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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현충원·사육신묘

[20070227]노량진 사육신묘에서 동작동 국립묘지(국립현충원)까지 다녀오다 - 3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07.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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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27일(화) 노량진 사육신묘에서 동작동 국립묘지(국립현충원)까지 다녀오다.

 

 오늘은 그간 숙제로 남겨둔 곳을 찾아나서기로 하고 디카를 들고 집을 나선다.
대략의 일정은 노량진역에서부터 사육신묘를 들러보고 흑석동을 지나
국립묘지(국립현충원)까지 걸어가서 국립묘지를 한바퀴 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하면 한강으로 나가던지 동작대교를 건너던지 하려한다.
 
다녀온 이야기는 사진으로 대신한다.
 

 

☞ 3부 - '국립현충원(국립묘지) 정문에서 경찰충혼탑까지'

 

▼ 국립묘지 정문에서...

 

 

 

☞ 국립묘지(국립현충원)의 역사

 

⊙ 설립경위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군이 창설되어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여 오던 중 북한 인민군의 국지적 도발과 여수/순천사건 및 각 지구의 공비토벌작전으로 전사한 장병들을 서울 장충사에 안치하였다.

 

그러나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육군에서 묘지 설치문제가 논의되어 1949년말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서울근교에 묘지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6.25전쟁으로 묘지 설치문제는 중단되었고 각 지구 전선에서 전사한 전몰장병의 영현은 부산의 금정사와 범어사에 순국 전몰장병 영현 안치소를 설치,봉안하여 육군병참단 묘지등록중대에서 관리하였다.

 

계속되는 격전으로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가하여 육군에서는 다시 육군묘지 설치 문제가 논의되고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주관하에 묘지후보지 답사반을 구성하여 제1차로 대구지방, 제2차로 경주지구 일대를 답사한 결과 경주시 형산강 지류인 천북대안 일대를 육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고 추진하던 중, 군 고위층에서 현지를 답사하여 검토한 결과 지역적으로 편재되어 있고, 침수의 우려가 많을 것을 고려하여 타지역으로 후보지를 재선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내려져 일단 중지하게 되었다.

 

1952. 5. 6. 국방부 국장급 회의에서 육군묘지 설치문제에 대하여 논의한 결과, 육군묘지를 설치하게 되면 타군에서도 각기 군묘지를 만들어 관리상 많은 예산과 인원이 소요되고, 영현관리의 통일성을 기할 수 없는 등 여러가지 폐단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육군묘지 설치문제는 일단 보류하도록 지시하고, 3군종합묘지 설치를 추진하되, 묘지의 명칭은 국군묘지로 칭할 것을 결의하였다.

 

1952. 5.26. 국방부 주관으로 국군묘지 후보지 선정을 위하여 3군 합동답사반을 편성하고, 동년 11. 3. 군묘지설치위원회를 구성한 후 ‘52.11월부터 ’53. 9월까지 11개월 동안 7차에 걸쳐 10개 지역을 답사하였다.

 

답사 결과 동작동 현 위치를 국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여 ’53. 9.29.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국군묘지 부지로 확정하고 ’ 54. 3. 1. 정지공사를 착공한 이래 3년에 걸쳐 묘역 238.017㎡ 을 조성하고, 그 후 연차적으로 68년 말까지 광장 99.174㎡, 임야 912.400㎡ 및 공원행정지역 178.513㎡을 조성하였다.

 

1955. 7. 15. 군묘지 업무를 관장할 국군묘지관리소가 발족되고, 이어서 1956. 4. 13. 대통령령으로 군묘지령이 제정되어 군묘지 운영 및 관리를 위한 제도적 기틀이 마련되어 전사 또는 순직한 군인, 군무원이 안장되고 덧붙여 순국선열 및 국가유공자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안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6.25 전쟁으로 발생한 많은 전사장병 처리를 위해 지금까지 군인위주로 이루어져 왔던 군묘지 안장업무가 1965. 3. 30. 국립묘지령으로 재정립되어 애국지사, 경찰관 및 향토예비군까지 대상이 확대됨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삶을 희생하고 아울러 국가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분들을 국민의 이름으로 모시게 되어 그 충의와 위훈을 후손들에게 영구히 보존,계승시킬 수 있는 겨레의 성역으로서 국립묘지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2005.7.29 국회에서 의원입법으로 제정 공포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 제7649호, 시행 2006.1.30"에 의거 동작동 국립묘지의 명칭이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변경되고 소방공무원과 의사상자도 안장대상자에 포함되었다.

