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6일(일)
'서울둘레길 16코스이자 은평둘레길 2코스~1코스인 앵봉산ㆍ봉산 이어 걷기를 하며, 고양 서오릉 탐방과 봉산 편백나무 치유의숲 무장애숲길 걷기'를 다녀와서...
'서울둘레길 16코스이자 은평둘레길 2코스~1코스인 앵봉산ㆍ봉산 이어 걷기를 하며, 고양 서오릉 탐방과 봉산 편백나무 치유의숲 무장애숲길 걷기'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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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서울둘레길 16코스이자 은평둘레길 2코스~1코스인 앵봉산ㆍ봉산 이어 걷기를 하며, 고양 서오릉 탐방과 봉산 편백나무 치유의숲 무장애숲길을 걷기 위해 길을 나선다.
▼ 고양 서오릉 주차장에서...
고양 서오릉 (西五陵)
서오릉(西五陵)은 ‘서쪽에 있는 5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구리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큰 조선왕실의 왕릉군이다.
1457년(세조 3) 세조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의묘(懿墓, 경릉)가 처음 조성되었고, 1470년(성종 1) 예종의 창릉(昌陵)이 왕릉으로서 최초로 조성되었다.
이후 순회세자의 순창원(順昌園), 인경왕후의 익릉(翼陵), 숙종의 명릉(明陵), 정성왕후의 홍릉( 弘陵)이 차례로 조성되어 조선시대에는 5기의 능과 1기의 원이 조성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영빈 이씨의 수경원(綏慶園)과 옥산부대빈 장씨의 대빈묘(大嬪墓)가 옮겨져 지금의 서오릉이 되었다.
연도 | 내용 |
1457년(세조 3) | 세조 첫째 아들 의경세자의 의묘 조성 |
1470년(성종 1) | 의경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고 의묘를 경릉으로 높임 예종의 창릉 조성 |
1499년(연산군 5) | 예종 두 번째 왕비 안순왕후의 능을 창릉 동쪽 언덕에 조성 |
1504년(연산군 10) | 추존 덕종 왕비 소혜왕후의 능을 경릉 서쪽 언덕에 조성 |
1563년(명종 18) | 명종 아들 순회세자의 묘 조성 |
1592년(선조 25) | 순회세자 부인 공회빈 윤씨가 세상을 떠남 |
1681년(숙종 7) | 숙종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익릉 조성 |
1701년(숙종 27) | 숙종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의 명릉 조성 |
1720년(경종 즉위) | 숙종의 능을 명릉 왼쪽 자리에 조성 |
1757년(영조 33) | 영조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 조성 숙종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의 능을 명릉 서쪽 언덕에 조성 |
1870년(고종 7) | 순회세자의 묘를 순창원으로 높임 |
1970년대 | 추존 장조 생모 영빈 이씨의 수경원을 신촌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김 경종 생모 옥산부대빈 장씨의 대빈묘를 광주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김 |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고양 서오릉 - 명릉(明陵, 숙종과 인현왕후·인원왕후)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조성 연도 : 1701년(숙종 27), 1720년(경종 즉위), 1757년(영조 33)
왕릉 형식 : 동원이강릉
▷ 명릉(明陵) 이야기
명릉은 조선 19대 숙종과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명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고 서로 다른 언덕에 쌍릉과 단릉으로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 언덕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이고 왼쪽 언덕이 인원왕후의 단릉이다.
명릉이 이곳으로 정해진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숙종이 하루는 평상복을 입고 민심을 살피기 위해 궁궐을 벗어나 어느 냇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냇가에서 한 젊은이가 울고 있는 것이 보여 연유를 물으니, 갈처사(葛處士)라는 유명한 지관이 이곳에 무덤을 쓰면 좋다고 해서 땅을 파는데, 아무리 파도 물이 나와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그 지관이 장난을 쳤다고 여기고, 젊은이를 불쌍히 여겨 관청에 가서 쌀 300석을 받아올 수 있도록 적은 서신을 주었다.
그리고 지관이 살고 있는 허름한 오두막집을 찾아가 청년의 일을 따져 물었다.
그러자 지관은 “모르면 잠자코 계시오. 저 땅은 무덤자리로 들어가기도 전에 쌀 300석을 받고 명당자리로 들어가는 자리라오!”라며 따져 묻는 숙종에게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그의 신통함에 놀라 자신이 국왕인 것을 밝히고, 훗날 본인이 묻힐 자리를 골라달라고 부탁하였다.
