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남대문(숭례문)→대한상공회의소→소의문터→순화빌딩→배재공원→정동교회→이화여고→서대문터(돈의문)→강북삼성병원(경교장)
→월암근린공원→홍난파기념관→딜쿠샤ㆍ권율장군집터→옥경이슈퍼→범바위→인왕산 정상(삿갓바위:338m)→청운공원(윤동주시인의언덕)
→자하문고개→창의문(자하문)→창의문쉼터→북악산 정상(백악마루:342m)→숙정문→말바위 쉼터→와룡공원→서울과학고 후문→경신고교
→서울시장공관→혜화문(동소문)→한성대입구역→삼선주유소→낙산 정상(駝駱山:125m)→동대문성곽공원→동대문(흥인지문)→오간수문
→이간수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한양공고→광희문→신당동 성당→장충체육관 뒤→신라호텔 담→반야트리호텔(舊타워호텔)→국립극장
→N서울타워(루프테라스)→남산 정상(팔각정:262m)→잠두봉포토아일랜드→남산분수대→백범광장→힐튼호텔→남대문(숭례문)→서울역
서울성곽의 탄생 국가를 상징하는 궁궐과 종묘 · 사직이 세워지면서 이를 방어할 도성(都城)이 필요했다. 이른바 성곽(城郭)의 구축이다. 성곽이 서고서야 도성의 규모가 갖춰지는 것이며, 명실공히 수도의 면모를 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원래는 도성도 한양 신도(新都) 건설 당시 동시에 쌓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궁궐과 종묘 · 사직의 건설이 먼저였기 때문에 곧 착수하지 못하다가, 태조 4년(1395) 9월 궁궐과 종묘의 공사가 끝날 무렵 도성 축조령이 떨어졌다. 즉 9월 26일에 좌 · 우 정승에게 다음 해 정월부터 각 도의 장정들을 징집해 도성을 쌓을 것을 명했던 것이다. 태조는 "성(城)은 국가의 울타리요, 강폭한 적을 방어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해 없을 수 없는 것"이라며 직접 산에 올라 성 쌓을 곳을 살폈다고 한다. 정도전은 윤 9월에 백악 인왕산 남산 낙산에 올라 이 네 개의 산을 연결한 총 길이 59,500척의 성터를 실측, 성곽의 기본을 잡았다. 남산을 제외한 백악 인왕산 낙산이 모두 종로구 지역임을 감안하면 서울 성곽 · 도성의 55% 이상이 종로인 셈이다. 도성축조와 관련,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기도 한다. 도성을 어느 규모로 쌓아야 할 지 고심하던 중 어느 날 아침 깨어보니 밤 사이 눈이 내렸는데, 지금의 도성 울 안쪽은 눈이 녹고, 바깥 쪽에만 하얀 눈이 줄을 그은 듯 남아 있었다. 이에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그 선을 따라 도성을 쌓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태조의 왕사인 무학대사는 새 왕조에서 불교의 쇠퇴를 막기 위해 인왕산 서쪽 장삼에 고깔 쓴 스님 형상의 선바위를 도성 안에 넣고자 인왕산에서 무악으로 연결시키는 도성을 쌓을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이 정도전의 반대로 무산되자 "이후 불자는 유생의 책 보따리나 져 나르는 심부름꾼을 면치 못하겠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성곽 축조공사
오늘 날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 후보로도 올라있는 서울 성곽(둘레 약 17킬로미터)은 태조 5년(1396) 1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49일간 계속되었다. 공사 진행 방법은 59,500척의 성터 중 600척을 1區로 정하고, 각 구마다 천자문으로 표시했다. 예컨대 백악산 동쪽에서 天字로 시작, 낙산 남산 인왕산을 거쳐 백악산 서쪽에서 字로 마쳤다. 59,500척의 성터를 600척씩 97字 區로 나누면 1,300척이 남는데, 이것은 인왕산 정상에 성을 쌓지 않아도 좋을 자연 석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전체의 성터를 600척씩 97字 구로 나누고, 1자 구를 다시 100척씩 6號로 나누어 동북면(백악산 동쪽 정상-숙정문), 강원도(숙정문-동소문), 경상도(동소문-남대문), 전라도(남대문-옛 서대문), 서북면(옛 서대문-백악산 서쪽 정상) 등의 구획으로 각 도(道) 인구비례에 따라 일을 분배했다.
