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남대문(숭례문)→대한상공회의소→소의문터→순화빌딩→배재공원→정동교회→이화여고→서대문터(돈의문)→강북삼성병원(경교장)
→월암근린공원→홍난파기념관→딜쿠샤ㆍ권율장군집터→옥경이슈퍼→범바위→인왕산 정상(삿갓바위:338m)→청운공원(윤동주시인의언덕)
→자하문고개→창의문(자하문)→창의문쉼터→북악산 정상(백악마루:342m)→숙정문→말바위 쉼터→와룡공원→서울과학고 후문→경신고교
→서울시장공관→혜화문(동소문)→한성대입구역→삼선주유소→낙산 정상(駝駱山:125m)→동대문성곽공원→동대문(흥인지문)→오간수문
→이간수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한양공고→광희문→신당동 성당→장충체육관 뒤→신라호텔 담→반야트리호텔(舊타워호텔)→국립극장
→N서울타워(루프테라스)→남산 정상(팔각정:262m)→잠두봉포토아일랜드→남산분수대→백범광장→힐튼호텔→남대문(숭례문)→서울역
서울성곽의 탄생 국가를 상징하는 궁궐과 종묘 · 사직이 세워지면서 이를 방어할 도성(都城)이 필요했다. 이른바 성곽(城郭)의 구축이다. 성곽이 서고서야 도성의 규모가 갖춰지는 것이며, 명실공히 수도의 면모를 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원래는 도성도 한양 신도(新都) 건설 당시 동시에 쌓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궁궐과 종묘 · 사직의 건설이 먼저였기 때문에 곧 착수하지 못하다가, 태조 4년(1395) 9월 궁궐과 종묘의 공사가 끝날 무렵 도성 축조령이 떨어졌다. 즉 9월 26일에 좌 · 우 정승에게 다음 해 정월부터 각 도의 장정들을 징집해 도성을 쌓을 것을 명했던 것이다. 태조는 "성(城)은 국가의 울타리요, 강폭한 적을 방어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해 없을 수 없는 것"이라며 직접 산에 올라 성 쌓을 곳을 살폈다고 한다. 정도전은 윤 9월에 백악 인왕산 남산 낙산에 올라 이 네 개의 산을 연결한 총 길이 59,500척의 성터를 실측, 성곽의 기본을 잡았다. 남산을 제외한 백악 인왕산 낙산이 모두 종로구 지역임을 감안하면 서울 성곽 · 도성의 55% 이상이 종로인 셈이다. 도성축조와 관련,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기도 한다. 도성을 어느 규모로 쌓아야 할 지 고심하던 중 어느 날 아침 깨어보니 밤 사이 눈이 내렸는데, 지금의 도성 울 안쪽은 눈이 녹고, 바깥 쪽에만 하얀 눈이 줄을 그은 듯 남아 있었다. 이에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그 선을 따라 도성을 쌓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태조의 왕사인 무학대사는 새 왕조에서 불교의 쇠퇴를 막기 위해 인왕산 서쪽 장삼에 고깔 쓴 스님 형상의 선바위를 도성 안에 넣고자 인왕산에서 무악으로 연결시키는 도성을 쌓을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이 정도전의 반대로 무산되자 "이후 불자는 유생의 책 보따리나 져 나르는 심부름꾼을 면치 못하겠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성곽 축조공사
오늘 날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 후보로도 올라있는 서울 성곽(둘레 약 17킬로미터)은 태조 5년(1396) 1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49일간 계속되었다. 공사 진행 방법은 59,500척의 성터 중 600척을 1區로 정하고, 각 구마다 천자문으로 표시했다. 예컨대 백악산 동쪽에서 天字로 시작, 낙산 남산 인왕산을 거쳐 백악산 서쪽에서 字로 마쳤다. 59,500척의 성터를 600척씩 97字 區로 나누면 1,300척이 남는데, 이것은 인왕산 정상에 성을 쌓지 않아도 좋을 자연 석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전체의 성터를 600척씩 97字 구로 나누고, 1자 구를 다시 100척씩 6號로 나누어 동북면(백악산 동쪽 정상-숙정문), 강원도(숙정문-동소문), 경상도(동소문-남대문), 전라도(남대문-옛 서대문), 서북면(옛 서대문-백악산 서쪽 정상) 등의 구획으로 각 도(道) 인구비례에 따라 일을 분배했다.
