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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경기 도보후기☞/☆ 염하강변일주

[20170318]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 - 3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7.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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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3월 18일(토)

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를 다녀오다.
 

 


'염하강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 이야기

 

 맥가이버의 '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 코스


성동검문소→포내천수문→포내배수펌프장→해병대훈련장→김포CC→고양리쉼터→원머루나루(고양포)→할머니매점→쇄암리전망대쉼터

→고란초삼거리→출렁다리→부래도쉼터→부래도(덕포나루)→손돌묘→덕포진 파수청터→덕포돈대→덕포진쉼터→평화누리길1코스 입구

→김포함상공원/대명항→호동천배수문→대명항 종점→초지대교 도강→대선정초지진→초지항활어회마을→덕진교→덕진진(덕진돈대

→경고비→남장포대→공조루)→광성보(광성포대→용두돈대→손돌목돈대→신미순의총→쌍충비각→안해루→광성돈대)→강기운 의교비

강화전성→오두돈대→화도수문개축기사비→화도돈대→용당돈대→강화 더리미포구→강화외성→갑곶교→舊강화대교 도강→성동검문소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안내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 김포평화누리길 1코스염하강철책길 안내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염하(鹽河) or 염하강 鹽河江] - 강화해협 or 김포강화해협

인천광역시 강화군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의 해협(海峽)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강화도)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에 있는 남북 방향의 좁은 해협(海峽)이다.
마치 강(江)과 같다 하여 염하(鹽河)라고 부르며 강화해협 또는 김포강화해협이라고도 한다.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20km이다.
 
밀물 때의 최대 유속은 약 3.5m/sec로 물살이 거세고 수심이 얕아서 썰물 때에는 곳에 따라 바닥이 드러나기도 한다.
염하의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강물이 흘러들어 오는데,
염하 북쪽의 월곶과 남쪽 황산도 간에는 물높이(해수면 높이) 차이가 아주 커서 물살이 빨라지게 된다.
 
염하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서해를 북상해 온 세곡선(稅穀船)이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염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외세를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개항기 때에는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치른 격전지였다.
염하를 따라 군대 주둔지인 진(鎭)과 보(堡), 초소인 돈대 등 수많은 방어유적이 산재해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초지진(草芝鎭, 사적 제225호), 덕진진(德津鎭, 사적 제226호),
덕포진(德浦鎭, 사적 제292호),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227호), 갑곶돈(甲串墩 갑곶돈대, 사적 제306호) 등이 있다.
염하는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북한 신의주까지 오가던 뱃길이었는데
전쟁 후 뱃길이 봉쇄되었다가 2007년부터 민간어선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염하를 가로질러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놓여 있다.
 
[출처 : 두산백과]

 

 
 
때 무작정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면 그 길을 찾아 나섰던 적이 있었다.
훗날 그 길들은 제각기 이름을 갖고 올레길, 둘레길, 나들길, 누리길 등이 되었다.
 
이미 걸었던 길들이 새로운 이름표를 달고 세상에 알려지면 다시 그 길을 찾아나서곤 하였는데...
최근 하루가 멀다하고 길이 생기다보니 그 길을 찾아 걷다보면 또 새로운 이름표를 단 길들을 만난다.
 
 
오늘은 '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 위해 길을 나선다.
 
염하(鹽河) 또는 염하강(鹽河江)이란 김포시와 강화도 사이의 바다를 달리 이름이고,
'염하강 일주'란 강화초지대교와 강화대교를 도강하며 '강화도 해안길'과 '김포 해안길'을 따라 걷는 것을 말한다.
 
오늘 걷는 '염하강(김포강화해협) 일주' 코스 中
김포 해안길은 '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로, 강화도 해안길은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이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그 두 길을 위 '염하강 일주 코스도'처럼 성동검문에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걸어서 성동검문소로 원점회귀하는 코스이다.
 
오늘 걸은 거리는 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14km와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16km를 합하고,
두 길을 잇기 위한 강화초지대교와 강화대교의 도강거리와 강화도의 여러 진과 돈대 등의 탐방으로 4km 정도를 더하면 34km 이상일 듯...
 

