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바위탐방(선바위-얼굴바위-모자바위-해골바위-범바위-치마바위-석굴암-기차바위-무계원)' 코스
독립문역→인왕사일주문→인왕사→국사당→선바위→전망바위→얼굴바위→모자(帽子)바위→해골바위→모자(母子)바위
→범바위→인왕천약수터→석문→치마바위(추정1)→석굴암입구→치마바위(추정2)→토끼와 거북이바위/석굴→주변탐색
→석굴암 데크계단→석굴암→천향암→인왕산 암벽코스→폐건물/비트→전망바위→기차바위능선 갈림길초소→해골바위
→기차바위→부암약수→반계 윤웅렬별장→청계동천각자→안평대군집터/무계정사→무계원(舊오진암)→부암동주민센터
오늘은 특별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 인왕산의 바위 탐방을 나선다.
인왕산은 유독 특이한 바위들이 많은데...
그동안 테마를 가지고 지나가다 보니 그 길에 있는 바위들만 보게 되었다.
해서 오늘은 인왕산의 바위들을 최대한 많이 볼 수 있는 길을 기획하고 나서기로 한다.
인왕산 바위들 중 논란이 있는
병풍바위 옆의 '주름치마바위'와 단경왕후 전설의 '치마바위'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모자바위는 모자(帽子)바위와 모자(母子)바위로 불리는 바위가 다르다는 것을...
기차바위능선은 정상의 가차레일이 아니라 옆에 기차바위가 따로 있다는 것을...
그외 범바위와 공작머리바위, 해골바위, 닭바위 등의 바위들을 찾아서 인왕산 바위탐방을 다녀왔다.
▼ 독립문역에서...
▼ 인왕산 국사당/선바위 방향으로...
▼ 아파트 사이로 보이는 '얼굴바위/부처바위'를 살짝 당기니...
▼ 저기 '도로반사경'아래에...
▼ '무악재 하늘다리 가는 길'이라고 안내표식이...
▼ 인왕사 가는 길을 따라...
▼ 인왕사 일주문이 보이고...
▼ 무악공원 입구에는...
▼ 인왕산 공원(무악지구) 안내도가 있고...
인왕산 仁王山
높이 338m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누상동·사직동과 서대문구 현저동·홍제동에 걸쳐 있는 산.
명칭 유래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西山)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고 한다.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인왕산(仁旺山)이라 하였으나,
1995년 본래 지명인 인왕산(仁王山)으로 환원되었다.
자연환경
인왕산의 높이는 338m이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암반이 노출된 것이 특징이다.
서울의 성곽은 이 산의 능선을 따라 지나며 동쪽 산허리에 북악산길과 연결되는 인왕산길이 지난다.
인왕산에는 타포니(Tafoni)가 발달한 토르(Tor)가 많다.
주로 서울시 무악동 남쪽기슭 135m 고도에 위치한다.
인왕산의 토르는 주빙하 기후에 의해 화학적 풍화가 진행되어 생성된 것과
후빙기에 절리 발달에 따른 차별침식으로 생성된 것이 있다고 한다.
흔히 타포니는 토르와 관련되어 발달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화강암 토르에서 관찰되는데 인왕산 또한 그에 해당한다.
토르에서 타포니가 발달한 부분은 다른 부위보다 풍화가 더욱 진전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2007년과 2008년 인왕산에서 관찰된 식물은
전체 75과 232종 38변종 5품종으로 총 275종이며, 귀화종은 37종이다.
주요 출현 식물은 생태계 교란 야생동·식물인 국화과의 돼지풀, 서양등골나물 등이다.
형성 및 변천
곳곳에 약수터가 있고 경치가 아름다워 서울시민들의 유원지였으나
군사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었지만 1993년부터 개방되었다.
인왕산은 조선시대의 명산으로 숭앙되었으며,
조선 초기에 도성을 세울 때 북악(北岳)을 주산(主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과 인왕산을 좌우 용호(龍虎)로 삼아 궁궐을 조성하였다.
