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모도 진달래산행 답사(해명산ㆍ낙가산ㆍ상봉산ㆍ상주산 연계산행)' 이야기
'맥가이버의 '석모도 진달래산행 답사(해명산ㆍ낙가산ㆍ상봉산ㆍ상주산 연계산행)' 코스
외포리선착장→석포리선착장→석포교회→해명산→마당바위→방개고개→새가리고개→낙가산→절고개→상봉산→한가라지고개
→검은난골 능선→KT통신탑→삼산저수지→석모2배수갑문→하리배수갑문→하리선착장→하리저수지→188봉→상주산→청주한씨묘비
→도예촌/버스종점→무지개펜션→이촌말→목개→석모교삼거리→삼산초교→삼산보건지소→승영교회→석포리선착장→외포리선착장
▲ 위 '석모도 진달래산행 답사(해명산ㆍ낙가산ㆍ상봉산ㆍ상주산 연계산행) 코스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오늘은 ‘석모도 진달래산행 답사(해명산ㆍ낙가산ㆍ상봉산ㆍ상주산 연계산행)’를 나선다.
섬속의 섬 '석모도'를 찾아가며 어떻게 길을 이어갈 것인가?를 궁리하다가...
일단 석모도의 4개 산(해명산ㆍ낙가산ㆍ상봉산ㆍ상주산)을 이어가는 종주산행을 염두에 두고...
석포리선착장에 도착하여 '상리행 버스'를 타게 되면 '상상낙해'가 되고...
상리행 버스가 시간이 안맞는다면 석포리에서 전득이고개로 걸어가다가
석포교회에서 해명산의 새로운 들머리를 찾아서 오른다면 '해낙상상'이 되는 것이고...
막상 석포리선착장에 도착하니 상리 가는 버스는 시간이 안맞아서 해명산부터 산행을 시작해야 했다.
해서 해명산의 새로운 들머리를 찾아보고자 하는 꿈은 이룰 수 있게 되었고...
석모도 4산 종주(해명산ㆍ낙가산ㆍ상봉산ㆍ상주산 연계산행) 대략의 여정은...
강화터미널에서 버스환승하여 외포리터미널까지 간 후
외포리선착장에서 철부선을 타고 석포리선착장에 도착하여 바로 걷기 시작한다.
해명산의 들머리를 '전득이고개'가 아닌 석포교회에서 산길로 이어간다.
해명산 정상을 거쳐 낙가산 정상과 상봉산 정상에 오르고,
한가라지고개에서는 검은난골능선을 타고 삼산저수지로 내려서고,
삼산저수지부터 하리저수지까지는 바다와 갯벌을 메워 만든 평야를 보며 걷는다.
하리저수지에서는 공동묘지를 지난 188봉을 거쳐 상주산 정상에 오르고,
도예촌을 거쳐 석포리선착장을 향해 무작정 걷다가 만난 석모도주민의 선의로 잠시 차를 얻어 탔다.
이후 이촌말에서부터는 아스팔트길을 따라 석포리선착장까지 걷는다.
09시 25분에 석포리선착장을 출발하여 도로를 따라 걸어서 09시 41분에 해명산의 새 들머리인 석포교회/석포경로당에 도착하고,
들머리에서부터 진달래가 터널을 이루고 있어 진달래가 핀 시기에 이 들머리를 이용하면 좋을 듯...
09시 41분 석포교회에서부터 시작된 석모도 4산종주(해명산ㆍ낙가산ㆍ상봉산ㆍ상주산)는
상주산을 내려서서 상리버스종점에 17시 53분에 도착하니 약 8시간 10분이 소요되었고,
상리 버스종점에서 마을길과 도로를 따라 걸어서 다시 석포리선착장으로 돌아온 시각은 19시 50분이다.
석모도 4산 종주(해낙상상)를 하고, 석포리선착장으로 원점회귀하는데 총 10시간 25분이 소요되었다.
석모도 4산종주는 진달래가 피는 시기에 다녀오면 좋을 듯...
들머리인 석포교회 앞에서부터 석모도 4산 종주를 하는 능선길에는 진달래가 줄지어 꽃몽우리를 틔우고 있고,
여러 곳에서 진달래가 산길 양쪽으로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석모도 4산 종주를 다시 한 번 더 하게 된다면 진달래꽃이 활짝 피는 날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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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사 [ 普門寺 ]
인천 강화군 삼산면(三山面) 매음리(煤音里) 낙가산(洛伽山)에 있는 절.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인천민속자료 제1호.