 


⊙ 지형지세

국립서울현충원은 한강과 과천 사이 넓은 벌판에 우뚝 솟은 관악산 공작봉(孔雀峰)기슭에 위치해 있다.


공작봉은 관악산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뻗어내려 불끈 솟아올랐다가는 엎드리는 듯 줄기와 봉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면서 늠름한 군사들이 여러 겹으로 호위하는 모양으로 기운이 뭉쳐 있다.


사방의 산은 군인들이 모여 아침 조회를 하는 것처럼 보이고 지하의 여러 갈래 물줄기가 교류하여 생기가 넘치는 명당자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전체의 형국은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孔作張)이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이다.


즉, 좌청룡(左靑龍 )의 형세는 웅장한 산맥의 흐름이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 거리는 듯 한강을 감싸 호위하는 형상이고, 우백호(右白虎)의 형세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우로 솟은 사방의 봉우리와 산허리는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다정하게 마주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마치 물소뿔 모양이며 한강물은 동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들어 마치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리며 공작봉을 감싸 흘러 내려가고 있다.


이와 같이 국립서울현충원이 위치한 공작봉은 산수의 기본이 유정(有情)하고 산세가 전후좌우에 펼쳐져 흐르는 듯하여 하나의 산봉우리, 한 방울의 물도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은 곳이 없으며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渴形象)으로 그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할 수 있다.

 

▼ 알림 

 

▼ 국립묘지 정문을 들어서니...

 

▼ 우측 안내문에는...

 

 

 

☞ 국립현충원[國立顯忠院, National Memorial Board]

 

군인·군무원으로서 사망한 사람과 국가에 공이 있는 사람의 유골 또는 시신을 안장하기 위하여 국방부장관 소속으로 둔 묘지.

 

6·25전쟁을 전후로 사망한 장병들의 영령이 전국에 산재해 있으므로 이들의 집단안치를 목적으로 1954년 육군공병단에 의해 착공되어 1957년에 준공되었다.

 

1965년 3월 30일 '국립묘지령'(대통령령 제2092호)에 의해 당초의 국군묘지에서 국립묘지로 승격하고 그 수용범위와 규모가 커졌다. 또한 1996년 6월 국립현충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청사를 준공했다.

 

안장 대상은 ① 현역군인, 소집중의 군인 및 군무원(종군자 포함)으로서 사망한 사람, ② 군복무중 전투에 참가하여 무공이 현저한 사람, 장관급 장교 또는 20년 이상 군에 복무한 사람 중 전역·퇴역 또는 면역(免役)된 후 사망한 자로서 국방부장관이 지정한 사람, ③ 국장 또는 국민장으로 장의(葬儀)된 사람, ④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한 향토예비군 대원과 임무수행중 순직한 경찰관, ⑤ 국가 또는 사회에 공로가 현저한 사람 중 사망한 사람으로서 국방부장관의 제청에 의하여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지정한 사람, ⑥ 우리나라에 공로가 현저한 외국인 사망자 중 국방부장관의 제청에 의해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지정한 사람 등이다.

 

국립현충원의 묘역(墓域)은 국가원수·애국지사·국가유공자·군인·군무원·경찰관·일반묘역·외국인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국방부장관 소속으로 국립묘지관리소가 설치되어 묘지를 관리하는데, 소장은 1급 상당의 별정직 국가공무원으로 임명되며 그 아래에 관리·전례과를 두었으나 1991년 현충선양과를 신설했다.

