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4일(목) 현충일을 앞두고 국립서울현충원(동작동국립묘지) 內 충혼당에 다녀오면서...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와 태극마크를 상징화하여 |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희생정신
나라의 평화와 안정, 자유와 순결함 |
설립경위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군이 창설되어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여 오던 중 북한 인민군의 국지적 도발과 여수/순천사건 및 각 지구의 공비토벌작전으로 전사한 장병들을 서울 장충사에 안치하였다.
그러나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육군에서 묘지 설치문제가 논의되어 1949년말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서울근교에 묘지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6.25전쟁으로 묘지 설치문제는 중단되었고 각 지구 전선에서 전사한 전몰장병의 영현은 부산의 금정사와 범어사에 순국 전몰장병 영현 안치소를 설치,봉안하여 육군병참단 묘지등록중대에서 관리하였다.
계속되는 격전으로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가하여 육군에서는 다시 육군묘지 설치 문제가 논의되고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주관하에 묘지후보지 답사반을 구성하여 제1차로 대구지방, 제2차로 경주지구 일대를 답사한 결과 경주시 형산강 지류인 천북대안 일대를 육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고 추진하던 중, 군 고위층에서 현지를 답사하여 검토한 결과 지역적으로 편재되어 있고, 침수의 우려가 많을 것을 고려하여 타지역으로 후보지를 재선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내려져 일단 중지하게 되었다.
1952. 5. 6. 국방부 국장급 회의에서 육군묘지 설치문제에 대하여 논의한 결과, 육군묘지를 설치하게 되면 타군에서도 각기 군묘지를 만들어 관리상 많은 예산과 인원이 소요되고, 영현관리의 통일성을 기할 수 없는 등 여러가지 폐단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육군묘지 설치문제는 일단 보류하도록 지시하고, 3군종합묘지 설치를 추진하되, 묘지의 명칭은 국군묘지로 칭할 것을 결의하였다.
1952. 5.26. 국방부 주관으로 국군묘지 후보지 선정을 위하여 3군 합동답사반을 편성하고, 동년 11. 3. 군묘지설치위원회를 구성한 후 ‘52.11월부터 ’53. 9월까지 11개월 동안 7차에 걸쳐 10개 지역을 답사하였다. 답사 결과 동작동 현 위치를 국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여 ’53. 9.29.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국군묘지 부지로 확정하고 ’ 54. 3. 1. 정지공사를 착공한 이래 3년에 걸쳐 묘역 238.017㎡ 을 조성하고, 그 후 연차적으로 68년 말까지 광장 99.174㎡, 임야 912.400㎡ 및 공원행정지역 178.513㎡을 조성하였다.
1955. 7. 15. 군묘지 업무를 관장할 국군묘지관리소가 발족되고, 이어서 1956. 4. 13. 대통령령으로 군묘지령이 제정되어 군묘지 운영 및 관리를 위한 제도적 기틀이 마련되어 전사 또는 순직한 군인, 군무원이 안장되고 덧붙여 순국선열 및 국가유공자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안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6.25 전쟁으로 발생한 많은 전사장병 처리를 위해 지금까지 군인위주로 이루어져 왔던 군묘지 안장업무가 1965. 3. 30. 국립묘지령으로 재정립되어 애국지사, 경찰관 및 향토예비군까지 대상이 확대됨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삶을 희생하고 아울러 국가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분들을 국민의 이름으로 모시게 되어 그 충의와 위훈을 후손들에게 영구히 보존,계승시킬 수 있는 겨레의 성역으로서 국립묘지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2005.7.29 국회에서 의원입법으로 제정 공포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 제7649호, 시행 2006.1.30"에 의거 동작동 국립묘지의 명칭이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변경되고 소방공무원과 의사상자도 안장대상자에 포함되었다.
지형지세
국립서울현충원은 한강과 과천 사이 넓은 벌판에 우뚝 솟은 관악산 공작봉(孔雀峰)기슭에 위치해 있다.
공작봉은 관악산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뻗어내려 불끈 솟아올랐다가는 엎드리는 듯 줄기와 봉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면서 늠름한 군사들이 여러 겹으로 호위하는 모양으로 기운이 뭉쳐 있다.
