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월 30일(목)
'조선의 종묘ㆍ사직과 5대 궁궐(덕수궁ㆍ경희궁ㆍ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 +@ 탐방'을 다녀와서...
'조선의 종묘ㆍ사직과 5대 궁궐(덕수궁ㆍ경희궁ㆍ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 +@ 탐방'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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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선의 종묘ㆍ사직과 5대 궁궐(덕수궁ㆍ경희궁ㆍ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 +@ 탐방을 위해 길을 나선다.
▼ 국립기상박물관(기상청옛터)에서...
성동인우 애지산학(性同鱗羽 愛止山壑)
"위 글은 율곡선생의 이곳 문성사 터에 있었던 선생의 마애각자인바
풍화작용으로 인하여 원형이 마모되었기에 탁본으로 복원한 것이다"
1988년 2월 1일
구세군 영천교회
사직 社稷
시대 : 조선
유형 : 개념용어
분야 : 종교·철학/유교
요약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국토와 곡식의 번창을 기원하던 제사 또는 장소를 가리키는 유교용어.
내용
사(社)는 토지신(土地神), 직(稷)은 곡신(穀神)을 상징한다.
옛부터 중국의 천자나 제후 또는 우리나라의 왕이 나라를 세워 백성을 다스릴 때는 사직단(社稷壇)을 만들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왔다.
국토 없는 나라는 있을 수 없으며 곡식 없는 경제는 파탄한다.
또한 백성은 땅 없이 하루도 살 수 없고, 곡식이 없으면 굶어죽게 마련이다.
이와 같이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으며, 사직 또한 영토유지와 백성의 윤택한 삶을 기원하며 국민적 단결을 공고히 하기 위해 세워지는 것이므로 임금과 같은 존귀한 지위에 있어서도 백성과 사직의 존망지추(存亡之秋)에 직결되는 것으로 인식해 왔다.
따라서 사직은 천자나 제후가 되어 제사하는 제례로서 항상 국가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논어(論語)』「선진 先進」편에 의하면, “백성이 있으면 사직이 있다.”고 했고,
『맹자(孟子)』「진심장구하(盡心章句下)」편에서는, “무도한 제후가 나타나 만약 사직을 위태롭게 할 경우는 다시 새로운 어진 임금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백성이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임금은 여기에 비해 가벼운 존재이다.”고 한 것은 사직을 국가 자체로 간주한 표현이다.
『후한서(後漢書)』「제사지하(祭祀志下)」편에서는 “제후에게 사직이 있다면 나라가 있는 것이고, 사직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한편 『서경(書經)』「태갑상(太甲上)」편에서는 “선왕이 이 하늘의 밝은 명(命)을 돌아 보사 상하(上下)의 신기(神祗)를 받드시며, 사직과 종묘를 경건하고 엄숙히 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하였다.
『예기(禮記)』「제의(祭儀)」편에서는 “나라의 신위(神位)를 세우되 우측에 사직을, 좌측에 종묘를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효경(孝經)』「제후장(諸侯章)」에 의하면, “능히 그 사직을 보전해 그 백성을 화합시켰다.”고 하여, 정치적 안정과 국민적 단결의 중요한 국가 체제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사’와 ‘직’의 결합과 관련해 『춘추좌전(春秋左傳)』「소공(昭公)」편에 의하면, 사에는 구룡(句龍)을 배사(配祀)하고 직에는 후직(后稷)을 배사하는 것이 관례이었으나, 하(夏)나라 이전에는 공공씨(共工氏)의 아들 구룡을 ‘사’라고 말했고, 열산시(烈山氏)의 아들 주(柱)를 직이라 했으며, 은(殷)나라 이후로 구룡과 후직을 함께 제사 지냈다.
또한 『예기』 교특생(校特牲)의 정현(鄭炫) 주(注)에 따라, “구룡 등을 지신(地神) 곡신(穀神)으로서 배사하게 되었다.
사직의 제사는 주대(周代)에 춘(春)·추(秋) 두 계절에 행하였다.
봄에 파종해 그것이 무사하게 성장이 잘 되기를 빌고, 가을에는 곡물이 자라나 많은 수확을 거두어 이를 감사하는 의례였다.
한(漢)나라 초기에는 ‘사’제례만을 자주 봉행하고, ‘직’제례의 경우는 자주 생략했는데, 후한의 광무제(光武帝)때에는 대사직(大社稷)을 낙양(洛陽)에 세웠다.
그 후 사직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대사(大社: 公社)·제사(帝社)·대직(大稷) 등의 제사를 거행하였다.
이때 비로소 왕이 백성을 위해 대사를 세운 것으로 간주된다.
