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 13일 일요일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나들이를 다녀오다.
창덕궁 창건 6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하나로 11월 한 달간은 일요일에 한해서
무제한 자유입장이라는 얘기를 전해 듣고서...
더없이 좋은 기회라 여기고 창덕궁 나들이를 다녀왔다.
아래 설명 글은
이 글을 읽는 님들에게 다소 도움이 될까하여 인터넷을 떠돌면서 퍼온 글입니다.
★ 창덕궁에 대하여........
창덕궁은 태종 4년 10월부터 시작하여 태종 5년(1405) 10월까지 1년간의 공사 끝에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다.
궁명(宮名)은 창덕(昌德)이며, 정전(正殿)은 인정전(仁政殿)이다.
태종 11년에 진선문과 금천교를 짓고, 태종 12년(1412)에 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세웠다.
세조가 즉위하면서 인정전을 다시 짓고 궁내 각 전각의 이름을 새로 정하였다.
조계청(朝啓廳)은 선정전(宣政殿), 후동별실(後東別室)은 소덕전(昭德殿), 후서별실(後西別室)은 보경당(寶慶堂), 정전(正殿)은 양의전(兩儀殿), 東침실은 여일전(麗日殿), 西침실은 정월전(淨月殿), 루(樓)는 징광루(澄光樓)라 하였다.
세조 9년(1463) 인접한 민가를 헐어내고 후원을 확장하였다.
창덕궁은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전부 소실되었다. 왕궁의 복구공사는 선조 40년(1607)에 시작하여 광해군 2년(1610)에 거의 마무리했다.
조선초기에는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왕이 경복궁에서 정사를 보았으나 임란 이후에는 경복궁이 복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창덕궁이 정궁 노릇을 했다.
1623년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나서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어 그 복구공사는 인조 25년(1647)에야 완료되었다.
효종 7년(1656)에는 만수전(萬壽殿), 춘휘당(春輝堂), 천경전(千慶殿)을 건립하였는데, 만수전과 천경전이 숙종 13년(1687) 화재로 소실되어 버렸다. 숙종 21년(1694) 춘휘당을 선원전(璿源殿)이라 개칭하고 어진(御眞) 을 봉안(奉安)하였다.
숙종 30년(1704) 12월에 대보단을 조성하고 정조 원년(1776) 9월 후원에 규장각(주합루)를 건립하였다. 정조 6년(1782)에는 인정전 뜰에 품위석(品位石)을 설치하였다.
순조 3년(1803) 12월에 인정전이 화재로 소실되자 다음해에 즉시 복구한 바가 있고, 순조 24년(1824) 8월에도 불이 나서 경복전(景福殿)이 모두 불탔다.
1912년 일제는 창덕궁과 후원을 일반 백성에게 관람시키기 시작하였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다.
1920년 이들 침전을 복구하였는데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복구하고 강녕전을 헐어다가 희정당을 복구하는 등 경복궁의 많은 침전을 헐어 창덕궁 부속건물들을 복구하였다.
1921년 후원 훈국북영지(訓局北營址)에 선원전을 새로 건립하고 어진을 옮겨 봉안하였다. 1995년에는 일제가 변형시킨 인정전 회랑(廻廊)을 헐고 새로 건립하였으며 1997년에는 진선문을 복원하였다.
창덕궁에서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건물은 인정전(국보 제 225호), 인정문(보물 제 813호), 선정전(보물 제 814호), 희정당(보물 제 815호), 대조전(보물 제 816호), 선원전(보물 제 817호)이다.
창덕궁 침전 동쪽에는 성정각과 승화루가 있고 낙선재 지역은 후궁들이 거처하던 곳이라 단청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들이 있다. 뒤뜰의 화계나 꽃담, 괴석 등이 대단히 아름답다.
창덕궁 후원을 '비원(秘苑)'이라고도 하는데, 실록에는 금원(禁苑), 후원(後苑), 북원(北苑) 등 표현이 많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는 상림(上林)이라 표현되기도 했다.
