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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궁궐·왕릉·묘ㆍ원

[20070808]도심나들이(경복궁-북촌한옥마을-인사동-조계사-보신각) - 4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07. 8. 9.

 

18940

 

2007년 8월 8일(수) 도심나들이(경복궁-북촌한옥마을-인사동-조계사-보신각)를 다녀오다.

 

오늘은 많은 비가 내린다기에 산보다는 도심나들이를 공지하고...

'경복궁역'에서 만나 비에 젖은 '경복궁'을 관람하고 나서, 삼청동길을 걸어 감사원앞에서 '북촌한옥마을'으로...

'북촌한옥마을'의 기와집을 구경하며 그 골목길을 걸어보고,

안국동 '종로경찰서' 부근에 있는 어느 음식점으로 가서 '삼합'을 먹어보고...

'인사동 쌈지길'을 구경하고, 인사동을 거닐다가 '조계사'로 향하고...

'조계사' 관람을 마치고, 청진동으로 가서 그 유명한 집에서 특★해장국을 먹고...

'종로 보신각'을 둘러보고 예정시각인 18시 30분에 '종각역'에서 해산하였다. 

 

☞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 블로그의 사진으로 대신한다.

 

 

☞ 4부를 시작하며...

▼ 쌈지길

 

 ▼ 쌈지길을 따라 아이쇼핑...

 

 

 

 

 

 

 

 

 

 

 

 

 

 

 

 

 

 

 

 

 

 

 

 

 

 

 

 

 

 

 

 

 

 

 

 

 

 

 

 

 

 ▼ 쌈지길을 구경하고 나오며...

 

▼ 인사동길을 걸어...

 

 

 

 

 

 

 

 

▼ 조계사를 향해...

 

 

 

▼ 대한불교 총본산 조계사

 

☞ 조계사 일주문

조계사 일주문은 불기 2550(2006)년 10월 9일 현판식을 가졌다.

조계사는 불기 2549(2005)년 3월에는 조계사 중창불사 및 일주문 기공식을 가졌고 같은 해 4월 27일에는 상량식을 봉행한 바 있다.


일주문은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로 一心을 뜻하며 그렇기에 기둥이 한 줄로 서 있다.

일주문에는 사찰의 현판을 걸어놓으며 여기서부터가 사찰의 시작임을 알린다.


조계사 일주문 현판 주련은 송천 정하건(鄭夏建. 한국서예가협회회장) 선생의 글씨와 철재 오옥진(吳玉鎭. 중요무형문화제 106호) 선생의 각자로 제작되었으며 주련의 의미는 아래와 같다.


以心傳心是何法 마음에서 마음에 전하는 법이 그 무슨 법인가

佛佛祖祖唯此傳 부처님이나 역대 조사가 오직 이것을 전함이로다.

曹溪山上一輪月 조계산 꼭대기에 둥근 달처럼

萬古光明長不滅 만고에 이 지혜광명 영원히 멸하지 않네.

 

▼ 조계사

 

☞ 조계사

조계사의 창건은 각황사(覺皇寺)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각황사는 1910년 창건되었으며 그 전에 원흥사(元興寺)에 있던 조선불교중앙회사무소를 옮겨와 한국 근대불교의 새 불교운동을 이어가게 했던 중심 사찰이다.


당시 일본은 총독부가 조선사찰령이라는 것을 선포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사찰을 그들의 일본사원인 장충단의 박문사(博文寺)에 귀속시키려 하였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해인사 주지 회광, 마곡사 주지 만공, 그리고 용운스님 등이 31본산주지회의를 열게 되었고 그때 만해 용운스님이 '조선불교의 개혁안'을 통하여 조선불교의 통일기반인 총본산제도를 주창했다. 


이어서 1929년 전국에서 모인 104명의 승려가 각황사에서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열어 종회법(宗會法)을 제정하였고 그 뒤 1937년 각황사를 현재의 조계사로 옮기는 공사를 시작, 이듬해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太古寺)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하여 절 이름을 태고사로 했다.

