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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경기 도보후기☞/☆ 염하강변일주

[20170318]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 - 2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7.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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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3월 18일(토)

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를 다녀오다.
 

 


'염하강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 이야기

 

 맥가이버의 '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 코스


성동검문소→포내천수문→포내배수펌프장→해병대훈련장→김포CC→고양리쉼터→원머루나루(고양포)→할머니매점→쇄암리전망대쉼터

→고란초삼거리→출렁다리→부래도쉼터→부래도(덕포나루)→손돌묘→덕포진 파수청터→덕포돈대→덕포진쉼터→평화누리길1코스 입구

→김포함상공원/대명항→호동천배수문→대명항 종점→초지대교 도강→대선정초지진→초지항활어회마을→덕진교→덕진진(덕진돈대

→경고비→남장포대→공조루)→광성보(광성포대→용두돈대→손돌목돈대→신미순의총→쌍충비각→안해루→광성돈대)→강기운 의교비

강화전성→오두돈대→화도수문개축기사비→화도돈대→용당돈대→강화 더리미포구→강화외성→갑곶교→舊강화대교 도강→성동검문소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안내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 김포평화누리길 1코스염하강철책길 안내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염하(鹽河) or 염하강 鹽河江] - 강화해협 or 김포강화해협

인천광역시 강화군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의 해협(海峽)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강화도)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에 있는 남북 방향의 좁은 해협(海峽)이다.
마치 강(江)과 같다 하여 염하(鹽河)라고 부르며 강화해협 또는 김포강화해협이라고도 한다.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20km이다.
 
밀물 때의 최대 유속은 약 3.5m/sec로 물살이 거세고 수심이 얕아서 썰물 때에는 곳에 따라 바닥이 드러나기도 한다.
염하의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강물이 흘러들어 오는데,
염하 북쪽의 월곶과 남쪽 황산도 간에는 물높이(해수면 높이) 차이가 아주 커서 물살이 빨라지게 된다.
 
염하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서해를 북상해 온 세곡선(稅穀船)이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염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외세를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개항기 때에는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치른 격전지였다.
염하를 따라 군대 주둔지인 진(鎭)과 보(堡), 초소인 돈대 등 수많은 방어유적이 산재해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초지진(草芝鎭, 사적 제225호), 덕진진(德津鎭, 사적 제226호),
덕포진(德浦鎭, 사적 제292호),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227호), 갑곶돈(甲串墩 갑곶돈대, 사적 제306호) 등이 있다.
염하는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북한 신의주까지 오가던 뱃길이었는데
전쟁 후 뱃길이 봉쇄되었다가 2007년부터 민간어선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염하를 가로질러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놓여 있다.
 
[출처 : 두산백과]

 

 
 
때 무작정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면 그 길을 찾아 나섰던 적이 있었다.
훗날 그 길들은 제각기 이름을 갖고 올레길, 둘레길, 나들길, 누리길 등이 되었다.
 
이미 걸었던 길들이 새로운 이름표를 달고 세상에 알려지면 다시 그 길을 찾아나서곤 하였는데...
최근 하루가 멀다하고 길이 생기다보니 그 길을 찾아 걷다보면 또 새로운 이름표를 단 길들을 만난다.
 
 
오늘은 '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 위해 길을 나선다.
 
염하(鹽河) 또는 염하강(鹽河江)이란 김포시와 강화도 사이의 바다를 달리 이름이고,
'염하강 일주'란 강화초지대교와 강화대교를 도강하며 '강화도 해안길'과 '김포 해안길'을 따라 걷는 것을 말한다.
 
오늘 걷는 '염하강(김포강화해협) 일주' 코스 中
김포 해안길은 '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로, 강화도 해안길은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이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그 두 길을 위 '염하강 일주 코스도'처럼 성동검문에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걸어서 성동검문소로 원점회귀하는 코스이다.
 
