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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성당·사찰·교회

[20100321]파주 용미리 장지산 용암사의 석불입상에 얽힌 전설

by 맥가이버 Macgyver 2010.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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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03월 21일(일)  
파주 용미리 장지산 용암사의 석불입상을 찾아가다.
 
 
파주 용미리 장지산 용암사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長芝山)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창건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용미리 석불입상(쌍석불)의 조성 배경과

절의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어 석불이 만들어진 11세기(고려시대)를 창건 연대로 잡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선종(宣宗:재위 1083~1094)이 후사가 없어 고민하던 중,
하루는 후궁인 원신궁주(元信宮主)의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 말하기를 "우리는 파주 장지산에 산다.
식량이 떨어져 곤란하니 이곳에 있는 두 바위에 불상을 새기라. 그러면 소원을 들어주리라" 하였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그곳에 실제로 큰 바위가 있어 서둘러 불상을 만들게 하였다.
그때 꿈에 보았던 두 도승이 다시 나타나 왼쪽 바위는 미륵불로, 오른쪽 바위는 미륵보살상으로 조성할 것을 지시하며
"모든 중생이 와서 공양하며 기도하면, 아이를 바라는 사람은 득남을 하고 병이 있는 사람은 낫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불상이 완성되고 절을 짓고 나자 원신궁주에게 태기가 있어 한산후 물(漢山侯勿)을 낳았다고 한다.

창건 이후 절의 옛 역사는 거의 전하지 않고 있다.


근대의 연혁은, 1936년에 파주군의 유지들이 절을 새로 지은 뒤

백정(白淨) 만월(滿月)과 승려 혜성(慧城)이 중창 불사를 시작하였고,
1978년 대웅전 불사에 착공하여 1979년 완성하였다. 이듬해에 대웅전 안에 지장탱화와 감로탱화를 조성하고,
요사채는 1982년 이후 꾸준히 증·개축하였으며, 1984년에 종각을 지어 범종을 봉안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미륵전·요사채·범종각이 있다.


대웅전에는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석가모니 후불탱화·지장탱화·감로탱화·신중탱화가 있다.
미륵전에는 칠성탱화·산신탱화·독성탱화 및 작은 범종이 하나 있다.

절 뒤에는 석불입상(보물 93)이 있다.
마애불로 쌍미륵이라고도 하며 11세기 작품이다.
바위 사이에 세로로 생긴 자연적인 틈을 이용해 두 개의 불상으로 나누어 새겨져 있는데,

전체 높이가 불두까지 합쳐 19.85m에 이른다.
천연 암벽을 이용해 불신을 만들고 그 위에 목·머리·갓을 따로 만들어 올린 특이한 형태이다.
한때 왼쪽 어깨 위쪽에 대통령 이승만이 세웠다는 동자상과 칠층석탑이 있었는데 1987년 철거하여 요사 뒤편으로 옮겼다.
 

 

-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EnCyber.com 에서 - 
 
 

 

 

 

 

 

용암사 범종각

 

용암사 초입에 있는 건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사모지붕 목조 건물이다.

1984년 10월 대웅전 중수 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사면은 개방되어 있고, 축대 주위로 난간이 둘러져 있다.

건물은 원형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창방 위로 익공식의 공포를 둔 모습으로

외관은 화려한 금단청이 시문되어 있으며, 사면에 기둥을 따라 풍각이 장식되어 있다.

범종각 내부는 1984년 봉덕사 종을 모방한 대형 범종이 걸려 있어, 조석으로 음공양의 묘음이 장지산에 울려 퍼진다.

 

- 한국의 사찰 홈에서 -

 

 

용암사 대웅보전
용암사의 주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건물이다.

축대는 장지산 아래 낮은 언덕을 다져 자연석을 조경한것으로,

건물은 원형 초석 위로 배흘림 기둥을 올리고 주심포를 놓은 모습이다.