창건시기 : 635년
창건자 : 회정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낙가산
635년(선덕여왕 4)에 회정(懷正)이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649년(진덕여왕 3)에 어부들이 불상과 나한 ·천진석상 22구(軀)를 바다에서 건져내어
천연석굴 안에 봉안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입구에 3개의 홍예문을 설치하고 천연동굴 내에 반월형 좌대를 마련하고 탱주(撑柱)를 설치하였는데,
탱주 사이에 21개의 감실(龕室)이 있어 거기에 석불을 안치하였다.
이 석실은 지방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1928년에는 절 뒤편 절벽에 높이 32척 너비 12척의 관음상을 새겼다.
이 마애석불좌상(磨崖石佛坐像)은 지방유형문화재 제65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두산백과]
보문사 [普門寺]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낙가산(洛迦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직영사찰로서, 우리 나라 3대 관음영지(觀音靈地) 중의 한 곳이다.
이 절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전한다.
635년(선덕여왕 4) 4월,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 속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비슷한 돌덩이 22개가 함께 올라왔다.
실망한 어부는 돌덩이들을 즉시 바다로 던져 버리고 다시 그물을 쳤지만
역시 건져 올린 것은 돌덩이였으므로 다시 바다에 던졌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귀중한 것을 바다에 두 번씩이나 던졌다고 책망하면서,
내일 다시 돌덩이를 건지거든 명산에 잘 봉안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다음날 22개의 돌덩이를 건져 올린 어부는 노승이 일러준 대로 낙가산으로 이들을 옮겼는데,
현재의 석굴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었으므로
“바로 이곳이 영장(靈場)이구나.” 하고는 굴 안에 단(壇)을 모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신라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고
려 초기에 금강산 보덕굴(普德窟)에서 관음진신(觀音眞身)을 친견한 회정(懷正)이 이곳에 와서 불상을 살펴보니,
가운데 좌상은 석가모니불, 좌보처는 미륵보살, 우보처는 제화갈라보살이었고, 나머지는 18나한상과 송자관음이었다.
회정은 이 22존 중 삼존불과 18나한은 굴 속에 모시고
송자관음은 따로 관음전을 지어서 봉안한 다음 이 절을 낙가산 보문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절의 역사는 사찰의 격에 비하여 자세히 전하지 않으며, 조선시대 후기부터의 역사만이 전해지고 있다.
1812년(순조 12)에는 이 절의 승려들이 홍봉장(洪鳳章)의 도움을 받아 중건하였고,
1867년(고종 4)에는 경산(京山)이 석굴 안에 처마를 이어 나한전을 건조하였으며, 1
893년(고종 30)에는 명성왕후의 전교로 요사와 객실을 중건하였다.
1911년 일제가 30본·말사를 제정하면서 전등사 말사가 되었다.
1918년에 대원(大圓)이 관음전을 중수하였고,
1932년에는 주지 배선주(裵善周)가 객실 7칸을 새로 지었으며, 1935년에는 나한전을 중창하였다.
그 뒤 관음전을 중건하고 대범종을 조성하였으며, 1976년 범종각과 요사를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관음전·대방(大房)·종각·석실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석실 굴 안에는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석굴 입구에는 세 개의 홍예문을 설치하였고,
동굴 안에는 반원형 좌대를 마련하고 탱주(撐柱)를 설치하였으며,
탱주 사이에 21개 소의 감실이 있어 석불을 안치하였다.
이 밖에 이 절에는 마애석불좌상과 천인대(千人臺)가 있다.
마애석불좌상은 1928년에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승려인 이화응(李華應)이
보문사 주지 배선주와 함께 조각한 것으로, 높이 9.2m, 폭 3.3m이다.
석불좌상의 상부에는 거대한 눈썹바위가 있고, 좌측에는 비명(碑銘)이 있으며, 불상 앞에는 소규모의 석등이 있다.
이 석불과 석굴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찾는 여인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
또 천인대는 길이 40m, 폭 5m의 큰 바위이다.
