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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과 깨달음☞/♡ 좋은 시 모음

[정끝별의 시 읽기 一笑一老] 서늘함

by 맥가이버 Macgyver 2017. 8. 21.




일러스트=박상훈

서늘함


주소 하나 다는 데 큰 벽이 필요 없다
지팡이 하나 세우는 데 큰 뜰이 필요 없다
마음 하나 세우는 데야 큰 방이 왜 필요한가
언 밥 한 그릇 녹이는 사이
쌀 한 톨만 한 하루가 지나간다

―신달자(1943~ )('북촌' 민음사, 2016)


  늙는다는 것은 작아진다는 것이고, 마른다는 것이고, 비운다는 것이다. 하나인 것에 덤덤해진다는 것이고, 지나가는 것에 담담해진다는 것이다. 늙으면 살던 집을 좁히고, 이고 지고 끼고 살던 것을 버리고, 일이나 사람을 줄이는 까닭이다.

  몸소, 간소, 검소, 감소, 축소, 청소하지 않으면 늙음은 시간의 소굴이 되기 십상이다.

 

  작아진 몸을 눕힐 주소 하나, 낮아진 몸을 의지할 지팡이 하나, 굼뜬 몸을 일으켜 세워줄 마음 하나, 주먹만 한 위를 채워줄 언 밥 한 그릇으로 압축되는 이 한 삶이 서늘하다.

그 하루하루가 '쌀 한 톨만'하다니 써늘하기도 하다. 엄마 배 속으로도 족했던 몸이었으니 '발 닿고 머리 닿는/ 복숭아씨만 한 방'이면 족할 것이다.

 

  실제로도 시인은 북촌에 '딱 명함 한 장만 한 한옥 대문'에 '공일당(空日堂)'이라는 문패를 걸고 사신다 했다.

  사랑이든 욕망이든 일상이든 낮고 작고 가벼워져야 크고 넓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문패에 담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