오늘 걸은 거리는 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14km와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16km를 합하고,
두 길을 잇기 위한 강화초지대교와 강화대교의 도강거리와 강화도의 여러 진과 돈대 등의 탐방으로 4km 정도를 더하면 34km 이상일 듯...
 

08시 14분에 성동검문소를 출발하여 휴식 없이 '염하강(김포강화해협) 일주'를 하고, 15시 37분에 성동검문소로 원점회귀하였다.


  

☞ 맥가이버의 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를 다녀오다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누군가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다.
맥가이버는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걷는 것을 죽고사는 차원이 아닌 즐기는 차원에서 걷는다.
즉, 좋은 길을 걷다가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되고, 느끼고, 감동 받고, 깨닫는 것을 즐긴다.
 

 

 
 
'모든 만남은 걷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길을 걷다보면 새로운 풍광을 보게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맥가이버가 '때론 함께, 때론 홀로' 산행이나 여행, 도보를 하면서 후기를 주로 사진으로 작성함은
인간의 만남이 또한 유한함을 알기에 어떤 연유로 비록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하고자 함이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하는 무능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든다면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자 할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 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를 다녀오다 - 2부를 시작하며...

 

 

신안리별장주택에서... 


2012년 1월 26일에 김포평화누리길 1ㆍ2ㆍ3코스 이어걷기(대명항→애기봉입구→전류리포구→샘재)를 할 때까지는 이런 모습이었는데...

 

▼ 대명항까지는 2.3km...







▼ 손돌묘


덕포진 손돌묘[德浦鎭孫乭ㅡ]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덕포진에 있는 묘이다. 


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292호
지정일 : 1981년 09월 25일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 103-1
시대 : 조선
종류/분류 : 유적지
크기 : 면적 48,794㎡

 

덕포진 북쪽 해안 언덕 위에 있다.

1970년에 덕포진 내의 현 위치에 복원하였으며 1977년에는 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단장하였다.
 
손돌은 고려시대의 뱃사공인데,
몽고가 침입하여 고려 왕이 강화도로 피난할 때 손돌의 배를 타게 되었다.
물길이 좁아 앞이 보이지 않고 세찬 물살에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왕은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손돌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손돌은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우고 그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 말한 뒤 죽음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왕은 자신이 경솔하였음을 깨닫고
후하게 장사를 치른 뒤 사당을 세워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넋을 위로하였다.
 
조선 말까지 손돌의 넋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오다가 일제강점기 동안 중단되었으며 1970년부터 다시 지냈다.
1989년부터는 김포문화원이 주관하여 손돌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에 진혼제를 지낸다. 

 

[출처 : 두산백과]





☞ 손돌공 전설

 

서기 918년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여 제23대 고종에 이르기까지 314년간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고려는 많은 수난을 겪었다.

 

서기 1231년 몽고(원나라)가 침입하매, 고종은 화친을 내세워 일단 회군시켰으나,

그들이 계속 부당한 조공(朝貢)을 요구하므로 결사항전할 것을 결심하고 1232년 몽고의 2차 침략 때 강화도로 천도 하게 되었다.

 

고종은 조정을 이끌고 개경을 떠나, 사공 손돌의 배를 타고

예성강 벽란도를 거쳐 임진강과 한강 하류를 지나 강화도로 가고 있었다.

도중 현재의 대곶면 신안리와 강화도 광성진 사이의 해협이 협소하고 급류인 목에 닿게 되었다.

 

이곳은 앞이 막힌 듯이 보이는 지형으로 처음 가는 사람은 뱃길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지라,

천도 하는 고종도 심기가 불편한 나머지 뱃길도 없는 곳을 향하여 노를 젓는 사공 손돌을 의심하여

수차 뱃길을 바로잡도록 하명하였으나, 손돌이 아뢰기를

 "보기에는 앞이 막힌 듯 하오나 좀더 나아가면 앞이 트이오니 폐하께서는 괘념치 마옵소서"라고 아뢰었다.