사방의 산은 군인들이 모여 아침 조회를 하는 것처럼 보이고 지하의 여러 갈래 물줄기가 교류하여 생기가 넘치는 명당자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전체의 형국은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孔作張)이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이다.
즉, 좌청룡(左靑龍 )의 형세는 웅장한 산맥의 흐름이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 거리는 듯 한강을 감싸 호위하는 형상이고, 우백호(右白虎)의 형세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우로 솟은 사방의 봉우리와 산허리는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다정하게 마주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마치 물소뿔 모양이며 한강물은 동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들어 마치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리며 공작봉을 감싸 흘러 내려가고 있다.
이와 같이 국립서울현충원이 위치한 공작봉은 산수의 기본이 유정(有情)하고 산세가 전후좌우에 펼쳐져 흐르는 듯하여 하나의 산봉우리, 한 방울의 물도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은 곳이 없으며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渴形象)으로 그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할 수 있다.
국립서울현충원 지형은 해발 174.8m 공작봉을 중심으로 산의 뻗어 내림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병풍처럼 펼쳐져서 묘역을 감싸고 있고, 토질이 편마암 복합체로서 흑운모 호상 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림경관은 봉우리와 능선길이 파노라마처럼 수림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군봉에서 내려다보이는 확트인 한강 물줄기의 유유한 흐름과 한강 좌우의 발전된 도시경관은 이곳이 명당이구나 하고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지리적 위치와 산세가 훌륭하다. 침엽수와 활엽수가 잘 조화를 이루는 혼효림이 61%를 차지하고 있어 매우 안정된 임상을 나타내고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은 다른 도시림에 비해 양호한 식생구조를 보이고 있어 도시림 식생관리의 모델이 될 수 있으며, 특히 도시림의 식생관리에 문제점으로 드러나는 아카시아림 비율이 10%로 매우 낮고, 점차적으로 이 비율을 낮추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신갈나무, 굴참나무, 팥배나무, 리기다 소나무 등이 혼효된 2차림으로 구성되어 매우 안정된 상태이다. 하층식생은 초본류가 172종이며 이 가운데 귀화식물은 가시상치, 개망초, 개쑥갓, 까마중, 나팔꽃, 다닥냉이 등을 비롯한 29종이 존재한다.
국립서울현충원은 50여년 동안 산림지역에 일반인의 접근을 통제하고 인위적인 훼손을 금지하는 등 철저한 보전 조치가 이루어져서 도심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생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 국립서울현충원내 서식하는 동물류는 조류와 포유류로서 조류는 총 26종이 관찰 되었고 천연기념물 243호인 붉은배새매가 관찰되며, 특히 청딱다구리와 오색딱다구리의 출현은 산림 식생이 이들에게 훌륭한 서식처를 제공하고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포유류는 청설모와 다람쥐가 관찰되고 있다. 이는 참나무류와 잣나무, 밤나무 등 동물의 먹이가 될 수 있는 나무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자연환경을 잘 유지관리하여 유가족 및 참배객에게 쾌적하고 안락한 참배분위기를 제공하며, 내방객에게 나라사랑의 정신을 고취함은 물론 수려한 자연경관을 통해 국토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도록 하고 있다.
주요수종
국립서울현충원 주요 수종으로는 소나무, 잣나무, 은행나무, 벗나무류 등 교목 73종과 무궁화, 철쭉류, 진달래 등 관목 43종이 있다. 이중에서도 성역분위기에 어울리는 소나무가 광장, 현충탑 등 주요부분에 식재되어 있으며, 정문에서 현충탑까지 이어지는 주요길에는 수양벚나무가 식재되어 있어 봄철이면 현충원의 아름다운 벚꽃경치를 이룬다.
또한, 3㎞에 이르는 순환도로는 직경이 30cm내외로 자란 은행나무를 비롯하여 많은 종류의 활엽수종이 어우러져서 봄 여름의 싱싱한 푸르름과 가을철의 노랗고 빨간 오색 단풍이 뒹구는 낙엽의 거리, 그리고 눈 내리는 겨울철에는 하얀 눈길을 조성함으로써 많은 방문객에게 아늑하고 정감있는 산책길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밖에도 노령목 및 희귀목으로는 양버들, 오동나무, 수양벚나무, 쪽동백나무, 서어나무, 스트로브잣나무, 섬잣나무, 산딸나무, 귀룽나무, 주엽나무 등이 있다.
