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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남한산성

[20051126]'晩秋의 남한산성'을 일주하다.

by 맥가이버 Macgyver 2005. 11. 27.

30125

 

 

2005년 11월 26일 토요일 '晩秋의 남한산성'을 일주하다.

 

마천역에서 남한산성 서문으로 올라 시계반대방향으로 남한산성을 일주하고,

다시 서문으로 돌아와서 서문밖에서 연주봉옹성으로 간 후,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성불사로 하산하여 마천역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산행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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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안내(남한산성 홈페이지에서 가져와서 편집한 것임)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은 동경 127도 11분, 북위 37도 28분 지점에 위치한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국가 사적 57호로서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었다. 지금은 동, 서, 남문루와 장대, 돈대, 암문, 우물, 보, 누,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대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 문무왕12년(672)에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광주시는 약 80%가 산이며 나머지 20%가 평야부에 속하는 경작지이다. 높고 낮은 산이 많으며 좁고 긴 하천이 한강을 향하여 북 또는 북동쪽으로 흐른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였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왕조 시대의 남한산성은 선조 임금에서 순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인조 2년(1624)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1626년)에 완공한데 이어,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 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그 이후 주인을 잃은 민족의 문화유산들은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다가 하나 둘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말았다. 그렇지만 남한산성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것에서 터만 남아있거나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최근 들어 남한산성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하여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비해 성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평균고도 350m 내외의 넓은 구릉성 분지를 이루고 있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광주시의 지질은 회색화강암과 편마암지대이며, 지형은 광주산맥의 영향권 안에 있다. 토양은 편마암계나 화강암을 母巖으로 하는 사질양토(砂質壤土)나 양토(壤土)이다.


남한산성은 청량산(497m)을 중심으로 급경사로 된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 내부는 약 350m의 구릉성 분지이다. 또한 산성리에서 엄미리에 이르는 지방도에 걸친 연변은 약 8km에 이르는 긴 협곡을 이루고 있다.

 

분지 내에는 고산지대인 관계로 하천의 발달이 미약하고, 산성천이 유일한 하천으로 침식곡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산정의 급경사면에 비해 북부 산록에는 경사가 하부로 갈수록 완만한 산록 완사면이 발달하고 있다.


한편 남한산성의 주봉인 청량산은 문형산497m, 매지봉(400m), 검단산(542m) 등과 남북으로 주부(主部)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산릉들은 북동 방향으로 연결되는데도 불구하고 전체적 모양이 대략 남북으로 발달된 것은 부분적으로 좌수향(左手向)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연평균 기온은 인접 도시와 약4。C 정도 낮은 기온차가 나며, 연평균 강수량은 1,300mm∼1,400mm이며 맑은 날의 평균 일수는 약 204일로 봄과 늦가을에 많이 분포하며 탐방객의 산성이용에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산간지역의 계절 변화는 평지보다 1∼2주 늦게 봄이 오고 일찍 겨울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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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일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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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호선 마천역 1번 출구 밖

 

▼ 좁은 인도를 따라 들머리로 이동하여...

 

▼ 노점과 음식점 사이를 지나서...

 

▼ 생각보다 따뜻한 날이라 옷을 가볍게 입고...

 

 

▼ 이 계단을 오르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고...

 

▼ 어지럽게? 널린 등산로를 오르고...

 

▼ 또 오르고...

 

▼ 오르고...

 

 

 

 

▼ 힘들지만 올라야 하기에...

 

▼ 또 오르고...

 

 

▼ 오르다 보니...

 

▼ 드디어 서문이 보이고...

 

▼ 서문 앞에서...

 

▼ 서문을 통과하고...

 

▼ 서문매표소에서...

 

▼ 입장권을 구입하고...

 

▼ 입장료및 시설사용료 1,000원

 

★ 서문(右翼門)
남한산성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서쪽사면의 경사가 급해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은 산성의 초축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 3년(1799) 개축하여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행궁터를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정치를 하는 것인데, 서문은 우측이 되므로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 15년(1637) 1월 30일 인조가 세자와 함께 이 문으로 청나라 진영에 들어가 화의를 맺고 항복하였던 바로 그 문이다.


서문은 개구부와 문루로 구성되어 있다. 개구부는 내외면이 반원형의 홍예식이다. 외면은 높이 210cm이고 폭은 146cm이다.

