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유적탐방후기☞/♣ 궁궐·왕릉·묘ㆍ원

[20081018]서궐(西闕) 경희궁慶熙宮(경덕궁慶德宮)에 다녀오다.

by 맥가이버 Macgyver 2008. 10. 18.

 

28171

 

2008년 10월 18일(토) 서궐(西闕) 경희궁慶熙宮(경덕궁慶德宮)에 다녀오다.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교회, 구세군 앞을 지나고

신문로 망치질하는 사람 아래를 지나 서울역사박물관을 둘러보고 경희궁으로 가서...

 

 

 

이 지도는 조선 후기에 김정호(金正浩)가 1824~34년에 그려서 목각(木刻)한

서울의 지도목판인 보물   제853호인 수선전도(首善全圖)이다. 

 

서울 북쪽의 도봉산에서 남쪽의 한강에 이르는 지역을 종로거리가
  동·서로 가로지르는 것으로 그렸으며,

1920년대 초의 주요도로와 시설, 궁전·종묘(宗廟)·사직(社稷)·문묘
  (文廟)·학교·교량·산천성곽·누 정(樓亭)·봉수(烽燧)·역원(驛院)·명승(名勝) 등에서

부(部)·방(坊)·동(洞)에   이르기까지 주요 지명 460여 개를 표기하였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많은 목판 지도 중에서도

이 목판 지도는 정확성과 정밀함 및 규모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제작 솜씨 또한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위의 그림은 우리궁궐이야기의 저자 홍순민 선생님이

수선전도를 바탕으로 내사산과 궁궐, 종묘, 사직  부분에 색칠을 하였다.

경운궁은 수선전도에 없는 것을 한성부지도를 참조하여 첨기한 것이다.)

 

 

 
에서 가져옴.

 

경희궁의 역사

서궐(西闕) 경희궁의 전신은 경덕궁(慶德宮)이었다. 
경덕궁은 본래 인조의 생부 원종(元宗)의 사저가 있던 곳으로 이 곳에 왕기가 서린다는 말을 듣고 광해군이 왕기를 없앤다는 뜻으로 광해군 9년(1617) 6월에 궁전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인경궁과 함께 공사가 진행된 관계로 재력의 소모가 막대하여 공사가 뜻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광해군은 궁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왕 15년 3월계해 반정(癸亥反正)으로 폐위되고 말았는데, 그 뒤 경덕궁은 인조가 인목대비를 받들어 일시 이 곳에 이어한 일이 있었고 그 후에는 역대 왕들이 수시로 이 궁에 거처한 일이 있었으므로 경덕궁은 왕궁의 하나로 손꼽힐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영조 36년(1760)에 경덕의 궁명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동음이라 하여 이를 피하여 경희궁(慶熙宮)으로 고쳤다. 순조 29년(1829) 10월 경희궁은 화재로 인하여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순조 31년(1831)에 다시 중건 되었고 철종 10년(1859)부터 11년 사이에 보수 공사가 시행되었다. 그 후 고종 초년 경복궁을 중건하고 법궁을 이어하자 경희궁은 빈 궁궐로 남게 된다. 관청의 필요에 따라 창고나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시설은 유지되고 궁궐로서의 외양은 지키고 있었다. 광무 5년인 1901년에서 1904년 사이에는 당시 고종이 임어 하고 있던 경운궁과 연결하기위해 운교가 연결되기도 한 것으로 보아 경희궁은 광무연간까지 궁궐로서의 가치를 인정 받고 있었다.

