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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경기 도보후기☞/☆ 강화도의 산&길

[문화생태탐방로]서울서 가까운 탐방로, 강화 둘레길

by 맥가이버 Macgyver 2009.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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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태탐방로]서울서 가까운 탐방로, 강화 둘레길

경향닷컴, 자료=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
 
섬 안에서 곰삭은 시간은 이야기가 되어...

강화도는 한 바퀴를 돌아도 99KM, 차로 달리면 1시간30분 남짓한 거리이다.
다리만 건너면 뭍으로 나갈 수 있어 뒤에 붙은 도(島)자가 괜스럽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답게 볼 것, 먹을 것 많은 곳이다. 서울하고 지척이라 주말이면 가슴 한켠이 꽉 막힌 도시 사람들이 바다 보러 가자며 나서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1시간. 한강과 임진강이 끝나는 자리에서 강화도는 시작된다. 차로 달려가는 동안 짠 내음은 진해지고 사람 많은 거리는 어느새 갯벌로, 양식장으로 변한다. 배를 기다려 건너던 불편함은 옛말, 시원하게 섬으로 향하는 강화대교 덕분에 서해의 풍경과 바람은 고스란히 차창을 통해 느껴진다. 강화도는 본디 김포반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파도와 바람이 오가며 섬이 되었다가 한강과 임진강이 실어다 준 모래 덕에 다시 뭍이 됐다. 그리고 해협이 만들어지며 섬이 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물결에 따라 섬과 뭍을 오간 태생, 사연 많은 섬 강화도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그 역사의 흔적들은 섬 안에서 돌고 돌아 길마다 이야기를 남겼다.

고려시대 흔적이 길잡이가 되려나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섬이구나’ 느낄 새도 없이 도보여행의 출발지에 도착한다. 강화 나들길의 정식 출발지는 용흥궁이다. 색색의 슬레이트 지붕 사이로 보이는 수더분한 기와집이 독특하다. ‘궁’이라고 하기에는 소박하다 싶지만, 알고 보면 철종이 왕이 되기 전 살던 곳이다. 원래는 초가삼간이었으나 철종이 왕위에 오른 후 강화유수가 그 터에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용흥궁을 둘러본 후 북쪽으로 조금만 걷는다. 오랜만에 걷는 사람이라면 한 두 차례 숨을 몰아쉬어야 오를 수 있는 언덕에 성공회성당이있다. 한국 최초의 성당이라는 것보다 마치 사찰처럼 생긴 성당의 모양새가 더욱 신기하다. 팔작지붕에 '천주성전(天主聖殿)'이라고 적힌 현판, 전통 범종처럼 생긴 종이 인상적이다.
 

온수리 성공회 성당 (자료=한국관광공사)


용흥궁과 성공회성당을 지나 본격적으로 강화해협을 따라 고려시대의 흔적을 좇는다. 1코스는 30km. 모두 걷는데 9시간 정도 소요된다. 2개의 구간으로 나눠져 있으니 모두 걷기 힘들다면 구간별로 나눠 걷는 것도 좋다. 각각 13km, 17km로 나눠진 구간은 4~5시간밖에 걸리지 않아 아이들도 쉽게 따라 걸을 수 있다.

성공회성당을 나와 쉬엄쉬엄 걷다 보면 어느새 고려궁지 앞이다. 바다를 끼고 있어 방어하기 좋은 지형인지라, 고려나 조선에 전쟁이 나면 강화도는 늘 피난처가 되었다. 고려궁지는 강화도가 39년이나 고려왕조의 도읍 역할을 했던 흔적. 700년 된 은행나무만이 흔적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은행나무를 지나면 명성황후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걱정하며 지었다는 관우 사당 북관제묘가 나온다. 이쯤 되면 평소 걷는 것이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허벅지가 뻐근하게 당겨온다. 올망졸망 한옥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걷는다. 마을 사람들의 인사가 살갑고, 사람 사는 냄새 물씬 풍기는 집들 덕분에 지친 다리도 잊혀진다. 한옥마을 길을 빠져나가자 강화향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새로 복원한 지 얼마 안 되어 깊은 정취는 없지만 옛 학교를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은수물을 지나 북산 오솔길을 오르면 강화산성의 북문이다. 북문에 이르면 북녘 땅이 어른어른하게 보일 정도이다. 예전에는 귀 밝은 이들이 대남방송도 들린다고 얘기하던 곳이다. 산성을 올라 숨도 차고 목도 마를 여행자를 위한 배려인지, 약수터로 들어서는 길이 시작된다. 오읍약수터, 강화로 피난 온 고려 사람들이 이곳 약수터에 앉아 바다 건너 개성 땅을 바라보며 목을 놓아 울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 그날 하늘과 땅, 신, 왕, 백성이 울었다 하여 오읍(五泣)이라 붙여진 이름과는 달리 물맛은 달고 시원하다. 4월이면 강화산성으로 이어진 길이 벚꽃으로 뒤덮여 아름답다.
 