전해지는 설화에 따르면, 지금의 명릉 자리가 바로 신통한 지관 갈처사가 택한 입지라고 한다.
그런데 『숙종실록』에 1680년(숙종 6)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익릉을 공사할 때 숙종이 본인 능 자리를 지금의 명릉 자리로 미리 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숙종은 허우(虛右, 오른쪽 자리를 비우게 함)제도를 참고하여 인현왕후의 능과 숙종 본인의 능 자리를 미리 공사하였고, 1720년에 숙종의 능을 이곳에 조성하였다.
명릉을 조성한 지 37년이 지난 1757년(영조 33)에 인원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인원왕후의 능자리에 대해서는 『숙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713년(숙종 39) ‘명릉과 익릉 사이에 간좌곤향(艮坐坤向) 언덕이 있는데 후에 내상(왕비의 상)이 있을 경우 이 언덕을 쓰되, 명릉과 가까우니 정자각을 같이 쓰라’라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명릉에서 400여보 떨어진 곳에 숙종이 미리 살아있는 왕비의 능 자리를 정한 것이고, 인원왕후 본인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명릉 곁에 묻히기는 원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1757년(영조 33) 인원왕후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에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홍릉)과 영조 본인의 능 자리를 미리 공사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영조는 또 다른 왕릉 공사에 대한 부담이 커지자, 명릉 바로 오른쪽 언덕인 지금의 자리가 길지(吉地)라는 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지금의 자리에 인원왕후의 능을 조성하여 왕릉 공사에 드는 인력과 국고를 줄였다.
명릉의 능침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석물의 상설은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과 인원왕후의 단릉 모두 비슷한 모습이다.
능침 아래의 비각 안에는 2개의 표석이 있는데 왼쪽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표석이고, 오른쪽이 인원왕후의 표석이다.
홍살문부터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 양옆에는 제향 때 제관이 걷는 변로(邊路)가 남아있다.
▷ 숙종(肅宗) 이야기
숙종(재세 : 1661년 음력 8월 15일 ~ 1720년 음력 6월 8일, 재위 : 1674년 음력 8월 23일 ~ 1720년 음력 6월 8일)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아들로 1661년(현종 2) 경덕궁(현 경희궁) 회상전에서 태어났다.
1667년(현종 8)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674년 현종이 세상을 떠나자 14살의 나이로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14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총명하고 영특하여 수렴청정을 받지 않았다.
재위기간 동안 붕당간 정치 대립이 심한 가운데 세 번의 환국(1680년 경신환국: 유악(油幄) 사건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 교체, 1689년 기사환국: 원자 칭호 문제로 서인에서 남인으로 정권 교체, 1694년 갑술환국: 인현왕후 복위 문제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 교체)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고, 전국적인 대동법(大同法)과 양전(量田)을 실시하였다.
또 상평통보를 유통시켜 상업을 장려하였고, 1712년(숙종 38)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청나라와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왕실 족보인 『선원록』 편찬을 시작으로 2대 정종의 묘호(廟號, 종묘에 붙여지는 이름) 추숭과 6대 단종과 정순왕후의 복위, 소현세자빈 강씨를 복위하는 등 왕실의 질서와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후 1720년(숙종 45) 경덕궁(현 경희궁) 융복전에서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 인현왕후(仁顯王后) 이야기
인현왕후 민씨(재세 : 1667년 음력 4월 23일 ~ 1701년 음력 8월 14일)는 본관이 여흥인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송씨의 딸로 1667년(현종 8) 반송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680년(숙종 6) 숙종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681년(숙종 7)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689년(숙종 15) 숙종의 후궁 장씨가 왕자(경종)를 낳자 원자(元子)로 정하는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기사환국이 일어나면서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되었다.
1694년(숙종 20) 인현왕후의 복위운동으로 갑술환국이 일어나면서 다시 왕비로 복위되었다.
1701년(숙종 27) 창경궁 경춘전에서 35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한 죄로 옥사(신사옥사, 무고의 옥)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 인원왕후(仁元王后) 이야기
인원왕후 김씨(재세 : 1687년 음력 9월 29일 ~ 1757년 음력 3월 26일)는 본관이 경주인 경은부원군 김주신과 가림부부인 조씨의 딸로 1687년(숙종 13) 순화방 사저 양정재에서 태어났다.
1701년(숙종 27) 숙종의 두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702년(숙종 28) 왕비로 책봉되었다.
