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하강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 이야기
'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 코스
강화역사관→舊강화대교 도강→포내천수문→포내배수펌프장→해병대훈련장→김포CC→고양리쉼터→원머루나루(고양포)→할머니매점
→쇄암리전망대쉼터→고란초삼거리→출렁다리→부래도쉼터→부래도(덕포나루)→손돌묘→덕포진 파수청터→덕포돈대→덕포진쉼터
→평화누리길1코스 입구→김포함상공원/대명항→호동천배수문→초지대교 도강→대선정(중식)→초지진→초지항활어회마을→덕진교
→덕진진(덕진돈대→경고비→남장포대→공조루)→광성보(광성포대→용두돈대→손돌목돈대→신미순의총→쌍충비각→안해루→광성돈대)
→강기운 의교비→강화전성→오두돈대→화도수문개축기사비→화도돈대→용당돈대→강화 더리미포구→강화외성→갑곶교→강화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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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하(鹽河) or 염하강 鹽河江] - 강화해협 or 김포강화해협
인천광역시 강화군(강화도)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에 있는 남북 방향의 좁은 해협(海峽)이다.
마치 강(江)과 같다 하여 염하(鹽河)라고 부르며 강화해협 또는 김포강화해협이라고도 한다.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20km이다.
염하의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강물이 흘러들어 오는데,
염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외세를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초지진(草芝鎭, 사적 제225호), 덕진진(德津鎭, 사적 제226호),
염하를 가로질러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놓여 있다.
08시 18분에 강화역사관을 출발하여 '염하강(김포강화해협) 일주'를 하고,
17시 40분에 강화역사관으로 원점회귀하였다.
▼ 08시 05분 - 강화역사관(전쟁기념관) 앞에서...
▼ 출발 전 인증샷
▼ 갑곶돈은 패스하고...
갑곶돈[甲串墩]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있는 돈대. 사적 제306호.
강화 53돈대의 하나로서 1876년에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역사적인 유적이다.
그뒤 갑곶돈은 허물어져서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 복원, 정화하였다.
유형 : 유적
시대 : 조선/조선 후기
성격 : 성곽시설, 돈대
건립시기·연도 : 1679년(숙종 5)
규모(면적) : 4만 5339㎡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20
소유자 : 국·공유,사유
관리자 : 강화군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306호
문화재 지정일 : 1984년 8월 13일
사적 제306호. 지정면적 45,339㎡. 강화 53돈대 가운데 하나이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 방어책의 하나로 12진보(鎭堡)가 설치되고,
다시 이 진보와 진보 사이에 몇 개의 돈대(墩臺)를 축조하였는데,
이 돈대들은 1679년(숙종 5) 어영군(御營軍) 3,000인과 함경·황해·강원 등
3도 승군(僧軍) 8,000인을 동원하여 40일 만에 축조하였다.
이 가운데 갑곶돈은 통진(通津: 지금의 김포시)에서 강화로 들어가는 갑곶나루에 축조되었는데,
주위가 113보(步)에 치첩이 40이었다.
이 갑곶나루에는 1875년(고종 12)에 축조 된 갑곶포대가 있었는데,
갑곶돈은 망해(望海)·제승(制勝)·염주(念珠) 등 세 포대와 더불어 제물진(濟物鎭)의 관할 밑에 있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함대가 600인의 병력을 이곳으로 상륙시켜 강화성을 점령하였으나,
정족산성(鼎足山城) 전투에서 양헌수(梁憲洙)부대에 패한 뒤 물러났다.
1876년에는 일본의 전권대신(全權大臣) 구로다(黑田淸隆)가 6척의 함선을 이끌고 와서
이곳으로 상륙한 다음 강화 연무당(鍊武堂)에서 조선의 접견대관 신헌(申櫶)과
강화도조약(일명 한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역사적인 유적이다.
그 뒤 갑곶돈은 허물어져서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 복원, 정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출발
▼ 갑곶순교성지로 잠시 들어가서...
▼ 舊강화대교를 이용해 염하강을 도강...
구강화대교[舊江華大橋]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甲串里)와 경기 김포시 월곶면(月串面) 포내리(浦內里)를 잇는 다리이다.
길이 694m. 너비 10m(차도 2차선 7m, 보도 3m). 1965년 7월 착공하여 1969년 12월에 완공되었다.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로서는 경남 충무교, 전남 완도교에 이어 3번째이다.
