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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서울한양도성

[20130504]숭례문(남대문)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4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3. 5. 5.

 

30908

 

 
 
 2013년 05월 04일(토)  
숭례문(남대문) 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다녀오다.
- 인왕산ㆍ북악산ㆍ낙산ㆍ남산 연계산행 -
 
   맥가이버의 '숭례문(남대문) 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 코스
 

서울역→남대문(숭례문)→대한상공회의소→소의문터→순화빌딩→배재공원→정동교회→이화여고→서대문터(돈의문)→강북삼성병원(경교장)

→월암근린공원→홍난파기념관→딜쿠샤ㆍ권율장군집터→옥경이슈퍼→범바위→인왕산 정상(삿갓바위:338m)→청운공원(윤동주시인의언덕)

→자하문고개→창의문(자하문)→창의문쉼터→북악산 정상(백악마루:342m)→숙정문→말바위 쉼터→와룡공원→서울과학고 후문→경신고교

→서울시장공관→혜화문(동소문)→한성대입구역→삼선주유소→낙산 정상(駝駱山:125m)→동대문성곽공원→동대문(흥인지문)→오간수문

→이간수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한양공고→광희문→신당동 성당→장충체육관 뒤→신라호텔 담→반야트리호텔(舊타워호텔)→국립극장

→N서울타워(루프테라스)→남산 정상(팔각정:262m)→잠두봉포토아일랜드→남산분수대→백범광장→힐튼호텔→남대문(숭례문)→서울역

 

 맥가이버의 '숭례문(남대문) 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 이야기

 

 

서울성곽의 탄생


국가를 상징하는 궁궐과 종묘 · 사직이 세워지면서 이를 방어할 도성(都城)이 필요했다.

이른바 성곽(城郭)의 구축이다.

성곽이 서고서야 도성의 규모가 갖춰지는 것이며, 명실공히 수도의 면모를 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원래는 도성도 한양 신도(新都) 건설 당시 동시에 쌓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궁궐과 종묘 · 사직의 건설이 먼저였기 때문에 곧 착수하지 못하다가,

태조 4년(1395) 9월 궁궐과 종묘의 공사가 끝날 무렵 도성 축조령이 떨어졌다.

즉 9월 26일에 좌 · 우 정승에게 다음 해 정월부터 각 도의 장정들을 징집해 도성을 쌓을 것을 명했던 것이다.


태조는 "성(城)은 국가의 울타리요, 강폭한 적을 방어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해 없을 수 없는 것"이라며

직접 산에 올라 성 쌓을 곳을 살폈다고 한다.

정도전은 윤 9월에 백악 인왕산 남산 낙산에 올라

이 네 개의 산을 연결한 총 길이 59,500척의 성터를 실측, 성곽의 기본을 잡았다.

남산을 제외한 백악 인왕산 낙산이 모두 종로구 지역임을 감안하면 서울 성곽 · 도성의 55% 이상이 종로인 셈이다.


도성축조와 관련,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기도 한다.

도성을 어느 규모로 쌓아야 할 지 고심하던 중 어느 날 아침 깨어보니 밤 사이 눈이 내렸는데,

지금의 도성 울 안쪽은 눈이 녹고, 바깥 쪽에만 하얀 눈이 줄을 그은 듯 남아 있었다.

이에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그 선을 따라 도성을 쌓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태조의 왕사인 무학대사는 새 왕조에서 불교의 쇠퇴를 막기 위해 인왕산 서쪽 장삼에 고깔 쓴 스님 형상의 선바위를

도성 안에 넣고자 인왕산에서 무악으로 연결시키는 도성을 쌓을 것을 주장했다.

러나 이것이 정도전의 반대로 무산되자

"이후 불자는 유생의 책 보따리나 져 나르는 심부름꾼을 면치 못하겠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성곽 축조공사

 

오늘날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 후보로도 올라있는

서울 성곽(둘레 약 17킬로미터)은 태조 5년(1396) 1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49일간 계속되었다.

공사 진행 방법은 59,500척의 성터 중 600척을 1區로 정하고, 각 구마다 천자문으로 표시했다.

