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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남한산성

[20060606]현충일에 '남한산성'을 일주하다 - 2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06.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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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6일(화) 현충일에 '남한산성'을 일주하다.

 

현충일에 '남한산성'을 일주하겠다는 님들과 5호선 마천역 1번출구에서 만나

남한산성 서문으로 올라 시계반대방향으로 '남한산성'을 일주하고,

다시 서문으로 돌아와서 서문밖에서 '연주봉옹성'으로 간 후,

쌍바위약수터를 지나 약 8시간 30분만에 마천역으로 원점회귀하고...

350장의 사진을 찍으면서 함께 하는 님들과 여유롭게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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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안내(남한산성 홈페이지에서 가져와서 편집한 것임)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은 동경 127도 11분, 북위 37도 28분 지점에 위치한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국가 사적 57호로서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었다. 지금은 동, 서, 남문루와 장대, 돈대, 암문, 우물, 보, 누,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대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 문무왕12년(672)에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결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광해군 13년(1621)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키 시작하였으나 준공치 못하고,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 2년)이다.
 
인조는 총융사 이서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 1,897개, 옹성 3개, 성량 115개, 문 4개, 암문 16개, 우물 80개, 샘 45개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벽암 각성대사를 도총섭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 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 22년) 한남루를 세우고 1642년에 세운 객관인 인화관을 1829년(순조 29년)에 수리하였다.
 
관해로는 좌승당, 일장각, 수어청, 제승헌을 비롯하여, 비장청, 교련관청, 기패관청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 마구, 뇌옥, 온조왕묘, 성황단, 여단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는 처음에 총융청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병지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은 서성을, 총융대장 이서는 북성, 호위대장 구굉은 남성, 도감대장 신경진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 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외침에 의하여 정복당한 적이 없는 성이다.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였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왕조 시대의 남한산성은 선조 임금에서 순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인조 2년(1624)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1626년)에 완공한데 이어,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 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그 이후 주인을 잃은 민족의 문화유산들은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다가 하나 둘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말았다. 그렇지만 남한산성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것에서 터만 남아있거나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최근 들어 남한산성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하여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비해 성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평균고도 350m 내외의 넓은 구릉성 분지를 이루고 있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광주시의 지질은 회색화강암과 편마암지대이며, 지형은 광주산맥의 영향권 안에 있다. 토양은 편마암계나 화강암을 母巖으로 하는 사질양토(砂質壤土)나 양토(壤土)이다.


남한산성은 청량산(497m)을 중심으로 급경사로 된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 내부는 약 350m의 구릉성 분지이다.

 

또한 산성리에서 엄미리에 이르는 지방도에 걸친 연변은 약 8km에 이르는 긴 협곡을 이루고 있다.

 

분지 내에는 고산지대인 관계로 하천의 발달이 미약하고, 산성천이 유일한 하천으로 침식곡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산정의 급경사면에 비해 북부 산록에는 경사가 하부로 갈수록 완만한 산록 완사면이 발달하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광주시는 약 80%가 산이며 나머지 20%가 평야부에 속하는 경작지이다. 높고 낮은 산이 많으며 좁고 긴 하천이 한강을 향하여 북 또는 북동쪽으로 흐른다.

 

한편 남한산성의 주봉인 청량산은 문형산497m, 매지봉(400m), 검단산(542m) 등과 남북으로 주부(主部)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산릉들은 북동 방향으로 연결되는데도 불구하고 전체적 모양이 대략 남북으로 발달된 것은 부분적으로 좌수향(左手向)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연평균 기온은 인접 도시와 약4。C 정도 낮은 기온차가 나며, 연평균 강수량은 1,300mm∼1,400mm이며 맑은 날의 평균 일수는 약 204일로 봄과 늦가을에 많이 분포하며 탐방객의 산성이용에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산간지역의 계절 변화는 평지보다 1∼2주 늦게 봄이 오고 일찍 겨울이 온다.

 

 

성곽은 기본적으로 원성과 외성으로 구분된다.

원성은 인조 2년(1624)에 수축한 남한산성의 영역으로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연결될 수 있는 본성을 의미한다.
 
이외에 외성으로는 동쪽에 봉암성과 한봉성이 있고, 남쪽에 신남성이 있는데 이곳에는 동·서 두 개의 돈대가 구축되어 있다. 지금까지 남한산성의 규모와 면적에는 많은 이론이 있었다.
 
