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사람과 길] 매창(梅窓)의 詩 닮은 바다… 여름비 오는 날, 혼자 걸었으면 좋겠다
- 입력 : 2014.06.05 09:27
여름 변산 바다와 기생 매창
- 적벽강 붉은 절벽에 여자 하나 오른다. 성미 급한 여름에 바다는 끓어오르는데, 변산반도에 충만한 서정(抒情)은 이른 더위 속에도 청량하다. / 박종인 기자
느닷없이 찾아온 이 여름날 전북 부안 변산(邊山)에 있었으면 좋겠다. 혼자도 좋고 동행이 있어도 좋겠다. 이름은 강(江)이되 정작 강과는 무관한 채석강과 적벽강도 구경하고, 기왕이면 부안 읍내에 잠든 기녀(妓女) 이매창도 만났으면 좋겠다. 비가 온다고 여행을 망쳤다 하지 말자. 우중(雨中)이면 변산 바다는 몽환(夢幻)이다.
◇매창(梅窓)이 살았던 부안 땅
매창 이계랑(李桂娘·1573~1609)은 부안에서 태어나 서른일곱 살에 부안에서 죽었다. 허난설헌, 황진이와 함께 조선 3대 여류 시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삶은 기구했다. 틀림없이 행복했을 소녀 시대가 끝나고, 아전 하급 관리의 서녀로 태어난 계랑은 관기(官妓)가 되었다. 스스로 기명(妓名)을 매창이라 했다.
그녀가 웃음과 노래와 시를 팔던 연회장에는 16세기 최고 시인 유희경, 혁명가 허균이 끼어 있었다. 두 사내는 단 한 번도 그녀를 매창이라 부르지 않았다. 유희경은 정인(情人)이었고 허균은 문우(文友), 벗이었다. 셋은 대등한 영혼으로 흠모했고 사랑했다. 임진왜란 와중에 유희경과 헤어진 매창은 이런 시를 남긴다.
梨花雨 흣날릴 제 울며 잡고 離別한 님/秋風落葉에 져도 나를 생각는가/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쾌라('梨花雨')
'나 아끼던 거문고와 함께 묻으라.' 유언과 함께 그녀가 요절했다. 허균은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 세계로 내려왔다가 불사약을 훔쳐서 떠났다'고 했다. 무덤은 '매창이뜸'이라 불렸다. 사후 45년 만에 묘비가 서고, 사람들은 글을 모아 시집을 편찬했다. 생전 즐겨 찾던 개암사 승려들을 채근해 목판본을 만들었다. 불티나게 팔린 덕에 파산 직전에 이른 개암사가 목판을 불살라버렸다고 했다.
가족 없이 죽은 여자를 300년 넘도록 나무꾼들이 보살폈다. 1917년 사람들이 세운 비석에는 이리 적혔다.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 기생(妓)이 아니라 '재주 있는 여인(媛)'이다. 기녀였으되 남자들에게 택함을 당하지 않고, 스스로 사랑과 우정을 택해 옷고름을 풀고 마음을 열었던 당당한 여자, 계랑이다. 무덤은 부안읍내 매창공원에 있다.
◇매창이 사랑한 개암사
매창공원에서 나오면 이제 몽환(夢幻)이다. "이따위로 밥 얻어먹기 배운 게 평생 부끄럽다(平生恥學食東家)"고 한탄하던 여자가 한을 풀었던 풍경이 펼쳐진다. 30분 거리에 있는 개암사. 7세기 창건된 백제 사찰이다. 백제 부흥군이 나당 연합군에 궤멸된 뒤편 울금바위와 함께 도처에 흔한 중창 불사 없이 옛 모습 그대로 고즈넉하다. 개암사에서 나와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내소사가 나온다. 일주문 지나 전나무 숲은 늘 푸르다. 장엄한 대웅보전은 반드시 본다.
- 내소사 전나무 숲.
모항 갯벌을 지나 해안도로로 계속 서진(西進)하면 채석강이 나온다. 입구에는 횟집이 즐비하고 주차장에는 차량이 빽빽하다. 기기묘묘한 채석강 해변은 인파로 붐빈다. 시각이 석양 무렵이라면 이곳에서, 아직 이르다면 적벽강에서 노을을 맞는다.
◇적벽강과 변산해수욕장
채석강과 달리 인적이 덜한 그 절벽에 그려진 자연의 시(詩)를 목격한다. 직설적이고 날카롭되 서정이 풍부한 매창의 시를 닮은 바다다. 붉고 누런 적벽강 절벽은 노을이 질 무렵이면 황홀하게 빛난다. 물이 빠지면 절벽 끝까지 거닐며 정인(情人) 떠나보낸 젊은 여인의 쓸쓸한 향기를 느껴본다. 적벽강 절벽 위쪽에는 이곳 어민들이 풍어와 무사고를 비는 수성당이 있다. 좀도둑이 들끓어 한 칸짜리 작은 집에 CCTV 카메라가 셀 수 없이 붙어 있지만, 대숲에 싸여 있는 그 공간이 아늑하고 조망이 훌륭하다.
그리고 변산해수욕장으로 간다. 물때가 맞으면 가게에서 호미랑 바구니를 빌려 온갖 조개도 캐본다. 가볍게 차려입고 모래에 뒹굴어도 본다. 되도록 혼자였으면 좋겠다. 함께 흥분해도 좋겠고, 헛헛한 마음 졸이며 가도 좋겠다. 화창한 날이 좋겠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더 좋겠다.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 번쯤 내동댕이쳐 보는 거야.(안도현 '모항 가는 길' 부분)
- *번호는 추천 여행 순서
추천 코스(수도권 기준): 매창공원~개암사~내소사~채석강~적벽강~변산해수욕장
서해안고속도로 부안IC에서 나와 좌회전, 부령로~매창로 직진 15분→매창공원→매창로~23번 국도~봉은삼거리에서 개암사 방면 우회전→개암사→봉은삼거리 줄포 방면~영전사거리 내소사 방면 우회전~이후 이정표→내소사→30번 국도 해안도로 따라 모항, 격포 지나 이정표→채석강→대명콘도 옆 산길로 올라가면 적벽강→30번 국도 해안도로 따라 30분→변산해수욕장.
먹을 곳: 채석강 입구 해산물식당가. 회, 튀김, 매운탕 등 전형적인 해산물 음식들. 1층 상가에서 재료를 사서 2층 식당에서 먹는 방식. 근해에서 잡은 것도 있고 중국 수입산도 있다. 원산지 표기가 잘 안 보이는 게 흠.
묵을 곳: 부안, 변산 숙박 및 여행 민간 정보 사이트 www.byeonsannet.kr, www.ibuan.co.kr 참고. 적벽강을 즐기려면 적벽강 입구 언덕에 있는 쁘띠블랑 펜션(www.petitblanc.co.kr) 추천.
기타 여행 정보: 부안군청 문화관광과 (063)580-4434, www.buan.go.kr/02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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