 

그리고 1999년 조직을 개편하면서 전례과와 현충선양과를 현충과로 통합했다. 국립현충원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에 있으며, 대전시에도 관리소가 있다. 

 

▼ 충성분수대를 바라보고...

 

▼ 현충문 너머로 현충탑이 우뚝...

 

▼ 정문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돌기로...

 

 

 

 

 ▼ 다리를 건너...

 

 

▼ 우측에 보이는 호수는...

  

▼ 현충지

 

 

☞ 현충지

 

1985. 10. 30. 준공된 이 연못은 당초 이곳에 있던 웅덩이를 기존의 형태를 살려 넓이와 깊이를 조정하여 조성한 연못으로,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고 가장자리는 자연석으로 꾸며 경관미를 더해 주고 있다.

 

또한, 주변 사방에는 잔디와 화수목이 식재되어 있고 등나무 그늘막, 벤치 등 각종 휴게시설과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으며, 연못 안에는 비단잉어가 뛰놀고 있어 경내에서 가장 수려하고 안락한 휴식처이다.

 

또한 이 연못은 전묘역 잔디에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스프링쿨러의 용수원이 되기도 한다.

 

 

 

 

▼ 이 길을 따라가면...

 

▼ 현충관이 보이고...

 

☞ 현충관(영현봉안관)

현충관은 안장식, 영결식 등 각종 의식을 거행하는 곳이다.
1980. 12. 31. 건립한 이 건물은 연건평 1,470.7㎡의 철근콘크리트 기와조 2층 건물로 기둥, 주춧돌, 지붕 등은 고전 한국식이고, 기타 부분은 현대식으로 된 절충식 건물이며, 건물 내부에는 349석의 좌석이 설치되어 있다.
1988. 3. 29. 현충선양관 개관 이후에는 주로 교육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현충관을 보고 사진전시관 앞을 지나...

 

 

▼ 유품전시관 앞에는 비행기가 전시되어 있고...

 

 

▼ 현충관 옆을 지나...

 

▼ 굴뚝에 걸린 해를 찍었더니...

 

 ▼ 잠시 고개를 숙이고...

 

 

 

 

 

 

 

▼ 갈림길에서...

 

▼ 좌측 오름길로...

 

 

▼ 오름 끝 좌측에는...

 

▼ 유격부대전적위령비가...

 

☞ 유격부대전적위령비

유격부대 전적위령비는 한국전쟁 중 북한지역 곳곳에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유격작전을 전개하다가 산화하신 유격부대원들의 고귀한 희생과 빛나는 업적을 기리고 그 영령들을 길이 추모하기 위해 국방부 주관하에 1977. 5. 30. 준공하고, 1977. 6. 2. 제막한 비로서 동쪽 순환도로 입구(솔냇길 끝)에 세워져 있다.

비의 중앙에는 유격부대원들의 투쟁 모습을 그린 조각이 있고 조각 위로는 당시 유격 부대원들이 쓰던 것과 같은 철모와 소총이 걸려 있다.

비의 전면 좌측에는 유격부대 약사, 우측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으며, 비의 후면에는 한국 반공유격대 참전부대명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철근콘크리트 골조에 화강석 판석을 붙여 건립했으며 높이 4.2m, 폭 8.4m, 화강석 바닥 면적은 165㎡로 남산미술원 이일영 원장이 설계 제작한 것이다

 

"한국전쟁중 자유와 평화를 위해 북한지역 곳곳에서
유격작전을 전개하다가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한
유격부대원들의 고귀한 희생과 빛나는 업적을 기리며
그 영령들을 길이 추모하기 위해 여기에 이 비를 세운다"

 

 

 ▼ 육탄 10용사 현충비

 

 

☞ 육탄 10용사 현충비

남북이 38선을 경계로 대치된 상황에서 ’49. 5. 4. 북한공산군에게 불법 점령당한 개성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포탄을 안은채 적진지에 뛰어들어 진지를 분쇄하고 산화한 10명의 용사(서부덕 소위, 김종해, 윤승원, 이희복, 박평서, 황금재, 양용순, 윤옥춘, 오제룡, 박창근 상사)가 제6묘역 맨 앞줄에 안장되어 있다.