이때 경기 충청 황해도의 장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전년도 궝궐 공사에 동원했기 때문이고,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의 국방을 감안해 서북면 안주 이북과 동북면 함주 이북의 장정들도 제외했다고 한다. 축성공사는 완벽을 기하기 위해 이중 삼중의 책임자와 감독자를 두어 그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성벽 바깥 쪽 돌에 감독자의 출신지와 성명 등을 새기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기간에 17킬로미터의 성을 쌓느라 부실하고 조잡한 데가 있었다. 때문에 1396년 8월부터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의 백성 7만 9,400명을 징발해 2차 공사를 또 했다. 2차 공사는 1차 공사에서 완성하지 못했던 부분의 완성과 여름철 장마에 무너진 곳의 개축, 낮은 성문의 보수, 누각을 짓는 일 등에 주력했다. 4대문 4소문 등 8개 성문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후에도 승려 · 군인들을 동원한 성곽 보수공사는 계속되다가 세종 4년(1422)에 와서야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한편 성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다시 부서지고, 그 후 또 보수하기를 거듭했다. 일제 강점기의 도시계획과 6. 25 한국전쟁 때도 성문과 벽이 많이 부서졌다. 현재 남아 있는 서울성곽은 대체로 태조 · 세조 · 숙종 때의 것이라 한다. 삼청동 성북동 장충동 일대에 성벽이 남아 있고, 흥인지문(동대문)과 숙정문 · 홍화문이 남아 있다. 국보1호로 지정되었던 숭례문(남대문)은 온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 얼마 전 불타고 지금은 복원공사 중이다. 2008년 2월 10일 완전소실된 숭례문(남대문)은 5년 3개월의 복원공사 끝에 오늘(2013년 5월 4일) 준공식을 하였다.
4대문과 4소문
성곽의 축성과 더불어 자연히 성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문들도 생겼다. 서울 성곽은 전체 둘레 약 17킬로미터 구간 요소마다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을 만들어 냈다. 이른바 '4대문 4소문'이다. 4개의 대문은 유교의 5상(5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에 의해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두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해당되는 곳에 보신각(普信閣)을 두어 도읍지의 이상과 정치이념을 나타냈다. 또한 대문과 대문 사이의 요충지에 작은 문을 두어 관문으로 활용토록 했으니 혜화문(동소문), 광희문, 소의문(서소문), 창의문(자하문)이 그들이다. |
순성(巡城)놀이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은 동서남북으로 바깥쪽은 외사산(아차산, 덕양산, 관악산, 북한산)이 둘러싸고 외수(한강)가 흐르며, 안쪽으로 내사산(낙산, 인왕산, 목멱산, 백악산)과 내수(청계천)가 있는 명당이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를 건국한 뒤 내사산을 잇는 서울성곽을 축조하였는데 2/3는 토성이었다. 그 뒤 세종이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숙종 때 보수공사를 고쳐 오늘에 이르렀다.
서울 도성의 둘레는 약 사십여리(약18㎞)인데, 순성(巡城)놀이는 봄과 여름철에 성안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성곽 둘레를 따라서 한 바퀴 돌며 성 안팎의 경치를 구경하고 과거 급제를 비롯한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조선 정조 때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誌)라는 책에는 “도성을 한 바퀴 돌아서 도성 안팎의 화류(花柳) 구경을 하는 것이 멋있는 놀이인데, 새벽에 출발하여 저녁종 칠 때에 다 볼 수 있다. 산길이 깎은 듯 험해서 지쳐서 돌아오는 사람이 많다” 하였다.
2013년 05월 04일(토)에 맥가이버와 함께 하는 '순성놀이'는 서울역에서 만나 숭례문을 출발하여 내사산(인왕산, 백악산, 낙산, 목멱산)과 4대문(돈의문, 숙정문, 흥인문, 숭례문), 그리고 4소문(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을 거치며, 600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생태도시 서울을 두 발로 걸으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는 여행이다.
지난 2008년 2월 10일 남대문(숭례문)이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5년 3개월의 복원공사로 마무리 되어 당일(5월 4일)에 남대문(숭례문) 준공 기념식을 한다니 더욱 뜻깊은 순성놀이가 되리라 여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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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의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 일주'에 관하여...
