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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궁궐·왕릉·묘ㆍ원

[20210209] 수색산ㆍ봉산 연계산행 & 서오릉 탐방 & 홍제유연ㆍ유진상가 탐방' - 2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21. 2. 9.

2월 09일(화) 수색산ㆍ봉산 연계산행 & 서오릉 탐방 & 홍제유연ㆍ유진상가 탐방'을 다녀오다.

'수색산ㆍ봉산 연계산행 & 서오릉 탐방 & 홍제유연ㆍ유진상가 탐방' 코스

 

디지털미디어시티역→수색성당→청구아파트 경로당→잣나무쉼터→수색산(119m)→증산 갈림길→팥배나무길 갈림길→은숭정(숭실고 갈림길)→봉산 전망대→편백나무 치유의숲→은덕정(헬기장)→덕산정→깃대봉(185.5m)→체력단련장→고은정→봉산(봉산정/봉수대:209m)→수국사 갈림길→구룡모정→서오릉고개(벌고개)→서오릉매표소→명릉→수경원→익릉→순창원→경릉→대빈묘→홍릉→창릉→서어나무길→소나무길→인성대군초장지→재실→매표소→서오릉입구 정류장→버스이동→홍제역→홍제천노상주차장→홍제유연→유진상가→인왕시장→홍제역

'수색산ㆍ봉산 연계산행 & 서오릉 탐방 & 홍제유연ㆍ유진상가 탐방' 이야기를 시작하며...

 

오늘은

수색산ㆍ봉산 연계산행 & 서오릉 탐방 & 홍제유연ㆍ유진상가 탐방'을 위해 길을 나선다.

 

디지털미디어시티역에서 수색성당을 거쳐 청구아파트에서 산길로 접어든다.

잠시 후 서울둘레길이자 은평둘레길을 만나 수색산과 깃대봉,

그리고 봉산을 지나 서오릉고개에서 연계산행을 마치고...

 

서오릉 매표소를 통과하여 서오릉에 있는 5릉(명릉, 익릉, 경릉, 홍릉, 창릉)과

2원(수경원, 순창원)ㆍ1묘(대빈묘)ㆍ1초장지(인성대군)를 둘러보고,

서어나무길과 소나무길을 걷고 매표소로 원점회귀하고...

 

서오릉입구정류장에서 홍제역으로 버스 이동하여

홍제유연(열린홍제천길)을 감상하고 유진상가와 인왕시장을 둘러보았다.

 

 

▼ 서오릉고개/시계입구가게앞검문소 정류장에서...

 

서오릉 西五陵

사적 제198. 5릉은 경릉·창릉·익릉·명릉·홍릉을 일컫는다.

 

1457(세조 3) 세자 장(뒤에 덕종으로 추존됨)이 죽자 이곳에 안장(경릉)한 이래 1470(성종 1) 덕종의 아우인 예종과 그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의 창릉, 1681(숙종 7)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 1721(경종 1) 숙종과 그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와 제2계비인 인원왕후 김씨의 명릉, 1757(영조 33) 영조의 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이 들어서 능의 무리를 이루었다. 그밖에 이곳에는 명종의 큰아들인 순회세자의 순창원이 경내에 있으며, 1970년에 숙종의 후궁인 희빈장씨의 대빈묘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경릉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왕의 것이 오른쪽에, 왕비의 것이 왼쪽에 조성되지만 이것은 반대로 왕릉이 왼쪽에, 왕비릉이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 형식이다. 추존왕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왕릉에 나타나고 있는 난간석이나 망주석, 석수 등의 호위가 없다. 반면 왕비릉은 생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므로 능제도에 따라 구색을 갖추었으며, 난간석의 기둥은 창릉의 형식을 따랐으므로 특이하다.

 

창릉도 몇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즉 상석을 받친 석족은 일반적으로 4개의 양각 귀면이지만 창릉은 문고리 모양을 조각했으므로 북과 흡사한 느낌을 준다. 또 난간석의 기둥머리는 연잎과 연주문이 보편적이지만, 창릉의 큰 석주는 둥근머리 밑에 환상받침을 마련하고 사각 석주로 변천되어가는 형식을 하고 있어 당시 일부 남아 있던 고려 왕릉의 석주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명릉은 조선 능제의 분수령이 되는 것으로서 그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석물의 치수를 실물에 가깝게 했으며 부장품의 수량도 감소했다. 둘째, 문인석의 미소와 무인석의 늘어진 투구와 이마에 새긴 투구의 파상선 등은 1649년에 조영된 장릉 석인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셋째, 8각의 장명등, 옥개를 4각형으로 제도화했다. 그리고 익릉은 기본적으로 국조오례의제도를 따르고 부분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홍릉은 명릉보다 20일 늦게 조성했으므로 상설제도나 석물양식은 거의 비슷하다. 가령 문인석은 용모나 복식상태 등에 있어서 그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한 특징을 보여준다.

 

출처 : 다음백과

 

 

명릉 明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조선후기 제19대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 그리고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

 

사적 제198. 1701년인현왕후가 죽은 뒤에 이곳에 묘지를 정하고 명릉이라 하였다.

