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경기 도보후기☞/☆ 강화도의 산&길

'강화 교동도'로 도보탐방을 준비하며 모은 자료

by 맥가이버 Macgyver 2009. 11. 30.

 

29364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강화 교동도'로 도보탐방을 준비하며 모은 자료 

['교동' 홈(http://www.gyodong.net/)에서 가져옴]

  ▲ 교동의 자연

  교동의 역사는 고구려시대때 이미 고목근현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지만 고려사에도 교동은 등장한다. 고려사의 편자들은 '김관의(고려의종때 문신)의 편년통록(編年通錄)' 에 실린 왕건 조상들에 얽힌 민담들을 함께 고려사에 소개해놓았다. 즉,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을 도우기 위해 백주관리 유상희등이 개주(개성), 정주(풍덕: 예성강하류), 백주(연안)의 4개주와 강화, 교동, 하음 3개현의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영안성(개성에 있는 토성)을 쌓고 궁을 세워놓겠다는 기록이다.

  최근에까지도 교동은 연산군의 유배지로만 알려져 있을 뿐 유구한 역사와 깊은 문화를 가진 역사가 있는 고장인 것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상고시대(士古時代)에 교동은 화개산, 율두산, 수정산을 중심으로 3개의 도서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교동평야에는 항시 조수가 흘렀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그러던 것이 후에 해조류의 영향과 고려때 도민들의 간척공사로 하나의 도서로 변하였다고 하는데, 지질이 충적토로 되어 있음을 보아 가히 입증되는 듯하다.
♠ 교동 개념도
  사면에 갯벌이 넓게 분포하여 섬의 중앙부에 위치한 간척지는 농경지로 이용한다. 남동부에 화개산(259m), 서부에 수정산(126m)이 솟아 있을 뿐 그 밖의 지역은 모두 평지이므로 비교적 밭과 논이 넓다. 동쪽해안의 단애를 호두곶이라 하는데 강화도의 인화곶과 마주하고 있다. 서단은 말탄각이라 하고 그 북단에 율두산곶이 있다. 논 2,679ha, 밭355ha 의 경작지에서 쌀, 콩, 감자를 생산한다. 예전에는 해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었으나 지금은 어장이 휴전선에 위치하여 있기에 어획량이 근소한 실정이다.
♠2001년 가을의 교동평야
  ▲ 교동의 호칭
  교동(喬桐)은 신라 경덕왕16년(757년)의 행정구역개편에 의해 호칭이 정해졌다.한자로 교(喬)는 높을 고(高), 높이솟을교(上 )의 뜻으로 어원은 「夭」(구부러짐) 와 「高」의 생략형의 한자로, 높고 상부가 구부러짐의 뜻이며 교목(喬木)은 키가 큰 나무를 가리키는데 아마도 고구려시대부터 고목근현(高木根縣)으로 불리워진것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한자로 동(桐)은 오동나무의 동자로 동재(桐梓)는 오동나무와 가래나무의 뜻으로 곧 좋은 재목(인재)을나타낸다. 교동에 예전에는 오동나무가 많이 있었을 것이고(지금도 읍내리에는 오동나무가 많이 보인다), 좋은 인재가 많이 났기 때문에 교동이란 명칭이 부쳐졌을지도 모른다.
♠ 읍내리 우물터의 오동나무
  ▲ 남북분단후 쇠퇴한 교동
  교동도는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섬이지만 교동도의 북쪽해안과 서쪽해안을 따라 휴전선이 지나면서 교동은 그 출입마저 자유롭지 못한 불편한 섬으로 되고 말았다.

동북쪽으로 개풍군과는 8.5km, 서북쪽으로 연백군과는 3.0km 거리로 상당히 가깝다. 수도서울에서 황해로 바로 횡단하는 48번 국도는 인진나루(강화)-호두포(교동도)-고읍리(교동도)로 연결되지만 군사지역으로 묶여 그길마저 끊겨버리고 섬의 북쪽과 서쪽은 휴전선의 남방한계선으로 되어 연백과 개풍의 실향민들은 북녘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는 교동의 '인사리망향대'에 와서 실향의 마음을 달래고 있다.
♠ 교동앞을 지나는 휴전선
 

위치는 동쪽 끝은 동경 126도 13분, 서쪽 끝은 126도 21분, 남쪽 끝은 북위 37도 45분, 북쪽 끝이 37도 48분에 위치하고 있다. 동서로 약 12Km, 남북이 약 8Km, 둘레는 37.5Km에 면적은 47.2㎦ 의 삼각주이다. 이로써 우리나라에서 열네번째로 큰 섬이다. 동쪽은 양사면(강화본도), 남쪽은 삼산면(석모도), 서도면(주문도 및 불음도)과 인접하며 불과 3.0Km 밖으로 황해도 연백과 지호지간이나 군사분계선이 서북으로 가로놓여있다.

 

♠교동에서 바라본 삼산면과 서도면
 

기후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까닭으로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해풍이 비교적 강하며 겨울에는 해안에 유빙이 있다.

부근의 섬은 동쪽에 강화도, 남쪽에 석모도, 서쪽으로는 말도, 불음도, 주문도 등이 있다.해류는 서남쪽으로는 허허바다 황해를 바라보고 동북으로는 개풍, 강화, 연백 3군계를 거쳐서 유입하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류가 흘러서 강물과 바닷물이 합류하여 교동에 이르러 서남으로 각각 흐른다.

 서쪽으로 흐르는 해류는 예성강물이 합류하여 연백과 교동사이의 협해로 흘러 황해로 유입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해류는 임진강, 한강물이 개풍 앞바다를 거쳐 강화 본도와 교동 사이의 협해로 흘러 황해로 유입된다.
위로 올라가기
  ▲ 교동에서 출토된 중국화폐


   예로부터 교동은 송도, 한양의 관문역할을 맡았을 뿐 아니라 중국으로 오가는 기착지로서 물물 교환이 성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국제교역이 육로와 해로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해로를 통하여 고려에 오는 경우 개경에 이르는 관문인 예성강입구의 벽란도를 거치게 되어 있었다.

  송나라와의 무역항로는 북로와 남로가 있었는데 남로는 명주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북로는 중국산동반도북단의 '등주'를 떠나 동쪽으로 황해도 북부에 이른 다음 장산곶을 돌아 교동 앞바다를 거쳐 예성강의 벽란도에 이르는 해로가 이용되었다. 김득초교장이 소장하고 있는 교동출토유물중 송대의 중국화폐가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교동과 중국본토사이의 해상교통이 활발했던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중국화폐중 제일 오래된것은 당현종의 개원통보(713-741)며 송태종의 태평통보(976-982) 그리고 청대의 건융통보(1736-1795) 등이 있다.

♠ 벽란도 항로
(교동의 일부가 보인다)
♠고려의 대외무역항로

  교동은 외침도 많이 받아 국가에서는 국토방위를 위해 삼도수군통어영을 비롯 진보를 튼튼히 하여 방비에 철저를 기했던 곳으로 번창이 되어 풍요로운 지방이었으나 6.25동란으로 상처를 입고 천신만고 끝에 다시 대한민국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북한땅과 교통이 두절되고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가 이농현상이 일어나니 오랜 역사를 통해 흥망성쇠를 같이 하던 교동이 수많은 사연과 전설을 지닌채 한동안 활기를 잃은 시기도 있었으나 이제 새로운 활력이 도는 것같다.

 
  ▲ 다시 각광을 받는 교동


  최근 역사적인 남북회담(2000.6.13-15.)후, 통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인천시는 6월16일, 교동을 「평화의 섬」으로 칭하고 부지 5만-10만평을 남북이산가족상봉 및 교역전진기치로 조성한다고 발표했으며,

7월4일,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가 개최한 "화해와 협력의 시대에 대비한 한반도 국토개발방향"세미나에서 강화도 교동도 일원은 경기도 김포시 지석리와 함께 기술, 물자 교류의 기능을 가진 농수산물 무역 및 유통시설, 농업기술전수학교, 배후주거기능 시설을 설치하는 단지 (단지명:강화,김포협력단지)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2001.9.30. 연합뉴스보도에 강화군은 강화와 교동 사이 2.3km를 잇는 900억원 규모의 사업비로 연육교 공사를 2004년까지 완공하는 것으로 하는 계획서를 행정자치부에 제출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

 교동경유 해주행 고속도로 예상

   한편, 지석리에는 북한전망대(인사리망향대)가 있는데 황해도 연안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며 연백군 등 황해도를 고향으로 둔 실향민들이 이곳에서 매년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앞으로 남북통일이 된다면 인화리·호두포간 다리를 놓고 인사리와 봉이가미(연안)간 다리를 놓게 된다면 해주행 고속도로가 교동으로 통하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 북한 영역의 봉이가미(북진나루에서본)
위로 올라가기

 


상고시대
대운도(戴雲島), 고림(高林), 달을신(達乙新)으로 호칭
고구려시대
혈구군에 속하는 고목근현으로 호칭(장수왕 63년-475년에 고목근현이 됨)
통일신라시대



9주중 한주(漢州)에 속함

해구군(강화군)에 속하는 3현중 하나인 교동현(경덕왕16년-757년 행정구역개편에 의함)으로 개칭[3현:하음현(강화군하점면), 교동현, 진강현(강화군남쪽)]편에 의함)으로 개칭

고려시대
5도(五道) 양계(兩界)중 양광도(楊廣道)에 속함. 강도군의 3현중 하나인 교동현으로 호칭
조선시대









8도(八道) 중 경기도에 속함

- 1627년(인조7년) 남양부 화량진으로부터 경기수영을 읍내리로 이전, 교동부로 승격, 현청을 읍내리로 옮김.

- 1633년(인조11년) 삼도통어영 설치, 삼도통어사 둠

- 1895년 강화군으로 편입

- 1896년 교동군으로 복위

근대






13도중 경기도에 속함

- 1915년 강화군에 속하게되고 화개면, 수정면으로 개편

- 1937년 강화군 화개면, 수정면을 합하여 교동면으로 개편

- 1995년 경기도 강화군을 인천광역시에 편입(현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 교동부전도 고종9년(1872) 서울대학교 규장각 사진
 
 
위로 올라가기

 


● 면적: 47.15㎢

   전 : 3.14㎢ 답: 26.46㎢ 임야: 11.53㎢ 기타: 6.02㎢

● 가구수: 1,367가구

   농가: 1,000가구    비농가: 367가구

● 인구수: 3,283명

   남: 1,637명    여: 1,646명

● 행정구역: 행정리(법정리): 17(13)

   자연부락: 39개, 국민반: 127개반

● 학 교: 5개교/308명

   初: 3 / 160명    中: 1 / 82명     高: 1 / 66명

● 병설유치원: 3 / 24명(2006년 1월현재)




♠면사무소가 있는 대룡리

교동면 설립연도
  • 1915년 교동군이 강화군에 합군

  • 1934년 4월 1일 화개면과 수정면이 합쳐 교동면이 됨

  • 1948년 6월 대룡리(현 궁전다방)에 신축

  • 1972년 현재 교동면 대룡리 산35-2로 이전

  • 2004 년 2월 현 부지에 신축 대룡2리 11-43 일반지번으로 편입
면사무소직제  

 


♠교동면사무소
위로 올라가기

 



교동 가는 길은 김포에서 48번 국도를 이용하여 강화읍을 지나 신봉리 301번지방도에서 좌회전하여 계속가면 외포리와 창후리 선착장의 갈림길이 나온다. 석모도를 가려면 외포리 를 이용해야 하나 교동을 가려면 창후리 선착장을 이용해야 한다.

  48번 국도는 김포를 가로질러 강화대교와 강화읍을 거쳐 이땅의 끝 인진나루로 연결되어 연백과 개성으로 연결되어야하지만 분단의 벽으로 인해 인진나루 가기 전 신봉리에서 창후리로 꺽어야 한다. 창후리에는 화개해운 대합실이 있다. 이곳에서는 교동까지 화개호가 운행 되는데 겨울과 여름의 출항시간이 틀리나 보통 6:30분경에 첫 출항하여 해질녁인 오후 6-7:00가지 운항한다.

  이곳은 민통선 지역이므로 인적사항을 적어야 하고 때로는 군인들에 검문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외포리처럼 번잡함이 없고 조용한 여행과 문화를 감상하려면 교동이 적합하다.


♠교동 가는 길
♠교동 창후리선착장

  교동까지는 약15분 정도(썰물때인 경우에는 30~40분 소요) 걸리며 승용차를 싣고 갈 수 있는 훼리호가 운행된다.

서울 신촌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강화행버스를 타고 강화읍에 오면 강화터미널에서 창후리 가는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창후리 선착장 연락처)032-933-4268, 6619

◎ 단체 탐방시 해야할일

버스로 도선, 단체 탐방할 경우에 한하여 아래와 같이 출입신고를 해야 합니다.

- 민북지역 출입승인요청서 (임의양식에 작성)

발신 : 단체명 (연락처 기재)
수신 : 2사단장

1. 출입일시 :
2. 출입장소 :
3. 출입목적 :
4. 인솔자 : 인적사항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5. 출입자 : 인적사항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위 내용을 작성하여 출입일 10일 이전까지 우편또는 FAX 서면으로 요청함.

·우편신고 : 인천광역시 서구 금곡동 사서함 204-1
·FAX : 032) 560-3585

- 안내가 필요할 경우 및 기타 문의사항

·교동사랑회(010-6376-9836)

이메일 :photo531@hanmail.net

 


  ▲ 고구려시대에는 고목근현(高木根縣)

사학자 나재명은 교동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화개산(華蓋山) 서쪽에서 발견된 지석묘(고인돌)와 마제석기, 인사리(仁士里) 절병산 동쪽에서 발견된 마제석검 등으로 판단하건데 신석기 시대부터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그 이전부터 살았음을 추측 가능케 한다고 주장한다.

   교동의 원래 이름은 대운도(戴雲島)라 하였고 고림(高林) 또는 달을신(達乙新),달을참이라 불렀으니 '구름을 이고 있는(戴雲島)'.'높은 숲(高林)'.하늘에 닿을 새(達乙)’모두 교동의 진산인 화개산의 모습을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교동의 행정 구역상 지위는 삼국시대에 이르러 고구려 장수왕 63년( 475년)에 처음으로 현(縣)의 지위로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하였으니 이 또한 '높은 나무의 뿌리(高木根)’이니 ‘키 큰 오동나무(喬桐)'라는 뜻의 지금의 이름과 꽤 근접한 표현이라 하겠다. 이는 예성강.임진강.한강의 3개강이 이루어 놓은 질 좋은 충적토에 뿌리 박고 자라온 기름지고 드넓은 교동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고목근현지의 물푸레나무
 

   그러나 신라 경덕왕 16년( 757년)에 지금의 강화군인 옛 해구군(海口郡)에 속한 현이 되면서 강화군의 한 부분이 되었다.


  ▲ 고려시대 때 중국으로 오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

   고려 명종 2년(서기 1171년)에, 교동은 현감을 둘 수 없는 작은 현의 감독관인 감무(監務)가 있게 되어 현으로의 지위마저 잃고 말았고 다시 공민왕때는 강도군(강화군)의 3현(鎭江, 河陰, 喬桐)중 하나로 속하게 되었다.
   현재 삼산면으로 편입된 송가도(석모도 위쪽)와 응암이 교동의 속현이었다.

♠ 송가도와 응암(교동읍내리에서 본)
그런데 이때 교동은 왕실의 유배지가 되기 시작했다. 즉 고려 제 21대 임금인 희종(熙宗)이 최충헌에 쫓겨나 교동에 오게되었다.
 