이때 경기 충청 황해도의 장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전년도 궝궐 공사에 동원했기 때문이고,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의 국방을 감안해 서북면 안주 이북과 동북면 함주 이북의 장정들도 제외했다고 한다. 축성공사는 완벽을 기하기 위해 이중 삼중의 책임자와 감독자를 두어 그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성벽 바깥 쪽 돌에 감독자의 출신지와 성명 등을 새기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기간에 17킬로미터의 성을 쌓느라 부실하고 조잡한 데가 있었다. 때문에 1396년 8월부터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의 백성 7만 9,400명을 징발해 2차 공사를 또 했다. 2차 공사는 1차 공사에서 완성하지 못했던 부분의 완성과 여름철 장마에 무너진 곳의 개축, 낮은 성문의 보수, 누각을 짓는 일 등에 주력했다. 4대문 4소문 등 8개 성문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후에도 승려 · 군인들을 동원한 성곽 보수공사는 계속되다가 세종 4년(1422)에 와서야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한편 성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다시 부서지고, 그 후 또 보수하기를 거듭했다. 일제 강점기의 도시계획과 6. 25 한국전쟁 때도 성문과 벽이 많이 부서졌다. 현재 남아 있는 서울성곽은 대체로 태조 · 세조 · 숙종 때의 것이라 한다. 삼청동 성북동 장충동 일대에 성벽이 남아 있고, 흥인지문(동대문)과 숙정문 · 홍화문이 남아 있다. 국보1호로 지정되었던 숭례문(남대문)은 온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 얼마 전 불타고 지금은 복원공사 중이다. 2008년 2월 10일 완전소실된 숭례문(남대문)은 5년 3개월의 복원공사 끝에 오늘(2013년 5월 4일) 준공식을 하였다.
4대문과 4소문
성곽의 축성과 더불어 자연히 성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문들도 생겼다. 서울 성곽은 전체 둘레 약 17킬로미터 구간 요소마다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을 만들어 냈다. 이른바 '4대문 4소문'이다. 4개의 대문은 유교의 5상(5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에 의해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두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해당되는 곳에 보신각(普信閣)을 두어 도읍지의 이상과 정치이념을 나타냈다. 또한 대문과 대문 사이의 요충지에 작은 문을 두어 관문으로 활용토록 했으니 혜화문(동소문), 광희문, 소의문(서소문), 창의문(자하문)이 그들이다. |
순성(巡城)놀이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은 동서남북으로 바깥쪽은 외사산(아차산, 덕양산, 관악산, 북한산)이 둘러싸고 외수(한강)가 흐르며, 안쪽으로 내사산(낙산, 인왕산, 목멱산, 백악산)과 내수(청계천)가 있는 명당이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를 건국한 뒤 내사산을 잇는 서울성곽을 축조하였는데 2/3는 토성이었다. 그 뒤 세종이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숙종 때 보수공사를 고쳐 오늘에 이르렀다.
서울 도성의 둘레는 약 사십여리(약18㎞)인데, 순성(巡城)놀이는 봄과 여름철에 성안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성곽 둘레를 따라서 한 바퀴 돌며 성 안팎의 경치를 구경하고 과거 급제를 비롯한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조선 정조 때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誌)라는 책에는 “도성을 한 바퀴 돌아서 도성 안팎의 화류(花柳) 구경을 하는 것이 멋있는 놀이인데, 새벽에 출발하여 저녁종 칠 때에 다 볼 수 있다. 산길이 깎은 듯 험해서 지쳐서 돌아오는 사람이 많다” 하였다.