예컨대 백악산 동쪽에서 天字로 시작, 낙산 남산 인왕산을 거쳐 백악산 서쪽에서 字로 마쳤다.

59,500척의 성터를 600척씩 97字 區로 나누면 1,300척이 남는데,

이것은 인왕산 정상에 성을 쌓지 않아도 좋을 자연 석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전체의 성터를 600척씩 97字 구로 나누고,

1자 구를 다시 100척씩 6號로 나누어 동북면(백악산 동쪽 정상-숙정문),

강원도(숙정문-동소문), 경상도(동소문-남대문), 전라도(남대문-옛 서대문),

서북면(옛 서대문-백악산 서쪽 정상) 등의 구획으로 각 도(道) 인구비례에 따라 일을 분배했다.

 

이때 경기 충청 황해도의 장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전년도 궝궐 공사에 동원했기 때문이고,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의 국방을 감안해 서북면 안주 이북과 동북면 함주 이북의 장정들도 제외했다고 한다.


축성공사는 완벽을 기하기 위해 이중 삼중의 책임자와 감독자를 두어

그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성벽 바깥 쪽 돌에 감독자의 출신지와 성명 등을 새기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기간에 17킬로미터의 성을 쌓느라 부실하고 조잡한 데가 있었다.

때문에 1396년 8월부터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의 백성 7만 9,400명을 징발해 2차 공사를 또 했다.

2차 공사는 1차 공사에서 완성하지 못했던 부분의 완성과 여름철 장마에 무너진 곳의 개축,

낮은 성문의 보수, 누각을 짓는 일 등에 주력했다.

4대문 4소문 등 8개 성문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후에도 승려 · 군인들을 동원한 성곽 보수공사는 계속되다가

세종 4년(1422)에 와서야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한편 성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다시 부서지고, 그 후 또 보수하기를 거듭했다.

일제 강점기의 도시계획과 6. 25 한국전쟁 때도 성문과 벽이 많이 부서졌다.

현재 남아 있는 서울성곽은 대체로 태조 · 세조 · 숙종 때의 것이라 한다.

삼청동 성북동 장충동 일대에 성벽이 남아 있고, 흥인지문(동대문)과 숙정문 · 홍화문이 남아 있다.

국보1호로 지정되었던 숭례문(남대문)은 온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 얼마 전 불타고 지금은 복원공사 중이다.

2008년 2월 10일 완전소실된 숭례문(남대문)은 5년 3개월의 복원공사 끝에 오늘(2013년 5월 4일) 준공식을 하였다.

 

4대문과 4소문

 

성곽의 축성과 더불어 자연히 성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문들도 생겼다.

서울 성곽은 전체 둘레 약 17킬로미터 구간 요소마다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을 만들어 냈다.

이른바 '4대문 4소문'이다.


4개의 대문은 유교의 5상(5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에 의해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두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해당되는 곳에 보신각(普信閣)을 두어 도읍지의 이상과 정치이념을 나타냈다.

또한 대문과 대문 사이의 요충지에 작은 문을 두어 관문으로 활용토록 했으니

혜화문(동소문), 광희문, 소의문(서소문), 창의문(자하문)이 그들이다.

 

 

순성(巡城)놀이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은 동서남북으로

바깥쪽은 외사산(아차산, 덕양산, 관악산, 북한산)이 둘러싸고 외수(한강)가 흐르며,

안쪽으로 내사산(낙산, 인왕산, 목멱산, 백악산)과 내수(청계천)가 있는 명당이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를 건국한 뒤 내사산을 잇는 서울성곽을 축조하였는데 2/3는 토성이었다.

그 뒤 세종이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숙종 때 보수공사를 고쳐 오늘에 이르렀다.

 

서울 도성의 둘레는 약 사십여리(18)인데,

순성(巡城)놀이는 봄과 여름철에 성안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성곽 둘레를 따라서 한 바퀴 돌며 성 안팎의 경치를 구경하고 과거 급제를 비롯한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조선 정조 때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誌)라는 책에는

도성을 한 바퀴 돌아서 도성 안팎의 화류(花柳) 구경을 하는 것이 멋있는 놀이인데,

새벽에 출발하여 저녁종 칠 때에 다 볼 수 있다.