『광주군지』에는 8km 정도라고 기술되어 있으며 1 : 5,000 지형도를 기본으로 한 GIS측정 결과 산성의 둘레는 옹성을 포함하여 10,841.5m로 확인되었다.
 
이것은 남한산성에 대한 정확한 측량이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한지』에서는 성벽 안 둘레는 6,290보로 17리반이고, 바깥 둘레는 7,295보로 20리 95보이며, 성가퀴는 1,940타이고, 5옹성과, 16개의 암문, 125개소의 군포, 4개소의 장대가 있다고 하였다.

안 둘레는 7,853.6m이고, 바깥둘레는 9,108.5m이다. 그런데 최근 토지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면서 정밀 측량을 한 결과 남한산성의 전체 규모는 기존에 알려져 있던 것 보다 훨씬 큰 것으로 밝혀졌다.
 

일반적으로 성벽의 둘레를 측량하는 방법은 성벽외곽 기단부나, 여장 안쪽 기저부, 여장 옥개 중심선을 기준으로 하는 등 세 가지가 있다. 그중 가장 보편적이고 무난한 기준은 여장 옥개 중심선을 따라 측정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도 여장 옥개중심선을 따라 측량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옹성과 외성을 포함한 남한산성의 전체 규모는 둘레가 12,355m이고 폐곡선을 이루지 않는 한봉성을 제외한 성내부의 면적은 2,209,270㎡(약 668,303평)으로 확인되었다.
 
그중 원성은 대부분 인조 2년(1624)부터 인조 4년(1626)까지 축성된 것으로 전체 둘레는 7,545m이고, 성 내부의 면적은 2,216,637㎡(643,307평)이다.

원성의 성벽은 사각추형으로 정연하게 다듬은 성돌을 사용하였다. 남벽과 북벽의 일부가 훼손된 채로 있다.
 
성 내부의 구조물로는 동·서·남·북 방향의 4곳에 성문이 있고, 신남성의 두돈대에 각각 홍예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남옹성2의 포루로 들어가는 홍예문이 1개소 있다.

암문은 기록과 마찬가지로 16개가 확인되었는데 그중 원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치는 각 남옹성과 연주봉 옹성에 1개소 및 봉암성에 1개소 등 5개소가 설치되었다.
 
포루는 각 남옹성과 장경사 부근의 옹성 및 장경사 신지옹성, 연주봉 옹성, 한봉성 등 7개소에 설치되어 있으며, 현재 포루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 연주봉 옹성을 제외하면 확인 가능한 포루는 모두 28개소이다.
 
또한 성내의 물을 성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수구문은 동문 근처에 1개소가 있었으며, 28개의 수구가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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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일주' 이야기 -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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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일주' 이야기 中 [마천역-서문-남문-동문까지]는 1부에서,

☞ 여기는 '남한산성 일주' 이야기 中 2부 - [동문-북문-서문-연주봉옹성-마천역까지]


▼ 동문 앞 이정목에는...


 

▼ 동문을 성안에서 보니...


 

▼ 동문 옆 계단을 오르는 님들...


 

▼ 계단길을 오르고...



▼ 편안한 길을 잠시 걷다가...


 

▼ 다시 계단길을 오르고...


 


 

▼ 여기는...


 

▼ 송암정


 

▼ 성곽 밖에 뭐가 있는지...


 

★ 송암정

성밖의 동문에서 성벽을 따라 동쪽으로 오르면 바위절벽과 그 사이에 말라죽은 소나무가 서 있는 곳이다.


이 곳은 산성리 산 8-1번지에 해당되며 송암정 표지석은 성 안에 , 송암정의 바위와 고사목은 성 밖에 서 있다.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가 하산하여 이 곳을 지나는데 남자 수명과 기생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때 술에 취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자 황진이는 개의치 않고 그 사내에게 심오한 불법을 설파하였다.
 
이때 그 무리 중 감명을 받은 기생 한사람이 갑자기 절벽으로 뛰어 내려 자결하였다.


이 바위에 서 있는 고사목(소나무)은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대부' 벼슬을 내렸으므로 '대부송' 이라고 부르는 그 소나무이다.

 

송암정은 우리말의 '솔바위 정자'라는 뜻이다.

 

▼ 대부송


 

▼ 다시 성곽을 따라가다가...


 

▼ 바위를 보니...


 

▼ '서상조'라고...


 

▲ 위 바위에 새겨진 '徐相祖'가 이 사람일까?

 

★ 서상조(徐相祖)


1830(순조 30)∼1905.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경념(景念).
복순(復淳)의 아들로 이조참의 기순(耆淳)에게 입양되었다.