--☞ 오래 전부터 막연하게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꿈꾸다가 지난 2006년 3월 2일자 모 일간지에 [건축가 황두진의 서울성곽 하루에 돌기]를 보고... 2006년 3월 05일(일)에 그 신문을 들고 '서울성곽일주'를 위한 답사를 나서 홀로 '서울성곽 길찾기 일주'를 하였었고, 두 번째는 2006년 4월 30일(일)에 좋은 님들과 함께 11시간 20분에 걸쳐 '서울성곽일주'를 하였으며, 세 번째는 2006년 9월 22일(금)~23일(토) 양일간에 걸쳐 '야간 서울성곽일주'를 한 적이 있었으며, 네 번째는 2009년 2월 22일(일)에 10시간 10분이 걸쳐서 보다 완전한 '서울성곽일주'를 하였으며, 그러니까 '서울성곽일주'는 네 번째가 제대로 된 ‘서울성곽일주’인 것이었다. 처음과 두 번째, 세 번째 '서울성곽일주'는 북악산 구간이 통제되었었고, 야간에 통행이 불가한 관계로 북악산 성곽 구간을 빼고 창의문(자하문)에서 청와대 앞을 지나 삼청동을 거쳐 감사원길을 따라 와룡공원으로 우회하여 북악산의 나머지 성곽을 걸었었다. 다시 차일피일하다가 |
☞ '숭례문(남대문) 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의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 14시 51분 - 말바위쉼터를 향해...
▼ 삼청각
▼ 14시 58분 - 말바위쉼터를 통과하여...
▼ 와룡공원으로...
▼ 15시 03분 - 와룡공원으로 가는 길에 있는 전망장소에서...
▼ 데크계단을 내려서서...
▼ 애기똥풀꽃
애기똥풀꽃[Chelidonium majus var. asiaticum]
쌍떡잎식물 양귀비목 양귀비과의 두해살이풀. 학명 : Chelidonium majus var. asiaticum 분류 : 양귀비과 분포지역 : 한국·일본·중국 동북부·사할린·몽골·시베리아·캄차카반도 서식장소 : 마을 근처의 길가나 풀밭 크기 : 높이 30∼80cm
까치다리, 씨아똥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근처의 길가나 풀밭에서 자란다.
뿌리는 곧고 땅 속 깊이 들어가며 귤색이다. 줄기는 가지가 많이 갈라지고 속이 비어 있으며 높이가 30∼80cm이고 분처럼 흰색을 띠며 상처를 내면 귤색의 젖 같은 액즙이 나온다.
잎은 마주나고 1∼2회 깃꼴로 갈라지며 길이가 7∼15cm이고 끝이 둔하며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와 함께 깊이 패어 들어간 모양이 있다. 잎 뒷면은 흰색이고 표면은 녹색이다.
꽃은 5∼8월에 황색으로 피고 줄기 윗부분의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가지 끝에 산형꽃차례를 이루며 몇 개가 달린다.
꽃의 지름은 2cm이고, 꽃받침조각은 2개이며 길이 6∼8mm의 타원 모양이고 일찍 떨어진다. 꽃잎은 4개이고 길이 12mm의 긴 달걀 모양이며, 수술은 많고, 암술은 1개이며 암술머리는 약간 굵고 끝이 2개로 얕게 갈라진다.
열매는 삭과이고 좁은 원기둥 모양이며 길이가 3∼4cm이다. 한방에서는 식물체 전체를 백굴채(白屈菜)라고 하며, 위장염과 위궤양 등으로 인한 복부 통증에 진통제로 쓰고, 이질·황달형간염·피부궤양·결핵·옴·버짐 등에 사용한다. 한국·일본·중국 동북부·사할린·몽골·시베리아·캄차카반도 등지에 분포한다.
[출처]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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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똥풀꽃 / 이문조
텃밭 가장자리
노오란 예쁜꽃
이렇게 아름다운 꽃 이름이
애기똥풀꽃이라니
같은 뿌리 양귀비꽃이름 덕(德)에
지극한 사랑 받는데
불쌍한 녀석
놀림도 많았겠지
개명(改名)이라도 했어야지 예쁜 꽃 착한 꽃
아무려면 어떠냐고
그저 노오랗게 웃고만 있네.
▼ 15시 13분 - 와룡고원으로 나가는 쪽문을 통과하여...
▼ 와룡공원에서 만난 성북동비둘기의 짝짓기 장면을...
▼ 짝짓기 후...