근세에 이르러 일제가 침략해 와서 한일합방이 체결될 무렵 경희궁은 숭정전(崇政殿), 회상전(會祥殿),  흥정당(興政堂),  흥화문(興化門) , 황학정(黃鶴亭)만이 남아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들어온 뒤로 숭정전(崇政殿)은 1926년 남산 산록에 이치(移置)되어 조계사(曹谿寺)의 본당으로 사용되었고, 흥정당(興政堂)은 1928년 광운사(光雲寺)로 이건하였으며, 황학정(黃鶴亭)은 1923년 사직단 뒤로 옮겨졌다. 흥화문(興化門)은 1932년 이토오히로부미를 위하여 짓던 절, 박문사(博文寺)의 북문으로 쓰였으며 최근까지는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경희궁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경희궁 자리에는 1910년 일본인 자제를 교육하는 경성중학교(옛 서울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접어들면서 일제는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을 경희궁 근처로 잡고 통감부 중학교를 경희궁 터에 세우고 지형도 높은 곳은 깍고 낮은 곳은 메꿔 버리는 등 그 만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들의 만행은 1922년 6월에는 경희궁의 동편에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부지로 25,500평을 떼어냈고 1927년에서 1928년에는 경희궁 남쪽 도로를 확장하면서 일부를 도로로 편입시킨다. 거기에 건물들은 대부분 매각 시켜 버리고 만다. 중학교 교실로 사용되던 숭정전(경희궁의 정전)은 1926년 3월 일본불교 종파인 조동종의 조계사에 매각 이건 되었다. 대내 정전인 회상전은 1911년 임시소학교 교원양성소의 교실과 기숙사로 그리고 편전인 흥정당은 1915년 소학교 교실로 사용되다 1928년 용산의 광운사로 팔려나갔다. 이렇게 1920년대를 지나면서 경희궁의 건물들은 완벽하게 소멸되고 만다.


흥화문


경희궁(慶熙宮)의 정문으로 경희궁의 창건과 함께 광해군 10년에 세워졌다. 이 문은 궁(宮)의 동남 우(隅)에 위치하여 (운종가를 바라보며)동향(東向)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구세군 빌딩과 마주한 위치쯤 되며 현 “서울 역사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만들어놓은 다리(금천교) 앞쪽이 되겠다. 1915년 8월 도로공사를 하면서 남쪽으로 이전되었다가 1932년 박문사(博文寺)의 사문(寺門)으로 둔갑 되었고, 광복 후에는 신라호텔의 문으로 이용되던 것을 경희궁 복원 계획에 따라 정문(正門)으로 이전해 놓기는 하였는데 본래 위치와는 전혀 다른 현 위치에 남향으로 모습이 바뀌어 있다. 이렇듯 정문의 위치부터 뒤죽박죽 되어버린 몰골로 복원하고 있으니 경희궁의 옛 모습을 상상하기란 여간한 관심 가지고는 힘들게 되어있다. 현재도 궁궐지(宮闕址)의 초라한 모습으로만 경희궁을 바라보면서 또 흥화문은 흥화문이되 본래의 문이 아닌 문을 들어서면서 지금은 기형적이긴 하나 그래도 다 없어져 버렸던 경희궁을 이나마도 되찾았다는 위안으로 삼고 복원되는 몇몇 전각들을 둘러보자.


숭정문/행각


흥화문을 들어서서 얼마정도를 걸어가면 말끔하게(?) 복원된 숭정문 영역이 나타나는데 그 앞의 계단도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계단 일부는 옛 것 그대로이고, 숭정문 좌우로 이어진 행각이 마치 곤룡포 자락처럼 화려하다. 그 행각은 동서쪽 행각과 이어져 있는데 동서행각도 물론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숭전문을 들어서면 법전인 숭정전이 2층 월대 위에 덩그렇게 올라앉아 있다. 물론 이 법전도 최근 새로 복원된 건물이다. 원래 있던 숭정전 건물은 일제 경성중학교 교실로 사용되다가 1926년 훼철될 위기에 이르러 조계사로 넘어갔다. 당시 일본 종파인 조동종(曹洞宗)에 속해 있던 조계사(曹谿寺)는 숭정전을 경내로 옮겨놓고 불전으로 사용했다. 당시 조계사는 현재 동국대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그 숭정전 건물은 지금도 동국대 경내에 남아 정각원이라는 법당이 되어버렸다. 숭정전은 창경궁의 명정전과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 궁궐 건축이지만 많이 낡았다. 최근 경희궁을 복원하면서 옮겨오려 했으나 너무 낡아서 이건하지 못하였다. 숭정전을 중심으로 둘레의 행각들이 새로 복원되어 있다. 현재 중층 월대 일부는 1985년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옛 것을 그대로 쓰고 있다.

