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18일(토) 서궐(西闕) 경희궁慶熙宮(경덕궁慶德宮)에 다녀오다.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교회, 구세군 앞을 지나고
신문로 망치질하는 사람 아래를 지나 서울역사박물관을 둘러보고 경희궁으로 가서...
이 지도는 조선 후기에 김정호(金正浩)가 1824~34년에 그려서 목각(木刻)한 서울의 지도목판인 보물 제853호인 수선전도(首善全圖)이다.
서울 북쪽의 도봉산에서 남쪽의 한강에 이르는 지역을 종로거리가 1920년대 초의 주요도로와 시설, 궁전·종묘(宗廟)·사직(社稷)·문묘 부(部)·방(坊)·동(洞)에 이르기까지 주요 지명 460여 개를 표기하였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많은 목판 지도 중에서도 이 목판 지도는 정확성과 정밀함 및 규모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제작 솜씨 또한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선전도를 바탕으로 내사산과 궁궐, 종묘, 사직 부분에 색칠을 하였다. 경운궁은 수선전도에 없는 것을 한성부지도를 참조하여 첨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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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 설명
원종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원종(1580∼1619)은 선조의 5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 경덕궁 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 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경희궁에는 부속건물로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학문, 황학정이 있었는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없어졌다. 나머지 건물은 1910년 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학교 안으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각각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현재 이 자리에 궁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정전이었던 숭정전의 기단부와 제자리에서 옮겨진 석수, 댓돌 등이 있고 이 밖에 바위에 새진 글이 남아있다. 공터 북쪽에 돌로 쌓은 축대의 길이는 약 100m로 건물로 오르는 계단에는 용머리조각과 구름무늬가 있어 주목된다. ☞ 전문 설명
경희궁(慶熙宮)은 원래 인조(仁祖)의 생부(生父)인 원종(元宗)의 사저(私邸)인 새문동(塞門洞)집터가 있던 곳으로 이곳이 왕기(王氣)가 서린다는 풍수설(風水說)의 제안(提案)을 듣고 광해군(光海君)이 그의 9년(年)(1617)에 궁궐(宮闕)을 건립(建立)하기 시작하여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렀다. 그러나 광해군(光海君)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하여 궁(宮)의 완성(完成)을 보지 못하고 1623년에 폐위되고 말았다. 그후 인조(仁祖)는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받들어 일시 이곳에 머문 일이 있고 그 후에도 역대왕(歷代王)들이 이 궁(宮)에 거처(居處)하여 왕궁(王宮)의 면모(面貌)를 갖추게 되었다. 한편 영조(英祖) 36년(年)(1760)에는 경덕(慶德)의 궁명(宮名)이 원종(元宗)의 시호(諡號)인 경덕(敬德)과 같은 음(音)이라 하여 경희궁(慶熙宮)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러나 궁명(宮名)은 이외(外)에도 여러 가지로 불리웠는데 북궐(北闕(경복궁(景福宮))과 東闕(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이란 궁명(宮名)에 대응(對應)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하였으며 별명(別名)으로는 새문안대궐(新門內大闕)또는 새문동대궐(塞門洞大闕), 야주재대궐(夜珠峴大闕)이라고도 하였다.
