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룡리 해안쪽 들을 조개맨들이라하고 현재 논둑과 갈아엎은 논바닥에 대형 대합의 패각과 소라, 굴껍질이 흩어져 있는 속에 서울 풍납동식 경질 무문토기 조각과 승석문, 타형문의 원삼국시대 토기조각이 발견되었다.
한편 2001.6.30에 방영된 KBSTV의 역사스페셜에는 여기에서 발견된 조개껍질을 탄소연대책정을 해본 결과 1200년전인 통일신라시대에 형성된 것 임이 밝혀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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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룡리 조개맨들의 흔적 |
화개산 중턱 이상의 고지대 곳곳에 조개맨들 패총과 같은 대합 패각과 소라, 굴껍질이 흩어져 있어 주민들은 지각변동에 의한 해안선의 상승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반해 무문토기 조각과 승석문, 타형문의 원삼국시대 토기 조각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피난 또는 국방상의 이유로 산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버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우리얼답사팀은 2000.4.13. 화개산산정(좌표 석모도상주산 151,교동중고등학교운동장서쪽끝295 지점)부근에서 패각산포지를 발견한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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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산정 부근의 패각산포지 |
저수지 공사 중에 길이 39센티미터 크기의 고래 뼈와 토탄층에서 무문회도편과 돌도끼, 돌화살촉, 쇠화살촉 등이 1962년 서울대 답사팀에 의해 수집보고 되었다. 이밖에도 지석초등학교뒷산에서 청자가 발굴되었다는 얘기도 있고 신골에도 청자가 많이 나왔다는 얘기도 들리는데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나선화학예관은 청자 중 교동에서 출토된것을 최고로 여긴다고 말하고 있지만 전해지는 것은 거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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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저수지 |
♠청자 발굴 추정터(지석초등학교 뒷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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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화살톡과 돌도깨 |
♠청자병 |
♠청동발 및 숟가락, 수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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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명류
◎ 고 대 석 기
합인석부 1점
유경석족 1점
◎ 고 려 시 대
청동발과 청동병 각1점
무유도병 1점
청동으로 만든 숟가락과 젓가락 2벌
청자완 1점
청자대접 2점
청자병 1점
◎ 조 선 시 대
분청단지 1점
백자잔 1벌(받침포함)
백자병 3개
▲ 동전류
개원통보 서기 713-741 주조 중국화폐 (당 현종)
태평통보 서기 976-983 주조 중국화폐 (송 태종)
함평원보 서기 998-1003 주조 중국화폐 (송 건종)
상부원보 서기 1008-1016 주조 중국화폐 -
천성원보 서기 1023-1031 주조 중국화폐(송 인종)
희령원보 서기 1068-1077 주조 중국화폐(송 신종)
원풍통보 서기 1078-1085 주조 중국화폐(송 신종)
원우통보 서기 1086-1093 주조 중국화폐(송 철종)
원부통보 서기 1098-1100 주조 중국화폐(송 철종)
대관통보 서기 1107-1110 주조 중국화폐(송 휘종)
정화통보 서기 1111-1117 주조 중국화폐(송 희종)
함순원보 서기 1265-1274 주조 중국화폐(송 도종)
건융통보 서기 1736-1795 주조 중국화폐(청 고종)
도광통보 서기 1821-1850 주조 중국화폐(청 선종)
광서통보 서기 1875-1908 주조 중국화폐(청 덕종)
해동중보 서기 1102 주조 한국화폐 (숙종 7년)
조선통보 서기 1423 주조 한국화폐 (세종 5년)
상평통보 서기 1678-1866 주조 한국화폐 (8개: 숙종4년-고종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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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중국화폐를 시대별로 살펴보겠다.
개원통보는 당 현종대에 발행한 것이다. 개원은 연호이니 주화는 서기 713년에서 741년까지 사이에 주조된 것이다.
태평통보(송 태종976-982), 함평원보(송 진종998-1003), 천성원보(송 인종 1023-1031) 희령원보(송 신종1068-1077), 원풍통(송 신종1078-1085), 원우통보(송 철종1081-1093), 원부통보(송 철종1098-1110), 대관통보(송 휘종1107-1117) 등은 북송시대의 주화인데, 남송시대의 주화는 단1개 함순원보(송 도종1265-1274)가 남아있다.
청대주화는 건륭통보(청 고종1736-1795) 도광통보(청 의종1821-1850) 광서통보(청 덕종1875-1908)가 있다.
이상 열거된 것은 판독이 가능한 것이다. 청대것은 전면과 이면문자도 약간 읽을수 있으나 송대것은 이면문자는 보이지 않으며 전면문자도 부분적으로 알아볼수 없다.
우리나라 주화로는 고려숙종(1054-1105)대 해동중보가 나왔는데 귀중한 것이다.
고려사에 숙종7년(1102) 12월 해동중보 15만관을 주조하여 문무양반, 군인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세종5년(1423)에 주조된 조선통보 역시 희귀한 것이다. 상평통보는 10여개가 나왔는데 상평통보는 조선 숙종4년(1678)에 주조한 것이 처음이며 영조7년(1731)9월에 다시 주조허가를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몇번 금지조치를 받았는데 상평통보는 같은 이름으로 숙종대부터 고종대까지 사용되어온 것으로, 소전이라고 불리운 중국화폐와 같이 사용되었음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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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고구리 557번지 한원식씨가 소장하고있다. 81년 구 가옥화재로 인하여 전소되어 현재의 건물로 신축 공사중에 집터에서 발견한 것으로, 한원식씨의 부친 한영수씨가 1945년~47년경 현 고구저수지 공사 전 토탄층에서 발견한 것으로 추측된다. |
♠돌도끼(마제석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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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지석리
교동 북쪽해안의 언덕배기에 위치한 곳으로 좁은 비탈 길목건너에는 황해도 연백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연백군등 황해도를 고향으로 둔 실향민들이 1960년도에 이곳에 비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낸다. 우리나라는 철원과 고성에 통일전망대가 있고 자유로 옆의 오두산 통일전망대도 있으며 파주에는 망배단이 있으나 여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인사리 망향대라 부르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지석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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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향대,멀리 북한 땅 연백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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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고구리
1976년 4월에 완공된 88.5㏊(26만6천평)의 저수지로서 사계절 어디든지 낚시할 수 있는 곳으로 주어종은 참붕어, 잉어, 빠가사리, 가물치등 공해없는 어종을 볼 수 있다.