   교동은 중국사신이 중국으로 떠나기전에 일주일이 걸려야 지낼수 있는 서해를 건너기전에 날씨등을 살피며 머물렀던 곳으로 사신관 자리가 남아있는데 김득초교장의 소장품에 개원통보, 태평통보, 함순원보등 중국의 화폐가 교동에서 수집된 것을 보면 고려시대때 교동은 중국(송)과 오가는 중간기착지였음을 알수 있다.



  ▲ 조선시대에 군사요충지

   독립된 행정 단위가 아닌 감무로 지속되어온 교동에 태조 2년( 1393년)에 이승원(李承源)이 교동절제사(喬桐節制使)라는 직함을 달고 부임하는 것으로 조선조에 첫선을 보인다.

   교동절제사는 정3품의 고위직으로 도무지 1개 지방에, 그것도 정식 행정기관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곳에 온 까닭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뒷날 교동의 지위가 도호부(都護府)로 오르는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이승원의 교동부임은 교동이 갖고 있는 해상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가치를 일깨우게 한다는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태조 4년( 1395년)에 드디어 교동에 진(鎭)이 설치되면서 현으로 승격하는데 특이한 것은 민간 관료가 현감이 되는 게 아닌 종4품인 수군만호(水軍萬戶)가 현감을 겸하도록 하였는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해군의 단위 부대장이 시장이나 군수를 겸했다는 말과 같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현감은 종6품의 품계를 갖고 있는 관료가 임명되는 것이 규정에 맞는데 비해 수군 만호는 일선수군의 지휘관으로 종4품 임에도 불구하고 격에 맞지 않는 현감을 겸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초기 지방의 우두머리를 종종 관료(官僚)가 아닌, 예컨대 향교의 훈도를 현감에 겸직시킨 것과 무관치 않다는 점에서 교동도 예외는 아니었지 않았나 싶다. 다시 태종 9년( 1409년), 현에서 현령(縣令)으로 승격되었는데 이때는 경기우도만호가 현령을 겸직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교동에는 가옥이 221호, 인구가 562명이 살고 있었고, 군정(軍丁)은 시위군 6명, 선군(船軍)이 195명, 장번수군(長番水軍)이 249명이었다.

   물론 이 숫자는 남양만에 있던 경기좌도수영의 군사 숫자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수군 배치에 있어 교동현 서쪽 응암(매바위)에 우도수군 첨절제사가 26척의 군선과 1,313명의 선군으로 편성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교동읍지에는 구한말 광무연대(1880년경)에는 호수가 1,343호, 인구가 5,637명 살았다고 기록되어있다. 여지도서(與地圖書 : 1759년 간행)에 의하면 호수는 1,739호에 인구는 남자가 3,599명, 여자는 3652명으로 전하고 있다.

  태조 이후 세조 때까지 경기우도 수영(水營)은 교동에 있었으나(좌도수영은 지금의 화성시 남양면),인조(仁祖) 때에 이르러 통합된 수영이 본래 경기도에 한곳밖에 없던 교동으로 되돌아온다. 즉, 인조 7년(서기 1629년)에 경기수영이 있던 남양의 화량진을 교동으로 옮기고 이른바 통합사령부격인 경기수영을 설치하게 된다. 이때 교동의 행정구역상 지위는 현에서 부(도호부)로 승격되고 경기수사(京畿水使)가 교동부사를 겸직토록 하였다(경기수사의 정식 직함은 경기수군절도사이며 정3품)

   4년뒤인 인조 11년(서기 1633년)에는 통어영을 설치, 수군절도사겸3도통어사(종2품)를 배치, 경기도는 물론이고 황해도와 충청도에 이르는 수군을 관장하게 하였다. 이같은 조치는 종래 삼남지방을 중시하던 전략을 버리고 수도 한양을 지키는데 주력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이때의 교동의 군사상 관할구역은 경기도의 삼산면, 서도면, 옹진군, 장봉도, 덕적도에 이르고 황해도와 충청도에 이르기 까지 전함을 배치하고 군기를 축적하여 서남해를 방어토록 하였지만 일반 행정(庶政)은 장단대도호부사(長湍大都護府使)의 통제하에 있었다.

 

♠교동도호부의 돌계단
 

교동은 수군절도사로 시작하여 수군절도사겸 삼도통어사→방어사→수군절도사겸 삼도통어사→방어사→수군절도사겸 삼도통어사→방어사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품계는 종2품으로 변함이 없었다.

   고종19년( 1881년), 통어영이 이웃 강화도로 이전되고, 고종 32년( 1894년)에는 그나마 부를 없애 강화군과 합쳤다.

다음해 7월에 다시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으로 교동은 군으로 승격하고 군수를 두었다.이때 교동군은 동. 서. 남. 북의 4개면(面)과 송가면(현재의 삼산면 일부)을 합쳐 5개면 이었다.
일본에 의한 강제 합방 후( 1911년)에 송가면은 송남면으로 이름이 바뀐 뒤 강화군에 부속되어, 교동은 4개면 13개리로 구획되어졌다.

   강화군에 합군( 1914년)이후, 송남면은 삼산면으로, 옛 교동군은 화개면과 수정면 2개면이 되었으나, 서기 1934년 이후 화개.수정면을 합면하여 지금의 교동면이 되었으며 법정리는 13개리, 행정리는 17개리로 되었다.

   서기 1995년, 교동은 강화군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됨에 따라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으로 불리워 오늘에 이른다.

위로 올라가기

  
▲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교동현

   본래 고구려의 고목근현(高木根縣)인데, 【일명(一名) 대운도(戴雲島)이다.】 신라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혈구군(穴口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가 그대로 따라서 강화현(江華縣) 임내(任內)로 삼았다가, 명종(明宗)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 《안동고기(安東古記)》에 이르기를, "옛 고림(高林), 또는 송가도(松家島)라." 고 하였다.】 본조 태조(太祖) 4년 을해에 비로소 만호(萬戶)를 두고 지현사(知縣事)를 겸하게 하였다.

   현(縣)이 바다 가운데 있으니, 바로 강화부(江華府)의 서북쪽이요. 연안부(延安府)의 동남쪽이 되며, 동서가 22리, 남북이 29리이다.

   호수가 2백 21호, 인구가 5백 62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位軍)이 6명, 선군(船軍)이 1백 95명이며, 장번 수군(長番水軍)이 2백 49명이다.

   토성(土姓)이 3이니, 고(高). 인(印). 전(田)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안(安)이다.

   땅이 메마르며, 바다로 둘러싸여 기후가 춥고 더운 것이 고르지 아니하다. 간전(墾田)이 1천9백 86결(結)이다. 【논이 3분의 2가 좀 모자란다.】토의(土宜)는 오곡과 조. 팥. 녹두. 메. 밀. 참깨. 뽕나무. 삼〔麻〕이요, 토공(土貢)은 민어. 마른 숭어〔乾水魚〕.물고기젓〔魚닭〕이며,토산(土産)은 대합조개〔生蛤〕.굴. 미네굴〔土花〕. 쌀새우〔白蝦〕. 조기이다.

   염소(鹽所)가 3곳이다.

   화개산 석성(華盖山石城) 【현(縣) 남쪽 7리에 있다. 둘레가 1천 5백 65보이며, 안에 못〔池〕이 1개, 샘〔泉〕이 1개 있다.】매바위〔鷹岩〕【현(縣) 서쪽 16리에 있는데, 우도 수군 첨절제사 수영(右道水軍僉節制使水營)이다.】 빗돌나루〔鼻石津〕【현(縣) 남쪽에 있다. 속칭 벗돌나루〔寅火石津〕라 하며, 나룻배가 있는데, 강화(江華)로 왕래한다.】 인점진(仁岾津) 【현(縣) 북쪽에 있다.】 봉화가 2곳이니, 수정산(修井山)은 현(縣) 서쪽에 있고, 【동쪽으로 성산(城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연안(延安) 간월산(看月山)에 응한다.】 성산(城山)은 현(縣) 남쪽에 있다.【동쪽으로 강화(江華) 별립산(別立山)에 응한다.】송가도(松家島)는 현(縣) 남쪽 수로(水路) 5리에 있다.

   【동서가 2리요, 남북이 1리 반이며, 간전(墾田) 4결이 있다. 목자(牧子) 2호가 살며, 조수가 물러가면 글음섬〔煤島〕의 목마(牧馬)가 스스로 왕래한다.】


♠교동주변섬


  
▲ 송가도와 교동

   교동은 처음에 3개의 섬으로 이루어 졌으나 고려때부터 진행된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지금의 형태를 갖게 되었다. 교동도의 간척평야는 섬의 중앙부에 분포하는데 서북쪽의 율두산(87m)에서 동남쪽을 지나 화개산에 이르는 북쪽의 영산평야와 남쪽의 염주평야로 나누어진다.

♠영산제언 ♠염주동제언

   송가도는 예전에는 교동군에 속해 있었으나 교동군으로 될 당시에 송가면으로 이름이 정해졌고 1911년에 송가면은 송남면으로 개칭, 교동군 5개면의 1개면이 되었다. 1914년 송남면은 석모도가 속해있는 삼산면으로 부속되었다. 교동이 한때는 송가도와 연육되기도 했으나 석모도와 송가도 사이에 갯벌이 형성되자 간척공사를 하여 석모도와 합쳐졌다. 송가도뿐만 아니라 불음도, 주문도 등 인근섬도 1895년 행정구역개편때는 교동군에 속해있었느나 1914년 군면개편때 강화군으로 현입되었다.


 

  ▲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의 기록

우리나라 최고의 사서인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과 관미성(關彌城)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 2년 392년〉″7월에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개성을 빼앗았다.

9월에 북으로 거란을 정벌하여 남녀 5백명을 사로잡고, 사로잡혀 있던 본국백성 1만병을 설득하여 귀국시켰다.

10월에 백제의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성은 사방이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왕은 군사를 일곱갈래로 나누어 20일동안 공격한 끝에 함락시킨 것이다.″

난공불락인 관미성의 함락은 백제에 큰 충격이었다.

그 여파인지 진사왕은 내부정변으로 사망하고 그해 아신왕이 즉위한다.

 

♠옛지도에 나타나는 교동

〈백제본기 아신왕 2년 393년〉“8월에 왕이 「무」에게 이르기를 ※관미성은 우리 북변의 도래지인데 지금은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통석하는 바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설욕하라”고 하였다.

드디어 병사1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경을 칠것으로 계펂하고 「무」가 몸소 사졸에 앞장서서 시석을 무릅쓰고 석현등 다섯 성을 회복하려 하여. 먼저 ※관미성을 둘러쌌다. 고구려 사람이 성을 굳게 지켰다.

「무」는 식량이 이어지지 못하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백제본기 진사왕 8년 392년〉“즉위8년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을 빼앗아갔다.왕은 구원으로 사냥을 가서 1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1월에 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돌아가셨다.”

한편, 중국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55여개 성중 ※관미성[=각미성(閣彌城)]이라는 성이름이 등장한다.


  ▲관미성은 화개산성을 가리키는가?

♠화개산성

기원전 1세기경 고구려로부터 남하한 비류, 온조집단은 한강 유역에서 연맹체를 형성하였고 다시 온조집단으로 합치면서 강화를 포함하고 있던 미추홀 지역이 백제에 편입되었다.

백제가 요서 지방을 경략하는등 주변지역의 행상 교역권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강화지역은 더욱 중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대왕은 즉위초부터 맹렬하게 백제공격에 나섰는데 그시대에 백제는 같은 민족이 아니라 조부(고국원왕)를 죽인 불굴대천의 원수였다.

그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주전선은 예성강 유역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재위기간동안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확장시켰는데, 예성강을 경계로 백제에 대해서는 즉위 초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광개토대왕2년(19세,392년) 석현성 (개풍군 북면 정석동)을 비롯한 10개 성을 빼앗고 관미성을 함락시켰다.

광개토대왕 4년(21세)에는 수곡성(지금의 신계), 광개토대왕 5년(22세,395년)에는 패수(지금의 예성강)에서 침공해 온 백제군을 격파하고 백제와의 접경지대에 7성을 쌓아 방비를 강화하였으며, 광개토대왕 6년(23세,396년)에는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락을 공략하여 왕제와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관미성은 삼국사기를 역주한 사학자 이병도에 따르면 강화 교동도를 가리킨다로 되어 있으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교동도라 주를 달고 있는 등 많은 사학자들이 교동도를 비정하고 있다.


<이병도 박사의 역주>

"관미성은 광개토왕비에 나타나는 백제성 이름 중의 각미성(閣彌城) 그것이 아닌가 한다. '각(閣)'과 '관(關)'은 글자모양도 비슷하고 음도 비슷하므로 혹 혼용되었는지 모르겠다.

이 성이 지금 어느 곳인가에 대하여 나는 일찍이 경기만의 교동도에 비정한 일이 있다.

교동 은 고구려 소유시대에는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하였다. '고목'은 '고마' '고무'의 사음(寫音)으로 '관미', '각미'와도 상관이 있는 말인 듯하며 더욱 그 지리로 보아 양자의 비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 섬의 유명한 '화개산성(華蓋山城)'은 후세의 개수를 많이 거친 것이지만 실상 백제, 고려 이래의 고성일 것이다.

목은 이색의 시에 '해중화개삽청천(海中華蓋揷靑天)'이라 함과 같이 험고한 곳이다.

'각미', '관미', '고목'등은 이 화개의 고칭(古稱)일는지 모르겠다.

또 광개토대왕의 백제방면 정토가 본 '사기'에는 차년조(此年條) 이후에는 더 보이지 아니하나 광개토대왕 비문에 의하면 익(翌) 6년에 왕이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대대적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58성, 7백촌을 함락 하고 그 도성(漢城)을 포위 공격하여 백제왕의 항복과 동시에 성밑 맹(盟)을 맺고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필의 헌출을 받고 인질로 왕제(王弟)와 대신 10명을 데리고 환도하였다"

 

  ▲ 오두산성이 관미성인가 ?

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산86에 속하는 오두산성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많다.

오두산은 한강과 임진강 하류가 맞닿은 곳에 표고 119m로 솟아있으며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산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는 북한 지역이 남쪽으로는 김포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또한 서쪽으로는 한강이, 북으로는 임진강이 흐르고 있어 두강이 만나서 서해로 흘러드는 길목에 위치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

♠오두산성

산성은 현재 정상에 통일전망대가 들어서 있어 그 규모와 원형이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되었고 산 정상부근에는 여기저기에 성벽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으며 삼국 시대부터 조선시대를 통하여 계속 수축된 것으로 보인다.

