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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현충원·사육신묘

[20070227]노량진 사육신묘에서 동작동 국립묘지(국립현충원)까지 다녀오다 - 2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07.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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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27일(화) 노량진 사육신묘에서 동작동 국립묘지(국립현충원)까지 다녀오다.

 

 오늘은 그간 숙제로 남겨둔 곳을 찾아나서기로 하고 디카를 들고 집을 나선다.
대략의 일정은 노량진역에서부터 사육신묘를 들러보고 흑석동을 지나
국립묘지(국립현충원)까지 걸어가서 국립묘지를 한바퀴 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하면 한강으로 나가던지 동작대교를 건너던지 하려한다.
 
다녀온 이야기는 사진으로 대신한다.
 

 

☞ 2부 - '한강대교 남단에서 국립현충원(국립묘지)까지'

 

▼ 한강대교 남단에서... 

 

 ▼ 횡단보도가 정면 하나밖에 없다.

 

▼ 국립현충원을 가기 위해서는...

 

▼ 한강대교 밑으로 나있는 산책길을 따라 동편 다리로 가야겠다.

 

☞ 한강대교[漢江大橋]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와 동작구 본동을 연결하는 한강상의 교량. 

총연장 1,005m로 한강에 가설된 최초의 인도교이다. 한강인도교의 가설 계획은 민간인 영업차가 들어온 1912년부터 수립되기 시작해 1916년 3월에 가교에 착수, 1917년 10월에 준공했다. 

교량의 상부는 핀 프랫 트러스(Pin Pratt Truss) 강구조(鋼構造)로 하여 최대경간을 60.6m로 했고, 교각(橋脚)의 기초는 우물통공법으로 시공했다. 교량은 중앙부에 있는 노들섬을 중심으로 하여 노량진측으로 경간 60.6m인 7연(連)의 한강교를, 용산측으로 경간 60.6m인 3연의 한강소교를 설치하고 다리 중간에는 401m의 둑을 쌓아 연결했다.

따라서 실제 교량의 길이는 629m이며, 폭은 7.7m로 중앙차도를 4.5m, 좌우 보도를 각각 1.6m씩 두었다. 그러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중간둑이 유실되어 용산측 한강소교가 위험한 상태에 놓임에 따라 용산측 한강소교를 폐지하고 종래에 둑을 쌓았던 곳(지금의 노들섬 북측 교량)까지 연장해 459m의 교량 가설공사를 1927년 5월에 실시해 1929년 9월에 완공했다. 

도로교통로뿐만 아니라 가로등을 설치해 시민들의 산책로로도 이용되었던 이 교량은 영등포·노량진 지역의 발전에 기여했으나 교통량의 증가에 따라 1934년 8월에 새 한강인도교 건설에 착수해, 1936년 10월에 완공했다.

교량의 형식은 타이드 아치(tied arch) 강구조로 최대경간이 63.55m인 교량과 최대경간 28.787m인 강판형교(steel plate girder)로 했으며, 하부구조는 아치교에 잠함(潛函)공법을, 강판형교(鋼鈑桁橋)에 우물통공법을 적용했다.

교량의 연장은 1,005m(노들섬 164m 포함)이며, 교량폭은 19.99m로 하여 중앙에 복선의 전차궤도를, 좌우 양측에 각각 차도와 인도를 설치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인해 1950년 6월 28일 타이드 아치 3경간과 판형교 일부분이 파괴되어 1957년 1월부터 복구공사에 착수, 1958년 5월에 준공됨에 따라 서울의 명물이었던 한강대교가 새로운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그후 계속되는 영등포구·구로구·금천구·동작구·관악구 지역의 도시확장과 인구증가에 따라 폭주하는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신설 계획중이던 한강대교-관악구청 간의 폭 40m 도로가 개설됨에 따라 발생되는 교통체증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1979년 1월부터 1981년 12월까지 교량확장공사가 실시되었다.

교량의 형식은 기존의 교량과 완전대칭을 이루는 쌍둥이 교량으로 하여 도로폭을 기존 18.4m에서 36.8m의 8차선으로 확장했다. 판형교 19경간교를 상류측으로, 타이드 아치 6경간교를 하류측에 확장했고, 노들섬측에 우회도로를 가설하고 북쪽에 입체교차로를 설치했다.

수도 서울의 관문이었던 이 교량은 한강인도교·제1한강교 등으로 불리다가 1984년 11월에 한강대교로 개칭해 현재에 이른다.

▼ 한강대교

 

▼ 한강철교

 

▼ 한강대교 중간에 있는 노들섬

 

▼ 이 계단을 내려서서...

 

 

▼ 이 산책로를 따라...

 

▼ 한강대교를 지나오면...

 

▼ 우측 오름길로...