 

고종은 마음이 초조하여, 손돌의 흉계로 의심하고 신하들에게 손돌을 죽이라고 명하였다.

손돌은 죽음에 직면하고도 임금의 안전 항해를 바라는 충성에서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뱃길이 트일 것을 아뢴 후 참수되고 말았다.

이후 왕의 천도 항해는 손돌의 바가지 안내대로 험한 협류를 무사히 빠져나와 목적지에 당도하였다.

 

왕은 늦게나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손돌을 후히 장사지내주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당도 세워주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 뱃길목을 지금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르며,

공(公)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 쯤이면 손돌의 원혼이 바람을 일으킨다 하였다.

이때에 거센 바람을 '손돌이바람', 이 무렵의 추위를 '손돌이추위'라 전해온다.

 

이러한 전설에 따라 매년 음력 10월 20일에 손돌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제를 지내고 있다.

아쉬운 점은 아직까지는 손돌의 실화를 입증할 어떤 문헌이나 자료 등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손돌공의 묘는 물 건너로 광성진을 보이는 덕포진 북쪽 해안 언덕 위에 있다.

공의 제사는 조선조말까지 계속되어오다가 일제 강점 후 중단되었었으나 1970년 이후 계속 지내오고 있으며,

묘는 1977년 박일양(朴一陽)씨등과 면민들이 묘비를 세우고 치산(治山)하여 크게 단장하였다.


 자료출처 : 경기도홈페이지>경기도소개>경기문화유산>향토지적재산 中


▼ 염하 건너편에 광성보의 용두돈대와 손돌목돈대가 보이고...




손돌목[孫乭項]

경기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지역에 있는 목[項].


유형 : 지명
성격 : 해협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정의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지역에 있는 목[項]

 

지형상 이 지역이 바다로 돌출해 있는데

대안(對岸)의 강화도 광성보(廣城堡)가 있는 곳도 바다로 돌출해 있어 두 지역 사이가 좁은 여울의 형태를 이룬다.

따라서 밀물 때 이곳을 흐르는 해류가 급류를 이루어 배가 건너다니기 어렵다.

 

손돌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있던 뱃사공의 이름에서 나왔는데 그에 관한 전설은 2개로 되어 있다.

 

고려 때 몽고의 난을 피해 급히 이곳에 도착한 왕이 바다를 건너고자 할 때 손돌이 아직 바람이 자지 않았으니 쉬었다 건너자고 하여

왕이 그를 모반자로 생각하여 처형을 하니 광풍이 불이 바다를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왕이 크게 후회하여 그가 탄 말의 목을 베어 제사를 지내고 나니 바람이 잔잔하여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전설은 왕이 탄 배가 바다를 건널 때 손돌이 배를 급류쪽으로 몰아 위험을 느낀 왕이

손돌의 행동을 의심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그가 죽기 전 자기가 죽은 뒤 바다에 바가지를 띠워

그 바가지가 가는대로 배를 몰면 안전할 것이라고하여 손돌을 죽인 뒤 그의 말대로 했더니 배가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이에 왕이 크게 뉘우쳐 손돌의 무덤을 만들고 크게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음력 10월 20일경인데,

이때는 겨울의 북서풍이 강하게 불어 겨울의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며 이 시기에 부는 바람을 손돌풍(孫乭風)이라고 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덕포진의 이 길이 늘 그립다.


김포 덕포진[金浦 德浦鎭]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진영. 사적 제292호.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66년(현종 7) 강화에 예속된 진이었다고 하며,
1679년(숙종 5) 강화의 광성보, 덕진진, 용두돈대와 함께 축성되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격전지이다.

 

유형 : 유적
시대 : 조선
성격 : 진(鎭)
건립연도 :1679년
규모(면적) : 지정면적 4만 8794㎡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292호
문화재 지정일 :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92호. 지정면적 48,794㎡.