현황
봄에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곳곳에 약수와 누대가 있었다.
경지가 아름다워 이를 배경으로 그린 산수가 많은데,
특히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인왕산을 등산할 수 있는 코스는 총 5개이며 각각 두시간 정도면 오를 수 있고,
인왕산을 종주하는데 3시간 정도가 걸린다.
제1코스 사직공원 입구·약수터·정상·부암동(자하문),
제2코스는 사직터널·성터·정상·부암동(자하문),
제3코스는 독립문역·인왕산 일주문·국사당·선바위·철조망문·능선길·범바위·인왕천 갈림길·정상·
305능선길·기차바위·인왕아파트 갈림길·홍심약수 갈림길·부암동사무소쪽 갈림길·하림각,
제4코스는 사직터널 전 사직공원·북악스카이웨이·국사당·달팽이바위·인왕산약수·해골바위·정상,
제5코스는 경복궁역·자하문길·영추문·청와대 앞길·청운중학교·최규식 경무관 동상·자하문·성곽길·정상 등이 있다.
지하철 3호선을 이용하여 경복궁역, 독립문역, 홍제역에서 하차한 후 사직공원에 가는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인왕사 일주문
▼ 인왕사 안내문을 보면 역사속의 '인왕사'가 아니라고...석굴암이 인왕사였다고 추정됨...석굴암에서는 궁궐들이 보임.
인왕사(仁王寺)
조선초에 창건되어 조생이 주지로 있었으며, 왕실의 보호를 받았던 절.
개설
인왕사(仁王寺)는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 무학 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조생(祖生)이 경복궁 조성에 참여했다가 태조 이성계의 신임을 받아 인왕사 주지가 되었고,
태조와 정종은 조생을 극진히 모셨다.
성종대까지 인왕사는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존속했으나
연산군이 궁궐을 내려다보는 곳에 있다는 이유로 철거를 명하였다.
현재의 인왕사는 근대에 복원한 것이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서울 인왕산에 있던 인왕사는 ‘인왕(仁王)’ 혹은 ‘인왕(仁旺)’으로 표기하며
조선이 건국되고 도읍이 정해진 이후에 무학(無學) 대사(大師)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라고 한다.
조선 태조가 도읍을 정할 때 무학 대사가 인왕산을 진산(鎭山)으로 삼아 궁궐터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진산은 나라의 도읍지나 각 고을 뒤에 있는 큰 산으로, 풍수지리에서 그것이 위치한 지역을 보호해준다고 하는 산이다.
하지만 정도전(鄭道傳)이 궁궐은 남면(南面)해야 한다고 반대하여 북악산을 진산으로 삼아 경복궁이 건설되었다.
이에 따라 무학 대사는 인왕산에 절을 건립하여 호국도량으로 삼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인왕산의 산 이름과 관련하여 후대의 기록에서,
인왕(仁王)은 석가모니의 다른 호칭이고
산 이름은 인왕사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라고[『광해군일기(중초본)』 8년 3월 24일] 한 것으로 보아
원래 산 이름은 인왕산이 아니었던 것 같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명나라 사신이
인왕산을 필운산(弼雲山)으로 고쳐 이름 지었다고 하였다.
즉 1537년(중종 32)에 온 명나라 사신이 인왕산이 경복궁의 오른쪽에 있으므로
‘오른쪽에서 임금을 보필한다’는 뜻의 우필운용(右弼雲龍)에서 산 이름을 취하였다고 한다
[『중종실록』 32년 3월 14일].
(2) 조선시대
인왕사는 태조가 도읍을 정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창건되었던 것 같다.
태조가 1397년(태조 6)에 인왕사를 방문하여
왕실 내의 불당 사무를 맡아보던 내원당감주(內願堂監主) 조생을 만났다는
[『태조실록』 6년 3월 14일]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조생은 한양에 도읍을 정하여 궁궐을 새로 짓는다는 소식을 듣고 승려들을 이끌고 와서 공사를 도왔으므로
[『태조실록』 2년 11월 19일] 태조에게 신임을 받아 인왕사 주지에 임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1398년(태조 7)에도 태조가 인왕사를 방문하였는데
조생이 오대산으로부터 와서 임금을 맞이하였다[『태조실록』 7년 1월 21일].