태고사를 창건하면서 사찰의 중심인 대웅전은 정읍에 있었던 보천교(普天敎) 십일전(十一殿)을 이전하여 개축하였으며, 1938년 10월 25일 총본산 대웅전 건물의 준공 봉불식을 거행하였다.


다시 1941년 조선의 사찰 및 승려를 통합하는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의 인가를 받아 조선불교 조계종이 발족되었고 제1대 종정에 한암스님이 취임하였다.

그러다 광복 후인 1945년 9월 이곳에서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일본강점기 때 만들어진 사찰령 및 태고사법 폐지를 결의하고 새로이 조선불교 교헌(敎憲)을 제정하였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사찰정화담화문>이 발표되는 것을 계기로 석우, 효봉, 동산, 금오 등의 선사와 청담, 경산, 구산, 탄허, 지효 등의 중견 수좌들은 앞장서서 '왜색화된 불교를 척결하고 비구 스님 중심의 전통 회복'이라는 목표로 불교정화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 와중에 태고사는 조계사로 이름이 개칭되었다.

1954년 11월 5일 당시 안국동에 있는 선학원을 중심으로 정화운동을 펼쳐나가던 비구 스님들이 태고사에 들어오면서 조계종의 이름을 따서 조계사라고 간판을 고치게 된다.

이후 비구와 대처 양측의 세력에 따라 조계사, 태고사라는 간판이 서로간에 붙여지게 되었고, 최종적으로는 비구 스님들 중심의 조계종이 성립되면서 현재의 조계사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 조계사는 한국불교와 그 대표종파인 조계종의 주요 사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조계사 법당은 불교 행사의 중심장소로서 거의 일년내내 법회나 강좌, 제사 등 다양한 의식들이 거행되고 있다. 

 

 

▼ 극락전

 

 

☞ 극락전

대웅전 왼편으로 근래에 세워진 조계사 극락전이 있다.

조계사 극락전은 전통 한옥 양식으로 지어진 2층 건물이다.

조계사 극락전에는 본존불로 아미타 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좌측으로 약사여래불,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우축으로 지장보살, 대세지보살,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는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본존불과 여러 보살 앞으로 지옥 중생을 다스리는 시왕(十王)과 판관서기, 인왕들이 모셔져 있다.

지장신앙은 '지옥에 중생이 단 한 명이라도 남아있더라도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대서원(大誓願)에서부터 비롯된다.

불자들은 돌아가신 부모나 친척, 가까운 이들, 더 나아가서는 제 명을 다 살다 가지 못한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과 그들을 편안하게 해주려는 마음에서 지장보살을 염원한다.

2층에는 큰 설법전(說法殿)과 작은 설법전이 있어 신도 교육과 문화강좌가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 대웅전

 

 

☞ 대웅전

조계사의 가장 상징은 대웅전(大雄殿)이라 할 수 있다.

대웅전은 '큰 영웅을 모신 집'이라 해석할 수 있다. 큰 영웅이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의미한다.

서울시 지방 유형문화재인 조계사 대웅전은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그 규모는 경복궁 근정전(勤政殿)보다 크며, 사방에 계단을 둔 단층 석조 기단 위에 정면 7칸, 측면 4칸의 515.6㎡(155.7평)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조계사 대웅전은 1938년 10월 25일 전북 정읍에 있던 보천교 십일전(十一殿) 건축자재를 인수, 신축한 것이다.

대웅전을 이렇게 크고 장엄하게 설계한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조계사는 일제 식민지 시절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로 건립되었다. 그렇기에 일본 불교와의 차별성을 기함은 물론,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사격을 갖추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전통 건축 양식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그 규모는 궁궐건물에 버금가는 형태로 된 것이다.


조계사는 건립 당시부터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매김하였기에, 불교의 교주(敎主)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본존불로 모신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우리나라 사찰은 사찰이 건립될 당시의 주요 이념에 따라 본존불(本尊佛)을 모시고 있다. 그렇기에 모든 사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본존불로 모시지는 않는다.

법보사찰(法寶寺刹)인 해인사는 비로자나불을 모셔놓은 대적광전(大寂光殿), 부석사는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모신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있다.