▼ 그들은 파고라 위로 올라가...
▼ 15시 17분 - 다시 길을 나서고...
▼ 명자나무꽃
명자나무 쌍떡잎식물 장미목 장미과의 낙엽관목.
학명 : Chaenomeles lagenaria 계 : 식물 문 : 속씨식물 강 : 쌍떡잎식물 목 : 장미목 원산지 : 중국 크기 : 높이 2m 내외 중국 원산이며 오랫동안 관상용으로 심어 왔다. 높이 2m 내외에 달하고 가지 끝이 가시로 변한 것이 있다. 잎은 어긋나고 타원형이며 양 끝이 좁아지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며 턱잎은 일찍 떨어진다. 꽃은 단성(單性)으로 4월 중순경에 피고 지름 2.5∼3.5cm이며 짧은 가지 끝에 1개 또는 여러 개가 모여 달리며 적색이지만 원예품종에는 여러 가지 꽃색이 있다.
열매는 7∼8월에 누렇게 익고 타원형이며 길이 10cm 정도이다. 참산당화(var. cathayensis)는 잎이 바소꼴에 가까우며 톱니가 뾰족하다. [출처]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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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시 23분 - 성북동주민의 통행편의를 위해 훗날 만들어진 성북동 암문
▼ 15시 24분 - 잠시 휴식하며...
▼ 15시 48분 - 혜화문(동소문)을 향해...
▼ 15시 55분 - 서울왕돈까스
▼ 경신중ㆍ고교의 담장아래 축대로 사용된 서울성곽
▼ 16시 00분 - 경신중고교 운동장에서는...
▼ 16시 05분 - 혜화문으로 가는 철문을 들어서서...
▼ 서울시장공관
▼ 16시 07분 - 혜화문(동소문)
4소문 中 동소문 - 혜화문(惠化門)
한양도성의 ‘동소문’이다. 본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으나, 창경궁을 세우면서 그 동문을 ‘홍화문’(弘化門)이라 짓는 바람에 이름을 바꾸어 혜화문이라 했다. 중종 6년(1511) 부터의 일이니, 혜화문이라 불린 지도 꽤 오래된 셈이다. 특히 이 문은 숙정문이 늘 닫혀 있다 보니 북대문의 역할까지 하느라 많은 사람들이 통행했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영조 20년(1744)에 문루를 재건했다. 1928년 일제의 도시계획으로 다시 헐렸다가 1994년 성곽과 함께 복원했다. 문의 홍예 틀 내부 천장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는데, 주변에 새가 많아 새들의 왕인 봉황을 그려 막으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종로구 혜화 로타리에서 성북구 삼선교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 복원된 혜화문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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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시 13분 - 한성대입구역 5번 출입구로 들어가서 4번 출입구로 나와야...
▼ 16시 14분 - 삼선주유소를 지나...
▼ 16시 16분 - 낙산성곽으로 오르는 계단...
▼ 16시 25분 - 카페가 생겼네...
낙산[駱山] 서울 종로구와 성북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
서쪽의 인왕산(仁旺山)과 동서(東西)로 마주보며 대치하는 산으로, 높이는 약 125m이다. 산 전체가 노출된 화강암(花崗岩)으로 이루어져 있고 산 모양이 낙타(駱駝)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 또는 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서울 남산, 인왕산, 북악산과 함께 서울을 둘러싼 능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성곽으로 이어졌다. 산 북쪽에 있었던 홍화문(弘化門:東小門)은 없어졌으나, 남쪽에 있는 흥인지문(興仁之門:東大門)은 남대문과 함께 서울의 상징이 되고 있다. 낙산에는 낙산의 유방이라고 불렸던 약수터 2곳이 있었는데 각 이화동약수, 신대약수로 불렸다. 오래 전부터 숲이 우거지고 야트막한 산으로 산책길로 많이 이용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문인들이 낙산 인근에 별장을 짓고 살았다. 인평대군이 거처했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고, 그외 이화정(梨花亭), 일옹정(一翁亭), 백림정(柏林亭) 등의 정자가 있었다.
근래에는 한 때 산 중턱까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지만,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아파트가 철거되고 성곽이 복원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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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시 31분 - 암문을 통과하여...