이곳은 돈대(墩臺)와 포대(砲臺) 및 파수청(把守廳)이 있던 곳으로,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66년(현종 7) 강화에 예속된 진이었다고 하며,

1679년(숙종 5) 강화의 광성보(廣城堡)·덕진진(德津鎭)·용두돈대(龍頭墩臺)와 함께 축성되었다.

 

돈대의 위치는 한성으로 통하는 바닷길의 전략요충지로서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함대와, 신미양요 때는 미국함대와 싸웠던 격전지이다.

또, 돈대와 포대의 중심부에는 파수청터가 있는데, 이곳은 포를 쏠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는 동시에 포병을 지휘한 장소로 생각된다.

 

1980년의 발굴조사 당시 7개의 포탄과 상평통보(常平通寶) 2개가 출토되었고, 건물터에서는 주춧돌과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는데,

건물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추정되며, 둘레에 맞담을 쌓듯이 둘러친 석벽이 있었다.

또, 돈대터에서는 1874년(고종 11)에 만들어진 포와 포탄 등이 발굴되었다.

 

이곳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화도의 광성보와 맞서 있는데, 시야가 막힌데다가 해협이 매우 좁고 물살이 빠르며 소용돌이치므로

적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고려 고종이 몽고병의 침략을 피하여 강화도로 가는 길에 배를 타고 이곳의 바닷길을 지나다가 위험을 느낀 나머지

사공이 흉계를 꾸몄다고 오해하여 그를 처형하였으나,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가자 잘못을 뉘우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부근에는 당시 사공이었던 손돌(孫乭)의 무덤이 있으며, 지금도 덕포진 앞의 좁은 바닷길을 손돌목이라 부르고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김포 덕포진[金浦 德浦鎭]


강화의 초지진(草芝鎭) ·덕진진(德津鎭)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통하여

수도 서울로 진입하려는 외세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한 조선시대의 군영. 


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292호
지정일 : 1981년 09월 25일
시대 : 조선
종류/분류 : 군영
크기 : 지정면적 48,794㎡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 103-1 지도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92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大串面) 신안리(新雁里)에 소재하며, 지정면적은 4만 8794㎡이다.
설치된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666년(현종 7) 이미 강화에 예속된 진이었다.

1679년(숙종 5) 강화의 광성(廣城) ·덕진(德津) ·용두(龍頭)의 여러 돈대(墩臺)와 함께 이곳에도 돈대가 축성되었으며,

1866년(고종 3) 9월 병인양요(丙寅洋擾) 때는 프랑스 함대와,

1871년 4월 신미양요(辛未洋擾) 때는 미국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1980년 포대 ·돈대 및 파수청(把守廳) 터의 발굴조사에서 1874년에 만든 포와 포탄,

조선시대의 화폐인 상평통보 및 주춧돌과 화덕 등이 출토되었다.

파수청은 유구(遺構)로 보아 포대와 돈대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포를 쏘는 불씨를 보관하던 장소인 동시에 포병을 지휘하던 장대(將臺)로 추정된다.


[출처 : 두산백과]


▼ 덕포진 파수청터












▼ 염하 건너편엔 덕진진이 자리하고...












▼ 강화초지대교가 보이고...






▼ 덕포진쉼터


▼ 말뚝박기


말타기놀이(마부놀이와 말뚝박기)에 대하여...



 1. 움직이는 말타기(마부놀이)

① 먼저 가위바위보로 마부와 말을 정한다. 보통 맨 꼴찌가 말이 되고 그 전 사람이 마부가 된다.


② 말은 마부의 오른쪽 옆구리에 머리를 대고, 마부는 오른손으로 말의 눈을 가려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하도록 한다.

말의 눈을 가리는 것은 말을 타려고 달려오는 사람을 보고 뒷발질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③ 놀이가 시작되면 말은 다른 사람이 못 타도록 이리저리 움직이거나 계속 뒷발질을 해댄다.