1720년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경종 연간에 있었던 노론과 소론의 대립인 신축·임인옥사(신임옥사)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은 영조를 끝까지 보호해 주었다.
1724년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가 되었으며, 1757년(영조 33) 창덕궁 영모당에서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고양 서오릉 - 수경원(綏慶園, 추존 장조 생모 영빈)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조성 연도 : 1764년(영조 40), 1899년(광무 3), 1970년
원의 형식 : 단분
▷ 수경원(綏慶園) 이야기
수경원은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이자 황제로 추존된 장조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원이다.
1764년(영조 40) 영빈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양주 연희궁 대야동(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에 의열묘(義烈墓)라는 이름으로 묘를 조성하였다.
1788년(정조 12) 무덤의 이름을 선희묘(宣禧墓)로 고쳤고, 1899년(광무 3)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자 영빈 이씨는 황제의 어머니 지위(궁원제의 예)에 맞게 무덤을 원으로 높여 이름을 수경원이라 하였다.
이후 수경원은 1970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원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상석, 석상(혼유석), 망주석, 표석을 배치하였다.
봉분 앞에 있는 표석에는 ‘영빈전의이씨지묘’라 쓰여있다.
입구에는 대한제국 때 세운 표석(대한 소유영빈 수경원)이 있다.
▷ 영빈 이씨(暎嬪 李氏) 이야기
영빈 이씨(재세 : 1696년 음력 7월 18일 ~ 1764년 음력 7월 26일)는 본관이 전의인 증 찬성 이유번과 한양 김씨의 딸로 1696년(숙종 22)에 태어났다.
1701년(숙종 27) 궁녀로 입궁하였다가 1726년(영조 2) 영조의 후궁이 되었고, 1730년(영조 6) 영빈이 되었다.
영조와의 사이에서 1남(사도세자) 6녀(화평·화협·화완옹주 등)를 낳았다.
영빈은 사도세자의 생모였으나 아들에 대한 일을 간섭하지 않았는데, 헌경황후(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한중록』에 의하면 영조가 사도세자의 처분을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영빈이 영조에게 ‘대처분’을 청하였다고 할 정도로 냉정하고 강철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1764년(영조 40) 경희궁 양덕당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고, 1899년(광무 3)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영빈은 황제의 어머니 지위로 신분이 높아져 시호(諡號)를 소유(昭裕)라 올렸다.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고양 서오릉 - 익릉(翼陵, 숙종비 인경왕후)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조성 연도 : 1681년(숙종 7)
왕릉 형식 : 단릉
▷ 익릉(翼陵) 이야기
익릉은 조선 19대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 김씨의 능이다.
익릉은 1680년(숙종 6) 인경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이듬해인 1681년(숙종 7)에 고양 경릉(敬陵) 근처인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다.
능침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숙종 초기에 조성된 능이기 때문에 석물의 크기가 크다.
정자각은 서오릉 내에 있는 정자각 중 유일하게 정전 양옆에 벽 없이 기둥을 세운 익랑(翼廊)을 설치하여 규모를 키웠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지형에 따라 중간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 인경왕후(仁敬王后) 이야기
인경왕후 김씨(재세 : 1661년 음력 9월 3일 ~ 1680년 음력 10월 26일)는 본관이 광산인 광성부원군 김만기와 서원부부인 한씨의 딸로 1661년(현종 2) 회현방에서 태어났다.
1671년(현종 12) 왕세자빈이 되었고, 1674년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숙종과의 사이에서 두 공주를 낳았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후 1680년(숙종 6) 천연두에 걸려 경덕궁(현 경희궁) 회상전에서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고양 서오릉 - 홍릉(弘陵, 영조비 정성왕후)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조성 연도 : 1757년(영조 33)
왕릉 형식 : 단릉
▷ 홍릉(弘陵) 이야기
홍릉은 조선 21대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다.
정성왕후의 단릉이지만 석물의 배치는 쌍릉의 형식이다.
1757년(영조 33)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숙종의 명릉(明陵)의 예를 따라, 영조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어 둔 허우제(虛右制)로 조성하였다.
석물 배치 역시 쌍릉의 형식으로 배치하였고, 비어있는 자리 정혈(正穴)에 십자(十字) 모형을 새겨 묻었다.
그러나 1776년 영조가 세상을 떠난 후 영조의 능 자리에 대한 대신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여러 차례 논의 끝에 정조는 효종의 옛 영릉 자리인 지금의 동구릉 내 원릉(元陵) 자리로 결정하였다.