이 절의 창건 당시 서역(西域)의 고승이 이 천인대에 불상을 모시고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그 뒤 이 바위는 법회 때 설법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는데,
이 바위 위에 1,000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하여 천인대라고 명명하였다.
1994년 10월 대한불교조계종 직영 사찰이 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2007년 10월 21일(일)에 '석모도 도보일주'와 '해명산-낙가산-상봉산 연계산행'을 위한 답사를 하며 찍은 사진들과 설명을 덧붙임.
☞ 나한 석상과 석굴 법당
희정대사가 보문사를 창건한지 14년 만인 649년(신라 진덕왕 3)에 일어난 일이다.
보문사 산아래 지금의 매음리 동네 어부들이 배를 타고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
바다에 그물을 쳤다가 한참만에 걷어 올렸는데 그물이 몹시 무거웠다.
고기가 걸렸으면 그물이 당겨지고 움직일텐데 그물은 무거웠지만 요동이 없었다.
이상하게 고기는 한 마리도 걸려있지 않고 이상스럽게 생긴 돌덩이만 잔뜩 그물에 걸려 있었다.
어부들은 어리둥절하며 그 돌덩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기이하게도 그 돌덩이들은 마치 사람 모습과 똑같았다.
어부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이한 석상을 보고 놀랍기도 하고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그 석상들을 얼른 바다에 다시 던져 버리고 배를 저어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가서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기로 했다.
한참만에 어부들은 그물을 다시 걷어 올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까처럼 그물이 무겁기만 하고 꿈틀거림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배에 올려놓고 다시 보니 아까 멀리 떨어진 곳에 던져버린 그 석상들이 그대로 똑같이 그곳에 놓여있었다.
어부들은 매우 놀라 황급히 그물은 바다에 털어 버리고 그 날은 고기잡이를 포기한 채 서둘러 배를 저어 육지로 돌아와 버렸다.
그런데 그날 밤, 어부들은 전부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꿈을 꾸었다.
꿈의 내용은, 맑은 얼굴에 훌륭한 풍모를 한 노스님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먼 서천국(인도)으로부터 왔느니라.
나와 더불어 스물 두 성인이 돌배를 타고 이곳까지 왔는데 우리가 타고 온 돌배를 돌려보내고
물속에 있다가 그대들의 그물을 따라 올라왔더니 그대들은 두 번씩이나 우리들을 다시 물속에 넣어 버리더구나.
그대들이 알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니 그 일을 허물하지 않겠노라.
우리가 이곳 동방 세계의 서쪽 바닷가에 온 것은 이 나라에 아라한의 신통을 펴기 위한 것이며
더욱 큰 뜻은 영산회상에서 베풀어진 무진법문과 중생의 복락을 성취하는 길을 전하러 온 것이다.
마을 뒤 낙가산에 가보면 우리가 오래도록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이 있으니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해 주기 바라노라.
의심하지 말라. 내일 곧 시행하도록 하라. 이 인연과 공덕으로 그대들의 후손들까지도 길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니라."
노스님은 다시 앞장서 낙가산으로 어부들을 인도하여 보문사 앞에 있는 석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노스님은 이곳에 쉬게 해달라고 다시 한 번 당부하고는 어부들이 낮에 석상을 버린 바다로 사라졌다.
어부들은 새벽녘부터 일어나 간밤의 꿈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모두가 감탄을 했다. 그
들은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띄워 어제 삭상을 던져 버린 그 바다에 그물을 쳤다.
조금 후 그들이 걷어 올린 그물에는 어제의 그 석상 스물 두 체(體)가 그대로 따라 올라왔다.
어부들은 정성스럽게 석상을 모시고 뭍으로 올라와 물로 깨끗하게 씻고 꿈에 본 석굴로 석상 스물 두 위를 모셔갔다.
굴 앞에 다가가니 굴 안에서 경 읽는 소리가 나고 은은한 향 내음이 굴 밖으로 스며 나오고 있었다.
어부들은 형언할 수 없이 편안한 마음을 느끼면서 굴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굴 안은 마치 어떤 사람이 일부러 다듬은 것처럼 천연적으로 된 좌대(座臺)가 만들어 져 있었다.
어부들은 스물 두 위의 석상을 그 좌대에 차례로 올려 모셨다.