이후에도 조생은 왕실로부터 존경을 받아 흥천사(興天寺)의 주지에 임명되었으며,
궁궐을 방문하고 떠나는 조생을 임금이 직접 배웅하기도 하였다[『정종실록』 1년 8월 12일].
조선초에는 인왕사의 승려들이 경복궁 내에 있던 내원당의 불사를 주관했다.
내원당에는 10여 명의 승려들이 소속돼 있었는데,
인왕사의 승려들이 정기적으로 궁궐을 출입하며 내원당의 불공과 법회 등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대에는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김승경(金升卿)이
인왕산에 있는 복세암(福世庵)과 인왕사는 경복궁을 내려다보고 있고 선왕이 창건한 사찰이 아니므로
철거해야 한다고 상소하였지만 성종이 윤허하지 않았다[『성종실록』 18년 6월 2일].
이 내용에서 볼 때 성종대의 대신들은
인왕사의 창건이 왕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1503년(연산군 9)에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복세암·인왕사·금강굴(金剛窟)을 철거하라고 명하였다
[『연산군일기』 9년 11월 9일].
이후로는 인왕사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3) 근대
인왕사가 복원되는 것은
1912년에 재가자 박선묵(朴銑黙)이 인왕사 옛터에 선암정사(禪巖精舍)를 세우면서부터이다.
이후 인근에 1914년에 탄옹(炭翁) 화상이 대원암(大願庵)을 세우고,
1922년에 서옹(西翁) 화상이 극락전을, 1924년에 비구니 자인(慈仁)이 안일암(安逸庵)을,
1927년에 춘담(春潭) 화상이 또 다른 극락전을, 1930년에 비구니 묘법(妙法)이 치성당(致誠堂)을 각각 세움으로써
여러 암자와 전각이 한 군락을 이루었는데 1942년에 이 암자와 전각들을 통합하여 인왕사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사찰문화연구원, 『전통사찰총서 4 : 서울』, 사찰문화연구원출판국, 1994.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
•황인규, 「인왕사와 무학대사」, 『한국선학』22, 한국선학회, 2009.
▼ 인왕사 주변 모든 절/암자가 다 '인왕사'에 속한다고...
▼ 여긴 '인왕사 대웅전'
▼ 인왕산 국사당
인왕산 국사당 仁旺山國師堂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인왕산에 있는 신당.
시대 : 조선
문화재 지정 ; 중요민속문화재 제28호
성격 ; 신당
유형 ; 유적
분야 : 종교·철학/민간신앙
내용
중요민속문화재 제28호. 1동(棟).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으로,
현재 인왕산 기슭의 선바위 밑에 위치하고 있으나, 원래는 남산 꼭대기에 있었다.
따라서 그 연혁은 남산과 관련된 신앙의 역사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태조 5년 12월) 호국의 신으로 삼아(태종 4년 9월)
개인적인 제사는 금하고 국가의 공식행사로 기우제(祈雨祭)와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태종 8년 5월, 9년 7월)고 하며,
아울러 신주(神主)가 있었음도 언급하고 있다(태종 12년, 2월).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권3)에 의하면, 목멱신사라는 명칭의 사당이 남산 꼭대기에 있었고,
매년 봄·가을에 초제[醮祭: 별을 향하여 지내는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그러나 국사당이라는 명칭과 무신도(巫神圖)에 대한 언급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에서 비로소 볼 수 있는데,
거기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현재 국사당의 전신이다.
1972년 당시 당 관리인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시대 말엽에는 이미 국가적인 제사를 지내는 일이 없었고,
다만 별궁(別宮)의 나인들이 치성을 드리러 오거나
또는 개성 덕물산(德物山)에 치성을 드리러 가는 사람들이 먼저 이 당을 거쳐가고는 하였다고 한다.