1997년 신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폐쇄되어 이용할 수 없다.
최근에 자전거와 사람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한시적(08:00~18:00) 개방을 하고 있다..
[출처 : 두산백과]
▼ 파란관은 한강물을 강화도로 보내는 관이라고...
▼ 염하강이 오늘은 호수처럼...
▼ 강화대교와 문수산
▼ 이런...현재 시각이 08시 34분인데...
▼ 이제부터는 염하강철책을 따라...
▼ 데크계단을 올라서며..
▼ 새우잡이 배 한척이...
▼ 해병대훈련장
▼ 김포시사이드골프장
▼ 고양리쉼터에서...
▼ 원모루나루
▼ 지난 2008년 12월 14일에 찍은 원머루나루 안의 풍경사진으로 대신하고...
▼ 원모루슈퍼
▼ 지난 2008년 12월 14일에 찍은 원머루슈퍼의 모습
▼ 따복버스
▼ 쇄암리전망쉼터
▼ 염하강 건너 광성보가 보이네...
▼ 고란초삼거리
▼ 쇄암리 출렁다리 쉼터
▼ 덕포나루 통제문을 지나...
▼ 2008년 12월 14일(일) 염하강따라걷기를 할 때 덕포나루 통제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가 보니...
▼ 부래도
부래도[浮來島]
구분 : 섬
위치 : 경기도 김포시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에 위치하고 있는 섬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섬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며, 『해동지도』에서는 통진현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섬으로 표기되었다.
'항무이도'라고도 불린 것으로 보인다.
『통진읍지』의 기록에 의하면 현의 남쪽 23리 지점에 위치한 항무이도(項無耳島)는 둘레가 4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부래도에 대한 설명에 해당한다.
강화와 통진의 사이를 흐르는 염하(鹽河)를 따라 한강물에 떠내려 왔다고 하여 부래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섬 안의 산에는 성터도 남아있으며, 부락산·부렴·부렴산·부렴섬 등이 부래도의 딴 이름이다.
[출처 :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2008.12, 국토지리정보원]
▼ 신안리 주택은...
▼ 2008년 12월 14일에 '김포 대명항에서 염하강 따라 강화대교까지 도보여행' 할 때는 이런 모습이었고,
▼ 2010년 11월 14일에 '염하강 따라 걷기(대명항-김포함상공원-김포CC-강화대교-광성보-초지대교-대명항)' 할 때는 이런 모습이었고,
▼ 2012년 1월 26일에 '김포평화누리길 1ㆍ2ㆍ3코스 이어걷기(대명항→애기봉입구→전류리포구→샘재)'를 할 때까지는 이런 모습이었는데...
▼ 지금은 이런 모습으로...
▼ ?
▼ 손돌묘
덕포진 손돌묘[德浦鎭孫乭ㅡ]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덕포진에 있는 묘이다.
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292호
지정일 : 1981년 09월 25일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 103-1
시대 : 조선
종류/분류 : 유적지
크기 : 면적 48,794㎡
덕포진 북쪽 해안 언덕 위에 있다.
1970년에 덕포진 내의 현 위치에 복원하였으며 1977년에는 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단장하였다.
손돌은 고려시대의 뱃사공인데, 몽고가 침입하여 고려 왕이 강화도로 피난할 때 손돌의 배를 타게 되었다.
물길이 좁아 앞이 보이지 않고 세찬 물살에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왕은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손돌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손돌은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우고 그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 말한 뒤 죽음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왕은 자신이 경솔하였음을 깨닫고 후하게 장사를 치른 뒤 사당을 세워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넋을 위로하였다.
조선 말까지 손돌의 넋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오다가 일제강점기 동안 중단되었으며 1970년부터 다시 지냈다.
1989년부터는 김포문화원이 주관하여 손돌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에 진혼제를 지낸다.
[출처 : 두산백과]
☞ 손돌공 전설
서기 918년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여 제23대 고종에 이르기까지
314년간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고려는 많은 수난을 겪었다.
서기 1231년 몽고(원나라)가 침입하매, 고종은 화친을 내세워 일단 회군시켰으나,
그들이 계속 부당한 조공(朝貢)을 요구하므로 결사항전할 것을 결심하고
1232년 몽고의 2차 침략 때 강화도로 천도 하게 되었다.