2013년 05월 04일(토)에 맥가이버와 함께 하는 '순성놀이'는 서울역에서 만나 숭례문을 출발하여 내사산(인왕산, 백악산, 낙산, 목멱산)과 4대문(돈의문, 숙정문, 흥인문, 숭례문), 그리고 4소문(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을 거치며, 600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생태도시 서울을 두 발로 걸으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는 여행이다.
지난 2008년 2월 10일 남대문(숭례문)이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5년 3개월의 복원공사로 마무리 되어 당일(5월 4일)에 남대문(숭례문) 준공 기념식을 한다니 더욱 뜻깊은 순성놀이가 되리라 여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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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의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 일주'에 관하여...
--☞ 오래 전부터 막연하게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꿈꾸다가 지난 2006년 3월 2일자 모 일간지에 [건축가 황두진의 서울성곽 하루에 돌기]를 보고... 2006년 3월 05일(일)에 그 신문을 들고 '서울성곽일주'를 위한 답사를 나서 홀로 '서울성곽 길찾기 일주'를 하였었고, 두 번째는 2006년 4월 30일(일)에 좋은 님들과 함께 11시간 20분에 걸쳐 '서울성곽일주'를 하였으며, 세 번째는 2006년 9월 22일(금)~23일(토) 양일간에 걸쳐 '야간 서울성곽일주'를 한 적이 있었으며, 네 번째는 2009년 2월 22일(일)에 10시간 10분이 걸쳐서 보다 완전한 '서울성곽일주'를 하였으며, 그러니까 '서울성곽일주'는 네 번째가 제대로 된 ‘서울성곽일주’인 것이었다. 처음과 두 번째, 세 번째 '서울성곽일주'는 북악산 구간이 통제되었었고, 야간에 통행이 불가한 관계로 북악산 성곽 구간을 빼고 창의문(자하문)에서 청와대 앞을 지나 삼청동을 거쳐 감사원길을 따라 와룡공원으로 우회하여 북악산의 나머지 성곽을 걸었었다. 다시 차일피일하다가 |
☞ '숭례문(남대문) 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의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 12시 31분 - 인왕산 정상 삿갓바위에서 인증샷
▼ 기차바위능선을 내려다 보니...
▼ 기차바위를 당기니...
▼ 아래 사진 두 장은 지난 2005년 10월 29일(토)에 '안산/인왕산 연계산행 後 청계천 야경 즐기기'를 다녀오면서 찍은 것임.
▼ 기관차처럼 생겨서 '기차바위'
▼ 12시 34분 - 이제 창의문을 향해..
▼ 제비꽃
제비꽃[Manchurian Violet] 학명 : Viola mandshurica
장수꽃·병아리꽃·오랑캐꽃·씨름꽃·앉은뱅이꽃이라고도 한다. 높이 10cm 내외이다. 원줄기가 없고 뿌리에서 긴 자루가 있는 잎이 자라서 옆으로 비스듬히 퍼진다.
꽃은 4∼5월에 잎 사이에서 꽃줄기가 자라서 끝에 1개씩 옆을 향하여 달린다.
어린 순은 나물로 먹는다. 풀 전체를 해독·소염·소종·지사·최토·이뇨 등의 효능이 있어 황달·간염·수종 등에 쓰이며 향료로도 쓰인다. 유럽에서는 아테네를 상징하는 꽃이었으며 로마시대에는 장미와 더불어 흔히 심었다.
꽃말은 겸양(謙讓)을 뜻하며, 흰제비꽃은 티없는 소박함을 나타내고 한국, 중국, 일본, 시베리아 동부 등지에 분포한다.
[출처]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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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바위능선
▼ 인왕산 정상 아래 넓게 펼쳐진 '병풍바위'...'치마바위'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 전설의 치마바위는 저 아래 수성동계곡에 있었으나 인왕스카이웨이를 만들 때 방해?가 되어서...