건물 외부는 전면 3칸에 4분합의 빗살창호를 단장하고, 삼면을 벽체로 마감하였는데,

외벽에는 금어 용정경춘(用淨鏡春)이 그린 심우도가 그려져 있으며, 공포는 주심포로 단청되어 있다.

 

건물 내부는 중앙 불단을 중심으로 ㄷ자형의 불단으로 구성된다.

중앙불단에는 석가ㆍ문수ㆍ보현의 삼존상을 비롯하여

후불벽에 2003년에 조성된 비로자아후불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불단 위로 화려한 다포집의 정자형 닫집이 걸려 있다.

 

중앙 불단 좌우로는 신중단과 지장단이 있는데,

모두 2003년 조성된 것으로 현재 주지스님인 태공스님이 발원한 것이다.

이외 불구로는 1950년대 만들어진 높이 51㎝, 구경 41㎝의 소형 범종이 걸려 있다.


- 한국의 사찰 홈에서 -

 

 

 

 

용암사 미륵전
 
대웅전 좌측편에 있는 조그마한 전각으로 용미리 석불입상을 뒤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팔작건물로 1981년 요사채 개축때 보수된 것이다.

 현재 법당은 2칸을 삼성각의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데,

법당 내부에는 1980년에 조성된 칠성탱과 산신탱ㆍ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원해 뒤편의 용미리 석불입상을 배알하고 기도드리기 위해 세워진 전각이었으나,

현재 그 용도가 삼성각으로 바뀌어 법당 겸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

 

- 한국의 사찰 홈에서 -

 

 

동자상과 칠층석탑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남북통일과 득남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동자불과 7층석탑이 전해진다.
조성 당시 동자불은 용미리 석불 좌측 어깨에 모셔졌고,

석탑은 그 옆쪽 바위에 봉안되었으나, 1987년 철거되어 현재의 자리에 모셔졌다.

 

- 한국의 사찰 홈에서 -

 

 

 

 

 

 

 

용미리 석불입상에 얽힌 전설

 

장지산 기슭에 있는 용암사는 쌍석불사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절 위에 있는 천연바위에 새겨진 두개의 석불입상(보물 제 93호)이 있기 때문이다.

 

구전에 의하면 이 절은 고려 선종(1084-1094년)의 후궁인 원신궁주가 아들을 낳기 위해

지금의 용암사 자리에 석불입상 2구를 만들었다는 곳이기도 하다.


《 용미리 석불입상은 높이 17.4m로, 천연암벽을 몸체로 삼아 그 위에 목과 머리, 갓을 따로 얹어놓은 불상이다.

그 모습이 우람하고 웅장하다. 원립모자를 쓴 부처는 남자, 방립모자를 쓴 부처는 여자로 전해지는데,

고려시대 선종이 자식이 없어 걱정하던 차에 후궁인 원신궁주가 어느날 밤 꿈을 꾸었다는데,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사는 사람들인데 매우 배가 고프니 먹을것을 달라"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에서 깬 궁주가 이상해서 왕께 고하자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 알아보니

장지산 아래에 큰바위 두개가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왕은 즉시 이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하였다고 전한다. 》

 

이 같은 전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기자전설(麒子傳設)에 불과하지만,

지금도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는다고 한다.

이 쌍석불은 웅장한 크기에 비해 신체비율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등 서투른 조각수법으로 그 중요성이 널리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우거진 숲 사이로 보이는 토속적인 얼굴과 자연스러운 미소로 방문객을 마을 어귀에서부터 맞이하는 모습이 정겹다.

 

- 가져온 글 -

 

 

 

 

 

 

 

파주용미리석불입상(坡州龍尾里石佛立像) 

보물  제93호


일반설명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불성(佛性)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

지방민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 한다.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까지 맞이했지만, 여전히 왕자가 없었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가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

 

전문설명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불성(佛性)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

지방민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 한다.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까지 맞이했지만, 여전히 왕자가 없었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가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


거대한 천연암벽에 2구(二軀)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긴 이 마애불상(磨崖佛像)들은

머리 위에 돌갓을 얹어놓은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고려시대(高麗時代) 석불입상이다.