산길이 깎은 듯 험해서 지쳐서 돌아오는 사람이 많다하였다.

 

2013년 05월 04()에 맥가이버와 함께 하는 '순성놀이'는

서울역에서 만나 숭례문을 출발하여 내사산(인왕산, 백악산, 낙산, 목멱산)과

4대문(돈의문, 숙정문, 흥인문, 숭례문), 그리고 4소문(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을 거치며,

600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생태도시 서울을 두 발로 걸으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는 여행이다.

 

지난 2008년 2월 10일 남대문(숭례문)이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5년 3개월의 복원공사로 마무리 되어

당일(5월 4일)에 남대문(숭례문) 준공 기념식을 한다니 더욱 뜻깊은 순성놀이가 되리라 여기면서...

 

 

 

  그간의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 일주'에 관하여...

 

 --☞ 오래 전부터 막연하게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꿈꾸다가

지난 2006년 3월 2일자 모 일간지에 [건축가 황두진의 서울성곽 하루에 돌기]를 보고...


2006년 3월 05일(일)에 그 신문을 들고 '서울성곽일주'를 위한 답사를 나서 홀로 '서울성곽 길찾기 일주'를 하였었고,

두 번째는 2006년 4월 30일(일)에 좋은 님들과 함께 11시간 20분에 걸쳐 '서울성곽일주'를 하였으며,

세 번째는 2006년 9월 22일(금)~23일(토) 양일간에 걸쳐 '야간 서울성곽일주'를 한 적이 있었으며,

네 번째는 2009년 2월 22일(일)에 10시간 10분이 걸쳐서 보다 완전한 '서울성곽일주'를 하였으며,

그러니까 '서울성곽일주'는 네 번째가 제대로 된 ‘서울성곽일주’인 것이었다.


처음과 두 번째, 세 번째 '서울성곽일주'는 북악산 구간이 통제되었었고,

야간에 통행이 불가한 관계로 북악산 성곽 구간을 빼고

창의문(자하문)에서 청와대 앞을 지나 삼청동을 거쳐 감사원길을 따라

와룡공원으로 우회하여 북악산의 나머지 성곽을 걸었었다.

 
그러다가
2006년 4월 1일에 북악산 지역 서울성곽이 처음 개방된 '홍련사 코스'는 홍련사-숙정문-촛대바위 구간으로 1.1㎞이고,
그리고
2007년 4월 5일 2단계로 '말바위 쉼터 코스'가 와룡공원-숙정문-청운대-백악마루-창의문으로 4.3㎞가 개방되면서
이 두 지역이 개방됨으로써 북악산 구간의  서울성곽을 완전하게 답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는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한 팀당 100명씩만 입장(2시간30분 동안 관람)을 시키는 제한적 개방인지라
'인터넷 예약이나 현장에 선착순' 등을 하면서
'서울성곽일주'를 하기에는 곤란함이 있어 완전?한 서울성곽일주를 할 수 있는 '언젠가'를 기다리며 지내는데...
 2007년 7월 1일을 기해 사전예약이나 선착순이 아닌 무제한 자유 탐방이 실시되었다.
 
해서 보다 완전한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하고자 날을 잡다가 2008년 3월 1일에 하려고 계획 중이었는데
2008년 2월 10일 20시 50분에 발생한 남대문(숭례문)화재로 허탈함에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연기하게 된다.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의 마지막 여정으로 하는 '남대문(숭례문) 야경 감상'이 압권이었기에...-

다시 차일피일하다가
2009년 2월 22일(일)에 하게 된 네 번째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는
이전보다는 충실한? '서울성곽일주'이었지만 남대문(숭례문) 야경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움은 컸다.
 