 

  

 

▼ 한강산책길 진입로가 보이고...

 

▼ 인도를 따라...

 

 

▼ 강변쪽을 보니...

 

 

▼ 앞에 보이는...

 

▼ 육교를 오르지 않고...

 

▼ 옆으로 지나쳐서 가면...

 

▼ 화장실이 있고...

 

▼ 앞에 보이는 저것은...

 

▼ 학도의용병 현충비

 

 

 

 

▼ 철문이 반만 열려있는 저곳은...

 

 

 

▼ 효사정(孝思亭)

 

☞ 효사정


효사정은 노량진 나루터 남쪽 언덕에 있던 조선초 공숙공 노한(盧)의 정자이다.
지금의 건물은 일본 신사 자리에 1993년 신축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세종때 우의정을 지낸 노한이 모친상을 당하여 선영인 이곳에 모시고 무덤 옆에 초막을 치고 3년간 거상하고도 서러워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묘지 북쪽 깎아지는 듯한 언덕 위에 별장을 짓고 일생을 살면서 등을 밝혀 추모하고 자신도 이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노한은 좌의정 민제의 사위로 태종과는 동서간이다. 16세에 음서로 등용되어 경기관찰사 한성부윤에 올랐고 1433년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노한의 아들 돈녕공의 친구인 대민공 강석덕이 <효사정>이란 정자이름을 지었고, 그 아들 강희맹이 정자의 내력인 기문을 지어 효사정의 참뜻을 밝혔다.

 

그 후에도 선비출신 재상인 기순, 정인지, 신숙주, 김수온, 서거정 등이 효사정의 정취와 효사의 참 뜻을 시로 읊어 기렸다.


이 별장은 효도의 상징으로 유명했으며 한강을 끼고 있는 정자 중 경관이 제일 좋은 곳으로 칭송되었다.

 

 

 

 

▼ 효사정(孝思亭)에서 바라본 동부이촌동의 아파트

 

 

 

 

▼ 효사정(孝思亭)에서 본 동작대교

 

 

 

 

▼ 효사정(孝思亭)에서 본 흑석동 중앙대학교

 

 

 

 

 

 

▼ 저 계단 끝에서...

 

▼ 원불교 서울교구당

 

▼ 계단을 내려서다가...

 

▼ 봄을 알리는 들꽃이...

 

 

▼ 지하철공사중인 흑석동

 

▼ 횡단보도를 따라 정면으로 건너다가...

 

▼ 원불교 서울회관

 

☞ 원불교[圓佛敎]

 

1916년 4월 소태산(小太山) 박중빈(朴重彬:1891~1943)이 창시한 불교 계통의 신종교.

 

전라남도 영광 태생의 소태산은 소년시절부터 구도생활을 시작하여 26세 때인 1916년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 진리를 깨닫고 원불교를 창립하게 되었다.

 

소태산은 깨달음을 얻은 지 몇 달 후 40여 명의 신자를 얻었고, 이들 중에서 이재철·이순순·김기천·오창건·박세철·박동국·유건·김광선·송규 등 9명을 표준제자로 선택했다.

 

소태산은 처음 이들 9명의 제자들과 함께 저축조합운동·영산방언공사·혈인기도(血印祈禱)를 통해서 교단 창립의 기틀을 닦았다.

 

저축조합운동은 근검저축·허례폐지·미신타파·금주단연·공동단연·공동출역 등의 새생활운동이다.

 

영산방언공사는 소태산의 탄생지인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지금의 백수읍) 길룡리 앞의 갯벌을 막아 농토를 개간한 간척사업이다.

 

혈인기도는 무아봉공(無我奉公)의 정신을 살리기 위한 서천기도(誓天祈禱)이다.

 

이러한 3가지 교단 창립의 기초작업은 1916~19년에 이루어졌는데, 특히 혈인기도는 3·1운동과 거의 같은 시기이다.

 

1919년 늦가을 소태산은 전라북도 부안군 산내면 봉래정사로 들어가 원불교의 교리와 제도를 제정·구상했다. 1924년에 이르러 전라북도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지금의 익산시 신룡동)에 총부를 건설하고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교명(敎名)으로 교화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명칭은 1948년 '원불교'라는 정식 교명을 제정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소태산은 처음 깨달음을 얻은 후 옛 성현들이 깨우친 경지를 알기 위해 불교·유교·도교·그리스도교 등의 여러 경전을 열람했다. 그중에서 〈금강경 金剛經〉을 보고 "석가모니불은 성현 중의 성현이요, 발심(發心)으로부터 구도(求道)와 대각(大覺)의 경로가 나와 비슷한 점이 많다. 따라서 나의 연원(淵源)을 석가모니불로 정하고 장차 불법(佛法)을 주체로 하여 새 종교를 창립하리라"고 결심했다.