원래 화개산 북쪽 기슭인 이곳에는 큰 연못이 있었고 연못은 가르는 길이 있었다. 76년에 바닷가쪽으로 둑을 쌓고 물을 끌어 올 때 물을 가두는 물푸기못으로 칭하여진 고구저수지는 상하류가 둑길로 갈려 있지만 물은 서로 통한다.
저수지 공사중에 길이 39cm 크기의 고래뼈와 토탄층에서 무문 회도편과 돌도끼, 돌 화살촉 등이 1962년 서울대학교 답사팀에 의해 수집보고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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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산에서 바라본 고구저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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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난정리외
난정지구 농어용수개발을 위해 1997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2002년 5월에 완성될 예정으로 있는데 위치는 난정리외7개리에 걸쳐있다. 난정저수지의 수혜면적은 321만평(1070ha)에 이르고 유수면적은 121ha에 달하며 저수지 담수는 2001년부터 시작되며 사업비만도 410억원에 달한다.
그리고 고구리에는 영산제언(榮山提堰)이, 지석리에는 염주동제언(鹽州洞提堰)이 옛부터 남 아 있으나 이제는 그 흔적마저 조금씩 헐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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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수가 시작된 난정저수지 |
2000년 7울 6일 교동의 4면 앞바다를 포함한 강화도 일대 바다의 갯벌이 천연 기념물 제419호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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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암이 보이는 교동갯벌 |
자그마한 섬인 교동에는 포구와 나루터가 유난히 많은데 이는 그 만큼 인근 지역과의 교류와 교통이 활발했던 것을 증명하는것이라 하겠다.
옛날에는 지금과 같은 동력선(기선)이 없었으므로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춰 배가 다녔고 바람이 없으면 노를 저어 바다를 건너야 했는데 이것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양갑리, 난정리, 동산리, 서한리 사람들은 멀탄(말탄포) 나룻배를 타고 불당포(연안)로 건너가 2, 3십리길을 걸어서 장출장(연안), 연안읍장을 봐 왔고, 지석, 무학, 삼선, 인사리 사람들은 민재(인현, 북진나루) 나룻배를 타고 봉이가미(연안)로 건너가 2, 3십리를 걸어서 연안온천장, 홍현장을 봐왔으며 또 밤머리(율두포) 나룻배를 타고 백석포(연안)로 건너가 역시 2, 3십리를 걸어서 연안읍장터로 나가 일을 보았다. 대룡리, 읍내리, 상룡리, 봉소리, 고구리 사람들은 호두포(봉소리) 나룻배를 타고 성(인화리)으로 건너가 2, 3십리를 걸어서 산이포(양사면)장, 강화읍장에 나가 일을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불편한 교통 조건에서도 당일장을 봐왔고 혼사 같은 큰 일이 있을 때에는 2일장을 봐야만했다. 장에서 구입한 물건들을 사달구지에 싣기도 했지만 흔히 등짐으로 지고 다녔다. 옛날에는 추위도 심하여 바다에 성에(얼음)가 많이 끼어 나룻배가 다니지 못하는 날도 많았으므로 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인천, 서울에 가려면 추수를 마친 후 벼를 몇섬씩 목선(돛단배)에 싣고 가서 객주가 팔아주면 그것으로 생활필수품을 사가지고 돌아와야 했다.
그 후 한일합방이 되고 나서 일본인 다나카(田中)라는 사람이 기계배(기선)로 인천을 출발, 읍내리 동진포를 거쳐 연안 불당포를 경유하여 해주까지 운항하였다한다. 그러나 배일사상(排日思想)으로 손님이나 화물 수송으로는 제 구실을 못하였다. 강화도의 뱃길은 호두포(봉소리)와 인화리가 이용되었지만 북방한계선이 가까이 있어 6.25사변후에는 월선포→창후리간 항로가 개척되었는데 1960년부터 월선포→창후리간에 쾌속선이 운행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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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의 포구,나루터 |
♠호두포에서 바라본 인화나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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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동산리
동산리에 있는 포구로 옛날에 이 동구에 배가 많이 정박하여 배의 돛대가 마치 대나무 숲과 같다하여 죽산동 또는 죽산포라 하였다.
또 임진왜란때 국방상 필요에 의해 이 마을 뒷산에 테를 두른 듯이 참묘를 팠다는 데서 유래한 테메가 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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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포 |
○ 소재지:지석리
율두산 북쪽에 있는 포구로 황해도 연백군과 연결되는 나루터를 율두포라 하는데 글자 풀이로 밤머리가 바머리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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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두포 |
○ 소재지: 양갑리
양갑리 빈장산 동쪽끝에 있는 포구로서 서해안 고기잡이 나가는 포구였으며 포구로 들어오는 돛단배의 장관이 볼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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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서한리
서한리에 있는 포구로 말탄이라하는 것은 맨 끝에 있는 여울 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해변에 나가면 험한 여울물을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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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탄포 |
○ 소재지:읍내리
남산포는 진망산(남산) 밑에 있는 포구이다. 이곳에 선창이 있었고 선창의 이름이 대변창이었다. 진망산에 사신당이 있었으므로 중국으로 오가던 사신들이 주로 이용한 포구라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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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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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봉소리
호두산을 끼고있는 포구. 이 마을산이 범의 머리형상이어서 호두포라 전해지고 있다. 원래 김포-강화로 이어지는 48번국도는 강화의 인진나루에서 호두포를 거쳐 고읍리로 연결되었다. 인진나루가 휴전선에 너무 가까워 군사통제지역으로 되자 창후선착장을 새로 만들어 지금은 창후리-월선포 항로를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휴전선이 생기기 전까지 호두포는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지 않는 주요 포구였기 때문에 매우 번화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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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포(우측은 강화의 인화나루) |
○ 소재지 : 상룡리
선멀(배를 짓던 마을) 앞에 있는 포구인데 달밤에 선멀서 바라보면 고요한 바다 위에 둥근 달이 비치니 바닷물 속에도 달, 하늘에도 달, 겸하여 노송이 물위에 비치니 그 광경이 달의 신선이라 하여 월선이라 하였으며 이태백이 놀던 자리같다 하여 월선포라 전해지고 있다. 현재는 창후리(강화)에서 오는 훼리가 닿는 곳이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하여 배타는 시간은 차이가 많이 난다.