민중전(閔中殿)이 궁중 나인들을 시켜 국사당에 치성을 드리게 하였다는 사실은,
궁중 발기[撥記:다스리는 기록]의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궁중 발기에는 인근 각처의 명산과 당·묘 등에 치성을 위하여 보낸 금품목록이 적혀 있는데,
여기에 국사당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한다.
국사당은 1925년 남산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신도의 신사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이보다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전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그곳이 태조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국사당이라는 명칭도 무학대사를 모시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전할 때 그 재료를 그대로 옮겨 원형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현재 당의 평면은 전면 3칸에 측면 2칸의 주간(柱間)이고,
기둥 간 사이는 전면 어간(御間) 약 2.6m에 협간(夾間)과 측간(側間)은 모두 2.4m이다.
따라서 내부의 넓이는 도합 11평이고,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다.
동서 양쪽에 온돌방이 있는데, 이것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마루 좌우 일부와 뒷면 및 전면에는 무신도가 걸려 있고,
평면 전체가 제상을 차리고 굿을 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민간의 일반건물들보다 단순한 구조이지만 규모는 더 큰 편이며,
기둥 위의 구조나 지붕형태 등 전체적인 구성이 견실과 간소를 위주로 하면서도
방주[方柱:네모진 기둥]의 실귀[糸刻:가늘게 귀접이한 재목]나 분합문의 긴 형태,
문살의 새김 등과 같은 드러나지 않는 세밀한 부분에서는
최소한도의 세련된 장식요소가 가해져서 우아한 면도 엿보인다.
아울러 대들보의 후림이나 연목의 배흘림, 규격 설정 등에서
경공[京工:뛰어난 장인]의 솜씨를 엿볼 수 있어서,
영조·정조 이래의 견실과 간결을 위주로 한 건축이념에 바탕을 두고 지어진 것이라고 판단된다.
국사당은 굿만 하는 곳이 아니라 단골신도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찾아와 참배하고 기도를 드리는 곳이다.
참배객들이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연중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데,
정월에 가장 많고 그 다음이 2월·3월·9월의 순이다.
이 당에서 행하는 굿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이고,
둘째는 병(病)굿 또는 우환굿,
그리고 셋째는 흔히 부모의 사령(死靈)이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진오기굿이다.
그러나 몇 가지 동기가 복합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굿이 1년에 평균 100여 회 치러진다.
서울시내에도 이러한 굿당이 몇 군데 있는데,
최근 10∼20년 사이에
남산 밑 회현동의 노인성당과 불광동의 할미당, 자하문의 서낭당 등이 없어졌지만,
국사당은 1973년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인왕산 선바위 가는 길...
▼ 정면에 보이는 바위는 최근에 '모자(帽子)바위'로 불리우고 있다.
▼ 원래 모자바위는 앞에 보이는 흰바위 뒤에 보이는 검은 바위가 모자(母子)바위인데...혹자는 '달팽이바위'라고도 하고...
▼ 지금은 대다수가 앞에 흰바위만을 모자바위라고 부른다. 해서 두 모자바위를 구분해야 한다.
▼ 선바위 입구
선바위[禪巖]
문화재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시도민속문화재 제4호
문화재 지정일 : 1973년 01월 26일
정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인왕산 서쪽 기슭에 있는 두 개의 거석(巨石).
내용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
형상이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 같아서 ‘禪(선)’자를 따서 선바위[禪巖]라 불렀다고도 한다.
또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이라는 전설, 또는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전설도 있다.
이것은 인간이 죽어서 석불(石佛)이 되었다는 인간의 화신으로 설화되고 있으며,
여기에 빌면 소원성취할 수 있다고 하여 일찍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특히, 자식 없는 사람이 이 바위에 빌면 효험이 크다고 하여 정성을 드리는데,
작은 돌을 붙이면 효험이 더욱 크다고 하여 작은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많이 남아 있다.