야생화 현황
국립서울현충원은 좀더 쾌적한 성역을 위해 묘역간 도로에 벌개미취(들국화류) 등의 야생화를 심어 단조로운 길을 특성화하고 있으며, 할미꽃, 작약, 비비추, 옥잠화, 맥문동, 도라지꽃 등을 화단에 식재하여 계절의 변화감을 느낄 수 있게 조성했다.
조류현황
국립서울현충원은 서울의 한강변이 대부분 개발된데 비해 1955년 창설 이래 50여년간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울창한 숲을 보존하고 있어 도심속의 자연생태 보고라고 일컬어진다.
2005년에는 MBC TV 자연다큐멘터리에서 7개월여 동안 현충원의 조류를 중심으로 한 자연생태를 촬영해서 10.16(일)에 "현충원의 친구들"이란 제목으로 50여분동안 방송을 해 많은 사람들에게 현충원이 우리 민족의 성역으로서만이 아니라 자연생태를 잘 간직한 소중한 곳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현충원에서 서식하고 있는 조류는 약 26종으로 텃새로는 참새, 노랑턱멧새,박새,직박구리,오목눈이,붉은머리 오목눈이,어치,꿩,오색딱다구리, 청딱다구리,쇠딱다구리, 굴뚝새,곤줄박이,멧비둘기 등이며 철새는 이름만 들어도 반가운 꾀꼬리,파랑새,소쩍새를 비롯하여 인디안 추장새라 불리는 후투티와 호랑지빠귀,청둥오리,흰뺨 검둥오리 왜가리,노랑할미새,물총새,청호반새,쇠물닭,울새,산솔새 등이 있다.
봄철에 현충원의 특이한 아름다움인 수양벚꽃이 피고 나면 현충천(중앙하천)에 흰뺨 검둥오리가 병아리를 데리고 노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06:00~18:00
지하철 : 4호선"동작"역 하차 2,4번 출구 (빨강)노선 운행구간
(파랑)노선 운행구간
(녹색)노선 운행구간
승용차량 : 국립현충원 정문 진입하여 위병의 안내에 따르고 지정된 장소에 주차 (무료) | ||||||||||||||||||||||||||||||||||||||||||||||||||||||
| ||||||||||||||||||||||||||||||||||||||||||||||||||||||
· 경부 고속도로 : 반포IC지나서 올림픽도로 김포공항 방향 ▶ 반포대교 지나 국립서울현충원 방향(약 3분) · 해안 고속도로 : 서서울톨게이트 ▶ 성산대교 방향 ▶ 노들길 국립서울현충원 방향(약15분) · 경인 고속도로 : 신월IC지나서 국회의사당 방향 ▶ 노들길 수산시장. 국립서울현충원 방향(약10분) 대형차량: 측문 이용 바람.
현충선양관 관람안내 : 직통 (02) 826-6251
|
이승만 초대대통령 묘소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독립사상과 민족계몽에 투신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항일투쟁 외교활동을 하다가 광복과 동시에 귀국, 초대 대통령으로 정부 수립과 반공체제 확립에 많은 공헌을 남기고 4.19로 하야 하였다. ’65. 7.19. 하와이에서 서거하여 동년 7.27.가족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고 이곳에 안장되었다.
영부인 프랜체스카 여사는 ’92. 3.19. 서거하여 ’92. 3.23. 가족장으로 이 곳에 합장되었다.
리승만 대통령 내외분 묘비
-전 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 리승만박사 내외분의 묘
- 후 면 -
大韓民國 建國 大統領 雩南 李承晩博士는 本貫이 全州이며
朝鮮朝 太宗王子 讓寧大君의 十五代孫인 敬善公과 어머니 金海金氏의 외아드님으로
1875년 3월 26일 黃海道 平山郡 馬山面 大慶里 ?內洞에서 탄생 하시었다.
