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유적탐방후기☞/♣ 궁궐·왕릉·묘ㆍ원

[20070826]도심나들이(종묘-창경궁-대학로-청계천-서울광장) - 2편

by 맥가이버 Macgyver 2007. 8. 27.

 

19275

 

2007년 8월 26일(일) 휴일 오후 도심나들이(종묘-창경궁-대학로-청계천-서울광장)를 다녀오다.

 

오늘은 휴일 오후 도심나들이로 종로3가역에서 만나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와 그리고 창경궁을 둘러보고...

대학로를 따라 걸어서 동대문까지 간 후, 청계천을 따라 청계광장을 거쳐 서울광장까지 다녀오는 여정이다.

 

1편 - [20070826]세계문화유산 '종묘'

2편 - [20070826]창경궁(구름다리-환경전-성종태실비) - 1부

3편 - [20070826]창경궁(성종태실비-춘당지-식물원) - 2부

4편 - [20070826]창경궁(명정전-숭문당-홍화문) - 3부

5편 - [20070826]젊음의 거리(대명거리-대학로-동대문)

6편 - [20070826]청계천(버들다리-청계광장-서울광장)

 

☞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 블로그의 사진으로 대신한다.

 

 

☞ 2편[창경궁(구름다리-환경전-성종태실비) - 1부]을 시작하며... 

 

◈ 창경궁에 대하여...

 

☞ 창경궁

사적 제123호. 이 궁궐에서 장조(莊祖)·정조(正祖)·순조(純祖)·헌종(憲宗) 등 여러 왕들이 태어났다.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다른 궁궐은 모두 남향하고 있으나 이 궁궐만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동향하여 있다.

 

본래 태종이 아들 세종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면서 자신이 거처할 궁궐로 지은 수강궁(壽康宮)에서 시작되었다. 그후 1484년(성종 15) 이 수강궁 자리에 새로이 별궁인 창경궁을 건립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 다시 세웠다.

 

이때 동향으로 세워졌던 명정전(明政殿)을 남향으로 고쳐야 한다는 김일손의 상소가 있었으나 도감(都監)에서는 만약 남향으로 할 경우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의 내청룡으로 이어지는 맥이 함춘원(含春苑)의 남쪽 지맥을 끊게 된다면서 그대로 둘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 많은 전각들이 1633년에 중건되었다. 1656년(효종 7)에 요화당(瑤華堂)·난향각(蘭香閣)·취요헌(翠耀軒)·계월각(桂月閣) 등 4개의 전각을 지어 효종의 네 공주들을 머물게 했다.

 

1909년에는 일제가 강제로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든 다음 일반인들에게 관람시켰으며, 1911년에는 박물관을 짓고 이름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을 낮추어 불렀다.

 

198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던 문정전(文政殿)과 월랑(月廊) 등을 복원하고 정비하면서 다시 이름을 창경궁이라고 했다.


동향한 궁궐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을 들어서면 금천(禁川)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이 개천 위에는 금천교(禁川橋)인 옥천교(玉川橋)가 있다. 옥천교를 건너면 정전의 정문인 명정문(明政門)에 이르고, 이 문을 들어서면 높은 월대(月臺) 위에 서 있는 정전인 명정전과 마주하게 된다.

 

동서로 길게 뻗은 월랑은 홍화문과 명정문의 남북 양쪽에서 뻗어나온 월랑과 합쳐져 'ㅂ'자 모양을 이루면서 정전의 좌우 앞쪽을 둘러싸고 있다.

 

명정전의 남서쪽에는 편전인 문정전과 그 월랑이, 북서쪽에는 많은 내전과 행각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나머지 수천 간의 전각과 행각 등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이 궁궐의 전체적인 배치는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꼭 필요한 곳만을 골라 집터를 잡고 정원을 꾸민 것이 특징이다.