고종은 조정을 이끌고 개경을 떠나, 사공 손돌의 배를 타고
예성강 벽란도를 거쳐 임진강과 한강 하류를 지나 강화도로 가고 있었다.
도중 현재의 대곶면 신안리와 강화도 광성진 사이의 해협이 협소하고 급류인 목에 닿게 되었다.
이곳은 앞이 막힌 듯이 보이는 지형으로 처음 가는 사람은 뱃길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지라,
천도 하는 고종도 심기가 불편한 나머지 뱃길도 없는 곳을 향하여 노를 젓는 사공 손돌을 의심하여
수차 뱃길을 바로잡도록 하명하였으나, 손돌이 아뢰기를
"보기에는 앞이 막힌 듯 하오나 좀더 나아가면 앞이 트이오니 폐하께서는 괘념치 마옵소서"라고 아뢰었다.
고종은 마음이 초조하여, 손돌의 흉계로 의심하고 신하들에게 손돌을 죽이라고 명하였다.
손돌은 죽음에 직면하고도 임금의 안전 항해를 바라는 충성에서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뱃길이 트일 것을 아뢴 후 참수되고 말았다.
이후 왕의 천도 항해는 손돌의 바가지 안내대로 험한 협류를 무사히 빠져나와 목적지에 당도하였다.
왕은 늦게나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손돌을 후히 장사지내주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당도 세워주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 뱃길목을 지금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르며,
공(公)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 쯤이면 손돌의 원혼이 바람을 일으킨다 하였다.
이때에 거센 바람을 '손돌이바람', 이 무렵의 추위를 '손돌이추위'라 전해온다.
이러한 전설에 따라 매년 음력 10월 20일에 손돌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제를 지내고 있다.
아쉬운 점은 아직까지는 손돌의 실화를 입증할 어떤 문헌이나 자료 등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손돌공의 묘는 물 건너로 광성진을 보이는 덕포진 북쪽 해안 언덕 위에 있다.
공의 제사는 조선조말까지 계속되어오다가 일제 강점 후 중단되었었으나 1970년 이후 계속 지내오고 있으며,
묘는 1977년 박일양(朴一陽)씨등과 면민들이 묘비를 세우고 치산(治山)하여 크게 단장하였다.
자료출처 : 경기도홈페이지>경기도소개>경기문화유산>향토지적재산 中
손돌목[孫乭項]
경기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지역에 있는 목[項].
유형 : 지명
성격 : 해협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정의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지역에 있는 목[項]
지형상 이 지역이 바다로 돌출해 있는데
대안(對岸)의 강화도 광성보(廣城堡)가 있는 곳도 바다로 돌출해 있어 두 지역 사이가 좁은 여울의 형태를 이룬다.
따라서 밀물 때 이곳을 흐르는 해류가 급류를 이루어 배가 건너다니기 어렵다.
손돌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있던 뱃사공의 이름에서 나왔는데 그에 관한 전설은 2개로 되어 있다.
고려 때 몽고의 난을 피해 급히 이곳에 도착한 왕이 바다를 건너고자 할 때 손돌이 아직 바람이 자지 않았으니 쉬었다 건너자고 하여
왕이 그를 모반자로 생각하여 처형을 하니 광풍이 불이 바다를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왕이 크게 후회하여 그가 탄 말의 목을 베어 제사를 지내고 나니 바람이 잔잔하여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전설은 왕이 탄 배가 바다를 건널 때 손돌이 배를 급류쪽으로 몰아 위험을 느낀 왕이
손돌의 행동을 의심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그가 죽기 전 자기가 죽은 뒤 바다에 바가지를 띠워
그 바가지가 가는대로 배를 몰면 안전할 것이라고하여 손돌을 죽인 뒤 그의 말대로 했더니 배가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이에 왕이 크게 뉘우쳐 손돌의 무덤을 만들고 크게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음력 10월 20일경인데,
이때는 겨울의 북서풍이 강하게 불어 겨울의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며 이 시기에 부는 바람을 손돌풍(孫乭風)이라고 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염하강일주를 할 때 염하강철책길 중 덕포진의 이 길이 가장 아름답게...
☞ 여기서 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 - 1부를 마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