낙산[駱山] 서울특별시 종로구·동대문구·성북구에 걸쳐 있는 산. 내용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아 낙타산 또는 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양도성의 동산(東山)에 해당하여 서쪽의 인왕산(仁旺山)에 대치되는 산이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예전에는 숲이 우거지고 깨끗한 수석과 약수터가 있어 산책로로 많이 이용되었으며 동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를 위시하여 유적이 많았다. 효종 때 왕의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의 거소인 석양루(夕陽樓)를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 영조시대의 문인 이심원(李心源)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등은 왕족·문인·가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또한, 산록에 있던 쌍계동(雙溪洞)은 암석이 기이하고 수림이 울창하며 맑은 물이 흐르는 절경으로 삼청·인왕·백운·청학과 더불어 도성내 5대명승지로 꼽혔다. 현재는 산중턱까지 아파트가 들어서 옛 자취를 찾기 어렵고 다만 산정에 남아 있는 성벽만이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산 북쪽에 있었던 홍화문(弘化門)은 없어졌으나 남쪽에 있는 흥인지문(興仁之門 : 東大門)은 서울의 상징이 되고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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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駱山, Naksan]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서울특별시 성북구 서울특별시의 종로구와 동대문구, 성북구에 걸쳐 위치한 산이다(고도:97m).
산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다고 해서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 또는 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에 "도성 안 동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혜화문에서 흥인문을 잇는 서울 성곽이 이 산에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타락산이 궐내(闕內)를 굽어 눌러 있으니, 그 밑에 목책을 설치하여 올라가서 바라보지 못하게 하라." 등 조선 연산군 연간에 성내를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낙산의 인가를 철거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수차례 나온다.
낙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한 지맥이 뻗어 나온 산봉이 있는데 이를 동망봉(東望峯)이라 부른다. 성북구와 종로구에 걸쳐 있다.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내어주고 영월로 귀양가 있을 때, 단종왕비 송씨가 청룡사에 살면서 매일 이 산봉우리에 올라가 동쪽의 단종이 있던 영월을 바라보았다 하여 봉우리 이름을 동망봉이라 하였다.
『여지비고』에서 "연미정동(燕尾亭洞)에 있는데 영조 47년에 어필로 글씨를 써서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 출처 :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2008.12, 국토지리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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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시 35분 - 낙산 정상 인증샷
▼ 16시 38분 - 낙산성곽을 따라 동대문으로...
▼ 16시 45분 - 저곳에선...
▼ 잠시 천사가 되어보고...
▼ 16시 55분 - 동대문성곽공원을 지나...
▼ 16시 57분 - 동대문이 보이네...
▼ 동대문교회 아래 성곽에는 공사실명제 각자가 새겨진 성돌이...
성벽 안팎을 살펴보면 글자가 새겨진 성돌(각자석)들이 많이 보인다. 조선시대 ‘공사실명제’의 흔적이다. 태조 때 서울 성곽을 처음 쌓을 당시 천자문의 글자 순으로 공사구간을 정했다. 전체 공사구간을 600자(약 180m)씩 97개 구간으로 나눠 각 군·현에 할당했다. 북악산 정상에서 ‘하늘 천(天)’ 자로 시작해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다시 북악산에서 ‘불쌍할 조(弔)’ 자로 공사구간이 끝난다. 태조 때 각자석엔 구간과 지역명, 날짜를 주로 새겼으나, 조선 중기 이후 각자석엔 감독관·책임기술자 등의 이름까지 명기돼 있다. 숙종 이전 성축의 각자는 주로 성벽 바깥에, 이후의 각자는 주로 여장 부분 안쪽에 새겨져 있다. |
▼ 17시 02분 - 동대문에 도착...
☞ 여기서 '숭례문(남대문) 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다녀오다 - 3부를 마치고...
-▥☞ 1부[서울역→남대문→서대문터→경교장→홍난파기념관→딜쿠샤→옥경이슈퍼→범바위→인왕산 정상]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2부[인왕산 정상→청운공원(윤동주시인의언덕)→창의문(자하문)→북악산 정상→청운대→숙정문]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3부[숙정문→와룡공원→혜화문→한성대입구역→낙산 정상→동대문성곽공원→동대문(흥인지문)]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4부[동대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광희문→반야트리호텔→국립극장→N서울타워→남산 각정]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5부[남산 팔각정→잠두봉포토아일랜드→남산분수대→백범광장→힐튼호텔→남대문→서울역]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문화유적탐방후기☞ > ♣ 서울한양도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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