강화산성 (자료=한국관광공사)


찬 약수로 여행자는 몸을 추스른다. 물통이 비었다면 앞으로의 여정을 위해 가득 약수를 담는다. 약수터를 지나 마을로 내려오면 대월초등학교가 나타난다. 이곳부터는 아스팔트 길. 황영장군묘를 거쳐 바다내음 오는 곳까지 부지런히 걸어간다. 얼굴로 짭짤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연미정이 자리한다. 작은 정자는 강화해협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앉아 쉬어갈 이를 기다린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했다 한 줄기는 서해로, 한 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흘러 드는 모습이 날렵하게 빠진 제비꼬리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강화 8경 중 하나, 더는 무슨 말이 필요할까. 한 눈에 담기 벅찰 정도의 광경, 돌아서 걷다 보면 그 아쉬움으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1코스의 반. 앞으로 만날 강화도의 다른 모습을 위로 삼아 여행을 계속한다. 강화역사관에 도착할 때까지 큰 힘 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내리막길이다. 걸음마다 따라오는 서해를 길벗 삼아 걷는다. 다시금 강화대교가 보이는 자리, 그곳에 강화역사관이있다.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고인돌,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를 지냈던 참성단,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외세에의 저항. 알차게 모아 놓은 유물과 자료들은 오랜 강화도의 역사를 한 눈에 보여준다. 밟고 있는 강화도의 땅, 올려다보고 있는 강화도의 하늘이 있기까지 쌓여온 이야기들이 도보여행에 의미를 더한다.
 

강화역사관 (자료=한국관광공사)


역사관에서 나와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 코스가 나들길 1코스의 두 번째 구간이다. 강화도 해안가에는 5개의 진(鎭)과 7개의 보(堡), 53개의 돈대(墩臺)가 있는데, 진은 오늘날로 치면 대대병력이 주둔하던 곳이고, 보는 중대병력쯤 머물렀던 곳이다. 진이나 보 사이에 설치된 방어시설이 돈대이다. 용진진은 그 중 하나. 밭과 민가 사이에 자리한 요새는 후세들의 손에 의해 복원되어 여전히 늠름하다. 용진진에서 1km 정도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면 용당돈대가 나온다. 성벽에 올라 앞으로 남은 거리를 가늠해본다. 오두돈대와 광성보가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이 보인다.

돈대에서 돈대로 이어지는 고려시대 외성은 흙길처럼 흔적이 남아 길을 안내한다. 외성을 따라 남쪽으로 1km, 화도돈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터만 남아 있다지만 해안도로에 바짝 붙어 있어 어느 돈대보다 가까이서 바다가 보인다. 여기서 20분 정도 슬슬 걸어가면 오두돈대의 모습이 보인다. 자라가 바다를 향해 머리를 내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오두(鰲頭)라고 한단다. 화도돈대와 오두돈대 모두 광성보에 속한 요새이다. 광성보는 오두돈대로부터 2.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강화도 요새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잘 꾸며진 곳으로 꼽힌다. 1871년 신미양요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지만 그 흔적은 전적비와 무명용사들의 무덤으로 남아 있다. 현재는 고즈넉한 공원이 되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늘과 산책로, 조용한 사색의 시간을 제공한다.

초지진 (자료=한국관광공사)


무려 30km 가까운 거리를 걸었으니 다리 근육들은 이제 그만 쉬자고 아우성일 테다. 금방이다. 3km 정도만 더 가면 1코스의 종착지인 온수천이다. 온수천 지척에 초지진이 자리한다. 초지진 성벽에는 100년 전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성벽에 기대 내려다 보는 야경은 1코스의 대미를 장식한다. 참고로 광성보에서 바다와 나란히 붙은 자전거도로를 이용하면 1코스의 마지막은 초지진이 아니라 온수리 시외버스터미널이 된다.