경희궁(慶熙宮)에는 외조(外朝)인 흥화문(興化門)을 비롯한 승정문(承政門) 등 출입공간(出入空間)과 치조(治朝)인 숭정전(崇政殿), 자정전 구역(資政殿 區域), 또 연조(燕朝)인 융복전(隆福殿), 장락전구역(長樂殿區域) 등이 배치(配置)되어 있다. 이 외(外)에도 회상전(會祥殿), 집경전(集慶殿), 만학정(萬鶴亭) 등 100여동(餘棟)의 대소(大小) 건물(建物)들이 있었음을 궁궐지(宮闕志)나 서궐도안(西闕圖案)등의 자료(資料)로서 알 수 있다. 순조(純祖) 29년(年)(1829) 10월(月) 이 궁(宮)은 화재(火災)로 인하여 건물(建物)의 대부분(大部分)이 소실(燒失)되었으나 1831년에 대시 중건(重建)되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시대(日帝時代)에 들어서 이 궁(宮)의 건물(建物)들은 헐리고 이곳에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가 세워졌다. 이때 남아있던 숭정전(崇政殿)을 비롯한 몇동(棟)의 건물(建物)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즉 숭정전(崇政殿)은 남산(南山) 기슭에 옮겨져 조계사(曹溪寺)의 본전(本殿)으로 사용되어 현(現) 동국대학교내(東國大學校內) 정각원(正覺院)으로 현판을 걸고, 흥정당(興政堂)은 광운사(光雲寺)로 이건(移建)되었으며 황학정(黃鶴亭)은 현(現) 사직단(社稷壇) 뒤로 이건(移建)되고 또 흥화문(興化門)은 1932년 박문사(博文寺) 북문(北門)으로 이치(移置)되어 현재는 신라(新羅)호텔 정문(正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궁지(宮址)는 광복후(光復後)에도 계속 서울중고등학교(中高等學校)로 사용되다가 그 후 현대(現代) 건설(建設)에 매각(賣却)되었다가 다시 서울(市)에서 관리(管理)를 하게 되어 그 복원정비(復元整備)를 위하여 1985년과 1987년 두 차례에 걸쳐 숭정전지(崇政殿址)를 중심(中心)으로 발굴조사(發掘調査) 하였다. 그 결과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와 계단(階段)을 비롯한 어도(御道)의 적심석(積心石), 그리고 좌우(左右) 행각지(行閣址) 숭정문지(崇政門址) 등 유구(遺構)가 밝혀졌다. 한편 서울시(市)에서는 1988년 흥화문(興化門)의 복원과 1990년 숭정전(崇政殿)의 복원(復元) 등 경희궁지(慶熙宮址)의 정비(整備)와 그 복원계획(復元計劃)을 갖고 계속사업(繼續事業)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현재도 시민(市民)의 교육장(敎育場) 또는 공원(公園)으로 개방(開放)되고 있다. 숭정전(崇政殿)은 이중월대(二重月臺) 위에 세운 정면(正面) 5칸(間), 측면(側面) 4칸(間)의 팔작지붕을 한 건물인데 기둥의 배열(配列)은 전·후 (前·後) 내외진(內外陣)으로 하였으며 후측(後側) 중앙(中央)에는 어좌(御座)를 꾸미었다. 건물의 4면(面)은 꽃살문의 분합(分閤)을 달았고 그 위에는 교창(交窓)을 내었다. 공포의 외부(外部)로는 창방(昌枋)위에 외2출목(外2出目)의 쇠서와 교두형(翹頭形) 첨차를 두어 다포계(多包系)의 특징을 보이고 있지만 공간포(空間包) 대신 화반(花盤)을 두고 공포 내부(內部)에는 출목(出目)없이 양봉형(養奉形)으로 보아지를 마련하여 보를 받치고 있음도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내부반자는 우물반자를 꾸미어 화려(華麗)한 용(龍)무늬 단청(丹靑)을 그렸다. 건물 앞에 놓인 계단(階段) 역시 다른 궁(宮)의 정전(正殿)의 예(例)와 같이 삼도(三道)로 꾸미어 중앙(中央)에는 쌍학(雙鶴)을 양각(陽刻)하여 조각(彫刻)으로 장식했다. 또 흥화문(興化門)은 궁지(宮址)의 동남(東南)쪽 금천교 밖으로 놓여 있었는데 정면(正面)이 3칸(間)이고 측면이 2칸(間)인 다포계(多包系)의 공포를 보이는 웅장한 건물이다. |
숭정전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진 곳이다.
특히 경종,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숭전전은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경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건물을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이다.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두었다.
우물천정에는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다.
자정전
자정전은 경희궁의 편전으로서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다.
1617~20년(광해군 9~12) 사이에 건립되었으나, 일제가 훼손하였다.
서울시에서는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자리에 <서궐도안>에 현재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자정전 서쪽에는 발굴을 통하여 행랑의 바닥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돌이 발견되었기에
발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여 복원하였다.
태령전
태령전은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곳이다.
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던 건물이었다.
그러나 영조의 어진이 새로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에 이 곳을 중수하여 어진을 봉안하였고,
영조가 승하한 후에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흔적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던 태령전을
서울시에서는 <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서암
경희궁 터에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이용한 시설들도 많이 있었는데,
현재는 서암과 영렬천만이 그 흔적을 말해준다.
서암은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이다.
바위샘이라는 뜻을 갖는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샘이 그 속에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이 바위는 임금님 바위라는 뜻의 ‘왕암(王巖)’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곳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년(숙종 34)에 이름을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의 ‘서암(瑞巖)’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던 사방석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바위에 깎아 놓은 물길이 옛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
흥화문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는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 빌딩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흥화문을 떼어갔었다.
광복 이후 박문사를 폐지되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에 이어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그 정문으로 남아있었다.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서, 현재의 위치에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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