비원이란 이름은 광무(光武) 8년(1904) 7월 15일 기록에서부터 보인다.
후원의 면적은 약 9만여평에 이른다. 북악(北岳)의 동쪽 봉우리인 응봉(鷹峰)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용같은 산줄기 중간에 후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능허정(凌虛亭)이 있는 언덕(표고 98m)이 제일 높은 지역이다.
임진왜란 이후 20여년간을 폐허로 있다가 광해군에 의하여 복구되었다.
후원에는 17개 동의 정자(亭子)가 있는데 연산군때 건물로 농산정(籠山亭)이 있고, 인조때 건물로는 청의정, 소요정, 태극정, 취규정, 희우정(喜雨亭), 존덕정이 있다.
숙종때 건물로는 영화당, 사정기비각, 애련정(愛蓮亭), 능허정, 청심정(淸心亭), 취한정(翠寒亭), 괘궁정(掛弓亭), 몽답정(夢踏亭)이 있으며, 정조때는 주합루, 서향각, 부용정이 있고, 순조때는 의두각, 기오헌, 연경당, 농수정이 있으며 조선말 일제 초의 건물로 승재정, 관람정이 있다.
연못으로는 부용지, 애련지, 반월지(半月池), 관람정 앞 연못, 몽답지, 빙옥지(氷玉池), 연경당 앞 방지(方池, 원래 魚水堂의 방지임)가 있다.
식물은 160여종에 297,000여주가 서 있으며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 주목, 음나무, 회화나무, 산뽕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 194호로 지정된 다래나무와 천연기념물 제 251호로 지정된 향나무도 있다.
괴석(怪石)은 크기가 사람의 키보다 모두 작은데, 정자 옆이나 연못가, 집안 담장 옆이나 후원의 화계에 배치되어 있다. 옥류천의 소요암에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곡수구(曲水溝)도 조성되어 있다.
후원의 수목은 계절 변화에 민감하게 변한다. 봄이면 신록이 움트고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단풍이 곱게 타며, 겨울에는 손시린 나목(裸木)과 설경이 아름답다.
후원은 제왕이 수학(修學)하고 수신(修身)하면서 치도(治道)를 닦고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어진 정치를 하기 위한 휴식처이기도 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세계적인 명원(名苑)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 以上은 문화재청 발행, <文化財大觀> 史蹟篇(改訂版, 下) 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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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5호선 종로3가역 6번출구에서 만나서...
▼ 창덕궁을 향해 걸어가는 님들...
▼ 저 앞에 돈화문이 보이고...
▼ 돈화문
돈화문(敦化門, 보물 제383호)은 1412년(태종 12)에 창덕궁 정문(正門)으로 세워졌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처럼 석대 위에 누각을 올린 궐문(闕門)이 아니고, 보통 기단 위에 나무로 2층 누각을 만들었다. 이런 점에서도 창덕궁은 경복궁보다는 격이 낮은 이궁(離宮)임을 알 수 있다.
창덕궁의 다른 전각들과 마찬가지로 돈화문도 임진왜란 때 불에 탔었다. 지금 돈화문은 1607년(선조 40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그 뒤로 400년 동안을 무사히 견뎌왔다.
일제시기에 헐리고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고, 군사정권에 의해 시멘트로 겨우 모양새만 갖추게 된 경복궁 광화문에 견주면 정말 운이 좋은 편이다.
▼ 창덕궁 매표소
▼ 관람권 1,000원
▼ 올해가 창덕궁 창건 600주년
▼ 돈화문(敦化門)
창덕궁의 정문이다.
다른 궁과 다른점은 정전과 축이 틀어져있다는 것이다. 문앞으로는 종로로 향하는 대로가 정면에 배치되고 금천교를 지나 1997년에 복구한 진선문에 이르면 왼쪽에 인정문과 맞은편 동쪽에 위치한 숙장문이 사다리꼴의 부정형으로 인정전 앞뜰을 이루고 있다.
기존 궁궐의 형식과는 달리 자연스런 배치를 채택한 것이다.