그밖에 고려시대때 고읍시절 고읍성을 드나들던 포구로 예성강하구와 마주보고 있는 고구리의 낙두포가 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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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선포 |
♠고려시대의 관문 낙두포 |
○ 소재지: 읍내리
읍내리 성내부락 동쪽에 있는 나루터는 동진나루라 한다. 예전에는 인천에서 강화도를 거쳐 해주로 가는 배가 기착하였다. 예성강입구의 벽란도를 떠나서 원나라로 가는 하정사신(賀正使臣)이 교동으로 와서 해로의 일기를 살핀후 서해로 나갔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그래서 사신들의 임시 숙소인 동진원(東津院)이 있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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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나루 |
○ 소재지: 인사리
인점진이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강화본도, 개풍, 김포를 거쳐 마포로 통하는 뱃길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연안을 왕래하였다. 교동읍지에는 북진나루터에 조선 선조2년(1569년)부터 13년간(1581년) 육지가 형성되어 연안사이에 인마가 통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북진나루터에 가기전 야트막한 산에는 바다에서 떠내려온 돌미륵이 모셔져 있는데 형태는 많이 상했으나 민간에 유행한 미륵의 모습이다. 귀와 입 등이 조악하나 하반신부분은 연꽃같아 마치 물에 떠있는 미륵의 모습을 표현한 것 같다.
바다중간에 휴전선이 있기 때문에 건널 수는 없지만 지금도 북진나루터에 서면 연백군이 한눈에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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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진나루 |
♠북진나루 위쪽에 있는 미륵불입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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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팔경은 신·구가 있으나 그동안 여러상황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신교동8경을 소개해 본다. 신교동8경이라 하더라도 현 상태에는 합당치 않은 부분도 많은 실정이다.
1. 화개효종(華盖曉鐘)
화개암은 화개산 중턱에 유일하게 현재까지 남아있는 암자로 이곳에서 매일 새벽에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종소리는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고 위안을 준다.
화개암 종소리에 대한 시(詩) 한수가 있다.
먼하늘의 새벽빛은 아지랑이 궤뚫고
흩어진 별들은 하나 둘 사라지네
바람이 들려오는 종소리는 어디서 울리는고
화개산 남쪽의 적은 가람(절)이겠지
2. 빈장모범(濱瀁暮帆)
양갑리 빈장산 동쪽 끝 빈장포구는 매일 서해로 떠나가 고기잡이며 제 볼일을 보고 저녁노을 붉게 물들 무렵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들의 분분한 광경이 장관이었다.
교동시인의 시 한수가 있다.
빈장산 밖은 하늘에 닿고
해저문 배는 개미같이 나부끼네
가득실은 고깃배는 서주로 갔건만
올 때 얻은 것은 돈주머니 반밖에 안되네
3. 잠두목적(蠶頭牧笛)
지석리 율두산 누에머리 목장에는 소먹이는 아이들이 많이 모여 사시사철 피리를 불어대는 소리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50년전만 해도 소를 방목하여 목동들이 지켰으나 지금은 잡목이 우거지고 산고지에는 군인이 수비하고 있다.
백마는 타지않고 황소를 타고서
붉은 수탉은 노래않고 백구만 노래하네
매화 관색곡만 부르지마소
태평속에서도 전쟁의 수심이 있다네 |
♠고구저수지를 끼고 있는 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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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말탄어화(末灘漁火)
말탄포는 서한리 끝 해변에 있어 새우잡이 어선과 낚시배가 모여들어 밤이되면 어화를 밝혀 해변에 비치는 그 광경이 장관을 이루었다.
섬의 밤바람은 차기도 해라
별같은 불들이 빨갛게 바다를 물들였네
조수에 노저어 사람의 말소리 일어나니
주막의 등불은 나루터 단풍사이로 반짝이네 |
5. 수정낙조(水晶落照)
난정리 뒤 수정산에서 서해를 바라보면 망망대해는 끝이 없으며 서해바다로 붉은 물을 들이며 떨어지는 낙조는 절경을 이룬다.
금빛 물결은 수정산 봉우리에 넘실거리고
바다는 온통 지는 햇빛으로 붉게 물들었네
덧없는 인생은 늙은 빛이 감도네
두 눈두덩이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지노라 |
♠수정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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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호포제월(虎浦霽月)
호포는 봉소리 동쪽 끝 호두포를 말하여 강화 본도의 인화리 포구와 마주보이는 곳으로 달 밝은 밤에 저녁 기러기가 떼지어 날아가고 해변에 교교히 비치는 달빛은 수면에 유리를 깔아놓은 듯 아름답다.
구름없는 푸른 하늘엔 기러기떼 흘러가고
동녘에 밝은 달은 가을에 어울려
언덕에 계집아이들은 강남노래 부르고
나루터 손님들은 주막에서 떠드네
7. 인산관창(人山觀漲)
인산은 인사리의 뒷산을 말하며 조석으로 만조가 되면 그 일대 조수가 일사천리를 이루어 바다가 몇곱으로 펼쳐지니 계표(界標)를 알 수 없어 제방둑까지 펼쳐지니 장관이라 하겠다.
갈대꽃 핀 들판에 가을철 조수가 불어나고
그 일대의 섬들은 계표를 알 수 없네
전사의 어시장은 앉아서 열리고
어선은 어느새 제삼교로 가버렸네
보뚝 동쪽과 방죽 북쪽은 물에 넘실거리니
봄철의 조수는 야외를 잠그도다
멀리 십리밖에 나무는 물에 잠기고
경원전 밖은 해가 저물어 안개만이 자욱하고나
8. 진망납량(鎭望納凉)
진망은 읍내리 남산인데 옛날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여 소나무 그늘진 곳에서 피서하기가 좋았으며 앞바다를 내다보는 경관이 사람의 흥취를 북돋아주며 또 오고가는 손님이 그치지 않으니 여름 피서와 등산하는 데 가장 좋은 곳이었다.