 

〈동궐도 東闕圖〉(국보 제249호, 고려대학교 박물관)를 통하여 1830년대의 창경궁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 창경궁 안내도 ☜

 

 

1. 홍화문   2. 옥천교   3. 명정문   4. 명정전    5. 문정전    6. 관천대    7. 숭문당 
8. 빈양문   9. 함인정    10. 경춘전   11. 환경전    12. 함양문   13. 통명전   14. 양화당
15. 구박물관    16. 풍기대   17. 영춘헌    18. 성종태실비    19. 춘당지    20. 대온실 
21. 관덕정    22. 집춘문    23. 과학문    24. 월근문    25. 선인문
 

 

 ▼ 종묘에서 창경궁으로 가는 구름다리

 

 ▼ 구름다리를 건너...

 

 

 ▼ 창경궁으로...

  

 

 

 

 ▼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건물은 '문정전'

 

 ▼ 숭문당과 문정전

 

 ▼ 숭문당 뒤에 있는 수령 300년의 주목

 

 

 ▼ 주목의 모습이...

 

 

 

 

 ▼ 주목 앞에는 키큰 향나무가...

 

 ▼ 함인정

 

이곳에는 원래 성종 15년에 지은 인양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인조 11년(1633)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이건하여 함인정이라 한 것이다.

이곳은 특히 영조가 문무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았고, 주간에는 화반 두 개씩을 놓았다.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내진주(內陳柱)로 구획된 마루는 한 단 높게 처리하여 그 위로는 우물천정을 하고 사방둘레의 퇴간(退間)에는 연등천정을 하였다.

 

 

 

 ▼ 春水滿四澤(춘수만사택) - 봄기운을 머금은 시원한 물이 연못마다 가득 차 있고.

 

 ▼ 夏雲多奇峰(하운다기봉) - 여름 뭉게구름은 기기묘묘한 봉우리에 많구나.

 

  ▼ 秋月揚明輝(추월양명휘) - 가을에 떠오른 달은 유난히도 밝게 비추는데.

 

 ▼ 冬嶺秀孤松(동령수고송) - 겨울산 준령에는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구나.

 

▲ 위 시는 중국시인 도연명의 四時詩라네...

 

 

▼ 경춘전

 

이 전각은 창경궁 내전으로 성종 14년에 건립되었다. 그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에 재건하였으나, 순조 30년에 불탄 것을 그 34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이 경춘전은 정조와 헌종이 탄생한 곳이며,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정면 7칸, 전후퇴칸을 포함해서 측면 4칸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사모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고, 기둥간에는 두세 개씩의 화반을 놓았다.

네면에는 모두 세살문을 달았고 그 위에 교살창을 하였다.

내부에는 모두 마루를 깔았는데 양측으로 각 2칸과 전후퇴칸은 연등천정을 하고 우물천정을 하였다.

 

 

 

▼ 환경전

  

이 건물은 성종 1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에 중건하였다. 그후 순조 30년(1830) 큰 불로 소실되었던 것을 그 34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곳은 창경궁의 한 내전으로 왕이 늘 거동하던 곳이며,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했고, 익종이 승하했을 때는 빈궁(殯宮)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고 기둥간에는 두세 개씩의 화반을 놓았다.

건물의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고, 외진평주(外陳平柱)와 내진고주(內陣高柱)를 배열하여 퇴량을 걸고 그 위로는 연등천장을 하고 안쪽으로는 우물반자를 하였다. 대량(大樑)은 내진고주 사이에 걸었다. 

 

 

 

 

 ▼ 양화당 

 

▼ 양화당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한 일이 있으며, 고종 15년(1878) 철종비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세벌대의 장대석 기단 위에 각주(角柱)를 세우고 초익공계 포작(包作)을 짜았다. 기둥간에는 화반(花盤)없이 굴도리 밑에 장여를 받고 있는 소로만을 끼워 간결한 장식을 하였다. 
 