 

바닥에는 지대석을 깔고 양쪽에 50×40×130cm의 장방형 홍예기석 한 매를 놓고 그 위에 5 매의 홍예석을 올려놓았다. 외면 홍예 안쪽에는 2짝의 목재 판문을 설치하였다.

 

문짝의 크기는 85×210cm이며, 표면에는 20×33cm 크기의 방형 철엽을 4cm 정도 겹치도록 부착하였다.

 

대문을 지탱하는 문지두리는 석재로 위, 아래에서 지탱하도록 되어 있고, 양 측벽에는 장군목을 끼워 빗장을 지를 수 있게 40×20×35cm의 장방형 홈을 파놓았다.

 

대문 안쪽의 천장부는 회반죽으로 마감되어 있으나 부분적으로 표면이 박락되어 전돌이 일부 노출되어 있다.

 

안쪽의 홍예는 높이 227cm, 폭 210cm이고, 측벽부는 114×103cm 정도의 장대석으로 두 단을 쌓았으며 높이 170cm 이상부터는 전으로 쌓았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다.

 

문루의 처마는 겹처마를 두르고 누대의 용마루는 치미를 올려 장식하였다. 문루의 천정 양식은 연등 천정에 일부 우물 천정을 병용하였다. 기둥 양식은 주심포에 2출목익공식포를 장식하였다.

 

▼ 서문(右翼門)

 

▼ 서문(右翼門)에서 단체사진

 

▼ 서문에서 시계반대방향을...

 

▼ 병암(屛岩)

병암은 수어장대에서 서문방향으로 약200m 길 우측에 두 개의 돌로 되어 있다.
이 비문에는 정조3년(1779) '남성신수기비문'이 새겨져 있어 유명하다.
이 바위 우측에 '병암이민하10세기미서'라는 글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병암'의 글씨는 이민하가 10세 때에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병암 앞 쉼터에서 간식시간을 갖고...

 

▼ 성곽길이 아닌 이런 길도 있지만...

 

▼ 오늘은 성벽을 따라 가기로...

 

▼ 수어장대로 가는 길

 

▼ 수어장대가 보이고...

 

▼ 수어장대 앞 남한산성 안내도

 

 

 

▼ 수어장대로 들어서며...

 

▼ 수어장대 앞에는 어느 문화유적 답사팀이 모여 있고...

 

▼ 무망루와 리승만대통령 기념식수 기념비

 

▼ 무망루(無忘樓)

성안 서장대(수어장대)의 2층 문루 이름이다. 남한산성의 5개 장대중 2층 문루가 있는 장대는 서장대와 남장대로서, 서장대의 문루는 '무망루' 이고, 남장대의 문루는 '타운루' 이다.


무망루의 2층 누대는 영조 때인 1751년 유수 이기진이 지었고, 현종 때인 1836년 유수 박기수가 중수한 것이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이 삼전도에 나아가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한번 절할 때마다 이마를 세 번씩 조아려야 했던 삼배구고두의 치욕, 그리고 청나라의 심양에 끌려가 8년 동안이나 볼모로 잡혀 있다가 돌아와 북벌을 꾀하였으나 끝내 그 한을 풀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임금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영조께서 이름한 것이라고 한다.


무망루의 뜻은 '無忘' 즉 '잊음이 없다', '잊을 수 없다' 는 뜻이다.

 

★ 매바위

수어장대 앞 마당 한쪽 모퉁이에는 '매바위' 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매바위로 불리어지게 된 데에는 남한산성의 축성 책임을 맡았던 이회 장군의 억울한 죽음과 한이 깃들어 있다.

 

이회 장군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산성 동남쪽 지역의 공사에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하나하나 철저하게 점검을 하며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그만 정해진 날짜를 넘기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공사비용 역시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사비용이 부족하게 된 이유가 이회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에 나라에서는 이회 장군에게 그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서장대 앞뜰에서 이회 장군은 참수를 당하기 직전 하늘을 쳐다보면서 "내가 죽은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죄가 있는 것이다" 라는 말은 남겼다.