 


특히 계단 소맷돌 측면의 당초문이 환상적일 만큼 아름답다. 계단에 엎드린 해치도 다른 정전의 해치보다 해학성이 뛰어나며, 해치가 Y형 뿔을 달고 있는 것도 이색적이다. 남향 건물인 숭정전은 옛 건물 그대로 본 따서 궁터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정전인 만큼 지붕마루에 잡상과 용두 등이 어김없이 치장되어 있으나, 그 기법은 세월과 기술의 단절이 엿보인다. 마치 조잡한 화장(化粧)술의 여인얼굴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 표현한다면 조금 지나칠까? 어간문을 열고 들어가면 용상과 일월오악도가 정면에 자리하고 있고, 그 위에는 닫집이 있고, 천장에는 근정전의 것을 본뜬 두 마리 황룡이 조각되어 있다.


자정전


숭정전 뒤를 돌아가면 2단의 높은 계단 위에 자정문이 덩그렇게 올라 앉아 있다. 자정문은 자정전 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자정전 영역이 법전인 숭정전 보다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것은 오로지 이곳 지형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정문의 좌우 행각도 지형의 높이에 따라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이 점이 다른 궁궐들과 다른 점이다.
그래서 경희궁의 전각배치는 마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지대가 높아지는 향교의 전각배치를 연상하게 한다. 정문 계단의 기단석 일부는 한눈에 세월을 읽어볼 수 있는 옛 것 들이다. 새로 깍아 앉힌 것보다 색깔이 붉은 까닭은 오랜 풍화로 돌속의 철분이 산화되어 겉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자정전은 이 궁의 편전 이다. 편전은 왕이 평상시 거처하면서 정사를 보는 집무실과 같은 것으로, 경복궁의 사정전, 창덕궁의 선정전, 창경궁의 문정전 등이 편전이다.  그리고 그 위치는 대개 정전 뒤쪽에 자리잡고 있다. 자정전은 자정문, 숭전전은 숭정문과 일직선상에 있고 흥화문 과 도 거의 축선이 같다. 그러나, 원래의 흥화문 위치는 그 축선에서 동쪽으로 크게 벗어난 곳에 있었다. 이것도 경희궁의 전각배치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그 밖의 전각들


회상전, 집경당(회상전의 남서쪽), 융복전, 흥정당은 한 영역 안에 있다. 회상전은 왕의 사적인 공간인 침전이며 숙종은 이곳에서 탄생하여 만승루에서 승하하였다고 한다. 회상전은 1928년 조계사에 매각되어 주지 집무실로 사용되다가 없어졌다. 궁궐지에 보면, 흥정당은 건물 일부에 누하주가 있는 다락식 건물이었던 것 같고, 흥정당 좌우에는 왕이 독서하던 존현각과 서음각을 끼고 있었다. 회상전 서쪽에 융복전과 주변에 연못, 정자 등이 있었다고 한다.

융복전 동쪽으로는 대비마마의 침전인 장락전이 있었고, 그 옆에 광명전이 있었다고 한다. 왕세자가 거처했던 동궁도 그 부근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 밖에도 단명전, 친현각, 창선각, 영강각 등 무수한 전각과 일신헌, 위선당, 봉황정,용비루 등 헌, 당과 누, 정 등이 궐내 즐비했을 뿐 아니라, 개양문 밖에는 승정원 홍문관 도총부등 관아 32개소와 방림원 등이 있어 궁궐로서의 규모와 위엄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홍순민 지음> 발췌

회상전

집경당

융복전

흥정당

  
 
에서 가져옴.

 

 

종 목

사적  제271호
명 칭 경희궁지(慶熙宮址)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101,221.5㎡
지 정 일 1980.09.16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1-126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서울역사박물관, 종로구
 
☞ 일반 설명
 
원종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원종(1580∼1619)은 선조의 5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 경덕궁 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 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경희궁에는 부속건물로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학문, 황학정이 있었는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없어졌다. 나머지 건물은 1910년 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학교 안으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각각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현재 이 자리에 궁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정전이었던 숭정전의 기단부와 제자리에서 옮겨진 석수, 댓돌 등이 있고 이 밖에 바위에 새진 글이 남아있다. 공터 북쪽에 돌로 쌓은 축대의 길이는 약 100m로 건물로 오르는 계단에는 용머리조각과 구름무늬가 있어 주목된다.
 