성남의 산색은 울창하고
온산의 소나무 덥힌 그늘은 서늘한 피서에 좋구나
동산에 맑은 바람 시원히 불어오니
공지에 오른 유객은 선향을 바라보네
이상을 신교동팔경이라 하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옛날 선인들이 신구팔경을 선정 변경한 것과 같이 6.25로 말미암아 헐벗었던 산천이 지금은 잡목으로 우거져 옛자취를 찾을 길이 어렵고 해변교통이 달라졌으니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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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은 아직 여행지로 삼기에는 안내판등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고 있고 숙박,음식점도 상당히 열악한 형편이다.
<제1코스>
※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안으로 오전 9시반에 월선포행 훼리를 창후리에서 타고 오전 10시경에 월선포에 도착해서 오후 5시 창후리행 훼리에 승선완료했을 때의 탐방로. (소요시간 6시간)
읍내리비석군 → 교동향교 → 화개사 →읍내리 부군당 → 교동읍성(남문) →교동부지(안해루쪽) →철종잠저소(연산군적거지)→ 동진나루 →사신당지→삼도수군통어영전함정박장→화개약수→효자묘→화개산성→화개산봉수대→교동향교원터→교동고읍성→고읍형옥지→경원전지→호두포(신골:연산군적거지) |
<제2코스>
※ 제1코스에서 화개약수와 화개산성과 화개산봉수대를 생략할 경우 ( 소요시간 4시간)
읍내리비석군 → 교동향교→화개사→읍내리부군당→교동읍성(남문)→교동부지→철종잠저소(연산군적거지)→동진나루→사신당→삼도수군통어영전함정박장→망향단→인사리돌미륵상→북진나루→고구저수지→교동고읍성→고읍형옥지→경원전지→호두포(신골:연산군적거지)
<제3코스>
※ 화개산등반을 주로 할 경우
읍내리비석군→교동향교→패각산포지->화개약수→효자묘→화개산성→화개산정상→화개산봉수대→화개사→대룡리패총
연번 |
업 소 면 |
전 화 번 호 |
대 표 자 |
1 |
강화여인숙 |
032-932-4067 |
황 도 신 |
2 |
고구촌 |
032-933-8668 |
한 재 중 |
3 |
교동파크 |
032-932-4164 |
전 종 삼 |
4 |
낙원여인숙 |
032-932-4071 |
이 삼 수 |
연번 |
업 소 면 |
전 화 번 호 |
대 표 자 |
1 |
경기식당 |
032-933-1772 |
조 재 두 |
2 |
교동식당 |
032-933-5320 |
서 경 현 |
3 |
중국성 |
032-932-4629 |
지 용 철 |
연번 |
업 소 면 |
전 화 번 호 |
대 표 자 |
1 |
고구촌 |
032-933-8668 |
한 재 중 |
2 |
고향산촌 |
032-932-4426 |
이 권 섭 |
3 |
대아촌 |
032-932-7556 |
이 정 호 |
4 |
대풍옥 |
032-932-4030 |
장 상 권 |
5 |
서경숯불갈비 |
032-932-5172 |
김 만 학 |
6 |
삼호정 |
032-932-5272 |
황 유 순 |
7 |
월선식당 |
032-933-2037 |
주 상 석 |
8 |
해성식당 |
032-932-4111 |
전 길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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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동쌀의 특징
교동은 지리적으로 섬이기 때문에 오염물질이 전혀없고, 축산농가가 없어 맑고 깨끗한 농업용수로 농사를 지어 정말 깨끗한 쌀이 생산되고 있고 주민의 99%가 농사에 의존하여 생활하기 때문에 벼농사 기술은 전국에서도 빠지지 않으며 교동쌀은 최상품으로 쌀의 고유명사가 되다시피 한다.
- 연간생산량
상품화할 수 있는 수량은 15,000섬 |
- 농가숫자는 1200농가, 면적은 2700㏊(약81만평)
- 현재 월선포 선착장에서 교동쌀을 판매하고 있으며 인천에서도 농협매장에 나와있으며, 삼성인터넷쇼핑몰에서도 판매한다.
- 가격 20kg 46,000원 10kg 23,500원 4kg 9,4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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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교동특산물 |
- 유래
정확한 연대는 문헌에 나타난 것은 없으나 고려말 교동면 화개사의 스님들이 불공을 드릴 때 앉았던 방석에서 유래된 것으로 교동의 공한지에서 자생하던 인초의 이용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인초를 이용한 방석을 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그후 완초를 사용하고 현재의 화방석으로 승격된 것은 대한제국시대 후기부터 무늬를 가미한 방석제작으로부터이다.
교동도 출신인 중요무형문화재103호 완초장기능보유자 이상재선생이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 특징
화방석은 여느 방석과 달리 여름철에 완초가 지닌 습기를 흡수하여주므로 오래 앉아도 피로감을 느끼지 않으며 완자, 봉황, 태극무늬등 고전적 무늬를 수놓아 장식용으로 또는 품위가 뛰어나다. |
- 용도
화방석은 주로 의자에 많이 이용되고 있고, 고전적 무늬를 수놓은 장식용품으로 활용가치가 매우 높다.
- 제작과정
완초를 이용한 제품으로 5∼8월에 왕골을 재배하여 왕골에 염색 등을 하여 전면 중앙에서부터 한올한올 엮어나가며 각종 무늬를 수 놓은 후 배면 중앙에서 마무리하게 되는 것으로 1세트(5장)를 제작하는데 5∼6일의 기일이 걸린다.
- 상품
강화 입구에 있는 토산품판매장에서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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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방석 |
- 유래
우리조상들이 음식을 담아 두거나 바느질 광주리로 사용하던 단합에서부터 사용된 것으로 초기에는 종이를 꼬아서 만들던 것을 조선말엽부터 완초를 이용하여 제작하게 된 것으로 꽃삼합으로 완성하게 된 것은 대한제국시대 단합에서 삼합으로 제작되면서부터 무늬를 수놓는등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특징
세 개의 단합을 크기별로 차등을 둬 한셋트로 제작되고 있으며 완자, 꽃, 태극, 봉황등의 무늬를 수놓은 제품으로 실내장식이나 귀금속 보관용으로 가치가 높다. |
- 용도
전에는 여인들의 바느질 광주리로 사용되거나 한식과자 등의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현재는 여인들의 귀금속 보관이나 장식용으로 효용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 제작과정
완초를 이용한 제품으로 세 개의 합을 차등을 두어 한올한올 엮어나가는 것으로 세 개의 합을 한셋트로 제작하고 있다.