이를 ‘붙임’이라 하며, 이러한 바위를 ‘붙임바위’라고도 한다.
일제가 남산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을 선바위 곁으로 옮기게 한 뒤로
더욱 선바위에 대한 신앙은 무속신앙과 밀착되게 되었다.
국사당은 무신당으로서 굿을 행하는 곳이니
바로 옆에 있는 선바위와 복합적으로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이다.
선바위는 전국적으로 보이는 암석숭배의 일종이었겠으나
이것이 전설화되고 무속신앙과 밀착되면서 무속신앙의 주요지가 된 듯하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선바위에서 얼굴바위와 모자바위를 바라보니...
▼ 모자바위와 해골바위
▼ 선바위의 뒷모습
▼ 선바위의 다른 모습
▼ 이 바위도 성곽공사에 사용될 뻔 했네...
▼ 와불바위를 향해 가다가...
▼ 안산을 바라보고...
▼ 와불바위에서 바라본 얼굴바위
▼ 얼굴바위 위에는 인왕산 성곽의 곡성이 보이고...
▼ 이 얼굴바위는 성곽을 따라 걷다가 보면 부처(스님)의 좌선 모습으로도 보인다...해서 '부처바위'라고도 한다.
▼ 와불바위
▼ 선바위
▼ 인왕정으로 가는 데크계단이 보이고...
▼ 얼굴바위(부처바위)를 올려다 보고...
▼ 와불바위를 향해...
▼ 와불바위 위로 가는 데를 깍아서 계단처럼...북악터널 위 보토현의 인디언바위처럼...
▼ 와불바위 위에서 주변을 돌아보니...
▼ 선바위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안산
▼ 얼굴바위
▼ 모자바위
▼ 해골바위
▼ 선바위
▼ 얼굴바위/부처바위
▼ 다시 안산 방향을 보니 무악재 하늘다리가 보이고...
▼ 무악재 하늘다리를 살짝 당겨보니...
▼ 안산 정상을 당겨보고...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선바위와 국사당
▼ 얼굴바위도 찾아보고...
▼ 모자바위도...
▼ 해골바위도...
▼ 일단 얼굴바위/부처바위를 찾아 가면서...
▼ 얼굴바위를 향해...
▼ 얼굴바위 위에는 군사시설이 있어서 더이상 접근금지.
▼ 帽子바위와 母子바위(달팽이바위)
▼ 母子바위
▼ 帽子바위
▼ 모자바위
▼ 해골바위
▼ 천존단/칠성단
▼ 마애제석...제석(帝釋)이란 무속인들이 모시는 최고의 신들 중의 하나인데, 제석이, 제석불, 대석, 대석이 등으로 부른다고...
▼ 제석불(帝釋佛)이라고 그 이름 뒤에 다시 불(佛)자를 붙인 것은 무속과 불교의 융합인 듯...
▼ 帽子바위를 올려다보니...
▼ 와불바위
▼ 해골바위
▼ 해골바위와 선바위
▼ 선바위와 와불바위
▼ 해골바위
▼ 선바위와 와불
▼ 와불바위과 얼굴바위(부처바위)
▼ 얼굴바위와 모자바위
▼ 해골바위에서 바라본 모자바위
▼ 이제 모자바위를 찾아가며...
▼ 모자바위에 도착...
▼ 母子바위
▼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도 보이고, 등에 업힌 모습으로도 보이고...아무튼 母子바위
▼ 母子바위 위에서...
▼ 帽子바위를 내려다 보니...
▼ 母子바위 아래는...
▼ 내려서고...
▼ 인왕산 성곽 안으로...
▼ 범바위를 향해 오르고...
▼ 성곽 너머로 모자바위를 보니...
▼母子바위는 마치 엄머가 아기를 업거나 안은 모습으로도 보이고, 달팽이 더듬이 모습으로도 보이고...
☞ 여기서 '인왕산 바위탐방(선바위-얼굴바위-모자바위-해골바위-범바위-치마바위-석굴암-기차바위-무계원)' - 1부를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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