이 성은 한국전쟁이후 거의 유실 파손되었으나 1990년 9월부터 1991년 11월 사이의 발굴조사에서 규모가 밝혀지고,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토기, 백자, 기와, 철촉 등의 유물이 다수 발견되었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의 김명우 박사는 "광개토대왕의 남하정복지에 대한 일고"라는 논문에서 ▲강화연안소재설 ① 교동 ② 강화도, ▲임진강 하구소재설, ▲예성강 하구소재설 ① 중류북안설 ② 하구 북안설 ③ 하구 남안설중 임진강 하구소재설을 지지하면서 관미성 위치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오두산성은 이미 조선시대 중엽부터 삼국시대의 성으로 전해져 오고 있으며, 또한 이 성의 형세는 현재로서는 3면이 초절(哨絶)하고 해수가 환요(環汀)하고 있으나, 고대에 있어서는 4면초절(四面哨絶)의 형세를 이루고 있던 천험의 요새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곳 오두산은 곧 지금의 임진강과 한강의 하류가 만나는곳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북쪽으로는 임진강하류가 둘러 있고, 남쪽으로는 한강하류가 둘러 있으며, 서쪽 연안부근에서 두강의 하류가 합류하여 서해의 해문으로 흘러 들어간다. 산 주변의 연안지대가 모두 가파른 형세이고, 북쪽으로는 임진강하류를 건너면 바로 개풍군(개성)지역에 닿는다. 때문에 광개토왕이 남하할 때 개성 지역을 통과하여 임진강을 도하하든지, 아니면 서해쪽에서 수군을 이끌고 한강하구쪽으로 진입하든지 이 곳은 지리적으로 남에서 북을 방비하는 매우 중요한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 관미성 위치의 여러 가지 설

한편 이형석 박사(백두문화연구소)는 당시 고구려의 수도는 국내성이었으며 광개토왕은 수군을 이끌고 침공하였으므로 왕은 국내성에서 압록강을 따라 황해에 이르고 초도→장산곶→옹진 앞 바다를 거쳐 황해도 연안군과 강화도의 불음도 사이를 지나 교동에 상륙, 고구려성(토성)을 쌓고 관미성을 공격했으리라고 추정된다고 했다.

그리고 한강의 입구인 개풍군과 강화도 사이를 지나고 한강을 따라 하남 위례성(아차산성)을 침공한 것으로 판단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결론적으로는 관미성을 강화도 북단의 별립산(400m)이라고 주장 하고 있다.

또한 <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의 저자 해양문화연구소장인 윤명철 박사는 별립산 북쪽에 있는 봉천산 지역으로 비정하는데 봉천산에는 토성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 이형석박사의 고구려군 침공루트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조> 진사왕3년(387년) 정월에 "「진가모」를 달솔로 삼고 「두지」는 을솔로 삼았다. 가을 9월에 말갈과 관미령(關彌嶺)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에 따라 이도학 박사는 「삼국사기」 권 23 백제온조왕본기 10년조에 보이는, <왕이 말갈군을 곤미천(昆彌川)에서 방어하다 패한 백제군이 청목산(개성송악산 또는 청석동부근산으로 추정)으로 후퇴하였다>는 기사에 의거하여 곤미천을 예성강으로, 청목성을 개풍군의 청석동으로 비정한 후에.

삼국사기 전24 백제 진사왕 본기 3년조에 보이는 관미령이 관미성과 관계있는 이름으로 보고 "7중성(七重城)과 7중하(七重河)의 관계처럼 관미령 역시 곤미천과 관련있는 지명으로 보여 개성근처의 고개가 된다. 이 관미령에 북변요새지인 관미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관미성은 사면이 가파르고 바닷물로 들어진데 자리 잡았다고 하였으므로 예성강 남안에 위치함이 된다"고 말하였으며, 여기에는 북한학자 박시영박사와 이형구 박사도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수도 국내성에서 광개토왕이 수군을 이끌고 왔다면 개성부근의 고개에 있는 성 또는 오두산성은 그 설득력이 떨어진다.

 

  ▲ 화개산성이 오두산성보다 관미성에 가까운 이유 세가지

오두산성은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토기, 백자, 기와, 철촉 등 유물이 다수 발견됨으로 인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축조된 성으로 확인되어 오두산성이 관미성에 가깝다고 할수도 있을 것이다.

관미성이 오두산성일것이라는 학자들의 주장이 만만치 않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오두산성이 관미성이라 표시되어 있다.

이와함께 화개산성은 성의 규모가 적어 많은 수군이 상륙하였다는데 동의하기가 쉽지 않으며 따라서 오두산성을 관미성으로 볼수도 있겠으나 교동의 화개산성이 오두산성보다는 관미성일 가능성이 더 많다고 주장할 수 있는 세가지 이유를 필자가 들어보겠다.

첫째는, 백제와 고구려의 당시의 주전선은 예성강이었다는 점으로 오두산성은 임진강에 접하고 있으므로 주전선을 예성강보다 동남쪽인 임진강으로 옮긴다는 것은 무리가 있고 광개토대왕이 수군을 이끌고 관미성을 침공한 392년의 2년후인 394년 백제군과 수곡성에서 전투한 것으로 미루어 평산군, 금천군, 토산군, 평천군, 배천군, 개풍군 등은 백제의 영토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임진강 유역을 통해 육지로 고구려가 침공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

 

♠고등학교 역사부도에 실린 고구려 전성기의 백제 침입도

둘째는, 삼국사기에 "그(관미성)성은 사방이 험란하고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基城四面絶海水環繞)"는 기록인데 관미성은 천연의 험준한 지세위에다 축조한 성이었음을 알수 있고 사방에 바다로 싸인 장소에 위치하었음을 추정케 한다.

또한 삼국사기 권제35 잡지제4 지리2 신라편에 보면 "해구군은 본시 고구려의 혈구군으로 경덕왕이 개명, 지금 강화현이니 영현이 셋이다(중략.)그중 교동현은 본디 고구려의 고목근현으로 해중의 섬(高木根縣海島也)" 이라는 기록에 부합된 다는 점. 그리고 목은 이색의 시에 "해중 화개삽청천"이라하여 화개산성은 험란하고 높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오두산성은 지금의 파주시 탄현면인 바, 삼국사기 동신라편에는 교하군으로 언급되어 있는바 "교하군은 본시 고구려의 천정구현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 영현이 둘인데 봉성현은 본시 고구려의 술이홀현, 고봉현은 본시 고구려의 달을성 현인데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 "라고 간단히 기술되어 있다는점 〔잡지제6 지리4 고구려편에 보면 한산주 소속에 천정구현(파주군교하면)과 고목근현(강화군교동면)이 나와있다.


♠ 발굴을 기다리는 화개산성
 

셋째는, 삼국사기에 "그성은 사방은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 싸여있다"고 기록되어있는바 화개산성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천연의 요새이고 오두산성은 서쪽은 임진강, 남쪽은 한강이 닿아 있고 두강이 만나서 서해바다로 흘러드는 길목에 위치해 있을뿐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는 서술과 틀리며 화개산은 높이가 259.5m로 높고, 오두산은 119m에 지나지 않는 다는점 등이 삼국사기 관미성의 서술과는 상당히 차이가 난다는 점 등이다.

따라서 관미성에 대한 숙제를 풀기위해서는 교동의 화개산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빨리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고구려 영역확장사 연구: 공석귀 서경문화사 1999.10

○ 고구려의 대외정복연구 : 이인철 백산자료원 2000.3

○ 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 : 윤명철 사계절 2000.10.

○ 삼국사기 : 이병도역주 을유문화사

○ 강화 향토사 연구 : 이형석 내고장인천 2000.3월 1996

○ 한국사의 이해 <광개토왕의 남하정복에 대한 일고> : 김명우, 1991년 윤내현외

 

 

   ▲ 유배지로서의 교동

교동은 지정학적 가치가 충분한 대신 고려시대부터 최적의 유배지가 되었다. 정쟁에서 패한 인물은 서울에서 먼곳으로 보냈으나 정말로 제거해야 될 인물, 늘 동정을 살필 필요가 있는 인물은 견고하면서도 수도로부터 가깝고 안전하고 주민들과도 격리된 곳에 두는 것이 좋았다.

교동은 수도에서 이틀 정도의 거리이고 바다로 둘러 싸여 있고 막상 해안과의 거리는 얼마되지 않지만 조류가 빠르기 때문에 유배지로 적정한 곳이었다.

 

   ▲ 역사(실록 등)에 나타난 중종 반정과 연산군

1506년(연산군 12년) 9월 1일, 성희안, 박원종등이 연산군을 폐 하려고 군사를 움직인 것이 중종반정이며 9월 2일 대비(성종의 계비)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맞아 왕으로 옹립, 그가 바로 중종이 된다.

그는 그날로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 되었고, 그해 11월 6일 교동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 조정에서는 왕자의 예로서 장사를 치러 강화에 묘를 마련하였으나 후에 양주(지금의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하였다.

실록에는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도록 한다"는 내용만 있을뿐 교동 어느곳이라는 기록이 나오지 않으며 약 2개월후 사망하였으므로 유배지가 교동 어느곳인지 알 수 없다.

 

   ▲ 3군데로 표시된 안내판

현재 교동면의 신골(봉소리), 연산골(고구리), 읍내리 세곳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교동 선착장인 월선포에 세워져 있는 지도가 곁들인 안내판에는 세곳 모두 연산군 유배지로 표시되어 있다.

 

   ▲ 교동에 유배된 역사인물

○ 희종(1181-1237)

- 고려 21대왕. 최충헌에 의해 1211년 왕위를 쫓겨나 처음 강화에 유배되고 1215년 자연도(영종도)를 거쳐 교동에 유배된 후 복위운동 펼치다 1227년 다시 교동에 유배되어 사망.

○ 안평대군(1418-1513)

- 세종의 3남

1453년 계유정란때에 세조에 의해 아들 우직과 함께 교동으로 유배되어 사사됨

○ 임해군(1574-1609)

- 선조의 첫째 서자

1608년 광해군에 의해 처음 진도로 유배되고 다시 교동으로 옮겼다가 1609년 사사됨.

○ 광해군(1575-1641)

- 인조반정(1623)에 의해 폐위되어 처음 강화도에 유폐됨. 1624년 이괄의 난때 태안으로 옮겼다가 난이 평정되자 강화도로 다시 데려옴. 1636년 청나라가 쳐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자 다시 보내졌다가 1641년 제주도에서 사망

○ 능창대군

- 조선조 선조의 손자이며 인조의 동생

능창군 추대사건인 신경희의 옥사사건으로 광해군에 의해 1615년 교동에 안치 된후 사형.

○ 숭선군

- 인조의 5남

1651년의 무고로 1652년 처음 강화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교동으로 안치되었다가 1656년 석방됨

○ 익평군

- 철종의 사촌으로 헌종12년(1847) 교동에 유배됨.

○ 이준용(1870-1917)

- 흥선대원군의 손자, 고종의 조카

1895년 법무 현판 김학우의 피살사건에 연루되어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2개월만에 석방.

○ 민영준, 민형식(1875-1947)

- 을사오적 암살 계획이 발견되어 1896년 2월, 교동에 유배

 

   ▲ 연산군 유배지 검토

○ 교동읍성 동문안 : 교동읍 읍내리 270번지

읍내리 교동읍성 북성 위둑(읍내리 273)에 부근당이라는 조그만한 당집이 있어 이곳에는 연산군과 그 부인 신씨의 화상으로 추정되는 탱화가 걸려 있다.(강화사에는 부근당이 유배지라고 기록됨)

마을주민들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해마다 이곳에서 굿을 한다고 하며 부근당에서 좀 떨어진 곳에 1986년 「연산군 적거지」의 표지판이 설치되었다.

 


♠ 읍내리에있는 연산군적거지 안내판

○ 신골 : 봉소리 신곡동

옛 선착장인 호두포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봉소리 동쪽 봉황산 기슭에 있으며 본디 나무가 우거져 숯을 굽던 곳이며 신씨가 많이 살아 신골이라고도 하며, 대나무가 무성한 곳이며 연산군이 읊었다는 시에도 "인진나루 보이는 곳에"라는 구절이 있다고 전하므로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예전에 이곳에는 많은 토기와 집기가 나왔다고 한다.

♠ 연산군 유배지(봉소리 신곡동,신골)

○ 영산골(영산) : 고구2리

교동향토지 교동약사편에는 “연산군이 유배되어 이곳에 잠깐 있었다 하여  연산골이라 한 것이 그 유래라고 하고 영산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렇지 않다는 설도 있으나 별다른 유래는 없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 연산골의 느티나무

참고문헌

○ 교동사(황규열 편저)

○ 교동읍지

○ 임용한저 : 조선국왕 이야기 2(혜안)

○ 21세기 동국여지승람 1999. 5/6월호 : 집중탐구-교동도와 불음도

○ 강화군 역사자료 보고서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 우리얼 문화유산보전위원회 강화조사 5차보고서(2000.4.25)

위로 올라가기

 


교동은 면적은 작지만 문화적으로는 큰 섬이다. 교동은 고대부터 해방이전까지 해상교통의 중심지로서, 산간과 서해를 잇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교동은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지고 교동읍성은 황폐화되었고 객사도 동헌도 아전청도 안해루도 없이 교동도호부지의 흔적이 약간 남아있을 뿐이다.

수향교로 일컬어지는 교동향교원지는 흔적이 점차 사라지고 있고 고읍성은 심각한 훼손으로 몇 년 후에는 사라져 버릴 것이며,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는 화개산성에 대한 연구조사와 고증이 필요하고 성곽에 대한 실측조사 및 지표조사가 요청된다.

♠교동읍성석축이 민가의 담으로 변한 모습
♠교동도호부지의 초석이 민간의 담장으로 변하다.

   교동도호부지가 일찍 사적(史蹟)으로 지적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땅을 치게 만든다.

   한편 교동에는 교동향교,화개산성,화개산봉수대,교동읍성,연산군적거지등 지정문화재와 우리얼문화유산지킴이의 건의에 의해 비비정문화재인 읍내리비석군에 문화재안내판이 세워져 있었으나 다른 비지정문화재에는 아내판이 없었다. 따라서 교동을 찾는 사람들이 유적을 찾는데 많은 불편을 겪었고 유적들은 심한 훼손상태가 진행중이었는데 우리얼문화유산지킴이와 교동사랑회의 건의에 의해 2001.12.6.교동부지, 사신당지, 삼도수군통어영지, 고목근현지등 네곳에 강화군이 문화재안내판을 세움에 따라 역사적 고장으로서의 면모를 어느정도는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교동이 단순한 국내의 섬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가 함께 한 곳으로 지키기 위해서는 "읍성의 대대적인 정비"와 교동 역사찾기 운동이 벌어져야 할 것이다.

♠교동에 문화재 안내판이 세워지다
(시계방향으로 교동부지, 삼도수군 통어영지, 사신당지, 고목근현지)

 

 


   교동의 지정문화재 분포는 보잘것이 없다.

   예전에는 지방유형문화재로 교동읍성, 교동읍성내 남문, 교동향교, 화개산성, 교동현부지(교동도호부터), 삼도수군통어영지, 연산군사지, 고읍형옥지, 부근당, 화개사, 사신당, 교동봉수가 지정되어 있었다.


436. 대룡리패총 441. 교동읍성 446. 삼도수군통어영지 451.화개암지 456. 연산군적거지
437. 화개산성 442. 교동읍성 남문 447. 갈공사지 452. 화양사지 457. 황경례공 정려
438. 고목근현 고읍성 443. 진망산 봉수대 448. 안양사지 453. 교동향교 458. 부근당
439. 고읍형옥지 444. 수정산 봉수대 449. 인사리 미륵불 454. 읍내리 비석군 459. 사신당
440. 추정 경원전지 445. 화개산 봉수대 450. 법장사지 455. 김봉상묘 및 묘갈  


   그리고 월선포 선착장에는 교동 안내판이 세워져있고 탐방로가 표시되어 있으나 실제 현지에 가보면 지정문화재외에는 안내판이 없기 때문에 찾아다니기가 사실상 어렵게 되어있다.    