1852년(철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882년(고종 19) 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봉상시정(奉常寺正)을 거쳐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을 지내고, 1885년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1886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발탁되고 이어 사헌부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정사 조병식(趙秉式)과 같이 청나라에 다녀왔다.


1890년 이조참판·대사헌을 지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직제가 개편됨에 따라 1896년 종2품 중추원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칙임관4등으로 서임되었다.


이듬해인 1897년 중추원의관에서 비서원경(祕書院卿) 칙임관4등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1898년 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를 지내고, 이듬해 가자(加資)되어 1900년 정2품에 장례원경(掌禮院卿) 칙임관3등으로 승급되었다.


1901년 궁내부특진관 칙임관3등에 재임중 부사로서 정사 완평군(完平君) 이승응(李昇應)과 같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해 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칙임관3등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진되고, 1903년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 칙임관2등으로 승급하였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 님들의 모습을...


 

▼ 성곽길


 


 

▼ 계단길을 따라 오르고...


 

▼ 평짓길을 따라 걷다가...


 

▼ 성곽따라 '장경사'로 가는 님들...


 

▼ 도로 끝에 보이는 것은 장경사 일주문


 

▼ '남한산 장경사' 일주문


 

▼ 일주문 기둥


 

★ 장경사

성내에 존재했던 9개의 사찰 중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현존한는 유일한 사찰이며, 남한산성 동문 안에서 동북쪽으로 약 350m거리의 해발 36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망월봉의 남사면 중턱 곡저부이 완경사면을 이용하여 비교적 넓은 대지를 구축하였다.


이 사찰은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수축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건립한 군막 사찰이다.

 

사찰내의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진남누(鎭南樓), 칠성각, 대방, 요사채 등이 있는데, 그중 대웅전이 가장 화려하게 지어진 고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은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이며, 다포양식의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측면의 칸은 정면의 칸보다 약간 좁아서 건물의 전체 평면은 장방향을 이룬다.

 

건물의 정면에는 각 칸마다 4쪽 여닫이 교자문을 달았다. 종무소는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양식에 주심포식 4가가 모기둥을 썼다.


이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는데 앞으로는 짧은 툇마루를 내었으며 2쪽 미닫이 卍자문을 달았다.

 

요사는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양식의 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산신각은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양식으로 좌우에는 밑이 둥근 바람막이를 하였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규모인데 정면 2칸에는 2쪽 여닫이 卍자문을 달았다. 현재 장경사만이 유일하게 옛 모습이 남아 있다.

 

▼ 장경사 경내


 

▼ 은행나무


 

▼ 장경사 대웅전 앞


 

▼ 장경사 안내문


 

▼ '요사채'인가?


 

▼ 범종각 옆 샘에서 물보충을 하는 님들...


 

▼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서...


 


 


 


 

▼ 다시 성곽을 따라...


 

▼ 성곽 기와의 고향은...


 

▼ 동장대로 가는 길은 서서히 오름이...


 

▼ 오르고...


 

▼ 오르고...


 


 


 

▼ 이정목이 있는 이곳은...


 

▼ '장경사 신지 옹성'이 있는 곳....


 

▼ 이 암문을 통해 나가면...


 


 

▼ '장경사 신지 옹성'이...


 

★ 옹성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또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아 이중으로 쌓은 성벽을 말한다.

 

성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만 하고,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지만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옹성이라기보다는 치나 용도(用途)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록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지지자료에 이것들을 옹성이라고 명명하고 있음을 볼 때, 옹성의 개념은 단순히 성문을 보호하는 시설이라기보다는 체성벽의 보호를 위하여 이중으로 성벽을 구축한 시설을 의미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의 옹성은 남쪽에 3개, 동쪽과 북쪽에 각각 1개씩 설치되었다.

 

남쪽에 가장 많은 옹성이 설치된 것은 북쪽이나 동쪽, 서쪽에 비해 남쪽의 경사가 가장 완만하여 방어에 취약하여 검복리 방면에서 계곡의 완경사면을 따라 올라와 해발 537.7m인 검단산 정상을 확보하거나 계곡에서 화포를 쏠 경우 산성의 방어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옹성은 모두 능선으로 연결되어 방어에 취약한 지점에 축조되어 있다.


