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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NASA가 '제2의 앙코르 와트' 발굴, 잿더미 로마 문서는 X선으로 꿰뚫어

by 맥가이버 Macgyver 2016. 8. 27.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NASA가 '제2의 앙코르 와트' 발굴, 잿더미 로마 문서는 X선으로 꿰뚫어

고대 유적 속 전설과 진실의 경계, 현대 과학으로 재조명

글=박건형 기자  

그래픽=김현지 기자


神이 되고 싶었던 왕, 밀림 속 신전 '앙코르 와트'를 세우다

밀림 속에 우뚝 솟은 석조 건물과 그 사이를 꿰뚫고 자라는 나무들.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의 역사가 다시 쓰이고 있다.
당초 이 사원은 앙코르 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수리아바르만 2세가 자신의 사후를 위해 지은 바라문교(婆羅門敎) 사원이다.
동서 1500m, 남북 1300m에 이르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정면은 서쪽을 향하고 있다.
동양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오랜 전란(戰亂)으로 완벽한 복원은 힘든 상황이다.
또 나무가 건물 사이로 자라면서 곳곳이 붕괴 위험에 처해 있다.
최근 과학자들은 앙코르 와트가 외로운 사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1861년 프랑스 박물학자가 이 사원을 발견한 이후 오랜 기간 연구를 통해 정립됐던 동남아시아 지역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발견이다.

미국항공우주국(NASA)과 호주 연구팀은 최첨단 항공 레이저 측량 기술로 앙코르 와트 인근을 하늘에서 내려다봤다.
앙코르 와트가 자리 잡은 밀림 지대는 빽빽한 나무 때문에 육안으로는 지형지물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하지만 레이저를 이용하면 겉모습뿐 아니라 밀림 바닥까지 꿰뚫어 보며 자연과,
인간의 손길이 닿은 인공물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헬리콥터에서 지상으로 레이저를 쏜 뒤 돌아오는 거리와 모양, 세기 등을 측정하는 방식이다.

2012년 1차 레이저 측량에서 연구팀은 앙코르 와트가 메알레아, 코케르 등 과거 발견됐던 인근 도시들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작년에 좀 더 범위를 확대해 2차 레이저 측량을 진행하자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연구를 주도한 호주 고고학자 데미안 에반스 박사는 지난 6월 국제학술지 '고고학 저널'에
"앙코르 와트 인근의 열대 밀림에 900~14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개의 도시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새롭게 발견된 도시와 사원의 크기는 현재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에 버금가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특히 레이저 측량에서는 정교한 급수 시설과 다리 등 도시의 근간을 이뤘던 주요 기간 시설의 흔적도 나타났다.

고고학자들은 이번 발견이 앙코르 와트 연구에 '생명'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국 예일대 교수이자 저명 고고학자인 마이클 코에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앙코르 와트에 누가 살았는지,
놀라운 문화가 어떻게 번성하며 유지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아직 우리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다"면서
"이번 발견이 지난 100년간 이룬 앙코르 와트에 대한 연구 중에 가장 훌륭한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하루 아침에 묻힌 도시, 폼페이

            

로마 시대의 도시 폼페이는 사라진 도시 중 가장 완벽하게 복원된 도시로 꼽힌다.

현재 무려 95%에 이르는 도시의 옛 모습이 복원된 상태이다.

폼페이는 화산재에 묻혀 있었던 덕분에 시대의 변화를 피하면서 로마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도시 자체가 완벽한 박물관이자 민속촌인 것이다.

도로 구조, 배수관의 위치, 극장의 형태, 공중목욕탕의 사용법,

신분에 따른 집의 구조까지 2000년 전 로마의 모습 중 상당수가 폼페이에서 밝혀졌다.

무엇보다 폼페이의 진정한 가치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어떤 역사서도 시민들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역사는 지배계층의 시각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폼페이에서는 피지배계층은 물론 마구간과 당나귀까지 고스란히 발견됐다.

더 이상 밝혀낼 것이 없어 보이던 폼페이에서도 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고 있다.

이탈리아 초소형전자공학연구소 비토 모첼라 박사 연구팀은 지난해 숯덩어리 상태인 파피루스 두루마리의 문자를 읽어내는 데 성공했다.

두루마리가 발견된 헤르쿨라네움은 베수비오화산 폭발 때 폼페이와 함께 묻힌 이웃 도시이다.

종이의 원조인 파피루스는 열을 받으면 숯처럼 새까맣게 탄화(炭化)된다.

억지로 펴려고 하면 바스러지기 때문에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연구팀은 강력한 X선을 이용했다.

강력한 X선으로 파피루스의 내부를 꿰뚫어본 것이다.

잉크로 파피루스에 글을 쓰면 완전히 스며들지 않고 0.1㎜ 정도 솟은 상태로 굳는다.

이 차이를 X선으로 읽어내 두루마리에 쓰인 글자를 읽어냈다.

로마 시대의 문서들은 대부분 소실됐다.

고고학자들은 후대 역사가들이 전해듣고 적은 글을 보고 과거를 짐작하거나 재구성한다.