☞ 전문 설명
 
경희궁(慶熙宮)은 원래 인조(仁祖)의 생부(生父)인 원종(元宗)의 사저(私邸)인 새문동(塞門洞)집터가 있던 곳으로 이곳이 왕기(王氣)가 서린다는 풍수설(風水說)의 제안(提案)을 듣고 광해군(光海君)이 그의 9년(年)(1617)에 궁궐(宮闕)을 건립(建立)하기 시작하여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렀다. 그러나 광해군(光海君)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하여 궁(宮)의 완성(完成)을 보지 못하고 1623년에 폐위되고 말았다. 그후 인조(仁祖)는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받들어 일시 이곳에 머문 일이 있고 그 후에도 역대왕(歷代王)들이 이 궁(宮)에 거처(居處)하여 왕궁(王宮)의 면모(面貌)를 갖추게 되었다. 한편 영조(英祖) 36년(年)(1760)에는 경덕(慶德)의 궁명(宮名)이 원종(元宗)의 시호(諡號)인 경덕(敬德)과 같은 음(音)이라 하여 경희궁(慶熙宮)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러나 궁명(宮名)은 이외(外)에도 여러 가지로 불리웠는데 북궐(北闕(경복궁(景福宮))과 東闕(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이란 궁명(宮名)에 대응(對應)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하였으며 별명(別名)으로는 새문안대궐(新門內大闕)또는 새문동대궐(塞門洞大闕), 야주재대궐(夜珠峴大闕)이라고도 하였다.

경희궁(慶熙宮)에는 외조(外朝)인 흥화문(興化門)을 비롯한 승정문(承政門) 등 출입공간(出入空間)과 치조(治朝)인 숭정전(崇政殿), 자정전 구역(資政殿 區域), 또 연조(燕朝)인 융복전(隆福殿), 장락전구역(長樂殿區域) 등이 배치(配置)되어 있다. 이 외(外)에도 회상전(會祥殿), 집경전(集慶殿), 만학정(萬鶴亭) 등 100여동(餘棟)의 대소(大小) 건물(建物)들이 있었음을 궁궐지(宮闕志)나 서궐도안(西闕圖案)등의 자료(資料)로서 알 수 있다.

순조(純祖) 29년(年)(1829) 10월(月) 이 궁(宮)은 화재(火災)로 인하여 건물(建物)의 대부분(大部分)이 소실(燒失)되었으나 1831년에 대시 중건(重建)되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시대(日帝時代)에 들어서 이 궁(宮)의 건물(建物)들은 헐리고 이곳에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가 세워졌다. 이때 남아있던 숭정전(崇政殿)을 비롯한 몇동(棟)의 건물(建物)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즉 숭정전(崇政殿)은 남산(南山) 기슭에 옮겨져 조계사(曹溪寺)의 본전(本殿)으로 사용되어 현(現) 동국대학교내(東國大學校內) 정각원(正覺院)으로 현판을 걸고, 흥정당(興政堂)은 광운사(光雲寺)로 이건(移建)되었으며 황학정(黃鶴亭)은 현(現) 사직단(社稷壇) 뒤로 이건(移建)되고 또 흥화문(興化門)은 1932년 박문사(博文寺) 북문(北門)으로 이치(移置)되어 현재는 신라(新羅)호텔 정문(正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궁지(宮址)는 광복후(光復後)에도 계속 서울중고등학교(中高等學校)로 사용되다가 그 후 현대(現代) 건설(建設)에 매각(賣却)되었다가 다시 서울(市)에서 관리(管理)를 하게 되어 그 복원정비(復元整備)를 위하여 1985년과 1987년 두 차례에 걸쳐 숭정전지(崇政殿址)를 중심(中心)으로 발굴조사(發掘調査) 하였다. 그 결과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와 계단(階段)을 비롯한 어도(御道)의 적심석(積心石), 그리고 좌우(左右) 행각지(行閣址) 숭정문지(崇政門址) 등 유구(遺構)가 밝혀졌다. 한편 서울시(市)에서는 1988년 흥화문(興化門)의 복원과 1990년 숭정전(崇政殿)의 복원(復元) 등 경희궁지(慶熙宮址)의 정비(整備)와 그 복원계획(復元計劃)을 갖고 계속사업(繼續事業)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현재도 시민(市民)의 교육장(敎育場) 또는 공원(公園)으로 개방(開放)되고 있다.