그리고 어부들은 그 석상들이 돌부처님이라고 생각했다.
돌부처님을 좌대에 모시고 나니 굴 안은 엄숙하고 신비한 영기(靈氣)가 가득 찬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일제히 돌부처님 앞에 엎드려 거듭거듭 절을 하면서 돌부처님에게 소원을 이루어 주시도록 염원했다.
어부들은 돌부처님을 모시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신심이 절로 우러나서 기쁜 마음으로 동네에 돌아와 잔치를 벌이면서 하루를 경사스럽게 보냈다.
그날 밤 꿈에 그 노스님이 다시 어부들 앞에 나타나셨다.
"그대들의 수고로 장차 무수한 중생들이 복을 빌어가게 될 것이다.
그대들에게 먼저 복을 줄 것이니 받은 복을 함부로 쓰지 말며 교만하거나 자비심을 버리라.
악하고 삿된 마음을 일으키게 되면 곧 복을 걷어 들일 것이니라.
그리고 그대들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복덕을 갖춘 아들을 점지할 것이니라."
노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어부들에게 옥동자를 안겨 주고는 계속 말씀을 이었다.
"사람들은 이 노승을 빈두로존자라고 부른다네.
우리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두 보살님을 함께 모시고 왔으니
나와 더불어 나머지 열여덟 분은 모두 부처님의 수제자들이라네.
존자들의 이름은 스님들에게 잘 일러놓을 것이니 소원을 빌 때에는 반드시 명호를 불러야 하느니라."
어부들뿐만 아니라 보문사의 스님들도 같은 꿈을 꾸었다.
스님들과 어부들은 전부 이 신령스러움에 감탄만 할 뿐이었다.
어부들이 바다에서 옮겨 봉안한 열여덟 분의 존자들은 모두가 아라한과를 성취한 대 아라한들로
생사에 자재하여 삼천대천세계에 현몰이 자재한 대 신통을 갖추신 성인들이시다.
굴법당 좌측에 모셔진 분은 [나반존자]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독성이시다.
나반존자는 지금 천태산에서 선정에 들어 계시는데 장차 용화세계의 대좌주로 출현하시게 된다.
얼굴이 희고 눈썹이 길고 희게 표현되는 나반존자는 차와 과일을 즐기신다.
이러한 특징으로 보아 이 나반존자가 바로 빈두로존자라고 보고 있다.
신통 자재한 아라한들의 하는 일이므로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 석굴 옆에는 신령스런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다.
그 물맛이 감미로워 불자들이 많이 마시게 되는데 아무리 많이 마셔도 탈나는 일이 없다.
그때 모셔진 스물두 분의 석상은 조금도 변함없이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마치 최근에 모신 것처럼 항상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이 느껴진다.
근래 사람들이 돌의 석질을 조사해보니 석상의 돌은 화강암같이 보이지만
우리나라 화강암이 아니라 인도에서 산출되는 돌임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 보문사 석실(나한전)
석실 안에 봉안된 23불의 나한상은 눈썹바위의 마애관음보살좌상과 더불어 보문사의 대표적 성보문화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문사가 관음신앙의 성지인 동시에 나한신앙의 대표적 도량이 된 것은 바로 이 석실에 있는 나한상 때문으로 보아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 석실 및 안에 봉안된 나한상이 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높다.
또한 이 석실은 우리나라에 흔치않은 석굴사원이기도 하다.
석굴사원의 예는 경주 석굴암, 경북 군위의 삼존석굴,
강원도 속초의 개조암(開祖庵) 등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몇 되지 않는 귀중한 예이다.
이 석실의 역사는 곧 보문사 창건 역사와 거의 일치한다.
전설에 따르면 창건 후 14년 뒤인 649년 신라 선덕왕 때 어부들이 고기잡이 나가다 그물에 걸려 올려진 석불상들을
이곳 동굴에 안치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곧 이때부터 석실이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뒤의 역사는 알 수 없고, 조선 시대 후기에 들어서인 1812년(순조 12)에 한차례.
그리고 1867년(고종 4)에 다시 경산(京山)화상이 석굴을 보수했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1958년 춘성(春城)선사가 석굴 내부를 좀 더 확장하며 개수하였다.