- 상품
사하마을(읍내리)에 거주하는 부녀자들이 만들고 있는데 강화입구에 있는 강화토산품판매장에서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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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삼 합 |
옛날 사족·서인 또는 관례를 치른 나이 어린 사람이 쓰던 누런 빛깔의 가는 풀로 결여 만든 관모, 죽사립·모립·죽립 등으로도 불리우는데 이것은 그 재료에 의한 명칭이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선비나 서인이 함께 사용하였으나 점차 관례를 올린 소년이 흑립을 쓸 때까지의 관모로 사용하게 되어 '초립동이'라는 말도 생기게 되었다. 갓이 일반화되면서 패랭이와 함께 상민의 쓰개가 되었는데 별감도 상복에는 황초립에 호랑이 수염장식을 달아 착용하였다. 초립은 패랭이와 비슷하나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원통형의 모옥과 양태로 되어 있으며 정수리는 평평하다. 재료는 주로 강화 교동에서 나는 황색풀을 사용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대구·영천에서도 산출한다고 하였다. |
교동의 토산품으로는 민어, 쌀새우, 굴, 숭어, 소금 등은 한말에 이르도록 있었으나 소금, 황석어, 미네굴, 낙지, 무레 등은 1842년 이전에 생산되지 않는 것으로 경기지(京畿志)에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 동국여지승람에는 청해(게의 종류) 그리고 활과 노루 가죽을 진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대에 와서는 교동쌀이라는 고유명사가 되다시피한 비옥한 충적토에서 생산되어 일년 생산양만으로도 몇 년동안 섬안의 주민들을 먹일 수 있다는 좋은 쌀과 새우,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청주벌에서 서식하여 옛날 임금에 진상했다는 숭어와 동어, 왕골로 만드는 꽃 송둥이, 꽃 방석, 꽃 자리 그리고 막걸리가 유명하다. 특히 완초공예품은 성공회를 통해 영국에 까지 수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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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 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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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중학교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양갑리(兩甲里)와 매바지의 사이에 부시미산(富示米山) 또는 말산이라고 불리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조그마한 산이 하나 있다. |
이 산의 머리는 양갑리쪽을 향하여 바라다보고 있으며 꼬리쪽은 매바지쪽에 있다.
옛날에 양갑리 사람들은 몹시 부지런하고 근면하였다. 그런데 왠일인지 아무리 애를 쓰고 땀을 흘려도 농사는 잘 되지 않았고 계속 흉년이 들어 근근히 조반석죽(朝飯夕粥)으로 가난한 생활을 이어갈 정도이었다.
그러나 매바지 사람들은 그리 애를 쓰지 않아도 농사는 매년 풍년이 들어 잘살며 모두 기와집을 짓고 호사생활을 하였다. 양갑리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언제나 하늘의 무심함을 원망하면서 장탄식을 지었고 매바지 사람들을 부러워도 하고 때로는 시샘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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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시 미 산 |
그러던 어느날 한 노승(老僧)이 시조(施助)를 구하려 양갑리에 찾아들었다. 한 젊은 부인이 시조를 하면서 "우리는 언제나 부지런히 일을 하고 사람들도 모두 착한데 어찌하여 잘 살지 못하고 이처럼 가난하게 살아야 합니까?" 하고 물으며 "스님께서 우리 양갑리 사람들이 잘살 수 있는 비방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그 스님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였다. 노승은 한참동안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있더니 손을 들어 말산을 가르치며 "저 말산의 머리부분을 잘라 버리시오. 저 말이 언제나 양갑리쪽의 곡식은 모두 먹어 버리고 대소변을 매바지에 하니 그 쪽은 땅이 걸어서 농사가 잘 되고 이쪽은 못 사는게 아닙니까?" 하고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말았다. 부인은 마을사람들에게 노승이 남기고 간 이야기를 하자 남자들이 모여 말산의 머리 부분을 잘라내기로 공론을 모았다.
정작 일을 시작하고 보니 거의가 암석으로 되어 있고 어찌나 굳었는지 많은 시일이 걸려서야 겨우 잘라내었다. 어쨋든 그 후부터 양갑리 사람들은 남부럽지 않게 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머리를 떼어낼 때 목에서 피가 흘렀다고 하며 아직도 자세히 보면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산의 앞에 흩어져 있는 돌은 그때 떼어낸 것이라고 전하여진다.
또한 이 말산에 대한 전설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하여져 내려오고 있다.
그전 옛날에 양갑리에서는 어느 집에서나 자식을 낳기만 하면 거의가 여자였으나 모두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상하게도 이 애들은 장성하면서 부모를 돕거나 집안일을 돌보려고는 하지 않고 날이 밝기만 하면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말산에 모여 종일토록 시시닥거리기만 하고 게다가 행위도 방정치 못하였다고 한다. 각가정에서는 아들이 없는 것만 하여도 큰 걱정이고 원통한 일인데 양갑리에서 태어난 딸들은 정숙하지 않고 아무리 어른들이 타이르고 야단을 쳐도 막무가내로 행동이 좋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스님이 시조(施助)를 구하러 이 마을에 찾아 들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이 아들이 없는데다 딸들마저 정숙치 못하여 걱정이라는 말을 하였더니 스님이 혼자말로 중얼거리기를 "저 말산의 생김새가 저렇게 생기고서야 행실이 고을리 있나, 게다가 머리를 이쪽으로 향하고 있으니 저 말형상의 머리를 때려 부수지 않는 한 언제나 화를 면치 못할거야...." 하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모여서 신중히 의논을 하였다. 처음에는 장차의 재앙이 두려워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 중에 한 노인이 내가 앞장을 설 것이니 모두 힘을 합하여 깨뜨려 보자고 하였다. 그 후에 이 노인의 말씀에 따라 이 말상을 깨뜨리기 위하여 많은 시일이 걸리고 모진 고생을 하여 말상을 깨뜨리고 난 후부터는 여자들의 행실도 좋아지고 가정일을 잘 도와 주었으며 또한 아들도 많이 낳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부시미산(富示米山)의 글자를 해석하면 쌀이 넉넉함을 나타내는 산이란 뜻을 말한다. 옛날 양갑리 사람들이 농사가 잘 되지 않아 몹시 가난하게만 살았는데 마을에 마음씨 곱고 아주 착한 사람 하나가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이 매일 같이 꼭두새벽이면 부시미산에 올라가 맑게 개인 하늘에 반짝이는 은하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마을이 남과 같이 잘 살 수 있게 하여 달라도 무릎을 끓고 정성을 다하여 손 모아 빌었다.