이때 타려던 사람이 뒷발질에 채이면 그 사람이 말이 되고 말을 했던 사람은 마부가 된다.


④ 말이 움직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은 재빨리 말 등에 올라탄다.

한 명이 탈수도 있고 겹쳐 탈수도 있는데, 만약 무게를 못 이겨 말이 주저앉으면 다시 말이 되어 계속해야 한다.

⑤ 말에 사람이 올라타면 말은 몸을 이리저리 틀어서 말 위의 사람을 떨어뜨리려 하고,

말에 탄 사람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말을 꼭 붙잡는다.

말은 등에 사람을 태우면 힘이 들고 불편하기 때문에 타지 못하도록 계속 뒷발질을 한다.


2. 고정된 말타기(말뚝박기)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① 먼저 편을 나누어 각각의 대장을 선정하고 가위바위보로 공격과 수비를 정한다.


② 수비하는 편의 대장이 벽이나 나무에 기대어 서면

나머지 사람은 허리를 굽혀 머리를 가랑이 사이에 넣고 두 손으로 대장의 허벅지를 잡고 버티어 선다.

그 다음 사람도 마찬가지로 앞사람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끼고 다리를 꽉 잡고 길게 말을 만든다.


③ 이긴 편은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힘을 이용해 두 손으로 말 등을 잡고 뛰어올라 깊숙이 탄다.

이때 깊숙이 앞쪽으로 타지 않으면 뒷사람이 탈 수 없기 때문에 먼저 탄 사람은 되도록 앞쪽으로 타야 한다.


④ 말을 타다가 중간에 떨어지거나 발이 땅에 닿으면 공격과 수비가 교체된다.

반대로 수비하는 말이 힘이 없어 중간에 무너지면 다시 말을 만들게 하여 계속 공격한다.


⑤ 이긴 편이 다 탔으면 대장끼리 가위바위보를 해서, 다시 이긴 편은 타게 되고 진 편은 말을 만들어 놀이가 계속된다.

진 편의 대장은 편하기는 하지만 가위바위보를 해서 졌을 때 같은 편 아이들에게 구박받고 심지어 대장이 교체되기도 한다.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 말뚝박기 '가위바위보'


▼ '남자는 주먹!'


가위바위보
한 손으로 가위·바위·보의 세 모양을 만들어 차례나 승부를 정하는 방법 또는 놀이.

 

이 놀이는 본디 중국에서 전해진 손의 싸움으로 술자리의 놀이였으나, 뒤에 아이들의 놀이로 되었다고 한다.

가위·바위·보는 손가락 모양을 따서 붙인 이름으로,

한 손으로 엄지손가락이나 집게손가락

또는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만을 펴고 나머지 손가락은 접은 모양을 ‘가위’,

주먹쥔 손을 ‘바위’, 그리고 다섯 손가락을 모두 편 모양을 ‘보’라고 한다.


놀이방법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어린이들이 둘러앉거나 선 채로,

‘가위바위보’하고 합창하면서 제각기 마음 먹었던 손 모양을 지어 내민다.

그런데 가위는 보, 곧 보자기를 찢을 수 있기 때문에 ‘보’에 이기나, ‘바위’보다는 약하므로 ‘바위’에 진다.

한편, ‘바위’는 ‘보’로 싸 담을 수 있으므로 ‘보’에 지는 것으로 여긴다.


첫번에 낸 모양이 모두 같거나,

같은 사람이 둘 이상이면 지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거듭하는데,

곳에 따라서는 두번째·세번째 부르는 소리를 달리하기도 한다.


승부는 단번에 결정되나 ‘삼세번’이라 하여 세 번 계속해서 두 번 이상 이기는 것으로 정하기도 한다.

이 놀이를 할 때 남이 내는 것을 얼핏 보고 나서 뒤늦게 내는 꾀를 부리기도 하는데, 이 경우 늦게 낸 사람을 진 것으로 친다.

이를 막으려고 각각 돌아서서 어깨너머로 손을 내밀기도 한다.