▼ 창덕궁 나들이에 함께 한 님들과 돈화문을 배경으로...
▼ 돈화문을 들어서니..
▼ 창덕궁 안내문
▼ 금천교 앞에 단풍나무
▼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으로...
▼ 금천교(錦川橋)
아래 돌다리가 금천교(錦川橋)이다.
1411년(태종 11년)에 창덕궁을 처음 지을 때의 그 다리가 참 고맙게도 아직까지 남아있다. 다른 나무 건물들은 임진왜란, 인조반정, 1917년 대화재 등 여러 차례의 환란 때 불에 타서 계속 다시 지은 것들이다.
조선 궁궐에는 모두 금천(禁川)이라는 개울과 그 위를 건너는 금천교(禁川橋)가 있다.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으로, 명당수(明堂水)가 있어야 길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경복궁 영제교(永濟橋)와 창경궁 옥천교(玉川橋), 경운궁 금천교도 모두 그런 이유로 만든 다리다.
창덕궁 금천교(禁川橋)의 이름이 '금천교(錦川橋)'이다. 그러나 지금 금천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다. 이 개울을 늘 채워주던 물은 아마도 인근 주택가 하수도와 연결되어 다른 어디론가로 열심히 흘러가고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이 다리는 길이가 12.9미터, 폭이 12.5미터로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폭이 넓다. 임금 행차 때 의장 행렬을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길이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길은 어도(御道)라 하여 왕만이 다닐 수 있었다.
또한 곳곳에 동물(또는 괴물)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무섭기는 커녕 익살맞고 재미있는 표정들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저승사자, 도깨비같은 공포의 대상들도 놀림감으로 삼아왔다. 같은 것을 대하는 서양의 어둡고 우울한 태도에 견주어보면, 이는 참으로 매력적인 면이 아닐 수 없다.
▼ 진선문(進善門)
▼ 진선문을 들어서니...
▼ 인정문
인정문(仁政門, 보물 제813호)은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대문이다.
입구가 세 부분으로 되어있는데, 가운데는 왕이 드나드는 어문(御門), 동쪽은 문관, 서쪽은 무관들이 드나들던 문이다.
인정문과 그 옆 회랑은 일제가 홍보 전시장으로 개조하여 많이 훼손시켰었으나, 1995년에 복원해 놓았다. 그러나 용마루에 붙은 오얏꽃 문양은 일본인들이 해 놓은 그대로다.
▼ 인정문에서 궁중음악회 안내도우미와 함께
▼ 인정전에서는 궁중음악회 준비 중이다.
인정전은 신하들의 하례식과 외국 사신의 접견 장소로 사용되는 국가 행사의 공식적인 건물로서 정면 5칸에 측면 4칸의 중층 팔작 지붕의 다포 구조이다.
▼ 출석 확인 중인 솔롱고님
▼ 궁중음악회 준비 중
▼ 객석은 만원
▼ 왕의 만수무강을 비는 萬壽舞
▼ 문 안으로는 희정당(熙政堂)이 보이고...
▼ 희정당
희정당(熙政堂)은 임금이 평상시에 머무르는 처소였으며 신하들과 회의하는 장소로도 썼다. 지금 있는 건물은 원래 경복궁 강녕전(康寧殿)이다. 1917년 희정당이 불타버려서 1920년에 옮겨다 지었다.
강녕전은 경복궁 규모에 맞는 아주 큰 건물이었는데 억지로 창덕궁의 좁은 공간에 끼워 맞추다 보니, 주위 건물들과 전혀 안 어울리는 이상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일본인들은 이 새로운 '희정당'에 시멘트로 용마루를 만들고는 취두(鷲頭) 부분에 일본식 괴물까지 붙여놓았다. 이 때 앞쪽에 신관을 함께 지으며 자동차를 댈 수 있는 현관도 만들었다. 현재 보물 제 815호로 지정되어 있다.
▼ 희정당 안내문
▼ 하늘소풍님
▼ 대조전으로 들어서는 님들...