하지만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도서관과 공공기관에 쌓여 있는 탄화 문서들을 읽을 수 있다면 로마 연구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호메로스의 전설, 트로이

            

19세기까지 고고학자들은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가 노래한 트로이를 단순히 신화로만 여겼다.
하지만 여덟 살에 아버지에게 트로이 전설을 들은 하인리히 슐리만은 달랐다.
그는 트로이가 실재했다고 확신했고, 수십년간의 노력 끝에 실제로 터키에서 트로이를 찾아냈다.

하지만 슐리만이 찾은 트로이는 그가 찾아 헤맨 트로이가 아니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정밀한 연대 측정을 통해 트로이 유적의 구조를 밝혀내고 있다.
그 결과 같은 자리에 도시가 생겨났다 없어지고, 다시 그 위에 도시가 생기기를 반복한 것으로 드러났다.
방사선 동위원소 측정 등을 통해 단층(斷層)처럼 쌓여 있는 도시의 흔적을 한 꺼풀씩 벗겨 내는 작업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최소한 10개의 트로이가 밝혀졌고 앞으로도 더 많은 트로이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슐리만이 엄청난 양의 보물을 찾아낸 트로이는 두 번째 트로이,
실제 호메로스가 쓴 그리스 서사시 ‘일리아스’에 나오는 트로이는 일곱 번째 트로이였다.
시간상으로 보면 수백년 이상의 차이가 있다. 슐리만은 현대 고고학 발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마추어였던 슐리만은 섣부른 발굴보다는 조심스러운 발굴을 선호했다.
최대한 광범위한 영역을 설정한 뒤 조심스럽게 파내려가는 방식을 개발했고, 이 방법은 현재까지 사용된다.
당시 슐리만이 인부를 동원해 발굴한 지역은 무려 25만㎡에 이른다.

공중도시, 마추픽추

            

1900년대 초반 미국 예일대 고고학자 하이럼 빙엄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재단의 지원을 받아 남미 탐사에 나섰다.
빙엄을 이끈 것은 ‘대단히 높은 산꼭대기에 정교한 기술로 건축된 장대한 건물이 솟아 있다’는 고문헌의 한 문장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태양의 제국’으로 불렸던 잉카 문명의 흔적을 찾아낼 것으로 기대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11년 빙엄은 가장 찬란했던 문명 도시 마추픽추를 찾아냈다.

15~16세기에 번성했던 잉카 제국은 남미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지만, 200명도 되지 않는 스페인 군대에 의해 멸망했다.
마추픽추는 잉카인들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도시로 추정된다.
마추픽추의 절반은 농경지로 계단식 밭에서 최소 1만명이 먹을 수 있는 곡식이 생산됐던 것으로 보인다.

태양의 제국이라는 별명답게 마추픽추의 신비를 밝히는 결정적인 열쇠는 천문학이 쥐고 있다.
이들은 수백 년 전에 이미 1년의 길이를 365.242129일이라고 정확히 계산해낼 정도의 천문학 지식을 갖고 있었다.
폐허가 된 마추픽추의 각종 건물의 역할을 규명하는 데도 천문학이 활용된다.
각종 건물에 새겨져 있는 무늬조차도 특정 날짜와 연관이 있을 정도였고,
윤년·윤달까지 표시돼 있다는 점이 천문학자들의 참여를 통해 확인됐다.

콜럼버스 앞선 개척자의 도시, 카호키아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북미 대륙에 도착하고도 ‘인도’라고 착각했다.
콜럼버스의 실수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곳을 미개한 원주민들의 땅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도착보다 수백년 먼저 북미 대륙에는 현재의 서울에 비견될 만한 거대한 도시가 존재했다.
바로 오늘날의 일리노이주 세인트루이스 옆에 있었던 ‘카호키아’이다.

카호키아는 미시시피인으로 불리는 부족이 주도적으로 건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1000년 무렵에 건설돼 1350년까지 이어졌다.
유적의 규모를 볼 때 최대 1만명 정도가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인구를 감안하면 현재의 1000만명 도시에 비견되는 수준이다.

카호키아를 둘러싼 궁금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우선 위치가 대도시가 자리 잡기에 적합하지 않다.
미시시피강이 범람하는 지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토머스 에머슨 일리노이 주립대 교수는
“카호키아가 이곳에 건설된 것은 강을 이용해 수많은 도시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라며
“일종의 종교 도시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실제로 카호키아의 중심에는 거대한 제단이 설치돼 있었다.
또 과학자들이 발굴된 유골의 치아를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으로 조사한 결과 3분의 1은 외부인이었다.
먹는 음식의 종류가 다르면 치아에 남아 있는 방사성 물질의 양도 다르다는 점을 이용한 측정법이다.
이 밖에 제단 인근에서는 목이 깨끗하게 잘린 시신들이 발견됐다.
종교적 의식에서 주로 나타나는 형태이다.

두 번째 궁금증은 왜 카호키아가 사라졌는지이다.
과학자들은 카호키아에서 발굴한 유골에서 전쟁 등 외부 침입의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뚜렷한 전염병의 흔적도 없다.
결핵, 페스트 등 치명적인 전염병들은 뼈에 변형이나 감염 등의 흔적을 남기지만 카호키아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알려지지 않은 전염병, 아니면 어떤 이유에서 사람들이 도시를 버리고 떠났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심지어 미국 원주민 사이에서도 카호키아에 대한 전설은 전해지지 않는다.
철저히 ‘사라진 도시’인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