지정 문화재


< 지정 문화재 현황 >

   1. 연산군적거지(철종잠저소) : 교동면 읍내리, 강화군지정 향토유적 28호

   2. 교동봉수대(화개산봉수대) : 교동면 고구리산 233, 강화군지정 향토유적 29호

   3. 고구리산성지 (화개산성지) 교동면 고구리 산145, 강화군지정 향토유적 30호

   4. 교동향교 : 교동면 읍내리 148, 인천광역시지정 유형문화재 28호

   5. 교동읍성 : 교동면 읍내리 577, 인천광역시지정 기념물23호



   ▲ 교동향교

   · 소재지 : 읍내리 148

   · 유형문화재 28호


♠교동향교

원래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년) 때 각주에 향교가 세워졌을 때 화개산 북쪽인 고구리 향교골에 세워졌으며 교동읍이 읍내리로 옮겨짐에 따라 부사 조호신이 영조 17년(1741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건물로 대성전, 동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제기고 등이 있다. 대성전은 열간이며 봄 가을로 석전을 봉행한다. 동무는 아홉간이며 설총. 안유.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등 우리나라 9현을 봉안하고 배향한다.

   서무 역시 아홉간이며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세채등 우리나라 9현을 봉안 배향한다.

   명륜당은 여섯간이며 유림들의 강론장이다.

   동재는 네간으로 유생들의 숙소이며 서재 역시 네간이며 유생들의 숙소였다.

   건물의 배치가 고풍스럽고 주위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위로 올라가기


<교동향교 원터>

   ·소재지 : 고구리 향교골

   고구리의 향교골에 위치한 향교원터는 원래 충렬왕 12년(1286년)에 고려 유학자 안유의 제자들이 원나라에 갔다오는 길에 우리나라 최초로 공자상을 들여와 봉안한 장소 (나중에 개경으로 옮김)이다.

   교동은 우리나라와 중국 산동성과 무역을 하는 길목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중국을 갈 때 이곳을 들렀는데 안유의 제자들이 공자상을 가져들어오면서 서해로 귀환하면서 날씨 관계로 교동에 일시 기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교동향교의 문묘(대성전)를 우리나라 최초로 공자상을 봉안한 곳이라하여 '수묘'라 칭한다.

   그러나 향교원터는 지금은 잡목이 우거지고 그 흔적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상태다.

♠구향교 원터


    ▲화개산성지



♠화개산성

소재지 : 고구리 산 145

   ·향토유적 30호

   조선실록에 보면 세종 즉위1년(1418년) 경기팔방이 강화교동산성 및 광주 일장성을 수축 할 것을 청한다는 기록이 있는바 적어도 세종이전에 화개산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개산성은 적의 침입시 방어를 위하여 사전에 준비된 병력집결지였으며 해상에서 적을 격파하지 못하였을 경우를 대비한 육상 예비진지의 역할도 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교동은 화개산(259.5m)을 중심으로 조선 인조7년 이전의 고읍리 지역과 현재 읍내리로 행정명이 되어 있는 읍내리가 중심이 되는데 화개산에는 화개산성이 포곡식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산 정상 부분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훼손되어 있는 상태이다.

   교동읍지에 의하면 과거에는 내외로 성이 있었다고 전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교동현편에는 화개산성은 돌로 쌓았는데 성안에 연못이 하나, 샘 하나, 군창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마 고려때부터 만들어 전해진 것 같으나 "국조문헌"에 의하면 조선 명종 10년 (1555년)에 왜란을 당하여 지현 최제운이 이 산성을 증축하고 성안에 군량창고를 두었다고 한다.

   선조 24년(1591년)에 지현 이여양이 외성을 개축하여 현재의 고읍리 부근에 고읍성을 축조하였으며 지금은 다만 내성만이 남아 있다. 그 후 영조 13년(1737년)에 이르러 개축하였는데 돌로 쌓아졌으며 주위 길이는 2km, 높이는 5m의 석성으로 고구리와 상룡리로 이어진다.
화개산성에 오르면 교동도 전체가 조망되어 옛읍자리와 인진나루에서 건너오는 길목, 그리고 추정유배지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일목요연하게 보인다 .

    뿐만 아니라 읍성터와 남산포 및 수군훈련장의 배열이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멀리는 한양에서 강화를 거쳐 황해에 이르는 수로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화개산성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관미성인지는 고증으로 밝혀져야 할 사항이다. 화개산성 올라가기전 북쪽에 화개약수가 있는데 위장병에 좋다고 전해진다. 고읍성 옆 화개산 자락에는 최근에 백로서식지가 형성되어 좋은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내성 서벽의 8부능선쯤되는 위치에 높이가 80cm, 폭이 4m 정도되는 문지(門址)가 남아있다. 화개약수가 내성의 우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0년 강화군과 육군박물관의 공동조사에 의하면 화개산성에서 백자편과 분청사기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화개 약수터
    ▲ 화개산 봉수대

. ·소재지 : 고구리 산 233

   ·향토유적 29호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던 봉수라 전해지며 화개산정상에서 서북쪽으로 50m 떨어진 연봉 정상에 위치한 것으로 봉수대의 하부석축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남으로는 덕산(망산, 즉 강화봉수)에 응하고 동으로는 하음 봉천산 봉수에 응한다고 한다. 원래 교동에는 봉수대가 세곳 있었다고 한다.

♠화개산 봉수대


봉수는 김포 백석산, 통진 수안성산, 강화 진강산, 교동 화개산 봉수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강화 하음산, 강화 송악산, 통진 남산, 김포 북성산, 양천 화개산을 거쳐 서울 남산 제 5봉(烽)으로 연결된다.

<수정산 봉수지>

·소재지 : 서한리 산 92

   수정산 봉수지는 동서가 25m이고 남북이 14m이며 서쪽으로 330x260cm의 추정연조와 석벽과 석재등이 발견되고 있다. 수정산 봉수는 서쪽으로는 연백군 간월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같은 군의 각산에 응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연백군의 간월산에서 연락을 받아 북으로 각산에 연락을 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봉수군은 45명이라 전한다.

♠수정산 봉수지


<진망산 봉수지>

   ·소재지 : 읍내리 산571-1

   남산(진망산) 봉수는 인공시설물 설치로 인하여 지형이 교란되고 있기 때문에 원형은 추정하기 어렵다. 이 지역은 19 x 11m의 크기인데, 8 x 6m 암반지역이 포함되어 있다. 이 봉수는 장봉, 불음도, 말도와 연락되어 교동의 통어영에 보고하는 방법으로, 즉 서해안의 유사시에 상황을 보다 신속하게 통어영에 보고하는 역할을 수행한 봉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봉수대와는 달리 근세(조선시대 고종)에 설치되었다고 보여진다.

♠진망산 봉수지
위로 올라가기
    ▲ 교동읍성

   ·소재지 : 읍내리 577

   ·기념물 23호

   안내판이 남문 앞에 세워져 있어 교동읍성이라기보다는 남문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 인조 7년(1629년) 교동에 처음으로 영이 설치될 때 축조된 것으로 주위는 305m, 높이는 2.4m인 옹성(甕城)세곳과 치첩 네곳이 있고 둘레는 동남북에 세 개의 문이 있으며 소남문(小南門)이 있었다.

   순조 13년(1812년)에 당시의 통어사 백동원이 치첩을 수축하고 고종 21년(1883년)에 통어사 이교복이 체성문루와 치첩을 쌓다가 강영(降營)되어 돌아가게 되면서 후사를 완성치 못하게 되었다.

♠교동읍성 동문쪽

   방어사 백동윤이 동년에 남문을 중건하였는데 호지(濠地)는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무너지고 없어졌으며 북문과 동문도 고종 27년(1899년)에 부사 민구호가 중수한 듯 하나 그후 영원히 폐문되고 말았다.

   삼문에 문루가 있었는데 동문은 통삼루, 북문은 공북루, 남문을 유량루라 불렀으며 동문과 북문의 문루는 어느때 없어졌는지 연대조차 알수 없고 남문도 1921년의 폭풍우로 문루는 없어지고 현재는 아취형의 남문(구우체국 앞)만이 남아있던 것을 1982년에 강화군수를 지낸 교동 읍내리 출신 김충호 군수가 경기도청 재직시 붕괴된 남문(아치형)과 지첩을 보수하여 원형은 되찾았는데 남문위에는 유량루로 추측되는 네 개의 주춧돌이 남아 있다.

   남문은 1974년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56호로 지정되어 1975년에 해체 복원을 거쳤다.

   2000년도 강화군과 육군박물관의 공동조사에 의하면 교동읍성에서  수키와와 청자편,백자편 등이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남문은 고구려시대때부터 고목근현의 초소로도 알려져 있다.

♠교동읍성 남문

<연산군적거지>

   ·향토유적 28호

   연산군 유배지의 진실참조 (연산군 유배지의 진실<바로가기>)

   

비지정 문화재



   ▲ 교동부지(교동도호부지)

   · 소재지 : 읍내리 761-1

   조선 인조 7년(1629년)에 남양의 화량진을 옮겨 경기수영이 교동읍내리에 설치되고 교동현이 교동부로 승격된 후 설치된 것이다. 현 부지에는 돌로 쌓은 계단 20여개가 남아있어 삼도(경기·황해·충청) 수군통어영을 관장하던 본영다운 규모를 엿볼 수 있으며 안해루(현종9년-1667년 부사 구문저가 창건)의 석주가 2개 남아있고, 객사터와 북문과 서문, 동문의 흔적과 성곽의 일부가 제법 남아있다.
♠교동부지의 안해루 석주

   교동도호부터에는 경방청으로 추정되는 건물과 옆에는 해체시 수집된 건물기둥이 현재의 울타리(담)로 사용되고 있으며 관청과 객사터에는 일반건물이 들어 있는 상태다.

  교동도호부 배치도를 보면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위로 올라가기
♠ 교동초등학교내에 존치된 안해루 석주
♠ 교동부지 객사터

      교동도호부의 주요 건물을 살펴본다(1824년 경기지)

      - 근민당 : 부사의 집무실

      - 관청 : 도호부의 정무를 살피던 곳

      - 이사영 : 중영(中營)

      - 운사헌 : 중군(中軍)의 처소

      - 열무당 :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곳

      - 순뢰청 : 영기와 감옥을 지키던 군사가 거처하던 곳

      - 객사 : 교동부를 찾는 관원들이 기숙하던 곳

♠교동도호부 배치도(경기지)
 
   ▲ 삼도수군통어영지

· 소재지 : 읍내리 420-1

   인조 7년(1629년)에 경기수영이 설치되고 인조11년(1633년)에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설치되어 이후 고종초기까지 존속하였다.

   이곳의 서쪽해안이 수군 훈련장이었다고 하며 썰물때면 당시의 석축이 모습을 드러내고, 또한 함정을 묶어두던 계류석을 볼 수 있어 이곳이 군항임을 증명하고 있다.

   1894년 발행된 교동읍지 지도에는 "전함정박항(戰艦碇泊港)"이라 표시되어 있으며 수군훈련장은 "주사조련항(舟師操鍊港)"이라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수영은 교동읍성안에 설치되었고 이곳은 수영(삼도수군통어영) 소속의 전함이 정박한 곳이라 보여진다.따라서 이곳은 삼도수군통어영의 본영이기 보다는 통어영의 전함정박장 또는 선착장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것이다. 남산포선착장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조선초기 월곶진이 위치했던 지역으로 보여지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월곶진에 우도수군첨절제사영(右道水軍僉節制使營)이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월곶진은 효종 9년(1656년)에 강화유수 홍주보가 강화 연미정으로 이설하였다.


♠함정계루석
♠삼도수군통어영지 선착장
<경기수영의 위치>

   조선초 조정은 경기도를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 다스렸다. 태조3년 4월(1394년)에 경기 좌도와 우도의 수군절제사를 정부는 임명한다. 다시 태종 1년 7월, 전서를 지낸 김영렬을 좌우도수군절제사로 임명한다. 태종 8년 왜적을 막는다는 이유로 김우라는 사람이 경기우도 교동 등처 병마절제사로 임명하고 김만수라는 사람이 좌도 연흥자월 등처 수군절제사로 부임함으로써 경기도에 수군이 존재했음을 알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230년전 조선 영조대에 발간된 여지도서(與地圖書) 지도에 보면 읍내리 교동부(호동부)가 있던 자리에 「수영」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문헌비고에는 「영아(營衙) 통어영(統禦營)」의 설명에 있어 " 곧 경기 수영이며 읍성(교동읍성)에 있는데" 라고 되어있고 대동지지에도 "통어영은 곧 경기 수영인데 읍성안에 있다"고 기록되고 있다.

   

교동도호부 배치도를 보면 근민당(近民堂)이 부사의 집무실로 중앙에 자리잡고 도호부의 정무를 살피던 관청이 있고 중영(中營), 중군의 처소인 운사헌(運四軒) ,교동진영의 아전들이 일하던 곳인 영리청과 병무를 관장하던 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이 있는 것을 보면 수영과 도호부가 같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다만 인조7년에 수영을 교동의 월곶진으로 옮겼다고 하고 현이 부로 승격하였다고 하는데 읍내리로 옮기기전의 교동현은 고읍현터에 계속 있다가 인조때 부로 승격되면서 비로소 읍내리로 옮겼는지 확실치가 않다.

♠경기수영지

   이후 경기수군은 혁파되었다가 성종 4년 6월에 다시 경기 좌도 수군영이 있었던 남양 화양진에 경기수영을 설치하게 된다. 남양의 경기 수영은 명종 11년(1555년)부터 인조 7년 (1629년)에 교동으로 옮길때까지 통합수영으로 역할을 했다. 비변사 김유가 " 화량은 한쪽에 외따로 있어서 수영으로 는 적합하지 않음에 교동은 연안과 강하나 사이를 두고 있으므로 그곳에 수영을 설치하면 강화도와 기각의 형세를 이룰수 있다"는 의견에 따라 설치한 것이다. 교동수영은 이후 수영을 강화에 넘겨주는 변동을 겪기도 하였으나 삼도통어영까지 발전해 나갔다.

 

    ▲ 철종잠저소

   · 소재지 : 읍내리 270

   철종은 어릴적에 강화읍 내수골 초가집에 살았는데 아버지 정계군과 함께 곤궁한 생활을 보냈다. 어느날 조부로부터 방계친척이 야소교사건에 관련 있다고 모함받아 피살되자 두려움에 13살되던 헌종10년(1843년) 3개월간 교동으로 피신해 살았다.

   그 잠저의 위치는 읍내리 교동읍성 동문쪽으로 추정되어 1890년 도호부사 이태권이 그 초가를 헐고 새로 정당과 외문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 집터와 우물이 남아 있어 철종 잠저소라고 알려져 있고, 비석과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으나 1986년「연산군 적거지」(향토문화유적 28호)로 안내판이 바뀌어 세워졌다.

   한편 철종의 또다른 잠저는 강화읍에 있는 용흥궁으로 교동에서 3개월만에 강화로 옮겨진 것이다.

   교동읍지(1899년)에도 철종의 잠저소가 읍내리에 있었다고 전하기 때문에 현재의 연산군적거지는 철종잠저소가 분명하다.

 

♠철종잠저소(연산군적거지 안내판이 서있다)
 
   ▲ 화 개 사

   · 소재지 : 읍내리 산 25

   창건연대는 고려때라고 전하는데 고려말의 문신 목은 이색(1328-1396년)이 독서하였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금불상 2개가 있었으나 지금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전한다.

   원 건물은 1840년경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건립되었으나 1967년 다시 화재가 일어나 1968년 중건하였다.