1919년 三一독립운동후 大韓民國 臨時政府의 初代 大統領에 추대되어 조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하셨고
1945년 민족해방 후에는 美蘇양군의 분할점령과 강력한 국제간섭속에서 민족을 領導 국토분단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민족자결의 자율적 정부수립운동과 탁월한 외교 끝에 1948년 制憲國會의장으로 民主憲法을 제정하고
初代 大統領에 당선 정부를 수립하여 大韓民國의 건국을 세계에 선포하시었다.
1950년 북한공산집단의 남침을 격퇴하며 1960년까지의 대통령 재임중 나라의 안보를 공고히 하고
국가발전의 大本을 확립하여 民族史上 처음으로 자유민주국가 창업을 이룩하시고
1965년 7월 19일 美洲 호놀룰루市 마우날라니 병원에서 享年 91세로 천수를 다하시니
전국민의 애도속에 7월 27일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시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女史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市에서
1900년 6월 15일 루돌프 도너 公과 프란체스카 게르바르트 女史의 셋째따님으로 태어나시어
李承晩 博士와 1934년 10월 8일 뉴욕市에서 혼례를 올리셨으며
독립운동가와 大統領의 아내로서 극진한 내조와 근검절약의 귀감이시더니
1992년 3월 19일 梨花莊에서 享年 93세로 서거 3월 23일 夫君 곁에 안장되시다.
유족으로 嗣子 仁秀 子婦 曺惠子 孫子 丙久 丙朝가 있다.
1998년 光復節에 政府와 國民의 정성을 모아 세우다.
세계를 움직이신 웅대한 기상이시여
거룩한 나라사랑 민족의 은인이시여
아무도 범할수 없던 순수하고 고결한 영원한 한국인이시여
반도산하 읊으신 민족시인이시여
오늘도 임 그리며 오가는 동작의 성지에
주님의 은총중 영복을 누리소서
一九九八년 광복절에 정부와 국민의 정성을 모아 세우다
리승만 대통령 기념비
-전 면-
大韓民國 初代大統領
雩南 李承晩博士 紀念碑
우남 리승만박사는 1875년에 탄생하여 1965년 91세로 서거한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이시니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1895년 배제학당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워 개화기 언론과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을 주도하다가
1899년부터 옥고를 치렀으며 1904년 출옥후에는 구국의 밀사로 미국에 가서 활약하시었다.
1905년부터 5년간 조지 워싱턴대학 하바드대학 프린스턴대학에서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모두 마치고
1910년에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으시었다.
1919년 三一독립운동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추대되어
1945년 민족해방 후까지 그 법통을 지키며 해외에서 광복을 위한 외교와 민족교육 및 홍보활동으로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시었다.
해방후에는 미소양군의 분할점령과 강력한 국제 간섭속에서 민족을 영도하여 국토분단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거 자율적 정부수립운동과 탁월한 외교로 1948년 총선거를 시행 제헌국회의장이 되어
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하고 초대대통령에 당선 정부를 수립하여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세계에 선포하시었다.
1950년에는 북한공산집단의 남침을 격퇴하고 남북통일을 위해 힘썼으며 1952년에 해양주권을 선언하여 국익을 수호,
1953년에는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국가안보를 강화하시었다.
1960년까지의 재임중 농지개혁 교육진흥과 민족문화창달 경제부흥과 산업육성 민주제도 실시와 복지향상 등
국가발전의 대본을 확립하여 우리 민족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국가 창건에 대업을 이룩하시었다.
- 후 면 -
유구한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꽃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 복된 날을 누리게 해주셨거니와
모진 바람서리 시련의 시기에는 모세와 같은 일꾼을 보내시어 구원의 은총을 내려주셨으니
조선왕조말에 태어나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고 자유민주국가를 창건하여
우리에게 건전한 생존과 원대한 발전의 터전을 마련해 주신 어른이 리승만 박사이시다.
공은 총명이 뛰어나 일찍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한시와 서예에 능하였고
젊어서 신학문을 배워 개화기 언론의 선구자로서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을 주도하다가 영어의 몸이 되었으며
출옥후에는 구국의 밀사로 미국에 건너가 대한의 주권보전을 요청하시었다.