섬 안 쪽으로 스며들 듯 걸어가네

1906년, 나라를 잃은 설움에 과거급제의 기쁨도 잠시였다. 선비는 행장을 차리고 길을 나섰다. 고려시대부터 수많은 외침을 받았지만 늘 꿋꿋하게 이겨낸 자신의 고향 강화도를 일주하기 위해서였다. 강화도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마음 깊이 위로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선비는 1년에 걸쳐 400km를 걸었고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났다. 그 여정은 256수의 칠언절구로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심도기행’. 심도(沁都)란 강화도를 이르는 또 다른 말이다. 선비가 남긴 글들은 길로 복원되어 여행자를 설레게 한다.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숨어 있던 옛길은 온수사거리에서 시작된다. 온수사거리에서 이정표가 300m 앞에 전등사가 있음을 알린다. 찻길을 따라 가볍게 걷다 보면 전등사로 접어드는 길이다. 전등사는 381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창건된 사찰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이 소수림왕 때니, 전등사를 불교의 시원지라 부를 만하다. 정족산이 사찰을 감싸고 있는 모양이 아늑하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병인양요 때의 상처를 볼 수 있다. 대웅전 기둥에는 그 당시의 치열했던 상처가 아로새겨져 있다. 전등사를 둘러보았으면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을 따라 걷는다. 삼랑성은 정족산성이라고도 부르는데, 전등사는 이 성곽 안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된 사고가 이곳에 있었다.

삼랑성 밖으로 나간다. 우거진 나무의 그늘과 흙길 덕분에 걷는 길이 편안하다. 산길이 끝나고 마을, 이 마을에서 99칸의 옛 저택 우일각을 볼 수 있다. 외관이 반질한 것이, 알고 보니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는 고택이다. 안을 볼 수 없어 겉만 바라보고 발걸음을 돌린다. 연밭이 나오고 바로 보이는 것이 온수리 성공회성당이다. 용흥궁 옆에서 보았던 성공회성당처럼 한식과 양식이 묘하게 공존한다. 그 옆으로 3층짜리 새로운 성당 건물도 보인다. 성당 앞에서 되돌아 나와 길을 건넌다. 외길 따라 단조롭게 길이 이어진다 싶더니 길 끝으로 물 내음이 비친다.

물을 만나는 곳, 이 길을 걷는 여행자의 발걸음은 좀 전보다 빨라질 수밖에 없다. 뚝방을 따라 걸으면 수면 위로 숲이 아른거린다. 저수지는 어느새 논두렁 밭이랑으로 변한다. 이 구간에는 왕릉과 고려시대 관료들의 무덤이 많아 ‘하늘가는 길’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첫 번째로 마주치는 왕릉은 곤릉. 고려 제22대 왕 강종의 비인 원덕태후의 능이다. 작은 숲 사이에 오도카니 앉은 능에서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조금은 뻐근해진 다리를 잠시 쉬었다가 숲을 지난다. 농가와 밭, 작은 개울을 건너 다시금 왕릉을 품은 숲에 도달한다. 이곳에는 고려 제21대 왕 희종이 잠
들어 있는 석릉이 있다.
 

곤릉가는 길 (자료=한국관광공사)


최충헌의 무소불위 권력을 제압하지 못하고 개성이 아닌 강화까지 유배를 와 묻혔다는 이야기가 능에 안타까움을 더한다. 석릉부터 가릉에 이르는 길은 하늘을 보기 힘들 정도로 우거진 숲을 지나야 한다. 언제부터 쌓였을지 모를 낙엽을 밟으면 푹신한 것이 여태껏 쌓였던 발바닥의 피로마저 잊혀진다. 가릉 주변은 웃자란 나무들과 낙엽들로 쉬어가기 좋은 천연쉼터이다. 여행자들은 바닥에 앉아 간식을 먹거나 한담을 나눈다. 죽은 이들의 안식처는 산 자들에게 유용한 쉼터가 되기도 한다. 엄숙했을 봉분들은 이제 고즈넉한 풍경을 만들고 주위로는 자박자박 흙길을 밟는 소리만 들린다.

가릉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능내리 석실분이 있다. 능내리 석실분은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봤던 능들과 사뭇 다르다. 또한 누구의 무덤이었는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전혀 밝혀지지 않아 궁금증을 더한다. 그저 고려시대 관료의 분묘로 추정할 뿐이다

‘하늘가는 길’을 빠져 나오면 작은 마을길이다. 삶과 죽음이 지척에 있음인지, 마을에선 벼가 익고 밭이 무성하다. 조용한 마을길을 지나면 시골마을의 정겨움이 느껴진다. 때가 되면 밥 하는 냄새와 개 짖는 소리가 들려 그 운치를 더하기도 한다. 가릉을 지나온 지 5분, 오른편으로 정제두묘가 보인다. 앞에는 아버지 정상징의 묘가, 뒤로는 강화 양명학파를 일군 정제두의 묘가 자리한다.