건물의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전면 중앙의 2칸에만 툇마루를 창 없이 개방하였다. 외진평주와 내진고주 사이에는 퇴량을 걸었고, 그 위로는 연등천장을 하고, 안쪽으로는 우물반자를 하였다. 대들보는 내진고주 사이에 걸리었다

 

 

 

▼ 잡상(雜狀)인줄 알았더니...

 

▼ 통명전

 

 통명전은 창경궁의 연조 공간으로 명정전 서북쪽에 있으며,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침전의 중심 건물이다.

창경궁 창건 때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이 되고, 다시 이괄의 난과 정조 때 화재를 입었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년에 중건된 것이다. 남향한 전면에는 월대를 두고 양모서리에는 청동제 드므를 놓고 그 북쪽에 외벌대 기단 한 단을 두어 건물을 세웠다.

정면은 7칸이고 측면이 4칸인 이익공계(二翼工系) 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였다. 지붕 위에는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고, 전후퇴칸을 두었다.

북서쪽 일부의 방을 제외하고는 건물 내부 바닥에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원래는 정면으로 보아 양측에 2칸씩 방을 꾸몄음이, 1984년의 발굴조사에서 연도지(煙道址)가 노출됨으로써 확인되었다.

 

 

 

▼ 잡상이 셋 뿐이네...

 

▼ 영춘헌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集福軒)은 영춘헌의 서행각으로 초창 연대는 알 수 없다. 집복헌에서는 영조 11년(1735)에 사도세자가 태어났고 정조 14년(1790) 6월에는 순조가 태어났으며 정조는 영춘헌에서 거처하다가 재위 24년(1800) 6월 승하하였다.

순조 30년(1830) 8월 1일 오전 화재가 발생하여 환경전, 경춘전등과 함께 소실되어 순조 34년 장남궁을 헐어다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1983년 동물사 본관에 있던 창경원 관리 사무소가 동물사의 철거로 인하여 이곳으로 옮겨 임시 관리 사무소로 사용되다가 1986년 중건 공사 때 창경궁 관리 사무소를 신축하고 이 건물은 변형된 부분을 보수하였다.

영춘헌은 본채 5칸이 남향하여 ㅡ자형을 이루고 본채의 좌우와 뒷면으로는 행각이 둘러져 있어 ㅁ자형을 이루었으며 서쪽으로 ㅁ자형의 행각이 이어져 맞붙어 있다.

주위 건물과 비교해 볼 때 통명전, 경춘전, 환경전 등은 이익공식이고 양화당은 초익공식인 데 비하여 영춘헌은 기둥의 높이도 낮고 익공의 끝을 몰익공식으로 둥글게 굴려 초각하였으며 행각은 더욱 간결하게 굴도리집으로 처리하여 각 건물의 격을 엿볼 수 있다.

 

 

 

▼ 계단을 올라서니...

 

 

 ▼ 남산이 보이네...

 

 

▼ 양화당과 통명전을 내려다 보니...

 

▼ 잠시 쉬면서...

 

▼ 저기는...

 

▼ 풍기대

 

이 풍기대는 영조 8년(1732)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풍기대 위의 구멍에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재던 것으로, 방향은 24방향으로 측정하였다.

전체 높이는 228.1센티미터인데, 하부대석 높이는 92.4센티미터, 상부 팔각주의 높이는 135.7센티미터이다 

 

 

 

▼ 앙부일구

 

 

▼ 해시계를 보고...

 

 

▼ 성종태실비를 향해... 

 

▼ 성종태실비

 

☞ 여기서 2편을 마치고...

 

 

 2007년 8월 26일(일)    
'휴일 오후 도심나들이(종묘-창경궁-대학로-청계천-서울광장)를 다녀오다'
 
-▥☞ 1편[세계문화유산 '종묘']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2편[창경궁(구름다리-환경전-성종태실비) - 1부]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3편[창경궁(성종태실비-춘당지-식물원) - 2부]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4편[창경궁(명정전-숭문당-홍화문) - 3부]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5편[젊음의 거리(대명거리-대학로-동대문)]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6편[청계천(버들다리-청계광장-서울광장)]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