08시 14분에 성동검문소를 출발하여 휴식 없이 '염하강(김포강화해협) 일주'를 하고, 15시 37분에 성동검문소로 원점회귀하였다.


  

☞ 맥가이버의 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를 다녀오다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누군가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다.
맥가이버는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걷는 것을 죽고사는 차원이 아닌 즐기는 차원에서 걷는다.
즉, 좋은 길을 걷다가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되고, 느끼고, 감동 받고, 깨닫는 것을 즐긴다.
 

 

 
 
'모든 만남은 걷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길을 걷다보면 새로운 풍광을 보게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맥가이버가 '때론 함께, 때론 홀로' 산행이나 여행, 도보를 하면서 후기를 주로 사진으로 작성함은
인간의 만남이 또한 유한함을 알기에 어떤 연유로 비록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하고자 함이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하는 무능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든다면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자 할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 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를 다녀오다 - 3부를 시작하며...

 

 

덕진돈대 


덕진돈대[德津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 53돈대의 하나.


손돌목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소속한 2개 돈대 중 하나로서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 중간에 있어 강화수로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 역할을 한다.
 
1679년(숙종 5)에 축조하였으며 덕진진 안에 있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을 때 남장포대,

덕포포대와 함께 미국의 아시아 함대와 이틀에 걸친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신미양요 때 크게 파괴되었으나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 당시 새롭게 복원하였다.

돈대의 남쪽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가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당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짐작하게 하는 '강화 덕성리의 경고비'가 세워져 있다.

 

[출처 : 두산백과]



▼ 초지대교 방향을 바라보니...


염하강에서 / 김병중 詩

 

강이 아닌 바다에 서서

바다가 아닌 강을 바라본다

강이 바다의 할아버지인지

바다가 강의 어미인지 알 수 없지만

이름은 강이라 하고

몸은 바다라고 한다

거북처럼 머리 처들고

초지대교로 돌아오는 만선의 배는

흰 갈매기가 호위하고

덕포진에서 불어오는 손돌바람은

강비늘을 세우는데

못난 삼식이를 대명리 주인이라 한들

누가 그를 탓하는가

호랑이가 입벌린 모습이면 어떠하고

해마가 물밖으로 나오는 모양이면 무엇하리

문수산 아래

강이 있어 바다가 있고

바다가 있어 염하강 물길이 있는

우린 대명천지에 한배를 탄

노아의 외밧줄 목숨이다



▼ 덕진돈대 아래 경고비


덕진진 경고비[德津鎭警告碑]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덕진진에 있는 비석. 

 

강화해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요새 덕진진(德津鎭, 사적 제226호) 앞 바닷가에 있는 경고비이다.

강화군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바다의 척화비’라고도 불린다.

1876년,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세웠으며 높이는 147cm, 폭은 54.5cm, 두께는 28cm이다.

비석 정면에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는 문장이 음각되어 있는데,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므로, 외국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는 뜻으로 결연한 쇄국의지를 담고 있다.

경고비 우측 상·하단부에는 탄흔이 남아 있다.

 

[출처 : 두산백과]







▼ 남장포대



▼ 덕진돈대






▼ 남장포대




남장포대[南障砲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 8포대의 하나.
덕진진에 소속된 포대로 건립 당시에는 약 15문의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시되었다.


1679년(숙종 5)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바다)에서

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자연적인 지형을 고려한 반달 모양의 요새로 축조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군사들이 이 곳을 통하여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1871년(고종 8)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을 때는 덕포포대와 함께 미국의 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신미양요 이후 성곽과 포대가 크게 파괴되었으나,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 당시 새롭게 복원하였다.

덕진진 안에 있으며 포대 오른쪽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덕진돈대가 있다.


[출처 : 두산백과]





▼ 남장포대와 덕진돈대


▼ 염하 건너편엔 덕포진이 보이고...





▼ 덕진진의 공조루




▼ 덕진진 공조루


강화 덕진진[江華 德津鎭]

덕진진은 조선시대 때 덕포진과 더불어 강화도해협의 관문을 지키던 강화도 제1포대였다.