정제두묘는 심도기행길이 딱 절반에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두 개의 봉분을 지나 하우고개를 넘는다. 길쭉한 은행나무들이 길가 그늘을 만든다. 가을이 되면 황금색으로 빛날 나무가 그려진다. 완만한 고갯길이지만 10km 정도의 길을 걸어온 여행자들의 종아리부터 허벅지는 뻐근하게 울린다. ‘좀 쉬어 가야겠다’ 생각하는 여행자 앞에 하우약수터는 좋은 쉼터가 된다. 마시면 발끝까지 청량해지는 물과 발을 뻗을 수 있는 쉼터, 그리고 깨끗한 화장실이 있다. 약수터에서 쉬었다가 출발하면 다시금 발걸음은 가벼워진다. 이건창묘까지 한달음이다. 서양, 그리고 일본의 침략으로 개화되어가는 조선의 모습에 안타까웠을 학자는 이곳에 잠들어있다. 그의 묘 앞을 지나며 여행자들의 발자국 소리가 잦아드는 것은 그런 그의 안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조용히 그곳을 빠져 나와 바닷바람을 따라가니 건평나루가 나온다. 이곳에서부터 종착지인 외포리 터미널까지 매끈한 자전거도로가 나 있다. 신나게 페달을 밟아 바닷바람을 품에 안아도 좋고, 천천히 걸음마다 서해의 잔잔함을 담아도 좋다. 지금부터는 작은 어선과 넘실거리는 물결이 평화로운 어촌이다. 건평나루를 지나 나타나는 건평쉼터에서 한숨 돌리고 남은 여정을 재촉한다.

해안도로는 건평돈대로 이어진다. 1679년 축조된 이 돈대는 다른 돈대들과는 달리 전쟁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단지 흘러간 세월 때문인지 섬을 지키던 견고함은 어느 정도 사라졌지만, 보존상태는 좋은 편이다. 건평돈대를 뒤로 하고 정포동길을 지나 새우젓 시장으로 들어선다. 때만 잘 맞추면 강화 연안에서 잡은 싱싱한 새우로 만든 새우젓 냄새가 구수하다. 10월에서 11월이 새우젓 때인데, 그때가 아니더라도 강화 앞 바다에서 잡아 올린 해산물들이 있다. 바다를 보며 회 한 접시 먹으면 그 맛이 일품. 5월에서 6월 사이에는 알이 꽉 찬 밴댕이도 맛 볼 수 있다.

시장이라지만 바다를 배경으로 한적하게 자리하고 있어 왁자한 장과는 거리가 멀다. 천천히 시장을 둘러보고 가방에 여유가 있다면 저녁식사를 위해 작은 젓갈 하나 구입하는 것도 좋다. 시장을 뒤로 하면 앞으로는 석모도가 어렴풋이 보인다. 1.5km 뱃길이 한없이 가깝게 느껴질 정도이다. 망양돈대에 오르면 석모도는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강화도의 남쪽 바다를 지키려는 듯 아직까지 앙 다문 벽돌 틈새가 견고하다.
 

외포리 포구 (자료=한국관광공사)

2코스의 여정은 외포리터미널에서 끝이 난다. 섬 곳곳에 스며들 듯 난 작은 길들은 아직도 진행형. 강화도 나들길은 여행자들의 발길에 따라, 마음에 따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오솔길과 이야기들을 품게 된다.

여행정보

강화 나들길 별미
▷ 갯벌장어: 강화도의 갯벌은 세계 3대 갯벌 중 하나로 손꼽히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할 정도. 이곳에서 자란 갯벌장어는 그 살이 쫀득하고 고소하기 때문에 강화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꼭 먹고 가는 별미이다. 비린내는 물론 흙냄새도 전혀 없기 때문에 양념구이보다는 소금을 살살 뿌려 구운 소금구이가 제격이다.

▷ 강화인삼: 한국은 인삼이 자라기에 적합한 여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고려시대부터 재배해온 고려인삼은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강화도는 고려인삼의 원산지. 이곳에서 만병통치약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몸에 좋은 강화인삼을 맛보지 않을 수 없다. 도보여행 후 강화인삼 잔뜩 넣은 음식 먹으면 그것이 바로 웰빙이다.

자세한 정보가 필요할 때
• 강화도 시민연대, 032-933-6223
• 강화 나들길 추진위원회, 032-933-0110
• 공식카페 ‘강화 나들길’ http://cafe.daum.net/flowalongtheroad
• 카페 ‘강화의 아름다운 도보여행길’ http://cafe.daum.net/vita-walk
• 강화군청 문화관광사이트 http://tour.ganghwa.incheon.kr

관광안내소
숙박과 맛집에 대해 궁금하다면 관광안내소를 이용한다.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역사관 관광안내소 032-932-5464
고인돌 관광안내소 032-933-3624
터미널 관광안내소 032-930-3515
외포리 관광안내소 032-934-5565
초지진 관광안내소 032-937-9365

〈경향닷컴, 자료=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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