그런데 실제로 이회 장군의 목을 베자, 이회 장군의 목에서 매 한마리가 튀어나와 근처 바위에서 슬피 울다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멀리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이 그 매가 앉았던 바위를 보니 매 발톱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장군의 말대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이회 장군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라 믿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회 장군이 책임을 맡았던 지역의 성곽을 살펴보니, 아주 견고하게 쌓아져서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성곽 공사를 함에 있어서 부정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심혈을 다했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회 장군의 목에서 나왔던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고, 이 바위를 신성시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 매바위에는 실제로 매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어떤 일본인 관리가 남한산성을 둘러보다가, 바위 위의 매 발자국을 보고 참신기한 일이라 여겨서 그 매 발자국이 찍힌 부분을 도려내어 떼어 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 일본 관리가 떼어갔음을 말해주는 사각형의 자취만 남아 있다고 한다.

 

▼ 매바위

 

▼ 수어서대(守御西臺)

남동쪽 모서리에 있는 매바위에 새겨진 암각문이다.


사각형으로 제액을 파고, 그 안에 '수어서대'라고 새겨놓았다.

 

원래 수어사는 도성의 수어청에서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유사시 에는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에 와서 지휘하였다. 정조 19년(1795)부터는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였다.

 

 

★ 수어장대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며, 2층 누각과 건물의 왼쪽에 2동의 사당인 청량당으로 이루어졌다. 이 건물은 선조 28년 남한산성 축성 당시 동남북의 3개 장대와 함께 만들어졌으며 유일하게 현존한다.


원래 단층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 라 부르던 것을 영조27(1751)에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이층누각으로 증축하고 안쪽에는 무망루, 바깥쪽에는 '수어장대' 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며, 서대라고도 불렀다.

 

수어장대의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 상층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양식의 2층 누각이다.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루를 둘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올렸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 60cm의 팔각장주초석 위에 올려져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의 이출목익공식이다.

 

1층의 사방 1칸은 복도로 비워두고 정면 3칸, 측면 2칸만 장마루를 깔고 사방에 높이 45cm의 난간을 둘렀다.

 

2층은 1층 우측 뒷켠에 있는 사다리를 통하여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방에 판문을 달았으며, 판문에는 태극무늬를 그렸다.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 수어장대

 

 

▼ 수어장대를 나서며...

 

▼ 개나리가 피었네...

 

▼ 소나무지대를 지나서...

 

▼ 성벽을 따라서...

 

▼ 지난 여름에 계단 공사를 시작하더니...

 

▼ 성벽과 바깥길

 

▼ 성벽과 성안길

 

 

▼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성벽

 

 

 

 

 

 

 

 

 

▼ 잣나무 조림지를 지나서...

 

▼ 남문에 도착...

 

★ 남문(至和門)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cm 지점에 위치한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 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至和門)으로 칭하였으며 남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 올 때에도 이 문을 통해서 들어 왔다. 성문은 홍예문과 문루로 구분된다.


홍예문은 높이 475cm, 너비 335cm, 길이 860cm로 홍예기석 위에 17개의 홍예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문의 하부 육축은 일부 성벽의 배부른 현상을 제외하고는 육축의 높이와 홍예문의 높이가 동문보다는 높게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문의 문비도 두꺼운 판재에 30cm 크기의 철린을 촘촘히 박아 댄 육중한 모습이며 상하의 지도리석으로 위아래에서 지탱하도록 되어 있는 원형 그대로이다. 문짝의 뒷면에는 빗장을 지를 수 있도록 장방형 장군목 홈이 측벽의 좌우에 각각 파여져 있다.

 

성문 통로의 바닥은 바깥쪽으로 경사가 심하며 통로 위의 천장은 동문의 경우와 같이 회벽이 홍예형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회벽칠로 둥글게 막아져 있다.

 

다른 성곽의 성문에서는 주로 판자널로 천장을 막고 별화단청을 한 천판을 형성하는 것이 통례임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문루는 1976년 화강석 장주초석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주초석을 대부분 새로 보충하여 문루를 복원하고 현판을 걸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동문에 비해 비교적 그 규모가 크고 장초석을 사용하여 기둥높이는 낮으나 건물의 전체 높이는 약간 더 높게 지어졌다. 또한 건축양식으로 비교하면 동문보다는 공포와 가구구조, 처마부분 등에서 비교적 형식을 갖추어 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기단은 양 측면에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생략되어 있다. 향후 보수시에 기단이 설치 되어야 할 것이다. 화강석 장주초석 위에 세워진 기둥은 건물규모에 비하여 비교적 굵으며 약한 민흘림이 있다.