▼ 대조전
중궁전인 대조전은 용마루가 다른 건물과 달리 무량갓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음양설에 의해 궁궐을 조성하여 자연의 섧리에 순응하여 재앙을 막고, 영구히 안녕을 누리려는 의도인 것으로 파악된다고 한다.
▼ 철없는 철쭉이 피었네..
▼ 부용지 가는 길
▼ 부용지
부용지(芙蓉池)는 가로세로가 30미터에 달하는 네모꼴의 큰 연못이다.
동궐도를 보면, 옛날에는 이곳에 배를 띄워 놀았음을 알 수 있다. 그 한 가운데에는 동그란 섬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전통적 우주관에서 비롯되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것이다.
전통건축에는 이런 숨은 뜻들이 많다. 음양(陰陽), 오행(五行 - 木金水火土), 사신(四神 - 靑龍, 白虎, 朱雀, 玄武), 십이지(十二支 -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 등이 그것이다.
부용지의 물은 지하에서 솟아오른다. 그렇기에 이 큰 연못이 항상 마르지 않고 가득 차 있다.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세종 6년(1424)에 이곳에서 우물 네 개를 찾아내어
니(摩尼), 파리(璃), 유리(琉璃), 옥정(玉井)이라는 예쁜 이름들을 붙여준 일이 있다.
숙종 16년(1690)에 이 일대를 다시 잘 다듬으면서 옛 이야기들을 새긴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했는데, 이것이 부용지 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이다.
숙종 33년(1707)에는 우물이 있던 자리에 연못을 파고 남쪽 가장자리에 택수재(澤水齋)를 지었으며, 1792년에 정조가 부용정(芙蓉亭)으로 고쳐 지었다.
이 일대를 창덕궁 후원의 백미(白眉)라고 한다.
1776년 정조(正祖)는 즉위하자마자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奎章閣)을 짓도록 명했다. 규장각은 개혁정치의 상징이다. 정조는 규장각에 실학자들이나 서얼출신들을 파격적으로 기용했다. 위 사진에 보이는 제일 큰 건물이 규장각 본관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래층이 바로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이고, 2층은 열람실로서 주합루(宙合樓)라고 한다. 요즘엔 건물 전체를 그냥 주합루라고 한다.
단청을 새로 하지 않아 낡아 보이기는 하지만, 옛스러움을 느껴보기엔 아주 좋다.
주합루의 서쪽엔 책을 보관하던 서향각(書香閣)이 있고, 뒤쪽엔 별당인 제월광풍관(霽月光風觀)이 있다. 제월광풍관은 단청을 하지 않은 아주 소박한 건물이다. 이름이 참 멋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제월(霽月)'은 비 갠 뒤의 달을 뜻한다고 한다. 학자들이 독서를 즐기던 곳이다.
▼ 주합루
▼ 어수문 앞에 향나무
▼ 반도지
▼ 관람정
이 부채꼴 모양을 한 정자가 관람정(觀纜亭)이다. 마루 둘레에 두른 난간이 참 예쁘다. 이렇게 나무를 휘어가며 만들기는 대단히 어렵다고 한다. 동궐도에는 나오지 않으나, 1908년 무렵에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동궐도형(東闕圖形)'에는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종 때쯤에 만든 듯 하다.
여름에 본 관람정은 마치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연극배우 같다.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서 주위가 어두운데, 연못 있는 곳에만 햇빛이 비친다.
그 앞 연못을 '반도지(半島池)'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반도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동궐도에는 이 부근에 네모난 연못 두 개와 동그란 연못 하나가 있는 것으로 나오고, 동궐도형에는 동그라미 세 개로 만든 호리병 같은 모습으로 나온다. 따라서 지금같이 거꾸로 처박힌 한반도 모습으로 변한 것은 일제시기 이후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본인들이 한국을 주술적으로 '저주'하기 위해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진짜 뜻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 옥류천 가는 길
▼ 옥류천 안내문
▼ 옥류천
왼쪽에 있는 둥근 바위 주변을 옥류천(玉流川)이라고 한다.