그리고 남대문(숭례문)이 화재로 소실되고 복원공사를 하며 가림막 속에 숨어 있어 아쉽지만
다섯 번째로 2010년 4월 25일(일)에는 09시간 27분에 걸쳐서 '서울성곽일주'를 하였고,
여섯 번째로 2010년 7월 10일(일)에는 11시간 10분에 걸쳐서 '서울성곽일주'를 하였고,
일곱 번째로 2012년 8월 25일(토)에는 약 9시간 10분에 걸쳐서 '서울성곽일주'를 하였으며,
 
남대문(숭례문)이 지난 5년 3개월간의 복원공사를 마치고
남대문(숭례문) 복구 준공식을 하는 2013년 5월 4일에
여덟 번째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9시간 20분에 걸쳐서 의미 있게 하였습니다. 
 

 

 

'숭례문(남대문) 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의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누군가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다.
맥가이버는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걷는 것을 죽고사는 차원이 아닌 즐기는 차원에서 걷는다.
즉, 좋은 길을 걷다가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되고, 느끼고, 감동 받고, 깨닫는 것을 즐긴다.
 

 

 
 '모든 만남은 걷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길을 걷다보면 새로운 풍광을 보게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맥가이버가 '때론 함께, 때론 홀로' 산행이나 여행, 도보를 하면서 후기를 주로 사진으로 작성함은
인간의 만남이 또한 유한함을 알기에 어떤 연유로 비록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하고자 함이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하는 무능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든다면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자 할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숭례문(남대문) 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다녀오다 - 4부를 시작하며...

 

 

 

▼ 17시 02분 - 동대문(흥인지문)에 도착하여...

 

   4대문 中 동대문 - 흥인지문(興仁之門)

 

한양 도성의 동쪽 대문이다.

'仁'은 동쪽에 해당되므로 문 이름에 '仁'을 넣었다.

또한 궁궐 동쪽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駱山)이 산세가 약한 것을 보충하고 기운을 돋우려는 의미에서 '之'자를 넣었다.

4대문의 다른 문들과 달리 옹성을 설치한 것도 같은 의미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 보물 제1호이다. 

 

▼ 동대문에서 인증샷...

 

 

 

 

 

 

 

 

 

▼ 17시 06분 -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가는 중에...

 

▼ 17시 07분 - 청계천 오간수교 위에서...

 

▼ 오간수문 모형

 

 

오간수문[五間水門] 모형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복원된 오간수문이다.

오간수문의 전통적인 모양을 살려 5개 수문과 무지개 모양의 홍예 아치를 재현하였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6가에 있는 동대문(흥인지문)에서

중구 을지로(乙支路)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조선시대의 수문(水門)이다.

오간수문은 수문이 5칸, 즉 5개의 수문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초기 도성을 수축하면서 물길을 낼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대문 남쪽 성벽 아래로 흐르는 냇물이 도성 밖으로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치한 수문이다.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수문마다 쇠창살로 만든 철문을 설치하였다.

각 수문의 크기는 1.5m 정도이다.


그러나 쇠창살에 부유물이 걸리고 토사가 쌓여 2개의 나무문을 별도로 세웠는데, 이 역시 영조 때에 이르러 거의 막혔다.

이 때문에 1760년(영조 36)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수문 앞에 쌓인 토사를 걷어내고 복원하였다.


그후 1907년(융희 1) 중추원에서 청계천 하수의 원활한 소통을 이유로 수문을 헐고,

이듬해 3월에는 동대문 근처의 성벽과 함께 오간수문의 성벽마저 헐었다.

대신 같은 자리에 콘크리트로 만든 다리를 세웠는데,

오간수문을 오간수다리·오간수교·오간수문교로 부르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따라서 오간수문과 오간수교는 엄연히 다른 별개의 것이다.


오간수교는 1926년 다시 확장·건설되었으나,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청계천 복개공사로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다 2003년 7월부터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청계천 역사유적을 발굴할 때 오간수문의 아래쪽 끝받침과

홍예(虹霓:무지개 모양의 구조물) 기초부, 돌거북 등이 발굴됨에 따라 2004년부터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새롭게 만들어진 오간수교는 오간수문의 전통적인 모양을 살려 5개 수문과 무지개 모양의 홍예 아치를 재현하였다.


[출처] 두산백과

 

 

▼ 17시 11분 - 옛 동대문운동장(야구장) 지하에 있던 '이간수교'를 복원하여...