   유물은 부도 1기가 있으며 절 뒤에는 문무정이 있으며 절 오른쪽에는 불두화가 있다.

   이밖에도 교동에는 여섯곳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월정사,법장사, 갈공사, 화양사, 안양사지 등이 있다.

♠화개사
위로 올라가기


<갈공사지>

   · 소재지 : 고구리 233

   화개산 봉우리 북쪽에 있으며 사지는 화개산성의 끝자락에 해당된다. 목은 이색의 수양처로 전해진다.




♠갈공사지


<안양사지>

   · 소재지 : 상룡리 산199-1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될 정도로 연혁이 있었으나 화개산 남쪽에 그 터만 남아있다. 읍내리의 장수약수터가 안양사가 있던 자리로 낮은 석축이 남아있다.




♠안양사지


<화양사지>

   · 소재지 : 지석리 산50

   교동군지에 돌곶리(乭串里) 화양동(지석리 현암부락)에 있으며 석탑만이 남아있다고 하였다. 이제 탑은 없고 그 터와 돌만 남아있다.



♠화양사지

<월정사지>

· 소재지 : 상룡리 산59

  마을이름이 법장동(법래)이기 때문에 법장사라고도 불리워진다. 유구나 석래들은 보이지 않으나 자기편과 와편이 수습되었다,

♠월정사지


<목은 이색과 화개사>

   목은 연구회에서 펴낸 "목은 이색의 생애와 사상(1996년, 일조각)"에 따르면 이색은 총명과 지혜가 뛰어나고 스스로 글을 읽을줄 알아, 보기만 하면 외우는 천성과 학구열을 가지고 7세때부터 독서를 하기 시작하였다 한다. 한산 숭정산이 첫 입산지였는데 14세(1341년)인 고려 충혜왕 복위 2년에 강화부 교동 화개사에 들어가 친구들과 함께 책을 싸들고 공부하였다 한다. 그러나 교동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이해 가을에 그는 교동을 떠난다. 그해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여 관리생활의 첫발을 내디딘다. 박헌용의「강도지」에는 화개암은 목은의 독서처라하고 인근「갈공사」는 목은의 수양처라고 전해 내려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색이 교동에 머물 때 남긴 시로 교동삼수(喬桐三首)가 전한다.


   Ⅰ. 바다 가운데 화개산 푸른 하늘 찌를 듯 솟았는데

   거기에 황폐한 사당 햇수를 알 수 없네

   한 잔 술 올리고는 북쪽을 바라보니

   부소산 빛은 더욱 창연하구나


Ⅱ. 그 산 아래 노닐던 나그네 절방을 빌려 임시로 드니

   들 과일 살이 붙고 샘물도 향긋하네

   신에게 입은 은혜란 모름지기 갚아야지

   바람에 대하여 땅에다 두 번 잔을 기울이네


Ⅲ. 바다는 끝이 없이 푸른 하늘과 맞닿았는데

   돛대 그림자 날아오니 해는 서녘에 뉘엿뉘엿

   산 아래 집집마다 한 술 걸러내고

   파 설고 회 치는데 닭은 홰에 올라가네


   마지막 시는 교동해안의 어느 어부집의 정경을 생생하게 그려 볼 수 있게한다

 

   ▲ 교동고읍성(고목근현지)

   · 소재지 : 고구리 283-1

   교동은 고구려때부터 고목근현이 설치되고 고려때는 감무를 두었으며 그 관청인 관아터와 읍성인 토성이 남아있는데 둘레는 1,171m 로서 일부 석축이 남아있다. 진입로 우측에 수령이 1500년이 된다는 물푸레나무가 있으며 주변에 당시 관아터와 부속연당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남아있다.

   동·서·남·북문지를 추정할 수 있는 장소가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4문이 구비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02년도에 발간된 불교문화유산조사단의 보고서에는"이지역역사를 밝히는데 상당히 중요한 유적이라 생각되며 보다 정밀한 조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토성의 보존 상태는 좋지 않지만 토성의 규모와 복원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 이상의 훼손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곳이 조선인조 7년(1629년)에 읍내리로 교동부가 옮겨질때까지의 처소(處所)인지는 아직 더 연구돼 보아야 할 과제다

♠교동고읍성



<고읍형옥지>

   · 소재지 : 고구리 산112

   오늘날의 형무소와 비슷한 감옥으로 고읍현이 존치하던 조선초기까지 죄인을 수용하였으며 유배되어온 죄인과 황해도의 죄인도 이송 수감하였다고 한다.

♠고읍형옥지
    ▲ 읍내리 비석군

 

   · 소재지 : 읍내리

   읍내리 현 교동양조장 앞에서부터 서쪽으로 수십여개의 비석이 늘어서 있던 곳을 이름하여 비석거리라고 전해져왔다.

   이 비석들은 쓰러지고 훼손되어 멸실될 우려가 있었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이 한창일 때 교동의 지난날의 역사를 정립한다는 뜻에서 옛 교동의 관문이었던 남산포길 옆에다 이전 정립하였다가 1991년 다시 향교입구로 옮겼다.

39기 대부분이 겸부사(兼府使)의 선정비(善政碑)인데 이 가운데에는 거사대(去思臺)라는 특별한 양식의 비가 3기 포함되어있다.

♠읍내리 비석군
   ▲ 사신당지(사신관지)

   · 소재지 : 읍내리 산751-1

   진망산(남산) 밑에 사신관이라고 하는 큰 건물이 있었고 그 옆에 신당이 있었는데 이를 사신당이라 불렀는데 6.25때 없어진 것을 1969년 다시 건립한 것이다. 사신당 내부에는 임경업 장군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송나라 사신이 왕래할 때에 교동도 앞바다를 지나면서 배가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바닷가 바위위(인천에서 강화, 교동까지 연락선이 기착하던 곳)에 당시에 징과 끌로 쪼아서 사람이 오르내리는 길 즉,고려때 중국으로 떠나기전에 날씨등을 살피며 머물렀던 사신관으로 가기위한 사신등선로를 만들었으나 그 후 연락선 기착이 불편하여 선창을 개조하는 바람에 전부 묻혀버려 지금은 일부만 볼 수 있다.

조선중엽에는 이곳에 군기를 보관하다가 철종 12년(1860년)에 이르러 너무 오래되어 퇴락하기 시작하자 통어사 정기원이 구제도를 아주 철폐하고 군기고로 중수하였다.

♠사신관지 ♠사신등선로 ♠사신당 내부의 임경업장군으로 추정하는 초상
    ▲ 읍내리 부근당(扶芹堂)

   · 소재지 : 읍내리 251

   교동읍성 북성 둑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부근당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관청내에 두던 신당으로 부군(附=붙을 부. 君=임금 군) 또는 부근(付=줄 부. 根=뿌리 근)이라 하여 작은 사우(祠宇)를 두고 여기에 지전(紙錢) 등을 걸어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교동의 부근당은 특이하게도 扶芹堂 (扶=도울“부” 芹=미나리 “근”堂=집 “당”)을 쓰고 있다.
   햇미나리가 나면 제일먼저 임금께 바친다는 뜻으로 헌근지성(獻芹之誠)이라 했으며, 헌근(獻芹)이라하여 윗사람에게 물건을 선사할 때나 의견을 적어 마음을 표현할 때 겸손하게 이르는 말로서 근(芹)이란 자를 쓰고 있다.
    연산군(燕山君)을 신(神)으로 모신 이곳에서 폐주가 죽은 섣달에 예를 갖추어 당굿을 지내며 원혼을 위로하고 겸손의 표현으로 국내 유일하게 부근당(扶芹堂)이라 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부근당외부
♠부근당내부(연산군의 초상)
 
    ▲ 경원전지

   · 소재지 : 고구리 206

   고려 희종이 유배되어 기거하던 곳이라 짐작되는 전각지로 추초석과 축대석등을 볼 수 있으며 희미하게나마 연못터도 보인다.








♠경원전지, 초석이 보인다.
 
    ▲ 사 직 단

· 소재지 : 읍내리 산

   사직단이 세워진 고을은 옛부터 중요한 곳이라 보여진다.

   토지신과 곡신(穀神)을 제사하던 곳이며 백성들의 복을 빌기위해 세운 곳인데 교동의 사직단도 진망산 북쪽에 있는데 철종 3년에 고구리에서 옮긴 것이다.




♠사직단
 
    ▲ 조선시대분묘군(김봉상묘)

   · 소재지 : 상룡리 남대우동 산 85-4

   조선시대의 이름난 인물들의 무덤들이 교동에 집중되어 있다.

   대사간 전사안과 감찰 황태빈의 무덤은 지석리와 인사리에 있고, 습독관 김현, 영릉참봉 김봉상, 경산현령 김귀상, 군위현감 김경선, 습독관 김윤공, 남부령 전거의 등의 무덤은 화개산 북대우동에 있으며, 증병조판서 고언백의 무덤은 난정리 수정산에 있다. 정사공신 황경기, 평안도사 황경례의 무덤 등도 전해지고 있다.


   특히 상룡리에 있는 김봉상의 묘의 비문은 퇴계 이황이 쓴것이라 전하는데 비문의 판독을 통하여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평가해야 하겠다.

♠김봉상의 묘
 
   ▲ 효 자 묘



    · 소재지:고구리 산145

   화개산 화개약수터에서 화개산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다.

   교동에는 예부터 효자, 효부가 많이 있었는데 누구의 묘인지는 모르나 매일같이 성묘하던 손자국,무릎자국, 갓자국이 선명하게 나있다.

♠효자묘의 흔적
 
   ▲ 황경례공 정려(黃京禮公 旌閭)


· 소재지: 양갑리 236-2

이 정려는 1624년 이괄의 난때에 반란군에게 잡혀 굴하지 않고 순절한 교동출신의 무관이며 선전관이던 황경례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려이다. 그후 후손 양신이 왕에게 진언하여 정문(旌門)을 하사받았다.
♠황경례공정려

 

대룡리 조개맨들 (패총)

  대룡리 해안쪽 들을 조개맨들이라하고 현재 논둑과 갈아엎은 논바닥에 대형 대합의 패각과 소라, 굴껍질이 흩어져 있는 속에 서울 풍납동식 경질 무문토기 조각과 승석문, 타형문의 원삼국시대 토기조각이 발견되었다.

  한편 2001.6.30에 방영된 KBSTV의 역사스페셜에는 여기에서 발견된 조개껍질을 탄소연대책정을 해본 결과 1200년전인 통일신라시대에 형성된 것 임이 밝혀졌다.

♠대룡리 조개맨들의 흔적
화개산성 안의 패각 산포지

  화개산 중턱 이상의 고지대 곳곳에 조개맨들 패총과 같은 대합 패각과 소라, 굴껍질이 흩어져 있어 주민들은 지각변동에 의한 해안선의 상승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반해 무문토기 조각과 승석문, 타형문의 원삼국시대 토기 조각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피난 또는 국방상의 이유로 산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버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우리얼답사팀은 2000.4.13. 화개산산정(좌표 석모도상주산 151,교동중고등학교운동장서쪽끝295 지점)부근에서 패각산포지를 발견한바 있다.

♠화개산정 부근의 패각산포지
고구저수지 유적

  저수지 공사 중에 길이 39센티미터 크기의 고래 뼈와 토탄층에서 무문회도편과 돌도끼, 돌화살촉, 쇠화살촉 등이 1962년 서울대 답사팀에 의해 수집보고 되었다.

이밖에도 지석초등학교뒷산에서 청자가 발굴되었다는 얘기도 있고 신골에도 청자가 많이 나왔다는 얘기도 들리는데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나선화학예관은 청자 중 교동에서 출토된것을 최고로 여긴다고 말하고 있지만 전해지는 것은 거의 없다.
♠고구저수지
♠청자 발굴 추정터(지석초등학교 뒷산)
♠돌화살톡과 돌도깨
♠청자병
♠청동발 및 숟가락, 수저
 
위로 올라가기
김득초 교장의 수집품


 ▲ 기명류

 ◎ 고 대 석 기

  합인석부 1점

  유경석족 1점

 ◎ 고 려 시 대

  청동발과 청동병 각1점

  무유도병 1점

  청동으로 만든 숟가락과 젓가락 2벌

  청자완 1점

  청자대접 2점

  청자병 1점

 ◎ 조 선 시 대

  분청단지 1점

  백자잔 1벌(받침포함)

  백자병 3개


 ▲ 동전류

  개원통보 서기 713-741 주조 중국화폐 (당 현종)

  태평통보 서기 976-983 주조 중국화폐 (송 태종)

  함평원보 서기 998-1003 주조 중국화폐 (송 건종)

  상부원보 서기 1008-1016 주조 중국화폐 -

  천성원보 서기 1023-1031 주조 중국화폐(송 인종)

  희령원보 서기 1068-1077 주조 중국화폐(송 신종)

  원풍통보 서기 1078-1085 주조 중국화폐(송 신종)

  원우통보 서기 1086-1093 주조 중국화폐(송 철종)

  원부통보 서기 1098-1100 주조 중국화폐(송 철종)

  대관통보 서기 1107-1110 주조 중국화폐(송 휘종)

  정화통보 서기 1111-1117 주조 중국화폐(송 희종)

  함순원보 서기 1265-1274 주조 중국화폐(송 도종)

  건융통보 서기 1736-1795 주조 중국화폐(청 고종)

  도광통보 서기 1821-1850 주조 중국화폐(청 선종)

  광서통보 서기 1875-1908 주조 중국화폐(청 덕종)

  해동중보 서기 1102 주조 한국화폐 (숙종 7년)

  조선통보 서기 1423 주조 한국화폐 (세종 5년)

  상평통보 서기 1678-1866 주조 한국화폐
  (8개: 숙종4년-고종 3년)

♠동전류 일람
♠태펑통보
♠해동중보

  먼저 중국화폐를 시대별로 살펴보겠다.

  개원통보는 당 현종대에 발행한 것이다. 개원은 연호이니 주화는 서기 713년에서 741년까지 사이에 주조된 것이다.

  태평통보(송 태종976-982), 함평원보(송 진종998-1003), 천성원보(송 인종 1023-1031) 희령원보(송 신종1068-1077), 원풍통(송 신종1078-1085), 원우통보(송 철종1081-1093), 원부통보(송 철종1098-1110), 대관통보(송 휘종1107-1117) 등은 북송시대의 주화인데, 남송시대의 주화는 단1개 함순원보(송 도종1265-1274)가 남아있다.

  청대주화는 건륭통보(청 고종1736-1795) 도광통보(청 의종1821-1850) 광서통보(청 덕종1875-1908)가 있다.

  이상 열거된 것은 판독이 가능한 것이다. 청대것은 전면과 이면문자도 약간 읽을수 있으나 송대것은 이면문자는 보이지 않으며 전면문자도 부분적으로 알아볼수 없다.

  우리나라 주화로는 고려숙종(1054-1105)대 해동중보가 나왔는데 귀중한 것이다.

  고려사에 숙종7년(1102) 12월 해동중보 15만관을 주조하여 문무양반, 군인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세종5년(1423)에 주조된 조선통보 역시 희귀한 것이다. 상평통보는 10여개가 나왔는데 상평통보는 조선 숙종4년(1678)에 주조한 것이 처음이며 영조7년(1731)9월에 다시 주조허가를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몇번 금지조치를 받았는데 상평통보는 같은 이름으로 숙종대부터 고종대까지 사용되어온 것으로, 소전이라고 불리운 중국화폐와 같이 사용되었음을 알수 있다.