오른쪽 앞의 정자가 소요정(逍遙亭)이고, 그 뒤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태극정(太極亭)이 있다. 왼쪽 뒤에 초가지붕을 한 것이 청의정이다.
이 일대는 창덕궁에서는 돈화문 다음으로 '속세'와 가까운 지역이 아닐까 한다. 바로 뒤에는 성균관대학교의 시멘트 건물들이 솟아 있고, 동쪽 담장 너머로는 주택가가 있어서 개짖는 소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도 들린다.
옥류천은 인조 14년(1636년)에 만들었다. 소요정(당시 이름은 歎逝亭), 태극정(당시 雲影亭), 청의정 등을 세우고, 그 앞 바위에 둥근 홈을 파고 물길을 돌려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玉流川'이라는 인조의 붓글씨를 새겨넣었다.
1636년은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해다. 여진(女眞)족의 후금(後金)이 나라이름을 청(淸)이라 바꾸고 조선에 쳐들어왔다. 인조는 남한산성까지 피난갔다가 결국 항복을 결심하고는 삼전도(三田渡)의 청군 진영에 나아가, 피가 나도록 땅에 머리를 찧으며 청태종에게 절을 했다.
1690년에는 돌 윗부분에 숙종의 詩를 새겨 넣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飛流三百尺(비류삼백척) 遙落九天來(요락구천래)
看是白虹起(간시백홍기) 飜成萬壑雷(번성만학뢰)
"폭포수 물길이 300척에 이르고, 아득히 먼 하늘에서 떨어진다.
이를 보니 흰 무지개가 일고, 만 골짜기에 우레가 가득하다."
가끔 어느 책이나 인터넷 사이트를 보면 돌난간을 두른 어정(御井) 사진이 나오는데, 그 돌난간은 이미 없앴다. 어정은 옥류천 바로 뒤에 있는 약수터이다.
▼ 단풍
▼ 낙엽길
▼ 간식시간을 갖기 위해...
▼ 연경당
연경당은 순조28년(1828)당시 왕세자였던 익종의 청으로 사대부집을 모방하여 궁궐안에 지은 이른바 99칸 집이다.
순조의 왕세자인 익종은 순조9년에 태어나 순조 27년 왕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다가 순조30년(1830)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아들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왕으로 추증되어 익종으로 종묘에 봉향되었는데 연경당은 바로 익종의 대리 청정 때 창덕궁 안에 지은 것이다.
창덕궁 안에 지은 유일한 민가형식의 건물로 사랑채의 당호(堂號)가 연경당(演慶堂)이다.
▼ '산(山)'
▼ 향나무
▼ 세계문화유산 표지석에서 푸른나라님
▼ 금천교 위에서 들장미님
▼ 낙선재 가는 길에 멀리 서울의 빌딩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 낙선재
낙선재는 원래 창경궁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창덕궁에서 관리한다. 도심 한복판에 숨어 있어서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낙선재(樂善齋)는 1847년(헌종 13)에 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은 집이다.
그뒤로,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고종황제의 외동딸이자 마지막 공주였던 덕혜옹주, 일본의 왕녀로 두 나라를 조국으로 섬겨야했던 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 등 비운의 주인공들이 한많은 삶을 이곳에서 마쳤다.
▼ 장락문
낙선재 옆으로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가 나란히 붙어있는데, 보통은 이들을 모두 통틀어 낙선재라고 한다. 원래는 창경궁 영역에 속하는 건물이었다. 낙선재의 대문은 연경당 대문과 같은 이름인 장락문(長樂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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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원상가 옆 마산아구찜에서 1차 뒤풀이
▼ 인사동으로...
▼ 인사동 4거리
▼ 문전박대
▼ 삼일빌딩 앞에서 본 남산타워
▼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을 형상화 한 벽천
▼ 종로5가 닭한마리집에서 2차 뒤풀이
▼ 전철 안에서...
☞ 이것으로 '창덕궁 나들이'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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