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226호
지정일 : 1971년 12월 28일
시대 : 조선
종류/분류 : 요새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며, 덕진진은 덕포진과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의 포대였다.
덕진진은 본디 수영(水營)에 속하여 첨사(僉使)를 두고 있었는데,
1666년(현종 7년)에 강화유수 서필원(徐必遠)이 임금에게 청하여 첨사를 경기 김포시 덕포로 옮기고 이곳에 별장을 두었다.

1677(숙종 3년)에는 유수 허질(許秩)이 임금에게 청하여 만호(萬戶)로 승격시켰다.
1874년(고종 11년)에 축조한 남장 포대는 15문의 포대가 남아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梁憲洙)의 부대가 밤의 어둠을 타서 이 진을 거쳐

삼랑성(三郞城:일명 정족산성, 鼎足山城)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파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J.로저스 중장이 이끄는 미국 극동함대와 이곳에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성첩(城堞)과 문루(門樓)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터만 남게 되었다.
1976년에 문루를 다시 세우고 돈대(墩臺)를 보수하였으며 남장 포대도 개축하였다.


[출처 : 두산백과]










▼ 염하의 북쪽 월곶과 남쪽 황산포의 고도차가 커서 바닷물이 빠질 때 황산포쪽으로 물살이 세차게 흐른다.










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승 詩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깍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광성보(광성포대) 가는 길








▼ 광성포대










▼ 용두돈대 가는 길



용두돈대[龍頭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 53돈대의 하나.
광성보에 소속되어 있으며 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시되었으며 1679년(숙종 5)에 돈대가 세워졌다.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르면서

외국 함대들과 벌인 치열한 전투로 성벽이 크게 파괴되었으나,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당시 돈대 안에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를 세웠는데,

앞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돈대 앞을 흐르는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는 손돌풍으로 잘 알려져 있는 손돌목이다.
염하 건너편 덕포진 언덕 위에는 손돌풍 전설의 주인공 손돌의 묘가 있다.


[출처 : 두산백과]





















▼ 손돌목돈대


손돌목 돈대[孫乭─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53돈대의 하나.


덕진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으며 뱃사공 손돌의 전설에서 돈대의 이름을 땄다. 


1679년(숙종 5)에 축조하였는데, 강화도의 다른 돈대들이 사각 모양인 것과는 달리 원 모양으로 만들었다.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외국 함대들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서,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파괴되었던 성벽을 복원하였다.
돈대 입구에는 서해안 지역의 북한계선 식물인 탱자나무가 자라고 있다.
손돌목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는데,

그 앞의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고 한다.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 손돌의 묘가 있다.


[출처 : 두산백과]



▼ 신미순의총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광성보 내에 있는 조선 말기 무명용사들의 무덤이다.
 

쌍충비각 맞은편 아래쪽에 있다.

1871년(고종 8) 4월 23일 광성진(廣城津)에서 벌어졌던 미해군 육전대(陸戰隊)와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용사들의 무덤이다.
당시 군사를 이끌던 어재연 장군과 동생 재순, 군관, 사졸 등 53명의 전사자 중 어재연 형제는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신원을 알 수 없는 나머지 51명의 시신은 7기의 분묘에 나누어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호랑이를 사냥하던 포수 출신들로서 용맹함이 뛰어났다고 한다.

 

[출처 : 두산백과]



▼ 쌍충비각


쌍충비각[雙忠碑閣]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비각.


비각 안에는 신미양요(辛未洋擾)의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조선 후기의 무신 어재연(魚在淵)과

그의 아우 어재순(魚在淳) 등의 전적을 기리는 전적비가 있다. 


지정종목 : 향토문화재
지정번호 : 강화향토유적 제10호
지정일 : 1986년 04월 01일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
시대 : 조선
종류/분류 : 비각

 

1986년 4월 1일 강화군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 어재순을 비롯한 전 수비군은 인원과 무기의 열세를 딛고

미국함대와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대패하여 부상자 몇 명을 제외하고 전군이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비각은 후에 어씨 문중에서 이들의 충절을 기려 건립한 것으로

광성보 안에 있으며 1976년 광성돈대 복원작업의 일환으로 정비, 보수되었다.
해마다 음력 4월 24일이면 어씨 형제의 충절을 기리는 제를 올린다.