 

 

 

 

 

 

 

 

 

 

 

 

 

▼ 17시 20분 - 을지로와 퇴계로가 만나는 곳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 출입구쪽의 하얀 건물은...

 

▼ 우리나라의 대표적 건축가인 김중업의 '(구)서산부인과' 건물이었다고...

 

 

▼ 17시 23분 - 광희문(남소문)...시구문으로 불리기도...

 

 

  4소문 中 남소문 - 광희문(光熙門)


한양도성의 남소문이다.

서소문과 함께 죽은 사람들의 운구행렬이 이 문을 통해 나갔다고 해서 시구문(屍柩門)이라고도 불렀다.

서울 중구 광희2동 길 한 복판에 서 있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인 남동쪽에 세웠다가 1711년(숙종 37)에 고쳐 쌓았다.

1719년(숙종 45) 석축 위에 문루를 짓고 '광희문'이란 현판을 걸었다.

그후 석축으로 된 기단부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복원시 홍예석축(虹霓石築)을 해체해 남쪽으로 15m 옮기고,

문루 12평을 새로 짓고 주변의 200평을 녹지화했다.

 

 

 

 

 

▼ 17시 26분 - 골목을 통과하여...

 

 

 

 

▼ 17시 34분 - 고 이병철회장의 저택

 

▼ 17시 35분 - 장충체육관은 리모델링 중...

 

 

 

▼ 17시 37분 - 겨울연가 포토존에서...

 

▼ 잠시 송혜교가 되어보고...

 

 

 

 

▼ 17시 40분 - 간식타임을 갖고...

 

▼ 17시 49분 - 출발...

 

 

 

 

 

 

▼ 17시 56분 - 토끼굴을 지나쳐서...

 

 

 

 

 

▼ 18시 02분 - 반야트리호텔 골프연습장

 

 

 

▼ 18시 08분 - '타워호텔' 이젠 '반야트리호텔'

 

 

 

 

▼ 18시 10분 - 반야트리호텔 정문을 통과하여...

 

 

▼ 18시 12분 - 국립극징을 지나...

 

 

 

 

 

 

 

 

▼ 18시 17분 - 남산성곽을 따라..

 

 

 

 

 

 

 

 

 

 

 

▼ 18시 24분 - 남산산악회 갈림길에서...

 

 

▼ 18시 25분 - 성곽을 넘는 데크계단

 

 

▼ 18시 33분 - 남산 팔각정을 향해...

 

 

 

 

▼ 관중

 

 

 관중[貫衆] 

양치식물 고사리목 면마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 : Dryopteris crassirhizoma

계 : 식물

문 : 양치식물

강 : 양치식물

분포지역 : 한국·일본·사할린·쿠릴열도·중국 동북부 등지

서식장소/자생지 : 산지의 나무 그늘

크기 : 잎자루 길이 10∼25cm


산지의 나무 그늘에서 무리 지어 자란다.

뿌리줄기는 지름 8∼10mm의 굵은 덩어리 모양이고 비스듬히 서며 길이가 25cm 정도이고 잎이 돌려난다.

잎자루는 길이가 10∼25cm이고 잎몸보다 훨씬 짧으며 비늘조각이 빽빽이 있다.


비늘조각은 바소꼴이고 길이가 10∼25mm이며 광택이 있고

황색을 띤 갈색 또는 검은빛이 도는 갈색이며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에 긴 돌기가 있다.

잎몸은 거꾸로 선 바소꼴이고 2회 깃꼴로 깊게 갈라진다.


잎조각은 20∼30쌍이고 줄 모양의 바소꼴이며 자루가 없고 끝이 뾰족하며 양면에 곱슬털 같은 비늘조각이 있다.

잎몸 중간 부분에 있는 잎조각이 가장 크고, 밑 부분으로 갈수록 잎조각의 크기가 작고 달리는 간격이 넓다.


잎조각의 갈라진 조각은 긴 타원 모양이고 끝이 둔하며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고,

중앙맥에서 나온 잎맥은 보통 Y자 모양으로 갈라진다.

포자낭군은 잎몸 윗부분 잎조각의 중앙맥 가까이 2줄로 달리고,

포막은 둥근 신장 모양이며 가장자리가 밋밋하고 다 익으면 불규칙하게 갈라진다.