숭정전(崇政殿)은 이중월대(二重月臺) 위에 세운 정면(正面) 5칸(間), 측면(側面) 4칸(間)의 팔작지붕을 한 건물인데 기둥의 배열(配列)은 전·후 (前·後) 내외진(內外陣)으로 하였으며 후측(後側) 중앙(中央)에는 어좌(御座)를 꾸미었다. 건물의 4면(面)은 꽃살문의 분합(分閤)을 달았고 그 위에는 교창(交窓)을 내었다. 공포의 외부(外部)로는 창방(昌枋)위에 외2출목(外2出目)의 쇠서와 교두형(翹頭形) 첨차를 두어 다포계(多包系)의 특징을 보이고 있지만 공간포(空間包) 대신 화반(花盤)을 두고 공포 내부(內部)에는 출목(出目)없이 양봉형(養奉形)으로 보아지를 마련하여 보를 받치고 있음도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내부반자는 우물반자를 꾸미어 화려(華麗)한 용(龍)무늬 단청(丹靑)을 그렸다. 건물 앞에 놓인 계단(階段) 역시 다른 궁(宮)의 정전(正殿)의 예(例)와 같이 삼도(三道)로 꾸미어 중앙(中央)에는 쌍학(雙鶴)을 양각(陽刻)하여 조각(彫刻)으로 장식했다.

또 흥화문(興化門)은 궁지(宮址)의 동남(東南)쪽 금천교 밖으로 놓여 있었는데 정면(正面)이 3칸(間)이고 측면이 2칸(間)인 다포계(多包系)의 공포를 보이는 웅장한 건물이다.
 

문화재청 주소

 

 

  

 

 

 

 

 

 

 

 

 

 

 

 

 

 

 

 

  

 

 

 

 

 

 

 

 

 

 

 

 

  

 

 

 

 

 

 

숭정전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진 곳이다.

특히 경종,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숭전전은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경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건물을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이다.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두었다.

우물천정에는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다.

 

 

 

 

 

 

 

 

 

 

 

 

 

 

 

 

 

  

 

 

 

 

 

 

 

 

 

  

 

 

 

 

 

 

 

 

 

 

 

 

자정전

자정전은 경희궁의 편전으로서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다.

1617~20년(광해군 9~12) 사이에 건립되었으나, 일제가 훼손하였다.

서울시에서는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자리에 <서궐도안>에 현재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자정전 서쪽에는 발굴을 통하여 행랑의 바닥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돌이 발견되었기에

발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여 복원하였다.

 

 

 

 

 

 

 

 

 

 

 

 

 

 

 

 

 

 

 

태령전

태령전은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곳이다.

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던 건물이었다.

그러나 영조의 어진이 새로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에 이 곳을 중수하여 어진을 봉안하였고,

영조가 승하한 후에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흔적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던 태령전을

서울시에서는 <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서암

경희궁 터에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이용한 시설들도 많이 있었는데,

현재는 서암과 영렬천만이 그 흔적을 말해준다.

서암은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이다.

바위샘이라는 뜻을 갖는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샘이 그 속에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이 바위는 임금님 바위라는 뜻의 ‘왕암(王巖)’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곳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년(숙종 34)에 이름을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의 ‘서암(瑞巖)’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던 사방석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바위에 깎아 놓은 물길이 옛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

 

 

 

 

 

 

 

 

 

 

  

 

 

  

흥화문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는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 빌딩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흥화문을 떼어갔었다.

광복 이후 박문사를 폐지되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에 이어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그 정문으로 남아있었다.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서, 현재의 위치에 이전하여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