[출처 : 두산백과]








▼ 광성식당 가는 길



▼ 광성보 안해루


강화 광성보[江華 廣城堡]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광성나루(광성진)에 있던 성보(城堡). 

 

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227호
지정일 : 1971년 12월 28일
소장 : 강화군
시대 : 조선
종류/분류 : 성
크기 : 면적 61,000㎡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사적 제 227호.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 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이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 헐어진 데를 다시 고쳐 쌓았으며,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다.
그 후 숙종 때(1679)에 이르러 완전한 석성(石城)으로 축조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이다.
그 해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극동함대를
초지진·덕진진·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하여 물리쳤다.


그러나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24일에는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포로 되기를 거부,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 전원이 순국하였다.

 

이 때 파괴된 문루와 돈대(墩臺)를 1976년에 복원하였으며,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魚在淵) 장군의 전적비 등을 보수·정비하였다.

 

[출처 : 두산백과]



▼ 안해루




▼ 광성돈대



광성돈대[廣城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이다. 


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227호
지정일 : 1971년 12월 28일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종류/분류 : 성곽
크기 : 면적 6,102㎡

 

광성보(사적 제227호)에 소속된 3개의 돈대 중 하나이며,

보급창고 역할을 했던 손돌목돈대와 용의 모양을 닮았다 해서 이름 붙여진 용두돈대가 있다.
1679년(조선 숙종 5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여 일만에 완공하였다고 전해진다.
신미양요 때 파괴되었다가 1977년에 포좌 4개소와 포 3문을 복원 설치하였다.

 

돈대에 속한 홍이포는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뒤쪽 구멍에서 점화해 사격하는 사정거리 700m의 포구장전식 화포이다.
포탄을 날아가기는 하지만 폭발하지 않기 때문에 위력은 약하다.


[출처 : 두산백과]









▼ 강기운 의교비
























비스듬히 /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 강화외성 중 강화전성 구간...


<강화고지도> 18c후반 76.5*119cm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강화산성을 비롯하여 동쪽 해안의 강화외성, 정족산성, 문수산성 등이 검정색 굵은 선으로 강조되어 있다.

면 단위의 행정구역과 호구수, 강화부까지의 거리가 표시되어 있고, 상단의 지리지에는 강화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다.


▼ 강화전성 복원구간


강화전성[江華塼城]

 
강화전성인천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

길이 270m, 높이 0.9∼1.2m.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0호.

이 성은 강화도에 축조된 고려 외성 중의 하나이다.

 

유형 유적
시대 : 고려/고려 후기, 조선/조선 후기
성격 : 성곽, 전성(塼城)
건립시기·연도 : 고려 후기(토성), 1744년(전성)
크기(높이, 길이, 둘레, 깊이) : 높이 0.9∼1.2m, 길이 270m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 563
소유자 : 국(재정경제부)외 4인
관리자 : 강화군
문화재 지정번호 :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0호
문화재 지정일 : 1995년 3월 1일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성.

 

내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0호.

길이 270m, 높이 0.9∼1.2m.

이 성은 강화도에 축조된 고려 외성 중의 하나로 밑 부분은 돌로 쌓고 윗부분은 벽돌로 쌓았다.

 

원래 이 성은 1231년(고종 18)에서 1270년(원종 11) 사이에 토성으로 축조되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1742년(영조 18)에 강화유수 김시연(金時緛)이 벽돌을 구워

이 성을 개축할 것을 왕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아 이듬해 공사를 시작하여 1743∼1744년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래쪽은 돌로 쌓고 위쪽은 벽돌로 쌓았는데,

벽돌은 강회붙임으로 연결하고 어긋매김 공법으로 축조하여 허물어짐을 방지하였다.

원래 전체 높이 약 4m에 약 10리에 해당하는 부분은

벽돌로 개축하고 나머지 부분은 삼군문(三軍門)에서 축조하였는데,

현재는 약 270m 가량만이 군데군데 허물어진 채 남아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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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3월 18(토)

 맥가이버의 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를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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