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달간 숲에 대해 배우러 다녔습니다.
작년 봄부터 숲에 들어와 살고 있고,
앞으로 도시를 떠나 시골에 내려와 살자면
숲과 나무와 꽃과 식물과 자연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이
많아서였습니다.
실제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숲은 그냥 숲이 아니었습니다.
숲은 자원의 곳간이요, 거대한 산소공급기이며,
성능 좋은 공기청정기요, 아름다운 방음벽이며,
거대한 녹색 댐이고, 건강증진센터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떡갈나무 잎에다 결핵균이나 대장균을 놓아두면
균들이 죽는다고 합니다.
나무가 자기를 해치는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내뿜는
피톤치드라는 물질은 나무만이 아니라 사람도 지켜주기 때문에
숲에서 사는 동안 저절로 건강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도 아무리 약을 먹고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치료를 받아도 일년 내내 멈추지 않던 기침이
숲에 들어와 살면서 그쳤습니다.
몸의 균형이 깨져서 사소한 병이 걸려도 잘 낫지를 않았는데
서서히 몸의 균형이 회복되고 있는 걸 느끼겠습니다.
그런가하면 숲은 문화의 산실입니다.
차이코프스키, 요한 슈트라우스,
베토벤이 숲에서 아름다운 음악의 영감과 만났으며,
헨리 데이빗드 소로우, 필립시먼스, 스콧니어링 같은 문인이요
학자인 사람들이 숲에서 살면서 훌륭한 삶과 글로 우리에게
위대한 가르침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숲에 대해 조금씩 지식을 넓혀나가면서
내게 생각하는 방식의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뻐꾸기 소리를 듣고 있다가는
‘저렇게 울고 있는 뻐꾸기는 수컷이다.
저 뻐꾸기는 암컷에게 선택받기 위해 우는 것인데,
울음소리 말고도 벌레를 잡아다 준다든가
외모를 화려하게 가꾸는 일을 했을 것이다.
그것들도 다 선택받기 위한 행동들인데
그걸 다윈은 성선택설이라고 했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뻐꾸기소리를 들으면서 전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 산 속에 바람과 뻐꾸기만 웁니다 /
바람과 뻐꾸기 소리로 감자꽃만 피어납니다”
이런 시 구절이 떠올랐는데
지금은 뻐꾸기에 관해 배운 지식을 떠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침엽수의 둥치를 기어올라가는 담쟁이 잎을 바라보면서
‘그래 담쟁이 잎이 바닥에는 세 잎으로 갈라져 있고
위로 올라가면서 두 잎, 꼭대기에선 한 잎이 되지.
햇빛을 서로 알맞게 나누고자 하는 배려에서
그렇게 된다고 그랬지.’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 잎을 보다가
‘저것은 벽 /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
그때 /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이런 시를 생각했는데
담쟁이에 대해 배운 지식만을 떠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많이 배워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 중에는
중요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알고 있어야 실수를 하지 않고
정확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앎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식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식만으로 쓰는 글은 한계가 있습니다.
지식이 삶과 하나 되어야 하고
지혜와 만나야 비로소 생명을 얻습니다.
담쟁이에 관한 생물학적 지식은
학자들이 정리하고 가르쳐야 할 영역입니다.
그러나 담쟁이를 바라보다가 우리 삶 앞에 놓인 벽을
극복하는 지혜를 얻는 것은 철학적 영역이요,
문학의 본령입니다.
내가 담쟁이라는 시를 쓸 때는 나 자신이 앞길을 찾지 못해
절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만나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어떻게 넘어야 할지 상의를 해봐도 뾰족한 답을 찾을 수 없어
갑갑해하다가 창 밖 건너편 건물의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를 보고는 그래 저렇게 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급해 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고, 길게 내다보고 나아가되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꾸는 저 담쟁이처럼
우리도 인생을 그렇게 바꾸어 나가자.
그래야 나중에 우리 인생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물 한 방울 없고 흙 한줌 없는 벽에 뿌리를 대고 있는
저 담쟁이보다 그래도 내 처지는 낫지 않은가.
말없이 이 시련의 한가운데를 걸어서 벽을 넘자.
잡은 손 놓지 말고 함께 벽을 넘자.'
그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렇게 십 년 세월을 견디어 냈고
벽을 넘었습니다. 시 한편이 내 삶의 길이 되었던 것입니다.
몇 해 전부터 제주에 있는 장애인 단체를 비롯해
크고 작은 모임들이 이 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살기로
다짐하면서 자기들 모임 이름을‘담쟁이회' 라고 정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학생들이 보는 참고서 앞이나 책자와 홈페이지에
이 시를 게재하고 있는 곳이 무척 많습니다.
E카드로 만들어 사이버 공간에서 힘과 위안과 용기를 주고 싶을 때
건네주는 시가 되어 있습니다.
이미 내 시가 아니라 많은 이들이 자기 시처럼 생각하는 시가
되어버린 것을 나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내가 담쟁이를 보고 생물학적 지식만을 이야기했다면
이 시는 그런 생명력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연이 주는 지혜를 만나서
비로소 이 시는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를 제대로 아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혜로 깨달아 알아야
비로소 자기 것이 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도 “그리 중요치 않은 평범한 것을 많이 알기보다는
참으로 좋고 필요한 것을 조금 아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은 조금이라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지식 중에는 버려야 할 것도 많지만
지혜에는 버릴 것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 '산방일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