공은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수학 동서의 학문에 통달하였으며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후에는 미국에서 한인기독학원과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고
대한인 동지회를 조직하여 광복을 위한 외교와 민족교육 및 홍보에 힘쓰며 독립운동을 주도하시었다.
三一독립운동 후에 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 독립운동을 통할하고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 상해에 부임하여 대통령직을 수행하였으며
그 직을 떠난 후에는 전권대사로서 국제연맹과 열강을 상대로 조국의 독립운동을 추진하시었다.
일제의 야망을 간파한 공은 태평양전쟁을 예언하여 세인을 놀라게 하였고
전쟁이 발발하면서 임시정부의 국제승인에 주력하며 조국해방을 위한 특공부대를 편성하게 하는 등
한국인의 대일 참전을 선도하시었다.
해방된 고국의 땅을 三三년만에 밟은 공은 민족의 대동단결을 일깨우며
승전한 연합국에 우리의 완전독립과 三八선 장벽의 철폐 신탁통치의 반대와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
그리고 자유 선거를 통한 민족자결을 요구하여 우리 민족의 통일과 건국 노선을 천명하시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삼상결정과 미소의 부당한 국제간섭 속에서 북한이 공산화되고 나라의 독립이 어렵게 되자
공은 온 민족을 영도하며 자율적 정부수립운동을 추진 유엔으로 하여금 총선거를 실시하게 하여 제헌국회를 소집하고
민주주의 헌법을 제정 대통령에 취임하여 오천년 민족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국가 대한민국을 건국하시었다.
공은 건국초에 북한 공산집단의 남침을 격퇴하고 국가안보를 강화 경제발전의 토대를 구축하였으며
교육입국의 실현과 민족문화의 창달 민주제도의 시행으로 나라 발전의 대본을 확립하여 국가창건의 위업을 이룩하시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공의 생애는 바로 우리 민족 고난의 역사이니 중첩된 수난속에서
공의 거룩한 독립정신과 나라사랑 그리고 민족의 앞날을 투시하는 예지와 암흑을 이겨낸 인내심과
우리를 지키신 대영단의 용기와 신뢰하는 경륜은 민족의 삶을 희망과 광명의 길로 영도하여 주시었다.
세계를 움직이신 웅대한 기상이시여
거룩한 나라사랑 민족의 은인이시여
아무도 범할수 없던 순수하고 고결한 영원한 한국인이시여
반도산하 읊으신 민족시인이시여
오늘도 임 그리며 오가는 동작의 성지에
주님의 은총중 영복을 누리소서
一九九八년 광복절에 정부와 국민의 정성을 모아 세우다
리승만 대통령 헌시비
- 전 면 - |
- 후 면 -
|
※ 이 비는 하와이 한인동지회가 하와이 근해바다에서 |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서 오랜 가난을 물리치고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터전을 닦고 민족중흥의 위업을 이룩하였다. 안타깝게도 1979. 10. 26. 불의의 총탄에 서거하여 온 국민의 애도속에 11월 3일 국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영부인 육영수(陸英修) 여사는 ’74. 8.15. 광복절 기념행사 도중 북한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문세광의 흉탄에 서거하여 8.19. 국민장으로 안장되었다. 묘소에는 비석과 내외분에게 바친 헌시비가 세워져 있다.
- 전 면 - |
- 후 면 - |
박정희 대통령 헌시비
-전 면- |
- 후 면 - |
제 작 이 일 영
비 문 한 갑 수
글 씨 서 희 환
헌 시 이 은 상
글 씨 김 기 승
[육영수 여사 헌시비]
-전 면-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 영전에
박꽃으로 마을 길이 눈부신 밤
하얀 몸매로 나타나신 이여
조용한 걸음을 옮기시어
우리 서로 만나던 그때부터
당신을 고운 아씨로 맞이했읍니다.
흰 샘물의 미소로
이 땅의 갈증을 풀어주시고
길잃은 늙은이들과 상처입은 군인들
놀이터가 없는 어린이를 껴안아
그 삶은 보람차고 또 벅찼읍니다.