최근에는 1980년 정수(靜守)스님이 내부를 다시 확장하는 한편 지금의 불단(佛壇) 뒤와 옆에 있는 석탱화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다음으로 석실의 구조를 보면, 내부는 천연 동굴을 확장하여 만들었고 입구에 무지개 모양을 한 3개의 아치형 홍예문(虹?門)을 달았다. 석굴 안은 면적이 30평으로 꽤 널찍한 편이다. 늘 이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의 기도음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 석실 나한상
석실을 들어서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전부 22불의 성상(聖像)을 모셔 놓은 불단이다.
석실이니만큼 다른 불전과는 달리 불단 및 닷집이 전부 돌로 커다랗게 만들어진 것이 특이하다.
연꽃이 조각된 불단 위에 닷집이 달린 전각 형태의 불전(佛殿)이 있고,
그 안에 아래 위 두 줄에 걸쳐 감실(龕室)이 마련되었으며 여기에 22불의 석상이 봉안되었다.
석상의 22불의 석상(石像)은 아마도 전설에 전하듯, 어부들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 봉안한 석상 그대로인 것으로 보인다.
이 22나한상의 명호에 대해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좌우의 미륵보살·제화갈라보살 및 빈두로아존자·가락가빌차존자·바리도 아존자·노빈타존자
·낙구라존자·발타라존자·가릿가존자·빌사라불타라존자·주단반탁기존자·라후라존자·나가세라존자
·인계라존자·빌라바사존자·아시다존자·수단반탁가존자·정우존자·빈두루존자 등
18분의 나한들이라고 한다.
석상의 크기는 전부 30cm 안팎이다.
불단 뒤에는 1982년의 불단 조성을 기념한 <보문사석굴법당연기문(普門寺石窟法堂緣起文)>과
<법화경약모게(法華經略摹揭)>가 새겨져 있다.
연기문은 기현(奇玄)스님의 글이고, 게는 법화경의 내용을 베낀 것으로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의 글씨다.
한편 근래 이 석상들의 재질(材質)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강암이 아닌 인도에서 나오는 석재임이 확인되었다고도 한다.
불단 좌우로는 인등(引燈)이 있고, 불단 왼쪽 벽에는 석조 신중탱이 걸려 있다.
이 석조 신중탱과 불단 뒷벽에 커다랗게 조각된 탱화는 1980년 조성된 것이다
☞ 깨어진 옥등
보문사에는 고려왕실에서 왕후가 헌정한 옥등이 있었다.
이 옥등은 그 이후로 석굴법당의 인등용(引燈用)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
옛날 언제인가의 일이다.
석굴법당을 청소하던 어린 사미스님이 어느 날 이 옥등을 깨끗이 닦다가 실수로 그만 굴법당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래서 옥등은 마치 칼로 자른 것처럼 용케도 두 조각으로 잘라져 버렸는데 기름이 흘러 내려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옥등은 절에서 귀히 여기는 것이었으므로, 사미스님은 자신의 잘못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고도 남았다.
어린 사미승은 울면서 주지스님에게로 뛰어가 옥등을 깬 일을 보고했다.
주지스님도 크게 놀랐다.
"저런! 그 옥등은 사중의 보물이야. 이 일을 어쩐담! 깨져버린 건 할 수 없지만 ....."
사미스님을 앞세우고 주지스님이 황급히 석굴법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석굴 안이 훤했다.
옥등이 깨어졌으니 굴 안이 어두워야 했건만 불이 켜져 있는 것이었다.
그때 주지스님의 머리에 언뜻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급히 달려가 불 켜진 등을 만져봤더니 바로 옥등이었다.
주지스님은 사미스님을 돌아보고, 사미스님은 주지스님을 쳐다봤다.
주지스님의 입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아, 나한성중!"
주지스님은 옥등을 만지고 또 만져보며 깨어졌다고 생각하니 깨어진 것처럼 옥등에 금이나 보였다.
그러나 그 옥등은 깨어진 것이 아니었고 기름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완전히 두 조각으로 깨어져 버린 옥등이 이렇게 완전히 다시 붙여지다니!
굴 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고, 불단에 모셔진 나한상들도 움직인 흔적이 없었다.