옹성은 치성과는 달리 모두 체성과 직접적인 연결됨이 없이 체성벽의 기저부를 옹성의 상단으로 하여 축조하였고, 암문을 통하여 연결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말단부에는 포루를 설치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이 옹성들은 연주봉 옹성을 제외하고 다른 옹성은 원성축조 시에 쌓은 것이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에 적의 화포공격에 대응할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1남옹성은 둘레가 426m이며 옹성 끝에는 7개의 포루가 설치되어 있다. 원성과 연결되는 시축지점은 약간 넓게 벌어졌다가 가운데는 잘록하고 끝부분은 다시 넓어져 뭉툭하며 옹성 중간 부분에는 장대가 구축되어 있다.
 
 2남옹성은 둘레가 318m이며 옹성 끝에 87개의 여장이 있었다. 이 옹성은 다른 옹성과는 달리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 끝에는 포루가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홍예문이 있다.


포루는 동서남 3방향으로 3개씩 9개가 설치되어 있다.


3남옹성은 시축 부분에서 축조가 끝나는 부분의 양쪽 벽이 거의 평행이다.

 

둘레는 125m이고, 31개의 여담이 있었다. 끝부분엔 5개의 포루가 남쪽에 3개 동쪽과 서쪽에 각각 1개씩 설치되어 있다.

 

이 옹성의 포혈은 방형이 아니라, 凸자 모양으로 구축된 것이 특이하다. 
 
장경사 신지옹성은 둘레가 159m이며 여장이 40개였다. 옹성 끝에는 2개소의 포루가 구축되었다. 포루 좌측 벽에는 '이방' 이라 불리는 무기나 화약을 저장하는 시설이 있었다.


연주봉 옹성은 둘레가 315m에 73개의 여담이 있었다. 이 옹성에도 포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확인되지는 않는다.

 

암문을 통하여 성내로 출입할 수 있었으며, 옹성의 끝부분에는 원형의 석축구조물이 있다. 

 

▼ 이 길을 따라 올라야...


 

▼ 오르는 님들...


 

▼ 동장대로 가는 길


 

▼ 게속되는 오름...


 

▼ 이곳을 지나다가...


 

▼ 군포지(125개 중 하나)를 만나고...


 


 

▼ 다시 성곽을 따라 오르다가...


 

▼ 올라선 이곳이...


▼ 동장대가 있었다는...


 

 

동쪽 내성의 가장 높은 곳, 즉 한봉외성으로 나가는 암문의 우측 언덕에 있는 건물 터로 해발 501m 지점에 위치한다.

동장대는 인조 2년(1624) 산성수축시 동장대가 설치되고 누각이 함께 건축되었다. 이곳에는 동서 21m, 남북 17m 정도 규모의 평탄지가 있으며 중앙에는 4개의 초석이 남아 있다.
 
장대의 외곽에는 높이 350cm 정도의 석축이 쌓여 있다. 수어청의 5영 중 전영장과 좌영장이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 장졸을 지휘하던 곳이다.

건물 지에는 와편과 잡석이 흩어져 있으며 주변에 비교적 높이 쌓은 석축이 양호한 상태로 남아 았다.
 
이곳은 숙종 때 외성이 확장되면서 외도장대와 함께 성곽의 동쪽에서 가장 높아 성곽 북쪽과 동쪽을 한눈에 감지 할 수 있는 곳이다.

 

▼ 동장대지에서...


 


 

▼ 성곽 옆에 안내문에는...


 

▼ 여장에 대한 안내가...


 

▼ 이것이 '여장(女墻)'



성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을 말한다.
 
이 여장은 다른 용어로 여담, 여첩, 치첩, 타, 여원 이라고도 하고 고어로는 성각휘, 성가퀴, 살받이터 등으로 불려졌다. 또한 설치하는 목적에 따라 치폐, 첩담, 비예, 희장 이라고도 하였다.

여장의 종류에는 평여장과, 凸형여장, 반원형여장 등으로 구분된다. 평여장은 타와 타 사이에 타구를 설치하고 크기가 일정한 장방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남한산성의 여장은 1940타 이며 모두 평여장이다.
1타의 길이는 남한산성의 경우 위치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1타의 길이는 대략 3 ∼ 4.5m 정도이며 여장의 높이는 낮은 곳은 70cm, 높은 곳은 135cm 정도이다.
 
타와 타 사이의 타구의 폭은 30cm이고 타구의 높이는 56cm로 대략 여장높이의 1/2정도이다.
 
여장의 폭은 76cm이고, 타와 타 사이의 간격은 15cm 정도이나 중앙부를 형태로 뾰족하게 처리하여 좁지만 상대적으로 넓은 면적의 조망이 가능하도록 하여 방어의 효율성을 높였다.