한편, 날씨가 춥거나 하여 손을 내밀기 싫은 때에는 발로 가위바위보를 한다.

두 다리를 모으면 바위이고, 한쪽 다리를 벌리면 보가 되며, 한쪽 다리를 앞으로 내어디디면 가위로 친다.


이 놀이는 가위바위보만을 계속해서 많이 이기는 그 자체를 즐기기도 하는데,

이 때 상대방이 무엇을 낼 것인가를 짐작하는 묘미도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짱껨뽀


본 뜻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하는 놀이를 ‘가위바위보’라 하는데

이 이름이 생기기 전에는 ‘짱껨뽀’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었다.

이 ‘짱껨뽀’는 본래 중국말 ‘란쩡펑’에서 나온 것으로 란쩡펑이란 발음이 와전되어 ‘짱껨뽀’가 된 것이다.

바뀐 뜻

중국에서 들어온 이 놀이는 중국말을 그대로 따서 ‘짱껨뽀’라 했는데,

윤석중 선생이 순수한 우리말로 된 ‘가위바위보’란 이름을 지어냈다.

그 덕에 ‘짱껨뽀’란 말은 지금은 중장년층의 기억 속에나 있는 말이 되었고,

그 자리를 ‘가위바위보’가 차지하고 있다.
 
출처 : 우리말 1000가지



▼ 이 곳을 동행과 함께 오면 뒷모습을 찍을려고 맘에 두고 있지만...


▼ 오늘은 혼자 와서...











▼ '길은 끝이 없구나...'





▼ 홀로 선 닻 - 배가 떠나가지 못하도록 붙들어 매어 놓았을 텐데...



▼ 염하강철책길 시점 아치에 도착...



▼ 김포함상공원


▼ 지난 2010년 11월 14일에 '염하강 도보일주'를 하면서 잠시 들린 '김포함상공원' 안으로 들어가 보니... 

 

 

 

 







▼ 평화누리길 조형물






▼ 호동천 배수갑문


▼ 강화초지대교 방향으로...



▼ 강화초지대교를 통과하는 차량들을 소독 중...


▼ 강화초지대교



강화초지대교[江華草芝大橋]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草芝里)와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藥岩里)를 잇는 아치형 4차선 다리로,

길이 1.2㎞, 폭 17.6m의 4차선 교량인데, 1999년 6월부터 인천광역시가 공사를 맡아 2002년 8월 28일 개통하였다. 


인천 강화군 길상면과 경기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를 잇는 교량.


국가 : 한국
구분 : 다리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과 경기 김포시대곶면 약암리 사이
건립기간 : 2002년 08월 28일
건립자 : 인천광역시
설계자/건축가 : 시공 한솔건설(주), 감리 동일기술공사(주)
건축양식 : 교각 우물통공법
규모 : 길이 1.2㎞, 폭 17.6m(4차선)

 

1995년 10월부터 민자유치사업으로 추진되다가,

1999년 6월부터 인천광역시가 공사를 맡아 2002년 8월 28일 개통하였다.
시공은 한솔디앤씨(주)이, 감리는 동일기술공사(주)가 맡았고, 총 590억 원의 사업비가 들었다.
길이 1.2㎞, 폭 17.6m의 4차선 교량으로, 하루에 3만 5000대의 교통량을 처리할 수 있다.

 

교각(橋脚:기둥)은 12개이며, 아치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각 건설공법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고 물살이 빨라 이를 견뎌 낼 수 있도록 거대한 우물통공법을 적용하였다.
즉 강재로 제작한 우물통을 해상 크레인을 이용해 바다에 집어넣고,

콘크리트를 타설한 뒤 그 내부를 굴착해 바다 밑 암석에 2m 정도까지 심는 공법을 채택하였는데,

교각 지름은 16m, 높이는 30m, 무게는 5,000~6,000톤이다.
그 밖에 자전거 전용도로와 인도도 함께 건설되었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경기도 부천시·김포시 등 수도권 서부지역 주민들이 기존의 강화대교를 이용하는 것보다

차로 30여 분 빨리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고, 강화도에서 인천까지는 출퇴근이 가능한 1시간대로 교통이 편리해졌다.