▼ 솜나물
솜나물 학명 : Leibnitzia anandria 부싯갓나물·대정초·까치취라고도 한다. 뿌리에서 나온 잎은 사방으로 퍼지고 잎자루가 길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고 뒷면에 흰 털이 있다. 꽃은 꽃자루 끝에 1개씩 달리고 5∼9월에 피며, 봄에 피는 꽃은 1줄의 흰 설상화가 있으나 가을에 피는 꽃은 폐쇄화이고 펴지지 않는다. 열매는 길이 6mm 정도의 수과로서 털이 약간 있고 양끝이 좁으며 관모는 갈색이다. 한국·일본·사할린섬·쿠릴열도·타이완·중국·시베리아에 분포한다. [출처] 두산백과
쌍떡잎식물 초롱꽃목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계 : 식물
문 : 속씨식물
강 : 쌍떡잎식물
목 : 초롱꽃목
분포지역 : 한국·일본·사할린섬·쿠릴열도·타이완·중국·시베리아
서식장소/자생지 : 건조한 숲속
크기 : 봄형 높이 10∼20cm, 가을형 높이 30∼60cm
건조한 숲속에서 자란다.
봄에 꽃이 피는 것은 높이 10∼20cm이고 뿌리줄기가 짧으며 잎이 갈라지지 않는다.
가을에 꽃이 피는 것은 높이 30∼60cm이고 잎이 깃처럼 갈라진다.
또한 잎 끝이 둔하고 밑부분이 잎자루로 흘러서 좁아져 가장자리가 무잎처럼 갈라지며 각 갈래조각은 서로 떨어져 있다.
총포는 통 모양이고 포비늘은 3줄로 배열하며 넓은 줄 모양으로 끝이 둔하다.
어린 순을 나물로 먹는다.
▼ 옥개석[屋蓋石] - 지붕돌로 사용된 옥개석은 전쟁시 최후의 무기로도 사용한다고...
▼ 석파정이 보여 당기니...
▼ 12시 47분 - 잠시 성곽밖으로 나갔다가..
▼ 12시 48분 - 다시 안으로 들어서서...
▼ 12시 54분 - 인왕산 청운동 날머리에서...
▼ 12시 58분 - 청운공원 서시정을 지나...
▼ 13시 00분 - 윤동주시인의언덕 전망소나무에서...
▼ '성가퀴'사이로 석파정을 바라보니...
석파정[石坡亭]
1974년에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이 집을 석파정이라고 한 것은 정자 앞산이 모두 바위여서 대원군이 석파(石坡)라고 이름지었으며,
원래 이곳은 조선 숙종 때 문신인 오재(寤齋) 조정만(趙正萬)의 별장인 소운암(巢蕓庵)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 후기 학자 황현(黃玹)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흥선대원군이 김흥근에게 이 정자를 팔기를 청했으나 거절하자 아들 고종과 함께 묵었는데 김흥근이 '임금이 묵고 가신 곳에 신하가 살 수 없다'고 헌납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정자는 세검정 자하문(紫霞門:창의문) 밖으로 통칭되던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승경지(勝景地)로, 소계류(小溪流)와 거암(巨岩) 장송(長松)을 배경으로 지었다. 석파정의 뜰은 넓고 수목이 울창하여 봄철의 꽃과 가을의 단풍 등 절기에 따라 풍치가 아름답다.
[출처]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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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파정을 당기니...
▼ 13시 03분 - 자하문고개를 지나...
▼ 창의문 밖 쌈지공원에서...
▼ 지나가던 과객이...
▼ 안면이 있는 과객에게 따듯한 커피를 제공해 주시고...
▼ 13시 22분 - 창의문(자하문)
4소문 中 북소문 - 창의문(彰義門) 한양 도성의 북문 역할을 했다.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한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북서쪽에 세운 문으로, 돌로 쌓은 홍예(虹霓)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구조의 문루가 있다. 4대문 중 북대문인 숙청문이 항상 닫혀 있었으므로 경기도 양주 등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문을 거쳐서 왕래했다.