 

소태산은 불법을 주체로 하되 종교개혁·인간개혁·사회개혁을 동시에 수행하려 했다. 그래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 표어를 내걸고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事事佛供), 무시선 무처선(無時禪無處禪), 동정일여 영육쌍전(動靜一如靈肉雙全), 이사병행(理事竝行) 등의 정신으로 생활종교운동을 전개했다.

 

1924년부터 약 20년간에 걸쳐 소태산은 익산총부에 주재하면서 교리와 제도의 제정, 각종 교서의 편찬, 제자들의 훈련, 교세의 확장에 주력했다. 
 

원불교의 기본교리는 우주와 인생의 근본질서를 일원상(一圓相)이라 하고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아 4은4요(四恩四要)의 신앙과 3학8조(三學八條)의 수행으로 원만한 인격과 광대무량한 낙원세계 건설을 최고 이상(理想)으로 하고 있다.

 

4은이란 일원상의 진리를 구체적으로 현실화한 은(恩)에 입각한 4가지 존재분류이다. 이 세상과 나와의 관계를 은혜라고 파악한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세계관·인생관으로서 천지은·부모은·동포은·법률은을 말한다.

 

4요란 4은의 정신에 입각하여 평등의 윤리로 세상을 구제하고 인류사회를 향상·발전시켜가는 4가지 행동강령이다. 곧 자력양성·지자본위(智者本位)·타자녀교육·공도자숭배(公道者崇拜)를 말한다.

 

3학이란 일원의 진리에 바탕을 두고 원만한 인격을 양성해가는 3가지 공부길이다. 곧 정신수양·사리연구·작업취사를 말한다.

 

8조란 3학수행의 촉진제가 되는 신(信)·분(忿)·의(疑)·성(誠)과 3학수행을 방해하는 불신·탐욕·나태·어리석음을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4은4요의 신앙과 3학8조의 수행으로 일원상의 진리와 합일되는 인격자가 될 수 있고, 일원상의 진리가 지배하는 낙원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 원불교 교리의 핵심이다.

 

원불교의 근본교리를 종합하여 4대강령(四大綱領)이라고도 하는데, 4대강령이 실현되는 사회가 곧 원불교가 목적하는 최고의 이상사회·정의사회·낙원세계이다.

 

4대강령은 곧 정각정행(正覺正行)·지은보은(知恩報恩)·불법활용(佛法活用)·무아봉공(無我奉公)에서 결론을 얻는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의 원불교는 국민계몽과 농촌생활향상에 주력했다. 총부 건설 이후 출가수행자들은 총부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교단의 창립과 발전을 위해 헌신봉공했다.

교단 초창기부터 산업부를 창설하여 과수원 경영, 야채·약초·묘목 재배, 양계·양돈·양토(養兎) 등의 축산업을 활발히 전개했다. 일제강점기에 총부는 모범마을이 되었고 전국 각처에서 산업부 시찰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943년 6월 1일에 소태산이 53세로 열반하고 수제자 정산(鼎山) 송규(宋奎:1900~62)가 후계 종법사가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원불교는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나 차츰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소태산이 교단의 방향을 교화·교육·자선의 3대사업으로 설정한 데 근거하여 교화기관으로 각처에 교당을 설립하고 교육기관으로 원광대학교·원광고등학교·원광여자고등학교 등을 차례로 설립했으며 자선기관으로 병원·고아원·양로원·복지관·자선원 등을 설립했다.

해방직후에는 전재동포구호사업·한글보급운동·고아원경영 등의 건국사업을 전개했다. 1953년에는 제1대 성업봉찬대회를 열어 소태산의 성업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켜갈 것을 다짐했다.

1962년 정산이 열반하자 대산(大山) 김대거(金大擧)가 후계 종법사가 되었다. 송규는 열반을 앞두고 동원도리(同源島理)·동기연계(同氣連契)·동척사업(同拓事業)의 삼동윤리(三同倫理)를 최후 법문으로 발표하여 세계 모든 인류의 대동화합을 제창했다.

1971년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일원세계'라는 주제를 내걸고 개교 반백 년 기념대회를, 1991년 4월 소태산 대종사 탄생 100주년 기념대회를 열어 도덕상실의 현대사회에서 정신을 개벽하여 도덕성을 회복하고 일원세계(낙원세계) 건설과 일원문화(원불교문화) 창달을 선언했다.

원불교의 소의경전은 〈정전 正典〉·〈대종경 大宗經〉·〈정산종사 법어〉·〈불조요경〉 등이다. 〈정전〉은 원불교의 기본교리를 밝힌 경전이며, 〈대종경〉은 소태산 일대의 언행록이고, 〈정산종사 법어〉는 정산송규의 법문이며, 〈불조요경〉은 원불교 사상과 관련이 깊은 불경을 요약한 경전이다.