전체적으로 괴량감(塊量感)이 느껴지는 이 불상들은

불성(佛性)의 특징보다는 토속적인 특징을 얼굴에 나타내고 있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자연적인 미소가 깃든 네모진 얼굴과 삼도(三道)가 없는 원통형(圓筒形)의 목,

 당당한 어깨를 나타내고 있으며 두손은 가슴앞에서 연화(蓮華)를 쥐고 있다.

양어깨에 걸친 통견의(痛肩衣)는 양쪽으로 단계적인 세로무늬를 간결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가운데는 V자 모양을 선각(線刻)하고 있는데 아래 끝쪽은 의외로 부드러우며, 가슴에 보이는 띠매듭는 장식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

 

오른쪽의 네모난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을 하고 있는 수인(手印)만 다를 뿐

세부의 조각수법은 오른쪽의 원립불(圓笠佛)과 거의 같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 불교조각으로는 별로 우수한 편은 아니나,

고려 선종(宣宗)과 원신궁주(元信宮主)의 왕자인 한산후(漢山侯)의 탄생과 관계된 설화가 있고,

옆의 명문까지 새겨져 있어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

 

- 문화재청에서 - 

 

 

 

 

용미리 석불입상의 유래

 

이 입상석불은 광탄면 용미리 산 8번지 중턱 마애불(磨崖佛)로

고구려 응화(應化) 불기천년(서기 366년)에상효군(相孝軍)인 차호진(車好鎭)과 심장기(沈長己)에 의하여

천연암벽을 동체로 삼아 불상높이 57척 2촌(18미터)의 기형적 거대한 입상을 영조(靈造)로 조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각부에 토속적인 미풍이 짙어진 명작품으로 전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것으로

왼쪽의 둥근 갓을 쓴 불상 원립불(圓笠佛)은 사각형의 얼굴에 자연적인 미소가 떠오르고

오른쪽의 사각형의 갓을 쓴 불상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뿐 신체 각부의 조각수법은 두 불상이 같다.


원불상은 남상, 방립불은 여상이라 한다.
그리하여 항간에서는 부부상이라는 말들을 하며

오른편 방립불의 자비와 인종이 동양적 신비의 미소를 느낀다면

왼편 원립불은 활발하면서도 장엄수려한 용모를 보게 된다.

 

또한 방립불과 대치하여 원립불의 오른 어깨위에 작은 동자불이 세워졌는데

이 석벽아래 세워진 7층 석탑과 함께 1953년 10월 11일 이승만박사 내방지시로

박이순(朴彛淳)군수와 이만수(李晩秀), 남궁 연(南宮 鍊) 등 지방 우지들의 후원으로 새로 건립되었으나 후에 철거되었다.

 

이 석불 아래 감노정약수(일명 옷나무 약수)를 석불에다 떠다놓고 축원하면 득남한다는 전설이 오늘까지 내려오며

여름에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고 겨울에는 온수와 같다 한다.

또한 병약자가 이곳에 와서 10개월만 먹고 요양하면 십중팔구는 완치한다고 하며

최근에 이 석간수(石間水)를 감정한 결과 유명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확실한 문헌이 없어 전설에 의하면

고려 13대 선종조후사가 없어 원신공주를 후궁으로 삼은 후

어느날 공주에게 도승둘이 현몽하여 암벽에 미륵불을 건립 기도할 것을 권유 완성 후 왕자를 얻었다는 설과

여조말 삼각산하 이 지역에 왕기가 서려 있어 미륵불을 세웠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의 전설은 석불앞 양지동 현전(現田)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말할 수 없는 구두방추요 고집쟁이 욕심많은 영감으로 동냥하러 찾아오는 사람에게

학대와 구박을 하여 빈손으로 쫓아버려 인근주민들에게 고약한 늙은이라 소문이 나 있었다.