인조반정 때 능양군(綾陽君)을 옹립한 의군(義軍)들이 세검정에 모여 칼을 씻은 후 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킨 유래가 있는 곳이다. 광해군 15년(1623) 이귀 등 서인 일파는 광해군과 이이첨 등 대북파를 몰아내기로 했다. 이른바 반정계획이다. 일을 추진하던 중 계획 일부가 누설되었으나, 3월 12일 이귀 김유 김자점 이괄 등은 예정대로 실행에 옮겼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깨고 입성,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점령했다.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났으나 잡혀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죽었다. 훗날 영조 임금이 이때 일을 기억하며, 누문 다락에 반정 때의 공신 명단을 게시해 걸었다.
또한 문의 추녀 끝에 나무로 만든 닭을 많이 매달았는데, 이는 문밖의 지세가 지네와 비슷한데다가 주변에 지네가 많아 이를 제압하기 위해 지네와 상극인 닭을 만들어 걸었을 것으로 본다. 현재의 창의문 모습은 1958년 보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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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루조 - 빗물이 흘러내리도록 구멍을 뚫어 지붕 처마에 설치한 돌. 이무기나 용을 새긴 것도 있다고...
▼ 13시 27분 - 창의문쉼터에서 통행 표찰을 받기 위해 인적사항을 기재하는 중...
▼ 13시 38분 - 북악산 성곽을 따라 출발...
▼ 13시 58분 - 짧은 휴식...
▼ 지나온 인왕산을 바라보니...
▼ 석파정을 당기니...
▼ 14시 01분 - 백악마루를 향해 출발...
▼ 14시 05분 - 백악마루 삼거리에서...
▼ 14시 08분 - 북악산(백악산) 정상에 도착...
북악산[北岳山:342m] 서울 경복궁(景福宮) 북쪽에 솟아 그 진산(鎭山)을 이루어온 산.
북악산과 경복궁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위치. 북악산은 서울 경복궁 북쪽에 위치한다.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한다. 높이 342m. 기반암은 화강암으로, 인왕산(仁王山)·낙산(駱山)·남산(南山) 등과 더불어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이다. 이들 산지 능선을 연결한 옛 서울의 성곽은 이 산을 기점으로 축조되었다. 산 능선에는 옛 성벽이 원형대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서쪽 산기슭과 인왕산과의 사이의 안부에는 서울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일명 紫霞門)이 남아 있다. 북악산은 노송이 울창한 경승지를 이루고 그 남쪽 기슭에 청와대가 있다. 창의문에서부터 정릉(貞陵) 입구에 이르는 북악스카이웨이가 북악산 주봉 북쪽 사면을 끼고 돌면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달리고, 남동쪽 산기슭에는 삼청(三淸)공원이 있다. [출처]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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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악산 정상에서 인증샷...
북악산[北岳山:342m] 백악산(白岳山), 면악산(面岳山), 공극산(拱極山) 서울특별시 종로구 팔판동ㆍ삼청동ㆍ부암동ㆍ청운동ㆍ궁정동과 성북구 성북동에 걸쳐 있는 산. 개설 북안산은 높이 342m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서울의 주산(主山)이다.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338m), 남쪽의 남산(南山, 262m), 동쪽의 낙산(駱山, 125m)과 함께 서울의 사산(四山) 중 하나로, 북쪽의 산으로 일컬어졌다. 명칭 유래 남산에 대칭하여 북악이라 칭했다. 조선시대까지 백악산(白岳山), 면악산(面岳山), 공극산(拱極山), 북악산(北岳山) 등으로 불렸고, 특히 조선시대에는 주로 백악 또는 백악산으로 불렸으며 일부 북악이라고 불렸다. 자연환경 북악산은 북한산의 남쪽 지맥의 한 봉우리에 해당한다. 산경의 흐름을 보면 한북정맥(漢北正脈)의 끝자락인 북한산 보현봉에서 서남 방향으로 형제봉을 거쳐 북악터널 위의 보토현(補土峴)으로 이어진다. 이어 표고 328m의 봉우리와 팔각정 휴게소 앞 능선을 따라 북악 뒤편에 구준봉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서울의 부주산(副主山)인 응봉(鷹峰)으로 이어져 경복궁의 배산인 북악에 다다른다. 북악산의 식물은 총 208종이고 그 중 나무는 81종이 있다. 교목류는 소나무, 팥배나무, 때죽나무, 산벚나무 등이 있고, 관목류는 진달래, 철쭉, 쥐똥나무, 국수나무 등이 있다. 침엽수로는 소나무가 대부분이며, 활엽수는 참나무 등 여러 종류가 섞여 자라고 있다. 그 외 성곽 주변에 아까시나무, 은수원사시나무, 리기다소나무 등 토사 유출을 막기 위하여 심은 나무와 최근 조경수로 심은 스트로브잣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팥배나무 군락은 숙정문 일대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북악산에서 청계천이 발원하는데, 2005년 11월 종로구청에서 조사한 청계천 발원지는 종로구 청운동 자하문 고개에 있는 최규식 경무관 동상에서 북악산 정상 쪽으로 약 150m 지점에 있는 약수터이다.