어린잎을 식용한다. 한방에서는 뿌리줄기를 약재로 쓰는데,

기생충의 제거하고 해열·해독 작용이 있으며 지혈 효과도 있다.

양방에서는 성분을 추출하여 면마정(綿馬精) 등의 약품을 만든다.

한국·일본·사할린·쿠릴열도·중국 동북부 등지에 분포한다.


[출처] 두산백과

 

 

 

 

 

 

▼ 18시 39분 - 남산순환로를 만나...

 

 

▼ 남산 N서울타워

 

 

 

 

 

▼ 18시 46분 - 남산광장에 도착...

 

 

남산[南山:262m] 

서울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부에 있는 산.


산의 높이는 262m이며 한양이 조선의 도읍(都邑)으로 정해지면서 도성(都城)의 남쪽에 위치하는 산이라 남산이라고 불렀다.

본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인데, 목멱산이란 옛말의 '마뫼'로 곧 남산이란 뜻이다.

또 인경산(引慶山)이라고도 불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재위 4년인 1395년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이를 모시는 사당을 목멱신사(木覓神祠)라 하였다.

매년 나라에서 재사를 올리게 되자 목멱신사를 국사당(國師堂)이라고 불렀다.

 

남산은 북악산(北岳山)·낙산(駱山)·인왕산(仁王山)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하나이며 북악산과는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여러 산과 더불어 왕도의 위곽(圍郭)을 이루어 그 능선을 따라 성벽이 쌓여졌었고,

도성을 에워싸는 방벽은 태조 재위 5년인 1395년에 축성되어 이후로 여러차례 증축과 보수가 이루어졌다.

 

남산의 정상에는 5개의 화구를 가진 봉수대(烽燧臺)가 설치되었고 전국에서 올라오는 중요한 봉화가 서울로 집결되는 곳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북쪽 산허리에 왜장(倭將)들이 왜장대(倭將臺)라고 한 성채를 쌓았던 일이 있었다.

또한 군영인 어영청과 금위영의 분영이 남산 자락에 위치했다.

남산은 예로부터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여러 선비들이 거처했고

그들이 지은 누각이 곳곳에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문헌의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조선전기에는 부산포 왜관으로 내항한 일인들이 상경하여 머무는 동평관이 남산 인근에 있었다.


1900년에는 남산 동쪽에 을미사변 때 희생된 항일 인물들을 배향하는 장충단을 세웠다.

남산이 공원으로 개발된 것은 1910년으로, 당시 공원 표지로 세웠던

‘한양공원(漢陽公園)’이란 고종(高宗) 친필의 석비(石碑)가 지금도 통일원 청사 옆에 보존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남산 중턱에 왜성대공원(倭城臺公園)이라 이름지었고  공원에는 경성신사(京城神社)를 만들었다.

1925년에는 현 남산식물원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만들었는데

이때 일제는 남산 꼭대기에 위치하던 국사당을 헐어 인왕산으로 옮겨버렸다.

광복 후 일제의 신사는 철거되었다.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건립되었고 1959년에는 그의 호를 따 우남정을 건립했다가 4.19때 철거되었다.

1962년 남산 케이블카가 설치되었고 1965년 남산도서관, 1968년에는 남산식물원을 개관하였다.

1969년 8월에는 백범 김구(金九)의 동상을 세웠다.

 

1973년에는 국립극장이 들어섰으며 1975년에는 높이 236.7m의 송신탑인 남

산타워(현 N서울타워)를 완공하였고,  1980년 10월 일반인들에게 전망대를 공개하였다.

 

남산은 서울 중앙에 있으면서 102만 9300㎡ 산지가 남산공원으로 지정되어 서울에서 가장 넓은 도심공원이 되었다.

조선 태조(太祖) 때 쌓은 성벽이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남산은 소나무를 비롯한 각종 수목이 이루는 푸른 수림경관이 훌륭한데,

특히 조선시대에 금송이 많이 자랐다고 전해지며 이곳의 소나무를 함부로 베어내지 못하도록 하였다.

 

산꼭대기에서는 사방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서울 시가지를 볼 수 있다.