 

▼ 우측 나무는 '회화나무'

 

☞ 회화나무

대웅전 앞에 있는 수령이 450년이 넘고 높이가 26m, 둘레가 4m에 이르는 회화나무가 웅장하게 서있다.

서울시 지정보호수인 회화나무는 조계사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옛적에는 회화나무군이 이 근처에 형성되어 조계사 부근의 지명이 회화나무 우물골이라 불리었다 한다.

 

 

▼ 석가여래진신사리탑

 

☞ 석가여래진신 사리탑

대웅전 앞에는 7층 석탑이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조계사에 모셔놓은 경위는 "석가세존 진신사리 탑비명"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비명에는 달마바라(達摩婆羅)라는 인도 실론섬(현재 스리랑카) 스님이 전 세계의 부처님 성지를 두루 순례하던 중, 1913년 8월 20일 우리 나라에 와서 환희심을 내어 곧 바로 본인이 모시고 있던 사리 1과를 불교계에 전해 주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사리는 1914년 각황사에 모셨으며, 1930년 지금의 7층 석탑을 세워 모시게 된 것이다.


원래 탑(塔)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신 이후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데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탑은 불교에서부터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전통 사찰은 본존불을 모셔놓은 전각 앞에 1개, 혹은 2개의 탑을 모셔놓았다.

조계사 역시 이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 나 찾아 봐라!

 

 

 

 ▼ 대웅전으로...

 

 ▼ 석가모니불

 

 ▼ 삼존불

 

 ☞ 삼존불

2550년 11월 14일 점안식을 봉행한 조계사 대웅전 삼존불은 각각 17자 반 (약 5m 20cm)크기의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이다.


정토(淨土)란 깨달음의 세계를 뜻한다.

석존의 대각(大覺)을 신앙적으로 표현한 국토가 정토이다.

아미타불은 진여실상(眞如實相) 즉 중생의 본래 자성(自性)이며 정토신앙은 이러한 본래 자성을 48대원을 통하여 실현하는 것이다.

48대원은 삼세불의 서원인 동시에 깨달음을 지향하고 있는 모든 중생들의 서원이요,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약사여래불은 보통 중생의 병고를 치유하는 부처님으로 알려져 있다.

그 까닭은 약사여래불의 12가지 본원 가운데 6, 7의 서원이 중생들의 정신적 육체적 병고의 해결과 회복이기 때문이다.


조계사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을 협시불로 모셨다.

그 까닭은 석가모니불의 대각과 아미타불의 48대원 약사여래불의 12대원을 통하여 내세의 행복을 기원하는 중생과 온갖 질병으로 고통 받는 중생들, 가난한 중생들의 복전을 만들고자 함이다.

 

 

 

  ▼ 뭘 그리시나?

 

 

 

  ▼ 백송

 

☞ 백송(白松)

천연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령은 약 500년이 되었다.

높이는 10m, 둘레가 1.67m이다.

이 나무로 인해 수송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백송은 중국의 북부가 원산지이고, 잎이 3개씩 뭉쳐난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껍질이 벗겨져 회백색으로 변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 백송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는 서울과 고양, 이천, 밀양, 보은, 예산 등지에 몇 그루 밖에 없는 귀중한 나무이다.

 

 

 

 

 

 ▼ 조게사 일주문을 나서며...

 

 ▼ 청진동 거리를 걷다가...

 

 

 

 

 ▼ 특★해장국을...

 

  ▼ 올갱이에 대한 이해

 

 

 ▼ 종로 거리를 걷다가...

 

 

 ▼ 보신각을 향해...

 

 ▼ 종로타워빌딩

 

  ▼ 보신각 앞에서...

 

 

 

 

 ▼ 석류

 

  ▼ YMCA가 보이는 종각역에서 해산...

 

☞ 이것으로 '도심 나들이(경복궁-북촌한옥마을-인사동-조계사-보신각)을 다녀오다' 를 마친다.

 

 

 2007년 8월 08일(수)    
'도심 나들이(경복궁-북촌한옥마을-인사동-조계사-보신각)를 다녀오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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