주지스님은 석불 바닥에 흘려있을 기름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사미스님이 가리킨 곳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그리고 보니 옥돌잔의 불은 전보다 더 밝고 기름도 하나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주지스님과 사미스님은 나한님 앞에 정례(頂禮)를 올리고
`제대아라한무량자비성중(諸大阿羅漢無量慈悲聖衆)'을 되뇌었다.
이 옥등은 10여 년 전까지 보문사의 보물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10·27법난을 겪은 동안에 어디론지 행방을 감추어 버려 환란한 틈에 분실된 것으로 보여 진다.
그때 같이 보관되어 있었던 작은 또 하나의 옥등은 그 이후 최근까지도 사중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현재는 역시 남아 있지 않다.
▼ 2007년 10월 21일(일)에 '석모도 도보일주'와 '해명산-낙가산-상봉산 연계산행'을 위한 답사를 하며 찍은 사진들과 설명을 덧붙임.
☞ 마애관음좌상
보문사가 관음 도량의 성지임을 가장 잘 상징하는 성보문화재로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멀리 서해바다가 한 눈에 조망되는 등 경치가 장관이다.
특히 낙조(落照) 경관은 아주 일품이어서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붉은 해와 노을을 쳐다보노라면
종종 그야말로 무아지경 불심(佛心)의 경지에 들곤 한다.
이 관음좌상은 대웅전과 관음전 사이에 있는 계단을 따라 한 10분가량 올라가면 나오는 낙가산 중턱의 눈썹바위 아래에 새겨져 있다.
절에서부터의 거리는 약 1km가량 된다.
오르는 길이 제법 가파르기 때문에 계단은 지그재그 식으로 놓았다.
이 불사를 기념하는 `관음성전계단불사공덕비'가 중간에 놓여 있다.
계단이 놓여졌다고는 하나 눈썹바위로 올라가는 길 자체가 워낙 급한 까닭에 한달음에 올라갈 거리는 못된다.
가다 보면 제법 다리에 힘도 들고 허리가 뻣뻣해지기도 한다.
이럴 때 `관세음보살'을 마음속으로,
혹은 나지막이 외우며 올라가노라면 문득 어느새 관음보살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마애관음좌상은 1928년 배선주 주지스님이 보문사가 관음 성지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이화응(李華應)스님과 더불어 이곳에 새긴 것으로,
크기는 높이 920cm, 너비 330cm에 달하는 거상(巨像)이다.
크기를 척수로 환산하면 높이 32척에 너비가 11척이 되는데,
이것은 곧 관음보살의 32응신(應身)과 11면(面)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관음 좌상 약간 비스듬히 나 있는 바위면에 새겨졌는데,
위의 바위가 마치 지붕처럼 돌출되어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관음부처님을 가려 주고 있다.
관음 좌상의 양식을 보면,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보관을 쓰고 두 손을 모아 정성스레 정병(淨甁)을 받쳐 든 채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얼굴에 비해 다소 크게 느껴지는 코 입 귀는 투박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서민적이라 보는 사람의 마음도 푸근해지며 정감이 간다.
또 부처님 얼굴에 빠짐없이 있기 마련인 백호(白毫)도 이마 사이에 솟아 있다.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다.
불의(佛衣)는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도록 입는 통견(通肩)을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연화대좌 왼편, 그러니까 관음을 바라보아 오른쪽에는 `조불화응선사(造佛華應禪師)'가
그리고 그 반대편 위패 모양으로 새긴 구획 안에도 `화엄회상필부사왕중(華嚴會上八部四王衆)·
나무화엄회상욕색제천중(南無華嚴會上欲色諸天衆)·화엄회상호법선신중(華嚴會上護法善神衆)' 등의 글씨가 세 줄로 새겨져 있다.
이 관음상은 비록 작품이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이곳이 관음 도량의 성지인 동시에 기도(祈禱) 성지임을 나타내는 상징성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이곳에서 정성으로 기도 드리면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이 없다 하여 지금도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낙가산[落袈山:235m]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석모도에 있는 산.
강화도 서쪽 해안에 바짝 붙어 서해바다에 떠 있는 석모도에 있는 산으로
별로 높은 산은 아니지만 서쪽에 더 큰 섬이 없어 낙조가 좋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석모도는 강화군에 딸린 일개 낙도에 불과하지만
이 산에 보문사라는 큰 절이 자리잡고 있어 절을 찾는 사람들로 석모도행 배는 항상 붐빈다.