한편, 수림은 잘 보호되어 대도시 도심부(都心部)임에도 꿩을 비롯한 각종 산새·다람쥐 등 산짐승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남대문·퇴계로3가·장충공원·이태원동(梨泰院洞)·후암동(厚岩洞) 등

여러 곳으로부터 산꼭대기에 이르는 산책로가 있으며 서울시 전망을 조망하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정상부에는 탑골공원의 정자를 본뜬 팔각정(八角亭)과

N서울타워, 박물관, 레스토랑, 카페 등의 시설이 있고,

산정부 한국의 경위도 원점(經緯度原點)이 있다.


남산 서쪽은 계단으로 이어진 세 개의 광장이 산허리를 타고 펼쳐져 있다.

맨 아래에 있는 광장은 녹지대를 포함하여 약 2,500평 규모의 어린이 놀이터,

그 위에는 약 6,000평 규모의 백범광장(白凡廣場)이 있고,

위쪽 광장에는 남산 분수대를 중심으로 하여 그 북서쪽에 서울시 교육위원회 과학교육원이 있는데

서울시 교육위원회 과학교육원은 1970년 어린이회관으로 건립한 18층(시설면적 3,702평) 건물이다.


그 맞은편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있는데 1970년에 건립하여 의사의 사진·유묵(遺墨) 등을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 주변에는 안중근의사 동상과 휘호(揮毫) ·장인(掌印)이 새겨진 비석(碑石)이 있고,

광장 동쪽 비탈진 곳에는 총 2,500종, 1만 5000여 그루의 선인장 컬렉션 외에

200여 종, 3,000여 그루의 영산홍 동산 및 소동물원을 갖춘 남산식물원이 있다.

동쪽에는 야생화화원과 팔도소나무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그밖에 후암동 쪽 순환도로변에는 시립 남산도서관,

그 정면 양쪽에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동상, 부근에 소월시비(素月詩碑)가 있다.

회현동(會賢洞) 쪽 순환도로변에는 팔각정과 연결되는 케이블카 승강장이 있다.

서울 시가지 팽창으로 교통문제를 초래하게 되어 1·2·3호 터널이 뚫려 있다.

남산한옥마을, 장충단공원, 정도 600년 타임캡슐 등이 주변의 명소들이다.


[출처] 두산백과

 

 

 

 

남산[南山:265.2m] 


목멱산

서울특별시 중구와 용산구 경계에 있는 산.


내용

높이 265.2m. 대부분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駱山), 서쪽의 인왕산(仁旺山)과 함께 서울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목멱산(木覓山)·종남산(終南山)·인경산(仁慶山 또는 引慶山)·열경산(列慶山)·마뫼 등으로도 불렸으나, 주로 목멱산이라 하였다.


조선 태조가 한양(漢陽)을 도읍으로 정하였을 때

남산은 풍수지리설상으로 안산(案山) 겸 주작(朱雀)에 해당되는 중요한 산이었다.

도성(都城)도 북악산·낙산·인왕산·남산의 능선을 따라 축성되었다.


지금도 남산 주변에는 성곽의 일부가 남아 있다.

 남산의 정상에는 조선 중기까지 봄·가을에 초제(醮祭 : 星辰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내던

목멱신사(木覓神祠), 즉 국사당(國祀堂, 또는 國師堂)이 있었다.


또한 조선 시대 통신 제도의 하나인 봉수제(烽燧制)의 종점인 봉수대가 있어 국방상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전국 각지와 연결되는 남산의 봉수 중 제1은 양주 아차산(峨嵯山)에 응하는데,

이는 경기도·강원도·함경도와 연결되었으며,

제2는 광주 천천령(穿川嶺)에 응하여 경기도·충청도·경상도와 연결되었고,

제3은 무악(毋岳) 동쪽 봉우리에 응하여 경기도·황해도·평안도와 연결되었다.


제4와 5는 제1·2·3이 육로로 이어지는 데 반하여 해로로 이어지는 봉수로였고,

제4는 무악 서쪽 봉우리에 응하여 경기·황해·평안도 해안 지방과 연결되었으며,

제5는 양천현 개화산(開花山)에 응하여 경기·충청·전라도 해안 지방과 연결되었다.