이들 10용사의 명복을 빌며 위훈을 추모하고 그 뜻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육탄10용사 현충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하단의 기단석 위에 5층의 탑을 쌓은 듯한 형상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지는데, 제일 하단에는 비문, 그 위에는 ‘THE TEN BRAVE WARRIORS’라는 영문표기, 그 위에는 10용사의 계급과 성명 그리고 제일 상단에는 육탄 10용사 현충비라는 비명이 각각 새겨져 있다. 비의 높이는 6m, 폭은 상단 0.5m, 하단 2.3m, 바닥면적 89.8㎡이다.

이 비는 육탄 10용사가 산화할 당시 사단장이었던 김석원 장군이 앞장서고 개성 독지가, 일반유지 등이 “10용사 현충비 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건립한 비로서 1955년 3월 중순 국방부의 지원으로 기초 공사에 착공하여 동년 4월 하순 준공하고 5월 4일 전몰일을 기하여 제막하였다.

비의 전면 중앙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해방 이후 三八선으로 말미암아 국토가 분단되어 오던중

단기 四二八二년에 이르러서는 개성 서북방 송악고지에

공산 괴뢰군이 불법침입하여 방위가 불리하고 개성이 위태로우매

동년 五월 四일 제一사단 제十一련대 소속 서부덕 소위 이하 九명의 용사

화랑정신을 받아 조국애와 민족정기에 불타는 정열로 몸에 포탄을 지니고

적의 지하 참호 속에 뛰어들어 육탄 혈전, 적진을 분쇄하고

옥으로 부서지니 멸공전사상에 이룬 공과 그용맹이 널리 세계에 펴지다.

광음이 흘러도 잊음없이 명복을 빌고 그 영령을 추모하고저,

이에 눈물과 정성으로 현충비가 서나니

이는 조국수호의 정신을 청사에 새기고 만대에 전함이라

十용사의 영혼 불멸하여 겨레와 함께 살며 길이 빛나리로다.

 

 

 ▼ 시계방향으로 길을 따라...

 

 

 

 

 

▼ 당부드리는 말씀

 

 

 

 

 

 

 

 

▼ 정자가 보이고..

 

▼ 정자 - 솔내음집

 

 

 

▼ 정자에서 보니...

 

 ▼ 남산과 동작대교가 보이고...

 

 

 

 ▼ 다시 길을 따라 걸으니...

 

 

 

 

▼ 외부로 나가는 좁은 산책로가 있고...

 

 

▼ 계속 길을 따라... 

 

 

 

 

 

 

▼ 갈림길에서...

 

▼ 박정희대통령 내외분 묘소로...

 

▼ 우측에는 장군묘역이...

 

 

 

▼ 장군묘역 입구

 

▼ 박정희대통령 내외분 묘소 입구가...

 

 

 

 

▼ 좌측이 박정희대통령 묘, 우측이 육영수여사 묘

 

▼ 박정희대통령 영전비

 

 

▼ 육영수여사 영전비

 

 

▼ 대통령

 

▼ 영부인

 

▼ 묘에서 돌아보니...

 

 

▼ 다시 길을 따라...

 

☞ 공작지

 

박대통령 내외분 묘소 아래에 있는 이 연못은 주변에 잔디와 화수목이 식재 되어 있고 등나무 그늘막, 벤치 등 각종 휴게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이곳을 찾는 유가족 및 참배자들에게 정서적인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 이 나무는...

 

 

 

▼ 다시 길을 따라...

  

 

 

 

 

▼ 지장사 가는 길

 

▼ 우측 철망안에는...

 

▼ 충혼당이...

 

▼ 약수터가 보이고...

 

 

 

▼ 주차장

 

▼ 우측으로 내려서는 길은...

 

▼ 이 길은...

 

▼ 장군 제2묘역 가는 길

 

▼ 저 아래 보이는 것은..