이로 인해 앞에서 봤을 때 홍릉의 왼쪽 자리가 지금도 비어있는 모습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홍릉 능침의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능의 방향(을 ‘乙’, 신 ‘辛’)만 새겨져 있다.
홍릉의 무석인은 투구와 등에 장식이 많이 되어 있다.
뒷면에는 문양이 촘촘히 넣어져 있는 목 가리개를 위로 올렸다.
갑옷의 등 부분에는 물고기 비늘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가슴 부분은 구름 모양을 새겼다.
▷ 정성왕후(貞聖王后) 이야기
정성왕후 서씨(재세 : 1692년 음력 12월 7일 ~ 1757년 음력 2월 15일)는 본관이 대구인 달성부원군 서종제와 잠성부부인 이씨의 딸로 1692년(숙종 18) 가회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04년(숙종 30) 숙종의 왕자 연잉군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에 봉해졌고, 1721년(경종 1) 왕세제빈으로 책봉된 후, 1724년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정성왕후는 조선 역대 왕비 중에서 중전 재임을 가장 오래 하였으나 영조와의 사이에서 소생을 낳지 못하였다.
두 후궁에서 낳은 효장세자(추존 진종)와 사도세자(추존 장조)가 왕세자로 책봉될 때 양자로 입양하였으며, 영조와 사도세자가 대립하게 되자 그 중심에 서서 갈등을 풀기 위해 노력하였다.
1757년(영조 33) 창덕궁 관리합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고양 서오릉 - 창릉(昌陵, 예종과 안순왕후)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조성 연도 : 1470년(성종 1), 1499년(연산군 5)
왕릉 형식 : 동원이강릉
▷ 창릉(昌陵) 이야기
창릉은 조선 8대 예종과 두 번째 왕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이다.
창릉은 서오릉에서 왕릉으로 조성된 최초의 능으로,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동쪽)이 예종, 오른쪽 언덕(서쪽)이 안순왕후의 능이다.
창릉은 1469년(예종 1)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의경세자의 의묘(경릉) 북쪽에 조성되었고, 1498년(연산군 4) 안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창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창릉의 두 능침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석물의 상설은 예종과 안순왕후의 능이 비슷하다.
예종의 능침 석상(혼유석)을 받치는 고석(鼓石)의 무늬는 일반 조선왕릉의 도깨비 무늬가 아닌 북고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왕릉 중 유일하다.
▷ 예종(睿宗) 이야기
예종(재세 : 1450년 음력 1월 1일 ~ 1469년 음력 11월 28일, 재위 : 1468년 음력 9월 7일 ~ 1469년 음력 11월 28일)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둘째 아들로 1450년(세종 32) 수양대군 사저에서 태어났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고, 형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20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1457년(세조 3) 왕세자가 되었다.
1468년(세조 14) 아버지 세조의 양위를 받아 수강궁(현 창경궁) 중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 동안 남이의 옥사를 수습하였고, 세종의 영릉을 현 여주로 옮겼다.
또 세조 대부터 편찬하던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를 앞두었으나, 재위 1여 년 만에 경복궁 자미당에서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는 예종이 아버지 세조가 세상을 떠난 것에 충격을 받아 건강을 해쳤다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종이 왕세자일 때 세조가 병환이 생기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한잠도 못 잔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 세조가 돌아가매 슬픔이 지나쳐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건강을 해치게 되어 이해 겨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는 효성이 지극했던 예종의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 안순왕후(安順王后) 이야기
안순왕후 한씨(재세 : ?년 음력 3월 12일 ~ 1498년 음력 12월 23일)는 본관이 청주인 청천부원군 한백륜과 서하부부인 임씨의 딸로 태어났다.
1463년(세조 9) 왕세자의 후궁인 소훈(昭訓, 내명부 세자궁 종5품)이 되었고,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예종이 세상을 떠난 후 원자인 제안대군이 왕위를 이어받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잘산군(성종)이 예종의 양자로 입양되어 왕위에 올랐다.
성종이 즉위한 후 인혜(왕)대비가 되었고, 연산군 즉위 후 대왕대비가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창경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고양 서오릉 - 대빈묘(大嬪墓, 경종 생모 옥산부대빈)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조성 연도 : 1702년(숙종 28), 1719년(숙종 45), 1970년 이후
묘의 형식 : 단분
▷ 대빈묘(大嬪墓) 이야기
대빈묘는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경종의 생모인 옥산부대빈 장씨의 묘이다.