원불교의 최고 통치자를 종법사라 하고, 최고 결의기관으로 수위단회, 중앙집행기관으로 교정원, 중앙감찰기관으로 감찰원을 두어 교단을 통치하고 있다. 교도들을 훈련·교화시키기 위해 각처에 교당을 두고 있으며, 교당에 주재하는 교화자를 교무(敎務)라 한다.

재가교도와 출가교도를 두고 있는데 출가교도를 전무출신(專務出身)이라 하여 교단에 헌신봉공하고 있다. 재가 출신과 남녀 권리와 의무에 아무런 차별이 없다.

중앙총부는 전체교단을 통할하고 있고 교당을 효율적으로 관할하기 위해 각 교구(敎區)를 두고 있다. 신정절·대각개교절·석존성탄절·법인절 등 4축과 육일대재·명절대재 등 2재가 있어 이를 교단의 기념일로 하고 있다.

1992년 7월 현재 출가 교역자 1,400여 명, 훈련기관 11개, 문화기관 8개, 자선기관 42개, 산업기관 9개 등이 있다. 또한 1960년대부터 종교연합운동을 제창하고 있으며 미국·일본·캐나다·독일·오스트레일리아·카자흐스탄·프랑스 등지에도 20여 개의 교당이 있다.

 

▼ 보행자 전용도로?를 따라가서...

 

▼ 명수대 아파트 앞을 지나...

 

 

☞ 명수대(明水臺)

서달산 꼭대기에 있었던 건축물로, 1920년 일본인 부호 목하영(木下榮)이란 사람이 이곳에 별장을 짓고 놀이터를 만든 다음, 맑은 한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경치 좋은 곳이라 하여 명수대란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광복 후 이 건물은 철거되었다.

 

 

▼ 인도를 따라 걸어서...

 

 

 

 

▼ 이고개를 넘어...

 

▼ 내려가다가...

 

▼ 강변을 보니...

 

 

▼ 국립현충원의 건물이 보이고...

 

▼ 화장실

 

▼ 횡단보도가 없다.

 

▼ 지하철 공사로 어수선하고...

 

▼ 교통경찰의 도움으로 길을 건너면서 국립현충원 정문을 찍고...

 

▼ 대로 건너편 지하도로 나오기 위해...

 

▼ 이곳으로 내려서야...

 

▼ 이곳을 올라서면...

 

 

▼ 국립묘지(국립현충원) 정문이...

 

 ▼ 국립묘지

 

☞ 국립현충원(國立顯忠院)

 

동작구 동작동에 위치한 국립현충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민족의 성역이다. 이 곳은 관악산 기슭의 공작봉(孔雀峰)을 주봉(主峰)으로 하여 정기어린 능선이 병풍치듯 3면을 감싸고 앞으로 는 한강수가 굽이쳐 도는 풍수상 명당으로 손꼽히는 43만여평의 포근한 땅이다.

 

국군창설 이래 전사자들을 서울 장충단공원 내에 있는 장충사에서 모셔왔는데, 6.25동란이 발발하여 전사자 수가 증가하자 전국 곳곳에 이름없는 넋으로 산재하였던 국군장병들을 한곳에 안장하기 위하여 1955년 7월 15일 현재 위치하고 있는 동작동에 '국군묘지'를 설립하게 되었다.

 

초기 국군묘지에는 군인과 군무원만을 안장하였으나, 1965년 3월 30일 '국립묘지'로 승격,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위시하여 국가유공자, 경찰, 예비군 등이 추가 안장되고 있으며, 1996년 6월 1일 "국립묘지관리소"라는 관리기관 명칭이 "국립현충원"으로 개명되었다.

 

1999년 12월 31일 현재 국립현충원에는 국가원수 2위, 애국지사 206위, 국가유공자 61위, 임정선열 16위, 장군 355위, 장·사병 53,006위, 경찰 808위의 묘소와 102,793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 알림 

 

▼ 정문을 들어서니...

 

☞ 여기서 2부를 마치고...

 

 
 
▣ 2006년 2월 27일(화)에
 

['노량진 사육신묘에서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다녀온 이야기] 中

 

--▥☞ 1부(노량진역에서 한강대교 남단까지)는 여기를 누르세요.☜▥--
 
--▥☞ 2부(한강대교에서 국립묘지 정문까지)는 여기를 누르세요. ☜▥--
 
--▥☞ 3부(국립묘지 정문에서 경찰충혼탑까지)는 여기를 누르세요.☜▥--
 
--▥☞ 4부(경찰충혼탑에서 동작역까지)는 여기를 누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