 

돌도끼(마제석기)



 주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고구리 557번지 한원식씨가 소장하고있다.
 81년 구 가옥화재로 인하여 전소되어 현재의 건물로 신축 공사중에 집터에서 발견한 것으로, 한원식씨의 부친 한영수씨가 1945년~47년경 현 고구저수지 공사 전 토탄층에서 발견한 것으로 추측된다.

♠돌도끼(마제석기)
 

 

위로 올라가기

 


인사리 망향대

  ○ 소재지: 지석리

 교동 북쪽해안의 언덕배기에 위치한 곳으로 좁은 비탈 길목건너에는 황해도 연백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연백군등 황해도를 고향으로 둔 실향민들이 1960년도에 이곳에 비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낸다. 우리나라는 철원과 고성에 통일전망대가 있고 자유로 옆의 오두산 통일전망대도 있으며 파주에는 망배단이 있으나 여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인사리 망향대라 부르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지석리다.

♠망향대,멀리 북한 땅 연백이 보인다.

고구저수지

  ○ 소재지: 고구리

 1976년 4월에 완공된 88.5㏊(26만6천평)의 저수지로서 사계절 어디든지 낚시할 수 있는 곳으로 주어종은 참붕어, 잉어, 빠가사리, 가물치등 공해없는 어종을 볼 수 있다.

 원래 화개산 북쪽 기슭인 이곳에는 큰 연못이 있었고 연못은 가르는 길이 있었다. 76년에 바닷가쪽으로 둑을 쌓고 물을 끌어 올 때 물을 가두는 물푸기못으로 칭하여진 고구저수지는 상하류가 둑길로 갈려 있지만 물은 서로 통한다.

 저수지 공사중에 길이 39cm 크기의 고래뼈와 토탄층에서 무문 회도편과 돌도끼, 돌 화살촉 등이 1962년 서울대학교 답사팀에 의해 수집보고 되었다.

♠화개산에서 바라본 고구저수지
위로 올라가기

난정저수지

  

○ 소재지 : 난정리외

 난정지구 농어용수개발을 위해 1997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2002년 5월에 완성될 예정으로 있는데 위치는 난정리외7개리에 걸쳐있다. 난정저수지의 수혜면적은 321만평(1070ha)에 이르고 유수면적은 121ha에 달하며 저수지 담수는 2001년부터 시작되며 사업비만도 410억원에 달한다.

 그리고 고구리에는 영산제언(榮山提堰)이, 지석리에는 염주동제언(鹽州洞提堰)이 옛부터 남 아 있으나 이제는 그 흔적마저 조금씩 헐리고 있다.

♠담수가 시작된 난정저수지

강화갯벌(교동갯벌)



2000년 7울 6일 교동의 4면 앞바다를 포함한 강화도 일대 바다의 갯벌이 천연 기념물 제419호로 지정되었다.
♠응암이 보이는 교동갯벌

포구·나루터


자그마한 섬인 교동에는 포구와 나루터가 유난히 많은데 이는 그 만큼 인근 지역과의 교류와 교통이 활발했던 것을 증명하는것이라 하겠다.

옛날에는 지금과 같은 동력선(기선)이 없었으므로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춰 배가 다녔고 바람이 없으면 노를 저어 바다를 건너야 했는데 이것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양갑리, 난정리, 동산리, 서한리 사람들은 멀탄(말탄포) 나룻배를 타고 불당포(연안)로 건너가 2, 3십리길을 걸어서 장출장(연안), 연안읍장을 봐 왔고, 지석, 무학, 삼선, 인사리 사람들은 민재(인현, 북진나루) 나룻배를 타고 봉이가미(연안)로 건너가 2, 3십리를 걸어서 연안온천장, 홍현장을 봐왔으며 또 밤머리(율두포) 나룻배를 타고 백석포(연안)로 건너가 역시 2, 3십리를 걸어서 연안읍장터로 나가 일을 보았다. 대룡리, 읍내리, 상룡리, 봉소리, 고구리 사람들은 호두포(봉소리) 나룻배를 타고 성(인화리)으로 건너가 2, 3십리를 걸어서 산이포(양사면)장, 강화읍장에 나가 일을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불편한 교통 조건에서도 당일장을 봐왔고 혼사 같은 큰 일이 있을 때에는 2일장을 봐야만했다. 장에서 구입한 물건들을 사달구지에 싣기도 했지만 흔히 등짐으로 지고 다녔다. 옛날에는 추위도 심하여 바다에 성에(얼음)가 많이 끼어 나룻배가 다니지 못하는 날도 많았으므로 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인천, 서울에 가려면 추수를 마친 후 벼를 몇섬씩 목선(돛단배)에 싣고 가서 객주가 팔아주면 그것으로 생활필수품을 사가지고 돌아와야 했다.

그 후 한일합방이 되고 나서 일본인 다나카(田中)라는 사람이 기계배(기선)로 인천을 출발, 읍내리 동진포를 거쳐 연안 불당포를 경유하여 해주까지 운항하였다한다. 그러나 배일사상(排日思想)으로 손님이나 화물 수송으로는 제 구실을 못하였다. 강화도의 뱃길은 호두포(봉소리)와 인화리가 이용되었지만 북방한계선이 가까이 있어 6.25사변후에는 월선포→창후리간 항로가 개척되었는데 1960년부터 월선포→창후리간에 쾌속선이 운행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교동의 포구,나루터
♠호두포에서 바라본 인화나루
위로 올라가기

죽 산 포


  ○ 소재지:동산리

 동산리에 있는 포구로 옛날에 이 동구에 배가 많이 정박하여 배의 돛대가 마치 대나무 숲과 같다하여 죽산동 또는 죽산포라 하였다.

 또 임진왜란때 국방상 필요에 의해 이 마을 뒷산에 테를 두른 듯이 참묘를 팠다는 데서 유래한 테메가 있다고 전해진다.

♠죽산포

율 두 포


  ○ 소재지:지석리

 율두산 북쪽에 있는 포구로 황해도 연백군과 연결되는 나루터를 율두포라 하는데 글자 풀이로 밤머리가 바머리로 불린다.





♠율두포

빈 장 포



○ 소재지: 양갑리

양갑리 빈장산 동쪽끝에 있는 포구로서 서해안 고기잡이 나가는 포구였으며 포구로 들어오는 돛단배의 장관이 볼만하다.

말 탄 포

  ○ 소재지:서한리

 서한리에 있는 포구로 말탄이라하는 것은 맨 끝에 있는 여울 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해변에 나가면 험한 여울물을 볼수 있다.

 

♠말탄포

남 산 포


  ○ 소재지:읍내리

 남산포는 진망산(남산) 밑에 있는 포구이다. 이곳에 선창이 있었고 선창의 이름이 대변창이었다. 진망산에 사신당이 있었으므로 중국으로 오가던 사신들이 주로 이용한 포구라 할수 있다.


♠남산포
위로 올라가기

호 두 포


  ○ 소재지: 봉소리

 호두산을 끼고있는 포구. 이 마을산이 범의 머리형상이어서 호두포라 전해지고 있다. 원래 김포-강화로 이어지는 48번국도는 강화의 인진나루에서 호두포를 거쳐 고읍리로 연결되었다. 인진나루가 휴전선에 너무 가까워 군사통제지역으로 되자 창후선착장을 새로 만들어 지금은 창후리-월선포 항로를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휴전선이 생기기 전까지 호두포는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지 않는 주요 포구였기 때문에 매우 번화하였다.

♠호두포(우측은 강화의 인화나루)

월 선 포

  ○ 소재지 : 상룡리

 선멀(배를 짓던 마을) 앞에 있는 포구인데 달밤에 선멀서 바라보면 고요한 바다 위에 둥근 달이 비치니 바닷물 속에도 달, 하늘에도 달, 겸하여 노송이 물위에 비치니 그 광경이 달의 신선이라 하여 월선이라 하였으며 이태백이 놀던 자리같다 하여 월선포라 전해지고 있다. 현재는 창후리(강화)에서 오는 훼리가 닿는 곳이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하여 배타는 시간은 차이가 많이 난다.

 그밖에 고려시대때 고읍시절 고읍성을 드나들던 포구로 예성강하구와 마주보고 있는 고구리의 낙두포가 전해진다.

♠월선포
♠고려시대의 관문 낙두포

동 진 나 루

 

  ○ 소재지: 읍내리

 읍내리 성내부락 동쪽에 있는 나루터는 동진나루라 한다. 예전에는 인천에서 강화도를 거쳐 해주로 가는 배가 기착하였다. 예성강입구의 벽란도를 떠나서 원나라로 가는 하정사신(賀正使臣)이 교동으로 와서 해로의 일기를 살핀후 서해로 나갔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그래서 사신들의 임시 숙소인 동진원(東津院)이 있었다고 한다.

♠동진나루

북 진 나루

  ○ 소재지: 인사리

 인점진이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강화본도, 개풍, 김포를 거쳐 마포로 통하는 뱃길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연안을 왕래하였다. 교동읍지에는 북진나루터에 조선 선조2년(1569년)부터 13년간(1581년) 육지가 형성되어 연안사이에 인마가 통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북진나루터에 가기전 야트막한 산에는 바다에서 떠내려온 돌미륵이 모셔져 있는데 형태는 많이 상했으나 민간에 유행한 미륵의 모습이다. 귀와 입 등이 조악하나 하반신부분은 연꽃같아 마치 물에 떠있는 미륵의 모습을 표현한 것 같다.

바다중간에 휴전선이 있기 때문에 건널 수는 없지만 지금도 북진나루터에 서면 연백군이 한눈에 보인다.

♠북진나루
♠북진나루 위쪽에 있는 미륵불입상
위로 올라가기

신 교동8경(新 喬桐八景)


 교동팔경은 신·구가 있으나 그동안 여러상황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신교동8경을 소개해 본다. 신교동8경이라 하더라도 현 상태에는 합당치 않은 부분도 많은 실정이다.


 1. 화개효종(華盖曉鐘)

 화개암은 화개산 중턱에 유일하게 현재까지 남아있는 암자로 이곳에서 매일 새벽에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종소리는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고 위안을 준다.

 화개암 종소리에 대한 시(詩) 한수가 있다.

 먼하늘의 새벽빛은 아지랑이 궤뚫고

 흩어진 별들은 하나 둘 사라지네

 바람이 들려오는 종소리는 어디서 울리는고

 화개산 남쪽의 적은 가람(절)이겠지


 2. 빈장모범(濱瀁暮帆)

 양갑리 빈장산 동쪽 끝 빈장포구는 매일 서해로 떠나가 고기잡이며 제 볼일을 보고 저녁노을 붉게 물들 무렵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들의 분분한 광경이 장관이었다.

 교동시인의 시 한수가 있다.


 빈장산 밖은 하늘에 닿고

 해저문 배는 개미같이 나부끼네

 가득실은 고깃배는 서주로 갔건만

 올 때 얻은 것은 돈주머니 반밖에 안되네


 3. 잠두목적(蠶頭牧笛)

 지석리 율두산 누에머리 목장에는 소먹이는 아이들이 많이 모여 사시사철 피리를 불어대는 소리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50년전만 해도 소를 방목하여 목동들이 지켰으나 지금은 잡목이 우거지고 산고지에는 군인이 수비하고 있다.


 백마는 타지않고 황소를 타고서

 붉은 수탉은 노래않고 백구만 노래하네

 매화 관색곡만 부르지마소

 태평속에서도 전쟁의 수심이 있다네


♠고구저수지를 끼고 있는 교동



4. 말탄어화(末灘漁火)

 말탄포는 서한리 끝 해변에 있어 새우잡이 어선과 낚시배가 모여들어 밤이되면 어화를 밝혀 해변에 비치는 그 광경이 장관을 이루었다.


 섬의 밤바람은 차기도 해라

 별같은 불들이 빨갛게 바다를 물들였네

 조수에 노저어 사람의 말소리 일어나니

 주막의 등불은 나루터 단풍사이로 반짝이네

5. 수정낙조(水晶落照)

 난정리 뒤 수정산에서 서해를 바라보면 망망대해는 끝이 없으며 서해바다로 붉은 물을 들이며 떨어지는 낙조는 절경을 이룬다.


 금빛 물결은 수정산 봉우리에 넘실거리고

 바다는 온통 지는 햇빛으로 붉게 물들었네

 덧없는 인생은 늙은 빛이 감도네

 두 눈두덩이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지노라


♠수정낙조
 


 6. 호포제월(虎浦霽月)

 호포는 봉소리 동쪽 끝 호두포를 말하여 강화 본도의 인화리 포구와 마주보이는 곳으로 달 밝은 밤에 저녁 기러기가 떼지어 날아가고 해변에 교교히 비치는 달빛은 수면에 유리를 깔아놓은 듯 아름답다.


 구름없는 푸른 하늘엔 기러기떼 흘러가고

 동녘에 밝은 달은 가을에 어울려

 언덕에 계집아이들은 강남노래 부르고

 나루터 손님들은 주막에서 떠드네


 7. 인산관창(人山觀漲)

 인산은 인사리의 뒷산을 말하며 조석으로 만조가 되면 그 일대 조수가 일사천리를 이루어 바다가 몇곱으로 펼쳐지니 계표(界標)를 알 수 없어 제방둑까지 펼쳐지니 장관이라 하겠다.


  갈대꽃 핀 들판에 가을철 조수가 불어나고

 그 일대의 섬들은 계표를 알 수 없네

 전사의 어시장은 앉아서 열리고

 어선은 어느새 제삼교로 가버렸네


  보뚝 동쪽과 방죽 북쪽은 물에 넘실거리니

 봄철의 조수는 야외를 잠그도다

 멀리 십리밖에 나무는 물에 잠기고

 경원전 밖은 해가 저물어 안개만이 자욱하고나


 8. 진망납량(鎭望納凉)

 진망은 읍내리 남산인데 옛날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여 소나무 그늘진 곳에서 피서하기가 좋았으며 앞바다를 내다보는 경관이 사람의 흥취를 북돋아주며 또 오고가는 손님이 그치지 않으니 여름 피서와 등산하는 데 가장 좋은 곳이었다.


 성남의 산색은 울창하고

 온산의 소나무 덥힌 그늘은 서늘한 피서에 좋구나

 동산에 맑은 바람 시원히 불어오니

 공지에 오른 유객은 선향을 바라보네

 이상을 신교동팔경이라 하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옛날 선인들이 신구팔경을 선정 변경한 것과 같이 6.25로 말미암아 헐벗었던 산천이 지금은 잡목으로 우거져 옛자취를 찾을 길이 어렵고 해변교통이 달라졌으니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위로 올라가기

 


 교동은 아직 여행지로 삼기에는 안내판등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고 있고 숙박,음식점도 상당히 열악한 형편이다.