배를 타고 섬으로 간다는 사실과 섬에 큰 사찰이 있다는 점이 특이한 매력을 주는 데다
조망이 좋은 이 산까지 있어 관광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셈이다.
능선은 암릉으로 이어져 산행 맛이 산뜻한 데다
중부지방에는 바다를 바라보며 산행할 수 있는 능선이 많지 않은 터라 시원한 조망을 즐기며 산행 할 수 있다.
이 산은 석모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아니다.
산의 서북 방향으로 상봉산(316m)이 있고 남서 방향으로는 해명산(327m)이 있다.
그런데도 이 산이 회자되는 것은 보문사라는 절이 있기 때문이다.
산행은 선착장에서 내려 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새라리고개 안부로 이어지는 계곡으로 들어서서 올라간다.
주능선에 도착하면 그때부터는 주능선 산행으로 바뀐다.
이 산은 보문사로 가는 능선의 반대쪽에 비교적 뾰족한 느낌을 주는 봉우리로 솟아 있다.
주능선에 올라서면 서해의 섬들이며 능선상의 높은 봉우리인 상봉산이 다가선다.
능선을 따라 가다가 야트막한 봉우리를 지나 10여 분 더 올라가면 정상이다.
정상에는 너른 풀밭이 있어 앉아 쉬기에도 좋다.
정상에서는 잡목숲 지대를 지나 30여 분 가면 서쪽으로 이어진 능선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 산과 보문사는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조금 떨어져 있다.
또 한 코스는 섬의 남쪽 해안에 가까운 진득이고개에서 버스를 내려 산을 타기 시작,
북으로 긴 능선을 따라가며 섬 양쪽의 조망을 즐기기도 하고
암릉이 잇달아 나타나는 둥글둥글한 봉우리들을 하나하나 넘으면서 이 산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이 코스는 보문사까지만 3시간이 넘게 걸린다.
해명산을 지난 다음 이 산까지 능선산행과 바다조망을 실컷 즐긴 다음 보문사로 내려설 수 있다.
석모도에서 하룻밤 묵을 생각이라면 낙조를 보면서 산행 하면 내륙지방의 고산 산행과는 또 다른 맛을 즐길 수 있다.
보문사는 신라 선덕왕 4년(635)에 희정스님이 창건한 절로 낙산사와 함께 해수관음기도도량의 하나이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석굴이 깊고 넓으며 절 뒤에는10여m에 이르는 거대한 관음보살상이 있다.
[출처 : 두산백과]
상봉산 [上峰山]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석모도에 있는 산.
인천 강화 삼산면 석모도 높이 316.1m 높이는 316.1m이다.
석모도 남부에 솟아 있는 바위산으로 전망이 빼어나다.
상봉산, 해명산(海明山:327m), 상주산의 3개 산이 있다는 데서 지명이 유래한 삼산면에서도 가장 높은 산이다.
상봉산 단독 산행은 다소 짧은 편이며,
동남쪽 아래 자리한 낙가산 보문사(普門寺)와 해명산을 함께 오르는 4시간 코스를 흔히 이용한다.
상세한 코스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석포리 선착장에서
전득이고개-해명산-방개고개-낙가산-눈썹바위-절고개-상봉산-절고개로
이어지는 약 10㎞ 길이의 능선이 가족단위의 산행에 알맞다.
산행하면서 서해바다의 아름다운 모습을 구경할 수 있고
특히 상봉산 정상에서 서남쪽 볼음도 방향으로 바라보는 노을과 올망졸망한 섬들의 모습이 널리 알려져 있다.
정상은 암봉으로 되어 있으며, 남쪽으로 해안선과 바다, 북쪽으로 넓은 평야지대를 볼 수 있고
동쪽으로 해명산에 이르는 주능선이 잘 바라보인다.
능선 곳곳에 암벽이 자리잡고 있고 해명산에서 낙가산으로 가는 구간에는 억새풀 군락이 멋지다.
강화도 외포항에서 석모도 석포항 사이를 운항하는 배가 평일에는 30분 간격으로, 주말이나 휴일에는 수시로 다닌다.
숙박시설은 보문사 입구의 여관이나 부근의 민박집을 이용하며 석모도 곳곳에 민박집이 많다.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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