그런데 하루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老人)이 나타나 "빈장산과 부시미산 사이에 얕고 작은 산이 많은데 그 흙과 나무를 전부 치워 버리면 잘 살 것이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노인은 깜짝 놀라 눈을 뜨고 보니 그것은 잠깐 잠이 들었던 꿈속에서의 일임을 알게 되었다. 꿈을 이상히 생각하면서 집에 와서 다시 잠을 자는데 산에서 본 노인이 다시 나타나 같은 이야기를 하며 그대로 하라고 재촉하면서 책망을 하는 것이다. 그 뒤에 말을 사람들에게 꿈에서의 사연을 말하고 동네 사람들이 합심하여 꿈에 본 노인의 말씀대로 하였더니 그 다음해부터는 언제나 해마다 풍년이 들어 잘 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하여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이 전설이 깃든 유서 깊은 부시미산은 현재 전부 파헤쳐지고 곧 흔적도없이 사라져버릴 처지에 놓여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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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면 화개산 남쪽 기슭에는 두 개의 샘이 있었다고 한다. 동쪽에 있는 것은 문정(文井)이요, 서쪽에 있는 것은 무정(武井)이라고 불렀다.
두 샘에서는 맑고 깨끗한 물이 어찌나 많이 솟았던지 그 주위가 수백 척이나 되었고 그 깊이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 아래는 시내를 이루어 밤낮으로 물이 흘러서 바다로 들어갔다. 주변의 경치도 참으로 아름다워서 절경을 이루었으며 섬안은 물론이요, 원근(遠近) 각지에도 명승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두 샘물이 솟으면서 교동에서는 문관이나 무관이 많이 나왔고 높고 훌륭한 인재가 후세를 이어 생겼다. 어쩌다 한쪽 샘물이 많으면 한쪽은 자연히 줄어 들게 되어 문정(文井)에 물이 넘치면 문관이 많이 나고 무정(武井)에 물이 넘치면 무관이 많이 생겨났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일은 이 샘의 물빛이 멀리 바다 건너에 있는 송가도(松家島)에 까지 비치었는데 이 빛을 받은 송가도의 부녀자들이 풍기가 몹시 문란하게 되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공론한 끝에 수십명의 남자가 교동으로 건너가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샘을 메우자고 하였다.
그 뒤에 이 샘을 메우려고 수개월을 두고 많은 사람이 애를 썼으나 샘은 더 용솟음칠 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초조와 낙심에 지쳐 걱정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한 노승(老僧)이 이곳을 지나다 그 광경을 보고 까닭을 물었다. 그 중에서 한 사람이 그 사연을 낱낱이 말하였더니 그 노승이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이 "소금 몇포만 놓고 묻으면 될 것인데 공연한 고생을 한다" 고 하였다.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샘은 말라 버리고 다시는 물이 솟지를 않았다. 그로부터 교동에는 문무의 인물이나 귀하고 높은 벼슬은 나지 않았다고 한다. |
그 후로 송가도에서는 이 노승에 감사하는 뜻으로 사당(祠堂)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여지고 있으나 지금은 그 사당도 없고 문무정(文武井)의 흔적도 간신히 찾을 수 있다. 또 일설에는 이 샘이 마르게 된데 대하여 이렇게 전하여지고 있다. 이 섬에 사는 한 여인이 이 샘의 경치가 너무도 아름답다고 하여 어느날 그곳에 구경을 갔다가 돌아오자마자 왠일인지 미쳐 버렸다. 그 뒤 두 번째 간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느날 한 노승(老僧)이 이 근처를 지나가며 시조(施助)를 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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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정 |
집집마다 다녀보았으나 모두 허탕이었는데 구석진 곳에 넉넉지도 못하게 사는 한 노파가 이 노승을 반갑게 맞이하여 성심껏 시조(施助)를 하였다. 그 노파는 동네에서 일어난 기이한 일을 이야기하면서 두 여인의 변고를 사실대로 알렸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노승은 한참만에 입을 열고 하는 말이 "문무정(文武井)을 메우시오. 그러면 아무일이 없을 것이요" 하고는 총총히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 뒤로 온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이 샘을 메우려 하였으나 도무지 메워지지가 않았다. 모두 기진맥진하여 한숨만 짓고 있는데 난데없이 전날의 노승(老僧)이 나타나 하는 말이 그렇게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니 장풍으로 발을 엮어 그것으로 샘을 덮고 메우시오 하고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말았다. 그 말을 따라 장풍발을 덮고 흥이 나서 노래를 불러가며 메웠더니 거의 다 끝날 무렵 요란한 소리와 더불어 갑자기 용마(龍馬)가 뛰쳐나와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고 그 후 샘은 영영 말라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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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전설이라기보다는 조선실록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태종 18년 3월 13일) <황룡(黃龍)이 경기 교동현 수영(喬桐縣水營)의 우물 가운데 나타났다. 수군 첨절제사 윤하(尹夏)가 보고하였다. "수영 앞에 우물이 있는데 선군 등이 물을 긷고자 하여 우물가로 가니 황색 대룡(大龍)이 우물에 가득 차서 보였는데, 허리의 크기가 기둥과 같았습니다. 우물의 둘레가 12척 5촌이요, 길이가 2척 3촌이었습니다."> 우물의 둘레가 12척 5촌이라니까 약 4m정도, 길이가 2척 3촌이라니까 76cm 정도로 추정되는 크기의 용이라 추정되는데 용은 상상동물로서 낙타의 머리에 사슴의 뿔, 토끼의 눈, 암소의 귀, 뱀의 몸, 개구리 배, 잉어의 비늘, 호랑이의 발바닥으로 이루어졌으며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고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비와 바람을 일으킨다고 여겨져 왔다. 이 사실을 황규열 선생은 실록의 작성기법상 어떤 연도는 정사(政事)를 중심으로 어떤 연도는 재해나 기이한 일을 중심으로 작성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며 황룡이 아니더라도 어떤 특이한 짐승이 수영의 우물에 나타난 것은 사실일 것이라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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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동부지 앞의 우물터 |
황규열 선생은 교동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동수영(喬桐水營)은 직할부대 성격인 교동양영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교동수영이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월곶진(月串鎭)에 있다고 기록했다. 실록에는 교동수영안에 있는 샘물에서 황룡(黃龍)이 발견돼 수사(水使)가 임금에게 이 놀라운 사실을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또 실록에 당시 서울에서 교동수영(喬桐水營)으로 오는 배가 정박하는 곳을 아랑포라고 기록했고 황룡이 발견된 샘이 있는 포구의 이름이 아랑포이며 이 아랑포에 교동수영의 직할부대인 교동양영(喬桐梁營)이 있었다. 아랑포가 어디에 있는지, 지금은 그곳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안타깝게도 모른다. 다시말해 자금의 봉소리, 고구리 부근인지 아니면 읍내리 일대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되는데 읍내리쪽에 더 무게를 들 수 있다."