 <제1코스>

 ※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안으로 오전 9시반에 월선포행 훼리를 창후리에서 타고 오전 10시경에 월선포에 도착해서 오후 5시 창후리행 훼리에 승선완료했을 때의 탐방로. (소요시간 6시간)

 읍내리비석군 → 교동향교 → 화개사 →읍내리 부군당 → 교동읍성(남문) →교동부지(안해루쪽) →철종잠저소(연산군적거지)→ 동진나루 →사신당지→삼도수군통어영전함정박장→화개약수→효자묘→화개산성→화개산봉수대→교동향교원터→교동고읍성→고읍형옥지→경원전지→호두포(신골:연산군적거지)

 <제2코스>

 ※ 제1코스에서 화개약수와 화개산성과 화개산봉수대를 생략할 경우 ( 소요시간 4시간)

 읍내리비석군 → 교동향교→화개사→읍내리부군당→교동읍성(남문)→교동부지→철종잠저소(연산군적거지)→동진나루→사신당→삼도수군통어영전함정박장→망향단→인사리돌미륵상→북진나루→고구저수지→교동고읍성→고읍형옥지→경원전지→호두포(신골:연산군적거지)

 <제3코스>

 ※ 화개산등반을 주로 할 경우

 읍내리비석군→교동향교→패각산포지->화개약수→효자묘→화개산성→화개산정상→화개산봉수대→화개사→대룡리패총

숙 박

연번
업 소 면
전 화 번 호
대 표 자
1
강화여인숙
032-932-4067
황 도 신
2
고구촌
032-933-8668
한 재 중
3
교동파크
032-932-4164
전 종 삼
4
낙원여인숙
032-932-4071
이 삼 수

음 식

연번
업 소 면
전 화 번 호
대 표 자
1
경기식당
032-933-1772
조 재 두
2
교동식당
032-933-5320
서 경 현
3
중국성
032-932-4629
지 용 철

한 식

연번
업 소 면
전 화 번 호
대 표 자
1
고구촌
032-933-8668
한 재 중
2
고향산촌
032-932-4426
이 권 섭
3
대아촌
032-932-7556
이 정 호
4
대풍옥
032-932-4030
장 상 권
5
서경숯불갈비
032-932-5172
김 만 학
6
삼호정
032-932-5272
황 유 순
7
월선식당
032-933-2037
주 상 석
8
해성식당
032-932-4111
전 길 제

 

위로 올라가기

 


교 동 쌀

  - 교동쌀의 특징

 교동은 지리적으로 섬이기 때문에 오염물질이 전혀없고, 축산농가가 없어 맑고 깨끗한 농업용수로 농사를 지어 정말 깨끗한 쌀이 생산되고 있고 주민의 99%가 농사에 의존하여 생활하기 때문에 벼농사 기술은 전국에서도 빠지지 않으며 교동쌀은 최상품으로 쌀의 고유명사가 되다시피 한다.

  - 연간생산량

 상품화할 수 있는 수량은 15,000섬  

  - 농가숫자는 1200농가, 면적은 2700㏊(약81만평)

  - 현재 월선포 선착장에서 교동쌀을 판매하고 있으며 인천에서도 농협매장에 나와있으며, 삼성인터넷쇼핑몰에서도 판매한다.

- 가격
    20kg 46,000원
    10kg 23,500원
    4kg 9,400원

♠쌀 교동특산물
화 방 석

  - 유래

  정확한 연대는 문헌에 나타난 것은 없으나 고려말 교동면 화개사의 스님들이 불공을 드릴 때 앉았던 방석에서 유래된 것으로 교동의 공한지에서 자생하던 인초의 이용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인초를 이용한 방석을 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그후 완초를 사용하고 현재의 화방석으로 승격된 것은 대한제국시대 후기부터 무늬를 가미한 방석제작으로부터이다.

  교동도 출신인 중요무형문화재103호 완초장기능보유자 이상재선생이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 특징

 화방석은 여느 방석과 달리 여름철에 완초가 지닌 습기를 흡수하여주므로 오래 앉아도 피로감을 느끼지 않으며 완자, 봉황, 태극무늬등 고전적 무늬를 수놓아 장식용으로 또는 품위가 뛰어나다.

  - 용도

 화방석은 주로 의자에 많이 이용되고 있고, 고전적 무늬를 수놓은 장식용품으로 활용가치가 매우 높다.

  - 제작과정

 완초를 이용한 제품으로 5∼8월에 왕골을 재배하여 왕골에 염색 등을 하여 전면 중앙에서부터 한올한올 엮어나가며 각종 무늬를 수 놓은 후 배면 중앙에서 마무리하게 되는 것으로 1세트(5장)를 제작하는데 5∼6일의 기일이 걸린다.

  - 상품

 강화 입구에 있는 토산품판매장에서 판매하고 있다.

♠화방석
꽃 삼 합

 

  - 유래

 우리조상들이 음식을 담아 두거나 바느질 광주리로 사용하던 단합에서부터 사용된 것으로 초기에는 종이를 꼬아서 만들던 것을 조선말엽부터 완초를 이용하여 제작하게 된 것으로 꽃삼합으로 완성하게 된 것은 대한제국시대 단합에서 삼합으로 제작되면서부터 무늬를 수놓는등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특징

 세 개의 단합을 크기별로 차등을 둬 한셋트로 제작되고 있으며 완자, 꽃, 태극, 봉황등의 무늬를 수놓은 제품으로 실내장식이나 귀금속 보관용으로 가치가 높다.

  - 용도

 전에는 여인들의 바느질 광주리로 사용되거나 한식과자 등의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현재는 여인들의 귀금속 보관이나 장식용으로 효용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 제작과정

 완초를 이용한 제품으로 세 개의 합을 차등을 두어 한올한올 엮어나가는 것으로 세 개의 합을 한셋트로 제작하고 있다.

  - 상품

 사하마을(읍내리)에 거주하는 부녀자들이 만들고 있는데 강화입구에 있는 강화토산품판매장에서 판매하고 있다.

♠꽃 삼 합
초 립

 옛날 사족·서인 또는 관례를 치른 나이 어린 사람이 쓰던 누런 빛깔의 가는 풀로 결여 만든 관모, 죽사립·모립·죽립 등으로도 불리우는데 이것은 그 재료에 의한 명칭이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선비나 서인이 함께 사용하였으나 점차 관례를 올린 소년이 흑립을 쓸 때까지의 관모로 사용하게 되어 '초립동이'라는 말도 생기게 되었다. 갓이 일반화되면서 패랭이와 함께 상민의 쓰개가 되었는데 별감도 상복에는 황초립에 호랑이 수염장식을 달아 착용하였다. 초립은 패랭이와 비슷하나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원통형의 모옥과 양태로 되어 있으며 정수리는 평평하다. 재료는 주로 강화 교동에서 나는 황색풀을 사용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대구·영천에서도 산출한다고 하였다.

교동의 토산품으로는 민어, 쌀새우, 굴, 숭어, 소금 등은 한말에 이르도록 있었으나 소금, 황석어, 미네굴, 낙지, 무레 등은 1842년 이전에 생산되지 않는 것으로 경기지(京畿志)에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 동국여지승람에는 청해(게의 종류) 그리고 활과 노루 가죽을 진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대에 와서는 교동쌀이라는 고유명사가 되다시피한 비옥한 충적토에서 생산되어 일년 생산양만으로도 몇 년동안 섬안의 주민들을 먹일 수 있다는 좋은 쌀과 새우,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청주벌에서 서식하여 옛날 임금에 진상했다는 숭어와 동어, 왕골로 만드는 꽃 송둥이, 꽃 방석, 꽃 자리 그리고 막걸리가 유명하다. 특히 완초공예품은 성공회를 통해 영국에 까지 수출되었다.
♠ 초 립
위로 올라가기

 

 


부시미산(富示米山)

  교동중학교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양갑리(兩甲里)와 매바지의 사이에 부시미산(富示米山) 또는 말산이라고 불리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조그마한 산이 하나 있다.

  이 산의 머리는 양갑리쪽을 향하여 바라다보고 있으며 꼬리쪽은 매바지쪽에 있다.

  옛날에 양갑리 사람들은 몹시 부지런하고 근면하였다. 그런데 왠일인지 아무리 애를 쓰고 땀을 흘려도 농사는 잘 되지 않았고 계속 흉년이 들어 근근히 조반석죽(朝飯夕粥)으로 가난한 생활을 이어갈 정도이었다.

  그러나 매바지 사람들은 그리 애를 쓰지 않아도 농사는 매년 풍년이 들어 잘살며 모두 기와집을 짓고 호사생활을 하였다. 양갑리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언제나 하늘의 무심함을 원망하면서 장탄식을 지었고 매바지 사람들을 부러워도 하고 때로는 시샘까지 하였다.

♠부 시 미 산

  그러던 어느날 한 노승(老僧)이 시조(施助)를 구하려 양갑리에 찾아들었다. 한 젊은 부인이 시조를 하면서 "우리는 언제나 부지런히 일을 하고 사람들도 모두 착한데 어찌하여 잘 살지 못하고 이처럼 가난하게 살아야 합니까?" 하고 물으며 "스님께서 우리 양갑리 사람들이 잘살 수 있는 비방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그 스님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였다. 노승은 한참동안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있더니 손을 들어 말산을 가르치며 "저 말산의 머리부분을 잘라 버리시오. 저 말이 언제나 양갑리쪽의 곡식은 모두 먹어 버리고 대소변을 매바지에 하니 그 쪽은 땅이 걸어서 농사가 잘 되고 이쪽은 못 사는게 아닙니까?" 하고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말았다. 부인은 마을사람들에게 노승이 남기고 간 이야기를 하자 남자들이 모여 말산의 머리 부분을 잘라내기로 공론을 모았다.

  정작 일을 시작하고 보니 거의가 암석으로 되어 있고 어찌나 굳었는지 많은 시일이 걸려서야 겨우 잘라내었다. 어쨋든 그 후부터 양갑리 사람들은 남부럽지 않게 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머리를 떼어낼 때 목에서 피가 흘렀다고 하며 아직도 자세히 보면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산의 앞에 흩어져 있는 돌은 그때 떼어낸 것이라고 전하여진다.

  또한 이 말산에 대한 전설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하여져 내려오고 있다.

  그전 옛날에 양갑리에서는 어느 집에서나 자식을 낳기만 하면 거의가 여자였으나 모두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상하게도 이 애들은 장성하면서 부모를 돕거나 집안일을 돌보려고는 하지 않고 날이 밝기만 하면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말산에 모여 종일토록 시시닥거리기만 하고 게다가 행위도 방정치 못하였다고 한다. 각가정에서는 아들이 없는 것만 하여도 큰 걱정이고 원통한 일인데 양갑리에서 태어난 딸들은 정숙하지 않고 아무리 어른들이 타이르고 야단을 쳐도 막무가내로 행동이 좋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스님이 시조(施助)를 구하러 이 마을에 찾아 들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이 아들이 없는데다 딸들마저 정숙치 못하여 걱정이라는 말을 하였더니 스님이 혼자말로 중얼거리기를 "저 말산의 생김새가 저렇게 생기고서야 행실이 고을리 있나, 게다가 머리를 이쪽으로 향하고 있으니 저 말형상의 머리를 때려 부수지 않는 한 언제나 화를 면치 못할거야...." 하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모여서 신중히 의논을 하였다. 처음에는 장차의 재앙이 두려워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 중에 한 노인이 내가 앞장을 설 것이니 모두 힘을 합하여 깨뜨려 보자고 하였다. 그 후에 이 노인의 말씀에 따라 이 말상을 깨뜨리기 위하여 많은 시일이 걸리고 모진 고생을 하여 말상을 깨뜨리고 난 후부터는 여자들의 행실도 좋아지고 가정일을 잘 도와 주었으며 또한 아들도 많이 낳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부시미산(富示米山)의 글자를 해석하면 쌀이 넉넉함을 나타내는 산이란 뜻을 말한다. 옛날 양갑리 사람들이 농사가 잘 되지 않아 몹시 가난하게만 살았는데 마을에 마음씨 곱고 아주 착한 사람 하나가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이 매일 같이 꼭두새벽이면 부시미산에 올라가 맑게 개인 하늘에 반짝이는 은하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마을이 남과 같이 잘 살 수 있게 하여 달라도 무릎을 끓고 정성을 다하여 손 모아 빌었다.

  그런데 하루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老人)이 나타나 "빈장산과 부시미산 사이에 얕고 작은 산이 많은데 그 흙과 나무를 전부 치워 버리면 잘 살 것이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노인은 깜짝 놀라 눈을 뜨고 보니 그것은 잠깐 잠이 들었던 꿈속에서의 일임을 알게 되었다. 꿈을 이상히 생각하면서 집에 와서 다시 잠을 자는데 산에서 본 노인이 다시 나타나 같은 이야기를 하며 그대로 하라고 재촉하면서 책망을 하는 것이다. 그 뒤에 말을 사람들에게 꿈에서의 사연을 말하고 동네 사람들이 합심하여 꿈에 본 노인의 말씀대로 하였더니 그 다음해부터는 언제나 해마다 풍년이 들어 잘 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하여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이 전설이 깃든 유서 깊은 부시미산은 현재 전부 파헤쳐지고 곧 흔적도없이 사라져버릴 처지에 놓여있다.

위로 올라가기
문무정(文武井)


  교동면 화개산 남쪽 기슭에는 두 개의 샘이 있었다고 한다. 동쪽에 있는 것은 문정(文井)이요, 서쪽에 있는 것은 무정(武井)이라고 불렀다.

  두 샘에서는 맑고 깨끗한 물이 어찌나 많이 솟았던지 그 주위가 수백 척이나 되었고 그 깊이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 아래는 시내를 이루어 밤낮으로 물이 흘러서 바다로 들어갔다. 주변의 경치도 참으로 아름다워서 절경을 이루었으며 섬안은 물론이요, 원근(遠近) 각지에도 명승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두 샘물이 솟으면서 교동에서는 문관이나 무관이 많이 나왔고 높고 훌륭한 인재가 후세를 이어 생겼다. 어쩌다 한쪽 샘물이 많으면 한쪽은 자연히 줄어 들게 되어 문정(文井)에 물이 넘치면 문관이 많이 나고 무정(武井)에 물이 넘치면 무관이 많이 생겨났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일은 이 샘의 물빛이 멀리 바다 건너에 있는 송가도(松家島)에 까지 비치었는데 이 빛을 받은 송가도의 부녀자들이 풍기가 몹시 문란하게 되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공론한 끝에 수십명의 남자가 교동으로 건너가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샘을 메우자고 하였다.