이 사제의 중요한 목적은 만백성을 왕궁에 이미 설치한 사직단에서 통할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종묘제사의 목적이 동족간의 결속을 다지는데 있었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당(唐)나라 초기에는 매년 2월과 8월의 술일(戌日)에 대사와 대직을 제사지냈고, 겨울에는 연말을 기해 여러 신위에 대한 합동 제사를 지내고 난 다음날 사직을 사궁(社宮)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 후 명(明)나라에 이르러 1393년(홍무 26)에 처음 그 의례를 정했으며, 1421년(영락 19)에 지금의 북경에 사직단이 완성되어 매년 2월과 8월의 술일(戌日)에 제사를 거행해 청(淸)나라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문헌기록상 신라 선덕왕(善德王)이 783년에 처음으로 사직단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졌고, 그 뒤 고려는 성종(成宗), 조선은 태조때 각각 사직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구려의 경우 고국양왕(故國壤王) 때 국사(國社)를 세웠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국사는 사직단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더라도 유사한 성격과 기능을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새로 건국하게 되면 그에 따라 새로운 사직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으므로 사직을 국가나 조정(朝廷) 자체로 인식해 왔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직단(社稷壇)은 조선시대 토지의 신(사신社神)과
곡식의 신(직신稷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는 땅과 곡식이 국가 경제의 근본이었기 때문에,
고대부터 사직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직단은 조선 건국 후 1395년(태조 4) ‘궁궐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세운다’는 예에 따라 현재의 자리에 창건하였다.
그리고 이를 관리하고 제사와 실무를 담당하는 관청을 사직서(社稷署)라 하였다.
사직단은 종묘와 더불어 조선왕조의 근간이 되었던 곳으로 국가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
나라의 큰일이 있을 때 지내는 기고제,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풍년을 기원하는 기곡제 등의 제사가 사직단에서 행해졌다.
그 밖에 사직단 경내에는 대문(大門)과 안향청(安香廳,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곳),
전사청(典祀廳, 제례 음식을 마련하는 곳) 등의 건물이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景福宮)은 1392년 조선 건국 후
1395년(태조 4)에 창건한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法宮)이다.
경복궁은 백악산(북악산)을 주산으로 넓은 지형에 건물을 배치하였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넓은 육조거리가 펼쳐진 한양의 중심이었다.
‘경복’의 이름은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으며,
이곳에서 세종 대에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반포되기도 하였다.
경복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는데
그 후 복구되지 못하였다가 270여년이 지난 1867년(고종 4)에 다시 지어졌다.
고종 대에 들어 건청궁과 태원전, 집옥재 등이 조성되었으며,
특히 건청궁 옥호루는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1910년 경술국치 후 경복궁은 계획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하여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분으로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되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경복궁의 경관을 훼손하였다.
이후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경복궁 복원공사가 진행되었고,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였으며
흥례문 일원, 침전 권역, 건청궁과 태원전, 그리고 광화문 등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 여기서 '조선의 종묘ㆍ사직과 5대 궁궐(덕수궁ㆍ경희궁ㆍ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 +@ 탐방 - 2부'를 마치고...
조선의 종묘ㆍ사직과 5대 궁궐(덕수궁ㆍ경희궁ㆍ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 +@ 탐방을 다녀오다.
▣ 1부[시청역→서울광장→환구단 정문→환구단(원구단)지→황궁우→석고→프라자호텔앞→덕수궁→월대→대한문→금천교→중화문→중화전→석어당→즉조당→준명당→석조전→분수대→돈덕전(모던 라이트 대한제국황실 조명전)→정관헌→광명문→대한문→덕수궁돌담길→정동전망대(휴일미개방)→정동길→덕수궁 선원전 영역→고종의길→정동공원→舊러시아공사관(첨탑)→경희궁→흥화문→흥화문터(구세군회관)→금천교→서울역사박물관→숭정문→숭정전→자정문→자정전→서암(瑞巖)→국립기상박물관(기상청옛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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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국립기상박물관(기상청옛터)→월암근린공원→홍난파가옥→구세군영천영문→성동인우 애지산학(각자바위 안내문)→딜쿠샤(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권율장군집터→舊옥경이식품→종로문화체육센터→단군성전→사직단→진사청일원→사직단→사직단정문→세종마을 음식문화의거리→경복궁→월대→광화문→흥례문→영제교→근정문→근정전→수정전(집현전)→경회루(경회지)→아미산 굴뚝→자경전 십장생 굴뚝→국립민속박물관→7080 추억의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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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부[국립민속박물관→7080 추억의거리→북촌초등학교 등→효자각→북촌로5길→재동초교→북촌로4길→북촌1경→창덕궁→월대와 돈화문 구역 복원공사중→금호문→금천교→진선문→인정문→인정전→선정문→선정전→희정당→낙선재→성정각→창경궁→함양문→통명전→양화당→풍기대→성종태실비(진입금지)→춘당지→대온실→홍화문→옥천교→명정문→명정전→문정전→종묘 가는길→종묘→북신문→영녕전→정전→공민왕신당→외대문(창엽문)→종묘시민광장→종로3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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