 

이 말을 들은 한 도사가 하루는 찾아가 시주를 청하니 역시 거절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괘씸히 생각한 나머지 이 영감을 망해 놓겠다는 결심으로 몇일 후 다시 찾아가 공손히 절을 하고 나서

이 뒷산기암에다 2개의 부처를 조각하여 세워 보시면 만석꾼이 될 터인데 하고 돌아서 오니

쫓아오며 그게 정말이냐고 물어 반문하자 “틀림없습니다”라고 공손히 합장하고 물러났다.

 

옳게 여긴 욕심장이 영감은 많은 돈을 들여 쌍불상을 만들어 모시게 되었다 한다. 그

러나 얼마 안가서 흐지부지 재산이 없어져 버리고 영감은 울화병으로 고생만 하다가 죽었다 한다.

 

또한 석불 앞 200미터지점 밭 가운데 장사바위와 말바위가 나란히 있는데

이것을 부처님의 공양미바위로 부르기도 하는데

약 800근이나 되는 두 바위가 밭갈이에 거추장스러워 밭주인이 깨어 없애 버리려고 징으로 바위를 뚫으니

징구멍에서 피가 흘러 나오며 큰 소리가 나와 깜짝 놀라 정신을 잃고 자빠져 수개월동안 병석에서 고생하였다 하며

그후 일절 손을 대지 못하였다 한다.

 

- http://www.pajusi.com/xe/pjinfo/page3.htm 에서 -

 

 

 

용암사 용미리 석불입상
 

용미리 석불입상은 천연암벽을 몸체로 삼아 그 위에 목ㆍ머리ㆍ갓 등을 따로 만들어 얹어 놓은 석불이다.

보물 제 93호로 왼쪽의 불상은 사각형의 갓을 쓰고 있고, 오른쪽의 불상은 원형의 갓을 쓰고 있는데

마을 앞의 장승처럼 각각 여상과 남상을 상징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거대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했기 때문에 위압감(威壓感)은 있으나

신체 비율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서투른 조각수법을 가지고 있어 조상(造像)의 지방화된 양식을 보여준다.

왼쪽의 둥근갓을 쓴 불상(원립불 : 圓笠佛)은 장방형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어 안동 제비원 석불과 비슷하다.

하지만 부처의 상호로서 정신적인 불성(佛性)은 적어 보이며, 세속적이고 민속적인 얼굴이 지방화되어 표현된듯하다.

 

목은 원통형이며 당당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지만, 돌이라는 바위의 제약으로 목과 가슴이 혼연일체 되지 못하고 있다.

몸체는 법의(法衣)로 감싸고 있으며, 옷자락은 양쪽으로 길게 늘어져 가운데를 V자형 선으로 조각하였다.

법의 상체는 유연하여 가슴의 띠매듭이 이 불상의 장식적인 효과를 보여주나

아랫부분은 옷자락을 나타내는 선만 조각했을 뿐이어서 바위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다.

 

양손은 가슴에 들어 올려 연꽃을 잡고 있는데,

이는 관촉사 미륵보살상, 대조사 미륵 보살상처럼 이 불상 역시 미륵보살상이 아닌가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오른쪽 사각형의 갓을 쓴 불상(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만 다를 뿐

신체 다른 부위의 조각수법은 왼쪽 불상과 흡사하다.

오른쪽 석불의 합장한 모습은 석불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안녕을 빌기라도 하듯이

지극히 내려 보면서 무엇인가 간절히 바라는 모양이다.

 

합장한 모양이 벙어리 장갑을 끼고 있는 것 같아 웃음을 자아낸다.

또 불상의 옆쪽 벽면에는 200여자의 명문이 희미하게 조각돼 있는데,

마멸이 심해 판독은 어려우나 전설로 내려오는 용암사의 창건과 쌍미륵의 구전 내용일 것으로 추측 된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가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

지금도 이곳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불공을 드리기 위해 많이 찾고 있으며,

전설의 내용에 따라 많은 이들의 무병과 득남을 위한 영험있는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 한국의 사찰 홈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