또한 북악산 동쪽 촛대바위 부근의 해발 245m 지점(동경 126°58′41.8″ 북위 37°35′34.4″)이 청계천의 최장 발원지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인왕산ㆍ북한산ㆍ낙산ㆍ남산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장벽의 구실을 한다. 형성 및 변천 서울 성곽은 북악산을 중심으로 축조되었다고 한다. 이 성은 1395년(태조 4)에 궁궐이 낙성된 뒤 같은 해 1월 기공식과 함께 착공되었다. 정도전(鄭道傳)은 성저(城底)를 측정(5만 9500자)하고 이를 97구로 나누어 각 1구를 약 600자로 하였으며, 각 구마다 천자문(千字文)의 글자로 번호를 붙였다. 다시 말하면 북악산의 정상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일주하면서 천(天)ㆍ지(地)ㆍ현(玄)ㆍ황(黃)·……의 순서로 글자를 붙여나가다가 95번째 글자인 조(弔)자에 이르러 북악산에 도달하도록 하였다. 현재도 산 능선에는 옛 성벽이 원형대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시대 북악산 기슭은 왕궁 및 관청과 가깝고, 또 경치가 좋았던 관계로 왕족과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하였고 별서가 많았다. 그리고 많은 문인과 화가들은 이 일대의 빼어난 경치를 그림과 시문으로 남겼다. 숙정문 북서쪽 약 400m 지점에는 촛대바위가 있는데, 일제 때 이 바위 상단부에 쇠말뚝을 박았었고, 광복 후 이 바위의 쇠말뚝을 제거하고 우리 민족의 발전을 기원하는 촛대를 세우며 이름을 ‘촛대바위’라 정하였다. 현재는 쇠말뚝을 제거한 부분이 콘크리트 기중으로 마감되어 있다. 현황 문화재청은 2007년 4월 2일자로 북악산 일대 170필지 3,682,738㎡를 사적 및 명승지 제10호로 지정하였다. 사적 지정 명칭은 조선시대 도성과 도성 축성의 개념인 내사산(內四山 : 백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 보존의 의미를 되살리고, 조선시대 각종 고지도 및 문헌 등 사료에 전하는 ‘백악(白岳)’의 지명을 살리기 위해 “서울 백악산 일원”으로 정하였다. 즉 일제 강점기 이후 불린 북악산이란 이름 대신에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불린 백악산으로 회복시키기로 한 것이다. 북악산 일원은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서울성곽(사적 제10호)과 서울부암동백석동천 유적(사적 제462호), 대은암(大隱岩)과 부아암(負兒岩) 등이 있으며, 한양의 후현무(後玄武), 북쪽 주산(主山)으로서 조선왕조가 도성을 정하였던 정치적 사상과 지형적 기본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서쪽 산기슭과 인왕산과의 사이의 안부(鞍部 : 봉우리 사이의 우묵한 곳)에는 서울 4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 일명 자하문)이 남아 있다. 창의문에서 정릉의 아리랑고개에 이르는 북악스카이웨이는 창의문, 팔각정, 풀장 등을 연결하는 관광도로로 울창한 숲과 서울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조망이 좋은 경승지이다. 북악산의 남동쪽 산기슭에는 삼청공원(三淸公園)이 있고, 동쪽에는 숙정문(肅靖門)이 있다. 숙정문은 조선의 도성 4대문 가운데 정북에 위치한 문이며 속칭 북문(北門)이다. 이 문은 태조 5(1396)년 백악산의 동쪽 고갯마루에 세웠는데, 도성 북쪽 방향을 출입할 때 이용하였다. 1968년 1ㆍ21사태 이후 북악산 지역이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었던 것이, 서울성곽 백악산(북악산) 일원 전면개방계획에 따라 일차적으로 2006년 4월 1일 숙정문과 함께 삼청터널 북쪽 홍련사(紅蓮寺)에서 도성(서울 성곽)을 따라 촛대바위까지 약 1.1㎞가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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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시 12분 - 이제 숙정문을 향해...