 

▼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

 

 

  

☞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

이 탑은 일제시대에 만주,연해주 지역에서 조국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다 이름없이 사라져간 무명독립군을 기리기 위해 임정묘역 위쪽에 건립하고, 2002. 5. 17(금) 11시에 제막식을 하였다.

이 탑은 부지 1,320㎡에 가로 윗변이 25m, 아래변이 24m, 세로 16m의 기단을 5단의 계단으로 만들고 탑의 좌대 부분은 반원의 형상으로 삼태극을 만들어 하늘을 나타내고 그곳에 꺼지지 않는 불장명등을 설치했다. 기단은 좌청룡 우백호의 부조벽을 선익으로 만들고 무명용사의 혼을 지키는 수호상을 기단 양쪽에 세웠다.

 

중앙명당에는 『독립군의 숙의』라 명명된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3개의 주탑이 세워져 있고 각 탑의 높이는 1년 12달을 나타내는 12m를 기본으로 하여 시각적으로 율동적 변화를 가진 16m, 그리고 12m와 16m의 중간인 14m로 하여 세월의 흐름을 조형적으로 표현했다.

 

 

 

 

 

▼ 다시 길을 따라...

  

 

 ▼ 앞에 보이는 저곳은...

 

▼ 경찰충혼탑 

  

 

 

 

 

☞ 경찰충혼탑

이 탑은 탑신 중앙으로부터 양쪽으로 두 팔을 벌린 듯한 날개를 두어 민주경찰의 따뜻한 보호를 나타내고, 탑신 하단에는 경찰 활동의 상징인 신, 의, 용의 3인상을 세워 경찰의 충성과 봉사정신을 나타내었다.

탑 좌측에는 애민상, 우측에는 호국상을 새겼으며 양쪽 날개 벽면에는 조국을 지키고 국민을 보호해 온 경찰의 훌륭한 업적을 조각으로 부각하였다. 또한, 입구 양측에는 전설의 수호신으로 믿는 호랑이상을 세워 영령들을 보호하게 하였고, 탑신 내부에는 위패를 모실 수 있는 봉안실을 두었다.

이 탑은 바닥면적 112㎡, 중앙 화강석 탑 높이 13m, 3인상 높이 3.5m, 좌우 동상 높이 3m, 벽면 폭 3.5m이고, 탑 전면 하단에는 이은상 선생이 지은 헌시가 새겨져 있으며 탑신 중앙의 “경찰충혼탑” 글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휘호한 것이다.

 

원래 이 탑은 부평 경찰전문학교 교정에 건립하였던 것을 1967. 5. 30. 현위치로 이설하였다가 1979. 5. 22. 중건한 것이며 헌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는 우리들의 조국 지나간 한때 어둠 속에 잠겼다가

자유를 되찾은 광복된 나라 온갖 방해 물리치고 나라를 세우려고

고귀한 청춘의 피를 뿌린 이 나라 건국 경찰들
우리는 그들을 잊지 못한다

또 다시 닥쳐온 고난과 시련 민족을 반역한

북한 공산군 잔악한 남침으로 일으킨 전쟁 총탄 속에서

조국을 구하려고 값비싼 청춘의 피를 뿌린

이 나라 구국 경찰들 우리는 그들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도 밤낮을 이어 나라를 위해

오직 자유 평화 정의를 지켜 겨레의 안전을 보살피다  

 

 

 

▼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 여기서 3부를 마치고...

 

 
▣ 2006년 2월 27일(화)에
 

['노량진 사육신묘에서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다녀온 이야기] 中

 

--▥☞ 1부(노량진역에서 한강대교 남단까지)는 여기를 누르세요.☜▥--
 
--▥☞ 2부(한강대교에서 국립묘지 정문까지)는 여기를 누르세요. ☜▥--
 
--▥☞ 3부(국립묘지 정문에서 경찰충혼탑까지)는 여기를 누르세요.☜▥--
 
--▥☞ 4부(경찰충혼탑에서 동작역까지)는 여기를 누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