이때의 우물인가는 알수 없지만 교동 수영 앞에는 옛우물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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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갑리의 느티나무는 마을지정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수령은 약 400년이다. 그간 오랜 세월동안 불행히도 1919년 음력7월(기미년) 태풍에 막대한 피해를 입어 둘레 0.5m 되는 가지들이 전부 부러져 나갔으나 그 후 다시 소생하여 별로 손색이 없이 자라 노령수에도 옛모습을 되찾아 잘 자라고 있다. 옛날부터 미풍양속에 따라 매년 5월 단오절이면 마을 청년들이 이 나무 중간가지에다가 넓다랗게 그네를 매고 부녀자들의 즐거운 흥취를 한층 더 북돋아 주기도 하고 여름철에는 마을 남녀 노소들이 이나무 그늘 아래 한데 모여 매년 삼복더위를 식히는 피서처로 자연 경관을 즐기고 있다.
한가지 이 나무의 신비로운 전설은 봄에 잎이 일제히 피었다가 가을에 잎이 일제히 떨어지면 명년 농사가 풍작을 이루고 가을에 남은 잎이 봄까지 떨어지지 않으면 그해 농사가 흉작을 이룬다는 전설에 모두 그렇다고 유래되었으니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희한한 조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요즘 와서는 과학영농방법과 지하수 개발, 저수지 사업이 완공되면서부터는 위의 전설이 없어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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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갑리의 느티나무 |
또한 이 나무터에 대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양갑리내에 있어 산세나 지세로 보아 가장 좋은 자리에 위치하여서 마을에 부자가 없다는 비결도 전해내려오고 있다. 또 이곳 느티나무에서 약 10m 거리 동남간방에 현재 작은 느티나무 1목이 성장하는데 위의 나무와 형태가 똑같이 자라는 것을 볼 때 과연 뿌리없는 나무가 없듯이 인간과 같이 대를 이어주는 것같기도 할뿐더러 실로 이 느티나무 2개의 위치나 경치로 보아 전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외래객들의 각광도 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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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펄은 연백과 교동사이의 바다를 말하는데 옛날에는 육지였다고 한다. 그 청주펄에 소재한 동네는 아주 잘 살았다고 한다. 얼마나 잘살았는가는 동네에 다리를 놓는데 놋그릇으로 놓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느때 도사가 공양을 다니는데 인심이 나빠 그 동네남자가 쇠거름을 퍼주면서 "이거나 가지고 가라" 고 했다고 한다. 옆집에 가니까 그 집 며느리가 그냥 쌀을 퍼주면서 "죄송하게 되었다" 고 말했다. 도사가 며느리에게 "언젠가 하여간 우물에 피가 난다. 그 말을 듣거든 북쪽으로 향해 가는데 그 대신 뒤를 돌아보지 말고 가라" 고 말했다. 그 후 그 동네에서 개를 잡아먹었는데 개피를 우물에 집어넣어 우물에 피가 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며느리는 도사가 한 얘기를 듣고 동네를 떠나는데 아무래도 궁금하니까 뒤돌아보고 말았다. 그러니까 동네는 전부 바다로 변하고 그 대신 여자도 붙어 버렸다. 그래서 연백 고미포쪽에 할미당이라는 사당이 새겼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그 바다를 지날때는 물갈리는 소리, 놋다리에 물갈리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 |
이와는 달리 이때 살아난 사람은 노파 한사람으로 연백땅 고미포에 이르러 그곳에서 살았다. 후에 사람들이 당집을 짓고 그 노파를 제사지내는 곳이 "할미당"이라고 한다는 전설도 전한다.
청주펄에는 숭어가 많이 살아서 숭어 천지라고 주민들은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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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주 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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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에는 본토성(土姓)이 셋인데 고(高),인(印),전(田),안(安)등을 들었으며 안씨는 속성(續姓)이라하여 나중에 들어 왔음을 밝히고 있다.
교동지에 의하면 황(창원黃),한(청주韓),전(안동全),권(안동權),방(온양方), 이(전주李)씨등을 대성(大姓)으로 꼽고 있다. |
♠봉소리 느티나무 |
교동인씨(印氏)는 중국 진(晉)나라의 서(瑞)가 신라 유례왕때 들어와 아찬(阿)의 벼슬을 하고 그의 후손 빈이 고려 인종 때 한림학사, 문하시사(門下侍史)를 지내고 교동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그 자손이 교동으로 관적하게 되었다.
빈이 교동인씨의 시조로 되어왔으나 《교동인씨세보》(1936)에는 빈의 후손 당이 시조(1세)로 되어 있다.
당은 공민왕 때 서북면병마사로서 압록강 서쪽의 파사부(婆娑府)등 삼참(三站)을 공략하고 개척한 공으로 참지정사에 올랐다.
조선시대에 교동인씨 중 유일한 문과급제자는 석보(錫輔)로, 고종 때 경과별시에 급제했으며 문명이 높았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1만 791명으로 258성씨 중 87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4,280가구로 2,786위였다.
집성촌은 충남당진군,예산군등에 분포하고 있다.
1985년의 국세조사에서는 17,556명이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전씨(田氏)의 본관은 문헌에 남양, 담양을 비롯하여 159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이중 연원이 가장 오래된 것은 영광전씨 로서 시조는 고려조 개국공신 전종회〔田宗會〕이다.