▼ 14시 14분 - 1ㆍ21사태 소나무
▼ 14시 17분 - 청운대에 도착...
▼ 14시 26분 - 성곽밖으로...
▼ 양지꽃
▼ 14시 29분 - 청풍암문을 통해 안으로...
▼ 성벽축조의 시대별 차이
▼ 14시 38분 - 촛대바위 쉼터에서...
▼ 14시 42분 - 숙정문으로...
▼ 14시 45분 - 숙정문
4대문 中 북대문 - 숙정문(肅靖門) 한양 도성의 북대문이다. 본래 북쪽에 해당되는 글자는 '知'자 인데, '靖'자를 넣어 독특한 느낌을 준다. 숙청문(肅淸門)이라고도 불렀다. 태조 4년(1395)에 처음 건립됐으나 태종 13년(1413)에 최양선이 백악산 동쪽 고개와 서쪽 고개는 경복궁의 양 팔에 해당되므로 이곳에 문을 내어선 안 된다는 의견을 제기함에 따라 창의문(자하문)과 함께 패쇄 하고,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게 했다. 실제 이 문은 산 중턱에 있어 문을 통과해도 동쪽 성북동 골짜기를 거쳐 혜화문(동소문)으로 나오는 길 밖에 없어 효용성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또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 여자들이 바람이 난다는 속설도 있었다. 음양오행사상에 따라 북쪽은 음에 해당되므로, 음기를 열어 여자들이 바람나는 것을 원치 않았을 법한 일이다. 문의 규모도 작았기 때문에 이 문을 대신해 창의문을 북문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가뭄이 심하면 이 문을 열어 비를 기다리기도 했다 한다. 1968년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인 1.21사태 이후로 엄격히 통제됐다. 1976년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하면서 문루를 다시 짓고 편액도 걸었다. 2006년 4월부터 일반인들도 볼 수 있도록 개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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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정문에서 인증샷
▼ 14시 51분 - 말바위쉼터를 향해...
☞ 여기서 '숭례문(남대문) 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다녀오다 - 2부를 마치고...
-▥☞ 1부[서울역→남대문→서대문터→경교장→홍난파기념관→딜쿠샤→옥경이슈퍼→범바위→인왕산 정상]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2부[인왕산 정상→청운공원(윤동주시인의언덕)→창의문(자하문)→북악산 정상→청운대→숙정문]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3부[숙정문→와룡공원→혜화문→한성대입구역→낙산 정상→동대문성곽공원→동대문(흥인지문)]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4부[동대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광희문→반야트리호텔→국립극장→N서울타워→남산 각정]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5부[남산 팔각정→잠두봉포토아일랜드→남산분수대→백범광장→힐튼호텔→남대문→서울역]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문화유적탐방후기☞ > ♣ 서울한양도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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