 

▼ 이 성곽을 따라 내려서다가...

 

▼ 뒤돌아보니 '봉암성 암문'이...

 

▼ 동장대 암문 옆 주막?은 성업 中


 

▼ 방앗간을 지나쳐서 성곽을 따라...


 

▼ 붓꽃?


 


 


 


 

▼ 급경사 내리막길


 


 

▼ 저 아래에는 또다른 군포지와 수구가 있고...


 

▼ 수구(水口)


 

▼ 수구 옆 암문으로...


 

▼ 손을 흔드는 님들...


 

▼ 암문 밖은 급경사 비탈이고...


 

▼ 다시 손흔드는 님들...


 

▼ 군포지와 수구를 둘러보고...


 


 

▼ 다시 성곽을 따라...


 


 

▼ 돌탑에서...


 


 


 

▼ 성곽은 구비구비 이어지고...


 

▼ 멀리 있는 '연주봉옹성'을 당겨보니...


 

▼ 구비구비 흐르는 성곽을 따라...


 

▼ 가다가...


 

▼ 또다른 군포지를 만나고...


 


 

▼ 갈림길에서도 성곽에 붙어서 오르고...


 

▼ 내려서다가 나무를 보니...


 

▼ 나뭇가지 하나가 길을 막는 듯...


 

▼ 따라하기


 

▼ 이곳에서 휴식과 간식을...


 

▼ 출발하면서 뭔가를 유심히...


 

▼ 산딸기


 

▼ 북문은 아직도 공사 中...


 

★ 북문(戰勝門)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상사창리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안으로 운반하였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戰勝門)이라 칭하였다. '전승문' 이란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인데 현재 편액은 걸려있지 않다. 


북문은 홍예식 문이며, 홍예기석 위에 10개의 홍에돌을 쌓아 구축하였다. 문의 폭은 325cm, 높이는 365cm이다.

 

육축은 특별히 가공하거나 큰 무사석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며 일반 성벽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성벽의 두께는 두꺼워져 약 710cm에 달한다.

 

홍예 안쪽에는 판문을 설치하였으며 철린을 박아 보강하였다. 여장은 총안이나 타가 없는 평여장을 설치하였고 , 문루로 오르는 계단을 별도로 설치하지도 않았다.

 

문루는 단층이고 규모는 정면 4칸 측면2칸이며, 지붕은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용머리는 치미를 장식하였고 내림마루에도 용두를 장식하였다.

 

천장양식은 연등천정이며 기둥 양식은 주심포 양식의 민흘림 기둥이다.

 

▼ 계단길을 오르고...


 


 


 

▼ 이곳은...


 

▼ 북장대가 있던 곳...


 

 

북문에서 서북쪽 245m 거리의 해발 405m 지점에 위치한며, 연주봉과 성내를 연결하는 암문의 우측에 있었다.
 
북장대는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수축시에 단층누각이 함께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중영장이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 장졸을 지휘하던 곳이다.
북장대는 18세기 초에 붕괴되었다.
 
그후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남장대나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으나 북장대나 동장대의 경우에 다시 수축하지 않은 것은 한봉성과 연주봉 옹성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뿐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실질적인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다시 수축하지 않았다.
 
산성에 있었던 4장대 중 그 규모를 확실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훼손이 심한 편이다. 규모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주변의 잡석들 속에는 기단석과 파편 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 북장대지에서 내려서니...


 

▼ 이렇게 넓은 길이...


 

▼ 넓은 길을 따라가다가 갈림길에서 성곽을 따라 오르고...


 

▼ 다시 내려서서...


 

▼ 넓은 길을 가다가...


 

▼ 이곳에서도 성곽에 붙어서 오르고...


 

▼ 계단길을 따라 올라서니...


 

▼ 이곳에는...


 

▼ 알림판이...


 

▼ 바로 옆 이정목은...


 

▼ 연주봉 옹성


 

▼ 이 문은 성안에서 연주봉 옹성으로 드나드는 암문(暗門)


 

▶ 암문(暗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의 일종이다.

암문은 이름 그대로 비밀스러운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성문보다 작게 하고, 문루나 육축 등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을 하지 않았다.