1701년(숙종 27) 옥산부대빈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702년(숙종 28) 양주 인장리(현 구리 인창동)에 묘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묘소 자리가 불길하다 하여 1719년(숙종 45) 광주 진해촌(현 광주시 오포읍 문형리)으로 옮겼다가 1970년 이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대빈묘는 일반 후궁묘의 형식에 맞게 조성되었다.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봉분 주변에 문석인,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 석상(혼유석) 등을 배치하였다.
봉분 앞에는 표석이 있는데 ‘유명조선국 옥산부대빈장씨지묘(有明朝鮮國玉山府大嬪張氏之墓)’라고 쓰여있다.
▷ 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嬪 張氏) 이야기
옥산부대빈 장씨(재세 : 1659년 ~ 1701년 음력 10월 9일?)는 본관이 인동인 장형과 파평 윤씨의 딸로 1659년(효종 10)에 태어났다.
숙종 대 당시 대왕대비였던 장렬왕후 조씨를 모시는 궁녀로 입궁하였고 숙종의 총애를 받아 1686년(숙종 12) 숙종의 후궁이 되었다. 1688년(숙종 14) 소의(昭儀)의 품계에서 숙종의 첫째 아들(경종)을 낳아 희빈(禧嬪)에 봉해졌다.
숙종은 희빈이 낳은 왕자를 원자(元子)로 정하려는 뜻을 밝히자, 당시 집권당이었던 서인은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이 일로 기사환국이 일어나면서 남인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숙종은 환국 이후 인현왕후를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하고 희빈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인현왕후 복위 운동 사건이 일어나면서 갑술환국이 일어나고 서인 정권이 다시 들어서게 되었다.
이 일로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로 복위되고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신분이 낮아졌다.
이후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인현왕후를 무고한 죄(무고의 옥)로 세상을 떠났다.
『숙종실록』에는 자진(自盡)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720년 숙종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1722년(경종 2)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어 사당의 이름을 대빈궁(大嬪宮), 묘의 이름을 대빈묘라 하였다.
그러나 영조 대 궁원제(宮園制, 왕을 낳은 후궁의 사당을 궁, 묘를 원으로 정하는 제도)가 만들어질 때 옥산부대빈은 논의하지 않아, 경종 대에 올려진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고양 서오릉 - 순창원(順昌園, 순회세자와 공회빈)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조성 연도 : 1563년(명종 18), 1593년 이후, 1870년(고종 7)
원의 형식 : 합장
▷ 순창원(順昌園) 이야기
순창원은 조선 13대 명종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원이다.
순창원은 한 봉분에 왕세자와 왕세자빈을 같이 모신 합장의 형식이다.
1563년(명종 18)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고양 경릉(敬陵) 근처인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고 순회묘(順懷墓)라 불렀다.
1592년(선조 25) 공회빈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장례를 치르지 못하였다.
선조는 궁궐 후원에 시신을 임시로 묻으라는 명을 내렸고, 다시 시신을 찾으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후 공회빈은 유의장(遺衣葬, 의복으로 장례를 치름)으로 순회묘에 합장되었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 순회세자와 같이 신주를 만들어 사당에 모셨다.
1870년(고종 7) 묘를 원으로 높여 이름을 순창원(順昌園)이라 하였다.
순창원은 추존 덕종의 경릉의 예로 조성되었으며,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생략하였고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과 석양과 석호 각 1쌍씩 배치하였다.
▷ 순회세자(順懷世子) 이야기
순회세자(재세 : 1551년 음력 5월 28일 ~ 1563년 음력 9월 20일)는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첫째 아들로 1551년(명종 6)에 태어났다.
1557년(명종 12)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563년(명종 18)에 13세로 세상을 떠났다.
▷ 공회빈(恭懷嬪) 이야기
공회빈 윤씨(재세 : 1552년(?) ~ 1592년 음력 3월 3일)는 본관이 무송인 윤옥과 파평 윤씨의 딸로 태어났다.
공회빈의 생년은 미상이나, 『선조수정실록』에 10세에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1552년(명종 7)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561년(명종 16) 왕세자빈으로 황대임의 딸이 간택되었으나 병으로 인하여 간택이 중단되었고, 그 대신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563년(명종 18) 순회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덕빈(德嬪)에 봉해졌다.
이후 1592년(선조 25)에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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