 

그 뒤 1720년숙종이 죽자 이곳에 나란히 묻었으며, 1757년에는 인원왕후의 상을 당하여 그 우강(右岡)에 묘를 쓰게 됨으로써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과 함께 동원이강(同原異岡)을 이루게 되었다. 능의 석물은 석인(石人)과 등신대돌짐승等身大石獸으로 크기를 실물에 가깝도록 작게 하였고, 부장명기(副葬明器 : 무덤 안에 묻는 기물)도 간소하게 하였다.

 

석인상의 촌스러운 듯한 미소를 머금은 입과 남바위모양으로 늘어진 무석(武石)의 투구 등은 18세기 석인양식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 1인과 참봉 1인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익릉 翼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조선후기 제19대 숙종의 비 인경왕후 김씨의 능.

 

사적 제198. 숙종연간에 조영되었다. 그러나 아직 능석물(陵石物)의 간소화 교령(敎令)이 내리기 이전이므로, 기본적으로는 오례의(五禮儀)의 제도를 따르면서도 부분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정자각(丁字閣)은 당시 유행하던 익실(翼室)이 딸려 옆 전면으로 1칸 늘어난 전면 5, 측면 5칸으로 세웠고, 장명등(長明燈)과 망주(望柱)의 대석(臺石)에 화문(花文)을 새긴다든가 망주 귀에 구멍이 사라지고 상향하는 세호(細虎)를 새겨넣는 등, 임진왜란 이후 양식을 잘 나타냈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참봉 각 1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릉 敬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조선전기 추존왕인 덕종과 왕비 소혜왕후 한씨의 능.

 

사적 제198호인 서오릉의 하나이다. 능호(陵號)1456(세조 2)에 정하였다. 능제(陵制)는 좌강(左岡)이 왕, 우강(右岡)이 왕후의 동원이강형식(同原異岡形式)으로 왕우비좌(王右妃左)의 일반적인 예와 반대되고 있다.

 

왕후는 생전에 덕종의 추존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으므로 능제도 왕릉의 형식을 갖추어야 하겠으나 왕은 세자로 승하하였고, 또 부왕인 세조의 박장주의(薄葬主義 : 장례를 간소히 하려는 정책)와 또 소혜왕후의 주장에 따라 세자묘제로 하였다. 그 이후 추봉되는 능의 전례(前例)를 이루었다.

 

석물은 왕릉·왕후릉 모두 화강석으로 하였는데, 풍화가 심하여 섬세한 조각문양은 판별이 어렵고 왕후릉의 석난간주두(石欄干柱頭)가 창릉식(昌陵式)을 따라, 건원릉(健元陵 : 太祖陵) 등 조선왕가의 전형적인 석난간과 그 모양을 달리하고 있음이 특이하다. 이 능의 보호를 위하여 영() 1인과 참봉 1인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릉 弘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조선후기 제21대 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

 

1757(영조 33)정성왕후가 죽자 이 곳에 묘지를 정하고 홍릉이라 하였다. 영조는 먼저 죽은 왕비의 유택(幽宅)을 정하면서 장차 함께 묻히고자 하여 허우(虛右)의 제도를 쓸 것을 명하여, 왕비는 바른쪽 정혈(正穴)에 돌을 자형으로 새겨 묻도록 하였으며, 능의 석문은 쌍릉(雙陵)을 예상하고 있었다.

 

현재 홍릉 오른쪽의 공간은 바로 이 것으로, 영조의 능이 동구릉(東九陵)에 자리잡게 되자 빈 채로 남아 있게 되었다.

 

능의 상설제도(象設制度)와 양식은 기본적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능인 명릉(明陵)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독특한 양식도 보이고 있어 속오례의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의 제도가 잘 반영되어 있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 1인과 참봉 1인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창릉 昌陵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에 있는 조선전기 제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

 

사적 제198.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龍頭里)에 있다. 1470(성종 1)1499(연산군 5)에 정하여졌다.

 

왕릉과 왕비릉은 동원이강식(同原異岡式)을 이루고 있으며, 석물(石物)의 배치는 국조오례의의 예에 따랐다. 고석(鼓石)의 문양과 석난간(石欄干), 대석주(大石柱)의 주두양식(柱頭樣式)이 특이하다. 다른 능의 나어두(羅魚頭) 대신 문고리모양을 새겨서 북과 똑같이 만들었음이 특이하다.

 

또한, 대석주에 있어서 죽석(竹石)이 닿은 밑부분은 조선식 석주모양을 따르고 있으면서 그 주두는 둥그런 도수(圖首) 아래 환상(環狀)받침을 마련하고 4각석주로 옮겨가는 형식을 이루고 있다. () 1인과 참봉(參奉) 1인을 두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여기서 '수색산ㆍ봉산 연계산행 & 서오릉 탐방 & 홍제유연ㆍ유진상가 탐방 - 2부'를 마치고...

 

 

 

'수색산ㆍ봉산 연계산행 & 서오릉 탐방 & 홍제유연ㆍ유진상가 탐방'을 다녀오다

 

▣ 1부[수색산ㆍ봉산 연계산행]는 http://macgyver-dct.tistory.com/16160792 ☜클릭

 

▣ 2부[서오릉 탐방]는 http://macgyver-dct.tistory.com/16160793 ☜클릭

 

▣ 3부[홍제유연ㆍ유진상가 탐방]는 http://macgyver-dct.tistory.com/16160794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