  그 뒤에 이 샘을 메우려고 수개월을 두고 많은 사람이 애를 썼으나 샘은 더 용솟음칠 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초조와 낙심에 지쳐 걱정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한 노승(老僧)이 이곳을 지나다 그 광경을 보고 까닭을 물었다. 그 중에서 한 사람이 그 사연을 낱낱이 말하였더니 그 노승이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이 "소금 몇포만 놓고 묻으면 될 것인데 공연한 고생을 한다" 고 하였다.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샘은 말라 버리고 다시는 물이 솟지를 않았다. 그로부터 교동에는 문무의 인물이나 귀하고 높은 벼슬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로 송가도에서는 이 노승에 감사하는 뜻으로 사당(祠堂)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여지고 있으나 지금은 그 사당도 없고 문무정(文武井)의 흔적도 간신히 찾을 수 있다.
   또 일설에는 이 샘이 마르게 된데 대하여 이렇게 전하여지고 있다. 이 섬에 사는 한 여인이 이 샘의 경치가 너무도 아름답다고 하여 어느날 그곳에 구경을 갔다가 돌아오자마자 왠일인지 미쳐 버렸다. 그 뒤 두 번째 간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느날 한 노승(老僧)이 이 근처를 지나가며 시조(施助)를 구하였다.
♠문무정

  집집마다 다녀보았으나 모두 허탕이었는데 구석진 곳에 넉넉지도 못하게 사는 한 노파가 이 노승을 반갑게 맞이하여 성심껏 시조(施助)를 하였다. 그 노파는 동네에서 일어난 기이한 일을 이야기하면서 두 여인의 변고를 사실대로 알렸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노승은 한참만에 입을 열고 하는 말이 "문무정(文武井)을 메우시오. 그러면 아무일이 없을 것이요" 하고는 총총히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 뒤로 온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이 샘을 메우려 하였으나 도무지 메워지지가 않았다. 모두 기진맥진하여 한숨만 짓고 있는데 난데없이 전날의 노승(老僧)이 나타나 하는 말이 그렇게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니 장풍으로 발을 엮어 그것으로 샘을 덮고 메우시오 하고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말았다. 그 말을 따라 장풍발을 덮고 흥이 나서 노래를 불러가며 메웠더니 거의 다 끝날 무렵 요란한 소리와 더불어 갑자기 용마(龍馬)가 뛰쳐나와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고 그 후 샘은 영영 말라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교동수영의 황룡

  이는 전설이라기보다는 조선실록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태종 18년 3월 13일)
<황룡(黃龍)이 경기 교동현 수영(喬桐縣水營)의 우물 가운데 나타났다. 수군 첨절제사 윤하(尹夏)가 보고하였다. "수영 앞에 우물이 있는데 선군 등이 물을 긷고자 하여 우물가로 가니 황색 대룡(大龍)이 우물에 가득 차서 보였는데, 허리의 크기가 기둥과 같았습니다. 우물의 둘레가 12척 5촌이요, 길이가 2척 3촌이었습니다.">
우물의 둘레가 12척 5촌이라니까 약 4m정도, 길이가 2척 3촌이라니까 76cm 정도로 추정되는 크기의 용이라 추정되는데 용은 상상동물로서 낙타의 머리에 사슴의 뿔, 토끼의 눈, 암소의 귀, 뱀의 몸, 개구리 배, 잉어의 비늘, 호랑이의 발바닥으로 이루어졌으며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고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비와 바람을 일으킨다고 여겨져 왔다.
이 사실을 황규열 선생은 실록의 작성기법상 어떤 연도는 정사(政事)를 중심으로 어떤 연도는 재해나 기이한 일을 중심으로 작성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며 황룡이 아니더라도 어떤 특이한 짐승이 수영의 우물에 나타난 것은 사실일 것이라 말한다.
♠ 교동부지 앞의 우물터

  

  황규열 선생은 교동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동수영(喬桐水營)은 직할부대 성격인 교동양영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교동수영이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월곶진(月串鎭)에 있다고 기록했다. 실록에는 교동수영안에 있는 샘물에서 황룡(黃龍)이 발견돼 수사(水使)가 임금에게 이 놀라운 사실을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또 실록에 당시 서울에서 교동수영(喬桐水營)으로 오는 배가 정박하는 곳을 아랑포라고 기록했고 황룡이 발견된 샘이 있는 포구의 이름이 아랑포이며 이 아랑포에 교동수영의 직할부대인 교동양영(喬桐梁營)이 있었다. 아랑포가 어디에 있는지, 지금은 그곳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안타깝게도 모른다. 다시말해 자금의 봉소리, 고구리 부근인지 아니면 읍내리 일대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되는데 읍내리쪽에 더 무게를 들 수 있다."

  이때의 우물인가는 알수 없지만 교동 수영 앞에는 옛우물이 남아있다.

 

양갑리의 느티나무
  
양갑리의 느티나무는 마을지정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수령은 약 400년이다. 그간 오랜 세월동안 불행히도 1919년 음력7월(기미년) 태풍에 막대한 피해를 입어 둘레 0.5m 되는 가지들이 전부 부러져 나갔으나 그 후 다시 소생하여 별로 손색이 없이 자라 노령수에도 옛모습을 되찾아 잘 자라고 있다. 옛날부터 미풍양속에 따라 매년 5월 단오절이면 마을 청년들이 이 나무 중간가지에다가 넓다랗게 그네를 매고 부녀자들의 즐거운 흥취를 한층 더 북돋아 주기도 하고 여름철에는 마을 남녀 노소들이 이나무 그늘 아래 한데 모여 매년 삼복더위를 식히는 피서처로 자연 경관을 즐기고 있다.

한가지 이 나무의 신비로운 전설은 봄에 잎이 일제히 피었다가 가을에 잎이 일제히 떨어지면 명년 농사가 풍작을 이루고 가을에 남은 잎이 봄까지 떨어지지 않으면 그해 농사가 흉작을 이룬다는 전설에 모두 그렇다고 유래되었으니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희한한 조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요즘 와서는 과학영농방법과 지하수 개발, 저수지 사업이 완공되면서부터는 위의 전설이 없어져 가고 있다.
♠양갑리의 느티나무

  또한 이 나무터에 대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양갑리내에 있어 산세나 지세로 보아 가장 좋은 자리에 위치하여서 마을에 부자가 없다는 비결도 전해내려오고 있다. 또 이곳 느티나무에서 약 10m 거리 동남간방에 현재 작은 느티나무 1목이 성장하는데 위의 나무와 형태가 똑같이 자라는 것을 볼 때 과연 뿌리없는 나무가 없듯이 인간과 같이 대를 이어주는 것같기도 할뿐더러 실로 이 느티나무 2개의 위치나 경치로 보아 전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외래객들의 각광도 받고 있다.

위로 올라가기
청 주 펄

  청주펄은 연백과 교동사이의 바다를 말하는데 옛날에는 육지였다고 한다. 그 청주펄에 소재한 동네는 아주 잘 살았다고 한다. 얼마나 잘살았는가는 동네에 다리를 놓는데 놋그릇으로 놓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느때 도사가 공양을 다니는데 인심이 나빠 그 동네남자가 쇠거름을 퍼주면서 "이거나 가지고 가라" 고 했다고 한다. 옆집에 가니까 그 집 며느리가 그냥 쌀을 퍼주면서 "죄송하게 되었다" 고 말했다. 도사가 며느리에게 "언젠가 하여간 우물에 피가 난다. 그 말을 듣거든 북쪽으로 향해 가는데 그 대신 뒤를 돌아보지 말고 가라" 고 말했다. 그 후 그 동네에서 개를 잡아먹었는데 개피를 우물에 집어넣어 우물에 피가 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며느리는 도사가 한 얘기를 듣고 동네를 떠나는데 아무래도 궁금하니까 뒤돌아보고 말았다. 그러니까 동네는 전부 바다로 변하고 그 대신 여자도 붙어 버렸다. 그래서 연백 고미포쪽에 할미당이라는 사당이 새겼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그 바다를 지날때는 물갈리는 소리, 놋다리에 물갈리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이때 살아난 사람은 노파 한사람으로 연백땅 고미포에 이르러 그곳에서 살았다. 후에 사람들이 당집을 짓고 그 노파를 제사지내는 곳이 "할미당"이라고 한다는 전설도 전한다.

  청주펄에는 숭어가 많이 살아서 숭어 천지라고 주민들은 말한다.

♠청 주 펄
위로 올라가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본토성(土姓)이 셋인데 고(高),인(印),전(田),안(安)등을 들었으며 안씨는 속성(續姓)이라하여 나중에 들어 왔음을 밝히고 있다.

교동지에 의하면 황(창원黃),한(청주韓),전(안동全),권(안동權),방(온양方), 이(전주李)씨등을 대성(大姓)으로 꼽고 있다.


♠봉소리 느티나무
교동 인씨

교동인씨(印氏)는 중국 진(晉)나라의 서(瑞)가 신라 유례왕때 들어와 아찬(阿)의 벼슬을 하고 그의 후손 빈이 고려 인종 때 한림학사, 문하시사(門下侍史)를 지내고 교동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그 자손이 교동으로 관적하게 되었다.

빈이 교동인씨의 시조로 되어왔으나 《교동인씨세보》(1936)에는 빈의 후손 당이 시조(1세)로 되어 있다.

당은 공민왕 때 서북면병마사로서 압록강 서쪽의 파사부(婆娑府)등 삼참(三站)을 공략하고 개척한 공으로 참지정사에 올랐다.

조선시대에 교동인씨 중 유일한 문과급제자는 석보(錫輔)로, 고종 때 경과별시에 급제했으며 문명이 높았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1만 791명으로 258성씨 중 87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4,280가구로 2,786위였다.

집성촌은 충남당진군,예산군등에 분포하고 있다.

1985년의 국세조사에서는 17,556명이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교동 전씨

전씨(田氏)의 본관은 문헌에 남양, 담양을 비롯하여 159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이중 연원이 가장 오래된 것은 영광전씨 로서 시조는 고려조 개국공신 전종회〔田宗會〕이다.

다음은 고려때 조산대부, 신호위대장군을 지낸 전총문〔田寵文〕을 시조로 하는 태산전씨 이며,교동전씨는 고려말 정용산원을 지낸 전성무〔田成茂〕를 시조로 하는데, 그의 딸이 조선개국공신이자 옥천부원군인 유창에게 출가하였다.

 

교동 뇌씨

중국에서 계출된 성씨로 전하고 있으나 상계를 고증할 문헌이 없다. 우리나라 뇌씨(雷氏)는 청나라 덕종때 사람으로 형부시랑을 지낸 뇌이성(雷以誠 : 자는 학고)의 후예이며, 선조가 조선조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화를 입고 교동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살았으나 후손들이 황해도로 이주하였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황해도 수안(遂安)·황주(黃州) 등지에 30여 가구가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은 교동사(1995년: 황규열 저)에 의거, 대성(大姓) 을 소개해 본다.

 

권씨(權氏)

본관이 안동. 동산리와 삼선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휘(諱) 부(阜)의 후손(後孫)인 통정대부(通政大夫) 처중(處中)이 들어 와 현재 13세가 살고 있다.

 

방씨(方氏)

본관이 온양. 동산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호(號)가 월봉(月峰)인 휘(諱)치정(致正)이 들어와 살면서 현재 십수세(十數世)가 살고 있다.

대룡리에도 거주한다.

 

전씨(全氏)

본관이 안동. 봉소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시호(諡號)가 충렬공(忠烈公)인 휘(諱)이갑(以甲)의 후손이자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휘(諱) 사안(思安)이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자 처음 들어온 이래 현재 20여세가 살고 있다.


한씨(韓氏)

본관이 청주 봉소리 거주하고 있으며 시호(諡號)가 문경공(文敬公) 휘(諱) 수(脩)의 후손(後孫)인 도사(都事)를 지낸 휘(諱) 안국(安國)이 들어와 살면서 현재 18세가 살고 있다. 또 일파는 무학리를 비롯하여 교동 각지에 살고 있다.

 

황씨(黃氏)

본관이 창원. 인사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회산군(檜山君) 휘(諱) 석기(石奇)의 증손(曾孫)인 군수를 지낸 휘(諱) 의헌(義軒)이 들어와 살면서 현재 20세가 살고 있다.

또 고구리에 거주하는 일파는 회산군(檜山君) 휘(諱) 치윈(致源)이 들어와 살면서 현재 10세가 살고 있다.

난정리에도 거주하고 있다.

 

이씨(李氏)

본관(本貫)이 전주(全州), 봉소리(봉소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효령대군 증손 고양부정(高陽副正) 휘(諱) 인(仁)의 아들 휘(諱) 윤정(允貞)이 어머니 평산(平山) 신씨(申氏)의 품에 안겨 아버지 고양부정(高陽副正)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찬탈(王位簒奪)에 불만을 품고 신변에 위해를 느끼자 강화 양도면 조산리에 모자를 피신 시키고 자신은 행방을 감추었다. 휘(諱) 윤정(允貞)은 아들을 둘 두어 맏아들 휘(諱) 경수(敬守)는 조산리에 종현부락에 정착하여 전주이씨의 교동 입향조(入鄕祖)이니, 지금 교동에 거주하는 전주이씨는 대게 효령대군으로 부터 20대손, 입향조로 부터 15대손이다.

위로 올라가기

 


고구리 농악

교동의 독특한 민속으로는 고구리 농악과 부군당제사가 있으나 실제로 지금은 그 명맥을 찾기 힘들다.

농악의 리듬은 가리 리듬이 주가 되는데 꽹가리 장단을 쇠가락이라 부르며, 꽹가리와 장구는 섬세한 가락을 치고, 북은 장구 장단을, 징은 꽹가리 장단 중에 중요한 부분을 연주해서 농악 가락을 힘차게 흥을 돋구어 주는 놀이이다. 원래 농악은 중국 상고 지리서인 산해경과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고조선때부터 농악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 때까지 계속되다가 조선시대에 유교사상으로 농악이 금지되고 민속악사에 과거금지까지 시키기도 했었다 한다. 고종2년(1865)에 경복궁 중건시 농악을 하여 위안과 작업 능률을 올리도록 했으며, 고종 39년(1902)원각사에서 농민계몽의 뜻으로 놀이를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교동 사람들은 해방전부터 황해도 연백 땅을 왕래하면서 6.25후 연백 사람이 교동에 거주하면서 연백놀이가 교동 전통 농악에 가미된 놀이로 돌무 놀이가 너무 단조로와 복구 놀이까지 포함시켜 16단계로 발전시켰다. 이 놀이는 인원이 30명으로 구성되어 준비, 입장, 인사, 마당놀이, 씨고르기, 씨뿌리기, 콩심기, 모찌기, 모내기 , 김매기, 가마니짜기, 벼베기, 탈곡, 벼불리기, 풍년놀이, 마침놀이로 끝나는 교동 특유의 농악이다.

♠고구리 농악대


부군당제

고읍현터에 있는 물푸레나무 아래에서 열리는 제사이다. 이 마을에서는 3년에 한번씩 3월초에 당제를 모시고 있다. 당제 며칠전에 마을 대동총회를 열어 제일(祭日)을 택하고 제관(祭官), 제비(祭費), 당굿 칠 무당등을 선정하며, 선정된 사람은 특별한 유고가 없는 한 이에 따라야 한다. 제관은 제주 부부와 집사1명이고, 제일이 정해지면 이틀전에 제주와 20세 이상 성년 남자 중 생기복덩이 좋은 몇 사람이 제물과 함께 복슬매산에 올라가 이틀 밤을 지내고 당제를 모신다. 제주(祭酒)는 3일전에 제장에 파묻어 두며 돼지는 생으로 몰고가 중턱에 다달으면 제발로 막 뛰어오르게 한다. 이것을 신이 부른다고 한다.

새벽에 당제를 모시고 나면 신당(新黨)굿을 한다. 신당굿에 쓸 백설기 시루떡은 3일전에 부녀자들이 담그는데, 굿을 할 때는 모신 신인 부군신, 칠성신, 산신, 삽모당신, 용왕신의 떡을 별개로 찐다. 굿을 할 만신은 목욕재개를 한다. 제관과 만신 산에서 내려온 남자들은 저수지, 중머리, 독고개 마을을 지나며 대동굿을 치고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빈다.

♠읍내리 부군당의 남근목
위로 올라가기

 

- '교동' 홈(http://www.gyodong.net/)에서 가져옴 -

 

[문화생태탐방로]서울서 가까운 탐방로, 강화 둘레길   (0) 2009.12.11
강화도, 생명의 섬을 걷다 - 언니들과 함께한 ‘게으른’ 산책 / 한겨레21  (0) 2009.12.11
[강화나들길] 강화나들길 5구간 이어걷기를 위한 자료 모음(강화관광안내도)  (0) 2009.11.23
강화 올레 - 이리 걷고 저리 걸어도 좋은 가을 강화를 걷다  (0) 2009.11.20
과거의 향수 묻어나는 ‘강화 나들길’  (0) 2009.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