 

지난날 통신 제도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남산은 현재 방송탑이 정상에 세워져 전망대 시설을 갖춤으로써 관광자원으로 이용된다.


또한 이와 동시에 남산은 각지로 매스미디어 전파를 발송하는 중요 기능을 하고 있다.

서울의 발달로 시가지가 확장됨에 따라 교통의 장애가 되어왔던 이 지역에

산을 둘러 일주할 수 있는 순환도로가 만들어졌고,

1·2·3호 터널이 뚫려 있어 교통의 장애를 극복하고 있다.


우리 <애국가>에 남산의 소나무들이 철갑을 두른 듯하다는 구절이 있을 정도로 남산에는 원래 소나무들이 울창하였으나

일본인들이 우리의 정신을 빼앗기 위하여 소나무를 베어내고 아카시아 등의 잡목을 심어 산의 경관을 많이 해쳤다.


또한 8·15광복 이후 무질서한 개발로 자연이 많이 훼손되었으나 최근 들어 개발제한구역의 설치와 함께

녹화사업에 노력한 결과 사계절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남산의 동·서·북쪽의 사면 일대에는 자연공원인 남산공원이 설치되어 서울 시민의 휴식처로 제공되고 있다.

또한, 자연 학습장이 설치되어 학생들의 자연 학습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남산이 처음 시민공원으로 개발된 것은 1910년의 일로,

당시 공원 표지로 세웠던 ‘漢陽公園(한양공원)’이라는 고종의 친필 비석이 옛 통일원 청사 옆에 있다.


현재 산정에는 서울타워라 불리는 방송탑과 팔각정이 있으며, 이곳은 케이블카로 오르내릴 수 있다.

산의 서쪽 사면에는 국립과학교육원, 안중근(安重根)의사기념관과 동상, 백범광장(白凡廣場)과 김구(金九)의 동상,

남산도서관·용산도서관·식물원, 이황(李滉)·황희(黃喜)·정약용(丁若鏞)의 동상 등이 있고, 소월시비(素月詩碑)도 있다.

북쪽 사면에는 숭의여자중학교·숭의여자고등학교·숭의여자대학·리라초등학교 등이 있다.


동쪽 사면에는 동국대학교·국립극장·한국자유총연맹 등과 장충단공원이 있다.

장충단공원은 조선 시대에 도성 남쪽을 수비하던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자리이며,

고종 때 장충단(奬忠壇)을 세운 뒤로 그 이름을 따서 붙인 명칭이다.


이곳에는 청계천 복개 당시 옮겨온 수표교(水標橋)가 놓여 있으며,

부근에는 리틀야구장·테니스코트·수영장 등이 있어 공원 지역과 함께 시민들의 운동 시설로 제공되고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18시 46분 - 루프테라스로 올라가서...

 

 

 

 

 

 

 

▼ 남산 제1봉수대가 있었다는 곳에는 미군방송 철탑이 우뚝...

 

 

 

 

 

▼ 18시 51분 - 남산 팔각정으로...

 

▼ 18시 52분 - 남산 팔각정에서 인증샷

 

 

☞ 여기서 '숭례문(남대문) 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다녀오다 - 4부를 마치고...

 

 
 2013년 05월 04일(토)  
숭례문(남대문) 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다녀오다.
- 인왕산ㆍ북악산ㆍ낙산ㆍ남산 연계산행 -

 

-▥☞ 1부[서울역→남대문→서대문터→경교장→홍난파기념관→딜쿠샤→옥경이슈퍼→범바위→인왕산 정상]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2부[인왕산 정상→청운공원(윤동주시인의언덕)→창의문(자하문)→북악산 정상→청운대→숙정문]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3부[숙정문→와룡공원→혜화문→한성대입구역→낙산 정상→동대문성곽공원→동대문(흥인지문)]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4부[동대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광희문→반야트리호텔→국립극장→N서울타워→남산 각정]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5부[남산 팔각정→잠두봉포토아일랜드→남산분수대→백범광장→힐튼호텔→남대문→서울역]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