암문의 기능은 성내에 필요한 병기, 식량 등 항쟁물자를 운반하고 적에게 포위 당했을 때 적의 눈에 띄지 않게 구원요청은 물론 원병을 받고 역습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따라서 암문은 평지성 보다는 산성에 축조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지형적으로 설치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암문은 성의 방어와 관련된 주요한 시설인 만큼 삼국시대부터 축조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성의 기본적인 구조물로서 자리잡은 것은 조선시대 이후로 보인다.

 

암문의 숫자는 성의 규모에 비례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지형적인 여건에 더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암문이 여러 가지 용도로 쓰였다 하더라도 그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방어에 취약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암문 만이 설치되었을 것이다.


암문의 내측에 옹벽이나 흙을 쌓아서 유사시 옹벽을 무너뜨리거나 흙으로 메꾸어 암문을 폐쇄할 수 있게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남한산성은 현재 남아 있는 암문이 모두 16개로서 우리나라의 성 중에서 암문이 가장 많은 성에 속한다.

 

그중 원성에 11개가 있고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있다.

 

원성에 있는 11개의 암문은 남쪽에 4개, 동쪽에 2개, 북쪽에 3개, 서쪽에 1개가 분포되어 있다.


암문의 구조는 대체로 평거식과 홍예식으로 구분되는데 남한산성의 암문은 16개의 암문중 6개는 평거식이며, 나머지 10개는 홍예식이다.

 

평거식 중 3개는 봉암성에 설치되고 1개는 한봉성에 설치되었으며, 원성에 설치된 암문은 장경사옹성 으로 나가는 곳에 설치된 2암문과, 수어장대 서남쪽에 있는 제6암문의 2개만 평거식이고 나머지는 홍예식이다.


암문의 규모는 기능과 위치에 따라 크기가 매우 달랐다.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산성 동쪽 수구문 남쪽 20m 지점에 있는 11암문으로 암문의 폭은 286cm이고 높이는 307cm에 달하여 성문에 가까울 정도의 크기이다.

 

반면 가장 작은 암문은 수어장대 남서쪽의 6암문으로 푹은 77cm이고 높이는 155cm에 불과해 성인 1명이 지나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 암문 위 치(雉)에서 '연주봉 옹성'을 바라보는 님들...


 

▼ 연주봉 옹성


 

▼ 서문을 향하여...


 

▼ 이곳은...


 

▼ 매탄처(埋炭處)


 


 

▼ 마천동을 바라보던 버들님이 고개를 돌려...


 

▼ 연무로 인해 가시거리가 짧아...멀리 한강이 흐릿하게나마...


 

▼ 골프장이...


 

▼ 드디어 '서문'이 보이고...


 

▼ 서문으로 원점회귀하여...


 

▼ 서문을 나서서...


 

▼ 서문은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다.


 

▼ 서문을 나서 우측길로...


 

▼ 연주봉 옹성이 370m


 

▼ 이렇게 성밖길로 가다가...


 

▼ '연주봉 옹성' 입구를 들어서서...


 


 

▼ 연주봉 옹성


 

▼ 연주봉 옹성의 최정점은 망루?


 

▼ 그 아래에는 이런 구멍이...


 

▼ 구멍 밖으로 정면을 보니...


 

▼ 구멍 밖으로 우측을 보니...아래 마을이 '고골'


 

▼ 구멍 밖으로 좌측을 보니...아래 마을은 '마천동'


 

▼ 단체사진을 찍고...


 

▼ 버들님과 누가그래님


 

▼ 버들님, 누가그래님, 양지님


 

▼ '연주봉 옹성'에서 '성불사' 방향으로 내려서고...


 


 

▼ 첫 번째 주막을 지나치고...


 

▼ 하산 前 잠시 휴식을 취하고...


 

▼ 다시 출발...


 

▼ 두 번째 주막도 지나치고...


 

▼ 급비탈길을 내려서고...


 


 

▼ 세 번째 주막도 지나쳐서...


 

▼ 완만한 길을 가다가...


 

▼ 네 번째 주막도 지나친다.


 

▼ 비탈길로...


 

▼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가면 '성불사' 가는 길이고...


 

▼ 좌측길을 따라서...


 

▼ 내려가니...


 

▼ 어느 식당으로 통하고...


 

▼ 상가들이 들어선 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이곳에서 '양지님'은 먼저... 


 

▼ 남은 님들은 이곳에서 뒤풀이를 하고...


 

▼ 돼지껍질과 뼈대있는 닭발


 

▼ 삭힌 홍어


 

▼ 코다리찜


 

▼ 술국과 순대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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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일주' 1부 - 마천역에서 서문 거쳐 동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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