때로는 무르익은 포도송이들과
장미와 난초들의 향기로 이룬
즐거운 모임의 주인으로 임하여
부덕과 모성의 거울이 되시었거니
당신의 장미는 아직 시들지 않았고
뽕을 따서 담으시던 광우리는 거기 있는데
저기 헐벗은 고아들과 외로운 사람들이
당신의 어루만짐을 기다려 서 있거늘
홀연 8월의 태양과 함께
먹구름에 숨어 버리신 날
하늘과 땅으로 당신을 찾았읍니다.
우리 한목소리 되어 당신을 불렀읍니다.
쓰라린 상처와 오한에 쫓기는
당신을 구하려 검은 숲을 헤맸읍니다.
사무쳐 그리운 여인이시여
돌아서 당신의 삶을 끝내고 가시는 길
이토록 다 버리고 가시는 길에
비옵니다 꽃보라로 날리신 영이시여
저 먼 신의 강가에 흰 새로 날으시어
수호하소서 이 조국 이 겨레를
- 후 면 -
육영수 여사께서는
1925년 11월 29일 나시어
1974년 8월 15일 돌아가심
아들 박지만 |
국립서울현충원이 만장됨에 따라 1979년에 국립대전현충원을 추가로 창설하고 1980년대 초부터 안장을 시작하였으나, 안장대상자의 확대 및 지속적인 증가에 따라 국립대전현충원도 향후 20년 안에 만장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최근 사회적으로 일고 있는 봉안문화와 좁은 국토의 효율적 이용 측면을 고려하여 국립서울현충원에 국립묘지의 위상에 걸맞은 최고급 봉안시설인 충혼당을 건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충혼당은 2003년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1년 8개월간의 공사 끝에 건립(3층 건물, 연건평 4,791.6㎡, 157억 원 투입)하였고, 2005년 9월 28일 국방부 장관, 국가보훈처 장관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가졌다.
충혼당은 2005년 7월 29일 공포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의거 2006년 3월 1일부터 운영하고 있으며, 수용능력은 20,377위로써 개인형이 8,490위, 부부형이 11,887위이고, 옥내가 16,929위, 옥외가 3,448위이다. 충혼당은 대지 9,662.4㎡에 봉안동(3,903.9㎡), 제례동(709.5㎡), 휴게동(178.2㎡)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가족들은 봉안동에 고인의 영현을 안치한 뒤 자유롭게 제례동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다.
현재는 1층과 2층에 안치가 가능하며 옥내함의 안치가 완료되면 옥외함에 안치를 할 예정이다.
|
|
충혼당 기공식 장면 | 충혼당 준공식 장면 |
충혼당 전경
|
|
충혼당 제례동 | 충혼당 참배제단 |
충혼당 건립 및 운영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모시는 국립서울현충원이 우리나라 장례문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고, 서울·경기 등 수도권 지역 유가족들의 참배 시 거리상 편의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2007년 9월 30일 현재 애국지사 16위, 국가유공자 5위, 군인 741위, 군무원 4위, 경찰 28위 등 총 794명이 모셔져 있다. 귀환 국군포로 1호 조창호 중위, 카타르 도하 아라비아 반도의 동부 카타르반도 동안에 있는 카타르의 수도 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에 승마선수로 출전 중 낙마하여 사망한 김형칠 선수, 파키스탄 로와리의 철도터널 공사현장에 내린 집중호우로 현장숙소가 붕괴유실되는 과정에서 동료의 생명을 구하고 사망한 의사자(義士者) 윤태웅씨 등이 모셔져 있다.
이상 국립서울현충원 홈에서 가져옴.
▼ 2009년 6월 4일(목) 충혼당에 다녀오면서...
'▣문화유적탐방후기☞ > ♣ 현충원·사육신묘'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90808]도보여행(동작역→국립현충원→국사봉→보라매공원→신대방역)-1 (1) | 2009.08.08 |
---|---|
[20090630]도보-낙성대역→까치산→현충원→한강→안양천→구일역 1부 (0) | 2009.06.30 |
[20090508]도보여행-숭실대역에서 국립현충원 거쳐 서래섬 유채꽃 감상 - 1 (0) | 2009.05.08 |
[20090321]국립현충원(국립묘지)에서 만난 봄꽃들 (0) | 2009.03.22 |
[20090101]상도역에서 달마사, 현충원(충혼당) 거쳐 이수교까지 걷기 (0) | 2009.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