이 다리를 건너 우회전해 해안도로를 따라 5분 정도 가면
흥선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가 있는 덕진진(德津鎭)이 있고,

그 주위로 마리산 국민관광지, 화도면 철새도래지 등 관광명소가 많다.

 

[출처 : 두산백과]



▼ 한때 '대평포구'라 불리다가 이제는 '대명항'이라고 불린다.





▼ 만선의 꿈을 안고 포구를 떠나는 배








▼ 초지진을 당겨 보니...



▼ 지나가야 할 대선정과 보리밭집이 보이네...



▼ 강화초지대교를 도강하여...


▼ 대선정 방향으로...


▼ 대선정 앞을 지나...


▼ 초지대교를 바라보니...







▼ 초지진 주차장


▼ 초지진 소나무




▼ 초지진


강화 초지진[江華 草芝鎭]
인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초지리에 해안선을 지키기 위하여 설치한 진. 


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225호
지정일 : 1971년 12월 28일
시대 : 조선(효종7)
종류/분류 : 진(鎭)
크기 : 면적 4,233㎡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 

 

1971년에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4,233m2이다.

1656년(효종 7) 강화유수(江華留守) 홍중보(洪重普)가 처음 설치하였다.

 

66년(현종 7) 병마만호(兵馬萬戶)를 두었다가 1763년(영조 39)에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는데

이 때의 병력은 병마첨절별사(兵馬僉節別使) 1명,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墩軍) 18명, 목자(牧子) 210명, 진선(鎭船) 3척과 무기 다수가 있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이 곳에서 프랑스 함대의 로즈 소장과 싸웠으며,

1871년(고종 8)에는 미국 아시아함대의 로저스 중장이 이 곳에 침입하였을 때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하다 함락된 바 있었고,

1875년(고종 12)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와도 이 곳에서 교전하였다.

 

이 초지진은 모두 허물어져 돈(墩)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73년 초지돈만 복원하였다.

돈에는 3곳의 포좌(砲座)가 있고 총좌(銃座)가 100여 곳 있다.

성은 높이 4m 정도에 장축이 100m쯤 되는 타원형의 돈이다.

돈 안에는 조선 말의 대포 1문이 포각 속에 전시되어 있는데,

포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 홍살로 되어 있으며, 대포의 길이는 2.32m, 입지름 40cm이다.

 

[출처 : 두산백과]



▼ 초지항 활어회마을 가는 길







▼ 머무름 - 캠핑카의 정차, 어선의 정박...그들은 멈추었는데...









▼ 정면에 덕진돈대가 보이는데...



▼ 바로 건너갈 수 없어서...



▼ 수로에서 세월을 낚는 강태공




▼ 온수천배수문과 덕진교를 건너...



▼ 덕진돈대 방향으로...



▼ 덕진돈대 가는 길에는...






▼ '밤엔 이 돌문이 닫힌다고...'











▼ 덕진돈대


덕진돈대[德津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 53돈대의 하나.

손돌목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소속한 2개 돈대 중 하나로서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 중간에 있어 강화수로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 역할을 한다.
 
1679년(숙종 5)에 축조하였으며 덕진진 안에 있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을 때 남장포대,

덕포포대와 함께 미국의 아시아 함대와 이틀에 걸친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신미양요 때 크게 파괴되었으나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 당시 새롭게 복원하였다.

돈대의 남쪽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가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당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짐작하게 하는 '강화 덕성리의 경고비'가 세워져 있다.

 

[출처 : 두산백과]




☞ 여기서 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를 다녀오다 - 2부를 마치고...

 

 

 

2017년 03월 18(토)

 맥가이버의 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를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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