다음은 고려때 조산대부, 신호위대장군을 지낸 전총문〔田寵文〕을 시조로 하는 태산전씨 이며,교동전씨는 고려말 정용산원을 지낸 전성무〔田成茂〕를 시조로 하는데, 그의 딸이 조선개국공신이자 옥천부원군인 유창에게 출가하였다.
중국에서 계출된 성씨로 전하고 있으나 상계를 고증할 문헌이 없다. 우리나라 뇌씨(雷氏)는 청나라 덕종때 사람으로 형부시랑을 지낸 뇌이성(雷以誠 : 자는 학고)의 후예이며, 선조가 조선조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화를 입고 교동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살았으나 후손들이 황해도로 이주하였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황해도 수안(遂安)·황주(黃州) 등지에 30여 가구가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은 교동사(1995년: 황규열 저)에 의거, 대성(大姓) 을 소개해 본다.
본관이 안동. 동산리와 삼선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휘(諱) 부(阜)의 후손(後孫)인 통정대부(通政大夫) 처중(處中)이 들어 와 현재 13세가 살고 있다.
본관이 온양. 동산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호(號)가 월봉(月峰)인 휘(諱)치정(致正)이 들어와 살면서 현재 십수세(十數世)가 살고 있다.
대룡리에도 거주한다.
본관이 안동. 봉소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시호(諡號)가 충렬공(忠烈公)인 휘(諱)이갑(以甲)의 후손이자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휘(諱) 사안(思安)이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자 처음 들어온 이래 현재 20여세가 살고 있다.
본관이 청주 봉소리 거주하고 있으며 시호(諡號)가 문경공(文敬公) 휘(諱) 수(脩)의 후손(後孫)인 도사(都事)를 지낸 휘(諱) 안국(安國)이 들어와 살면서 현재 18세가 살고 있다. 또 일파는 무학리를 비롯하여 교동 각지에 살고 있다.
본관이 창원. 인사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회산군(檜山君) 휘(諱) 석기(石奇)의 증손(曾孫)인 군수를 지낸 휘(諱) 의헌(義軒)이 들어와 살면서 현재 20세가 살고 있다.
또 고구리에 거주하는 일파는 회산군(檜山君) 휘(諱) 치윈(致源)이 들어와 살면서 현재 10세가 살고 있다.
난정리에도 거주하고 있다.
본관(本貫)이 전주(全州), 봉소리(봉소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효령대군 증손 고양부정(高陽副正) 휘(諱) 인(仁)의 아들 휘(諱) 윤정(允貞)이 어머니 평산(平山) 신씨(申氏)의 품에 안겨 아버지 고양부정(高陽副正)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찬탈(王位簒奪)에 불만을 품고 신변에 위해를 느끼자 강화 양도면 조산리에 모자를 피신 시키고 자신은 행방을 감추었다. 휘(諱) 윤정(允貞)은 아들을 둘 두어 맏아들 휘(諱) 경수(敬守)는 조산리에 종현부락에 정착하여 전주이씨의 교동 입향조(入鄕祖)이니, 지금 교동에 거주하는 전주이씨는 대게 효령대군으로 부터 20대손, 입향조로 부터 15대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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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의 독특한 민속으로는 고구리 농악과 부군당제사가 있으나 실제로 지금은 그 명맥을 찾기 힘들다.
농악의 리듬은 가리 리듬이 주가 되는데 꽹가리 장단을 쇠가락이라 부르며, 꽹가리와 장구는 섬세한 가락을 치고, 북은 장구 장단을, 징은 꽹가리 장단 중에 중요한 부분을 연주해서 농악 가락을 힘차게 흥을 돋구어 주는 놀이이다. 원래 농악은 중국 상고 지리서인 산해경과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고조선때부터 농악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 때까지 계속되다가 조선시대에 유교사상으로 농악이 금지되고 민속악사에 과거금지까지 시키기도 했었다 한다. 고종2년(1865)에 경복궁 중건시 농악을 하여 위안과 작업 능률을 올리도록 했으며, 고종 39년(1902)원각사에서 농민계몽의 뜻으로 놀이를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교동 사람들은 해방전부터 황해도 연백 땅을 왕래하면서 6.25후 연백 사람이 교동에 거주하면서 연백놀이가 교동 전통 농악에 가미된 놀이로 돌무 놀이가 너무 단조로와 복구 놀이까지 포함시켜 16단계로 발전시켰다. 이 놀이는 인원이 30명으로 구성되어 준비, 입장, 인사, 마당놀이, 씨고르기, 씨뿌리기, 콩심기, 모찌기, 모내기 , 김매기, 가마니짜기, 벼베기, 탈곡, 벼불리기, 풍년놀이, 마침놀이로 끝나는 교동 특유의 농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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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농악대 |
고읍현터에 있는 물푸레나무 아래에서 열리는 제사이다. 이 마을에서는 3년에 한번씩 3월초에 당제를 모시고 있다. 당제 며칠전에 마을 대동총회를 열어 제일(祭日)을 택하고 제관(祭官), 제비(祭費), 당굿 칠 무당등을 선정하며, 선정된 사람은 특별한 유고가 없는 한 이에 따라야 한다. 제관은 제주 부부와 집사1명이고, 제일이 정해지면 이틀전에 제주와 20세 이상 성년 남자 중 생기복덩이 좋은 몇 사람이 제물과 함께 복슬매산에 올라가 이틀 밤을 지내고 당제를 모신다. 제주(祭酒)는 3일전에 제장에 파묻어 두며 돼지는 생으로 몰고가 중턱에 다달으면 제발로 막 뛰어오르게 한다. 이것을 신이 부른다고 한다. |
새벽에 당제를 모시고 나면 신당(新黨)굿을 한다. 신당굿에 쓸 백설기 시루떡은 3일전에 부녀자들이 담그는데, 굿을 할 때는 모신 신인 부군신, 칠성신, 산신, 삽모당신, 용왕신의 떡을 별개로 찐다. 굿을 할 만신은 목욕재개를 한다. 제관과 만신 산에서 내려온 남자들은 저수지, 중머리, 독고개 마을을 지나며 대동굿을 치고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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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리 부군당의 남근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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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동' 홈(http://www.gyodong.net/)에서 가져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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