 

도리는 굴도리가 사용되었으며 공포는 주두, 소로, 초익공을 갖춘 익공계 양식으로 꾸며 졌다. 고주없이 대량 위에 동자주를 세워 중도리를 받는 5량가 형식으로서 퇴량이 없이 측면쪽에만 대량 위에 충량 2본씩이 걸쳐져 외기중도리를 받는 구조이다.

 

건물 내부의 천장은 연목의 몸이 그대로 드러나는 연등천정이며 외기반자쪽만 판재로 막아 대었다.

 

문루는 팔작지붕이며 용머리는 망와로 마감하였으나 내림마루에는 망새대신 용두를 장식하였다.

 

누대의 천정 양식은 연등 천정 양식이다.

 

주춧돌은 가로 50cm, 세로 50cm, 높이 110cm의 장주 초석을 사용하였다. 남문은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다.

 

▼ 남문

 

▼ 남문의 밖에서 본 성벽

 

▼ 남문에서 단체사진

 

 

▼ 남문 문루를 지나 성벽을 따라 오르고...

 

 

 

▼ 뒤돌아 보니 수어장대가 아스라히 보이고...

 

 

▼ 남장대지

 

 

★ 남장대

남장대는  남한산성 남쪽 제2옹성의 바로 안쪽에 있었던 장대로 주변 지형을 보더라고 장대가 위치할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후영장이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 장졸을 지휘하던 곳이다. 장대 위에는 1788년 부윤 이태영이 세운 타운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둥글게 잘 다듬어진 21개의 주춧돌만 남아있다. 


주춧돌은 높이 31cm 내외의 원형 고주초석으로 직경은 50cm 정도이고, 남 - 북향으로 놓여져 있으며, 한 변의 길이가 880cm인 정방형 건물이다.


성 내부로 향하는 건물터 뒤쪽에는 장대를 지을 때 쌓았던 것으로 보이는 석축이 남아 있다.

 

장대가 있는 이 지역은 성곽을 크게 돌출 시켜 장대 앞의 면적을 넓히는 한편 수성의 효과를 크게 하였다. 특히 돌출된 성곽의 끝으로는 옹성을 설치하여 그 끝에는 포혈을 설치하여 수비하도록 하였다.

 

▼ 남장대 앞에 있는 제2남옹성 - 건너편 인공구조물이 있는 산이 성남의 검단산이다. 

 

▼ 점심식사

 

 

 

▼ 식사를 마치고 제2남옹성에서 소화를 시키기 위해...

 

 

▼ 다시 성벽을 따라 가고...

 

 

▼ 이곳도 언젠가 복원이 아닌 보수가 되겠지...

 

 

 

 

 

 

▼ 멀리 망월사가 보이고...

 

★ 망월사

장경사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9개 사찰중 가장 오래된 고찰로 망월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사찰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성을 정할 때 한양에 있었던 장의사를 허물고 그 불상과 금자 화엄경 한벌, 금정 하나를 이리로 옮겨 창건하였다고 한다.


옛 망월사는 일제에 의하여 모두 소실되었고 4종의 복원된 건물의 규모가 옛터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대웅전, 금당, 요사체 2동, 13층 적멸보궁탑과 병풍석은 망월사의 자랑이다. 
 
망월사의 돌축대는 옛 망월사의 규모와 건물의 배치를 대략 짐작할 수 있게 하며 대형 맷돌이 유물로 보존되어 있다.

 

▼ 망월사

 

▼ 성벽이 휘돌아 흐르는 듯...

 

▼ 저 아래 동문이 보이고...

 

▼ 동문을 당겨보니...

 

 

▼ 동문 앞에 있는 수구문

 

 

▼ 수구문 밖은...

 

★ 수구문과 수구

해발370∼400m 정도의 산능선을 따라 축성되어 있고, 분지형태의 성내부는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에 가깝다. 산성 내에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하였다.

 

성내에는 크게 네 개의 개울이 있었다. 계곡에서 각각 흘러내린 물이 지수당 부근에서 합류되어 동벽에 구축된 수구문을 통하여 성밖으로 흐른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이 개울물로 물레방아 8개를 돌릴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하였다고 한다.
 
수구문은 동쪽에서 서남쪽 70m 지점의 해발 300m 지점에 위치한다.

수구문은 110×50×157cm 정도의 대형 암괴를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양측 벽에 2단, 또는 3단으로 쌓았으며, 강회몰탈을 빈공간에 채워 넣었다. 천장은 180×80×115cm 정도의 대형 암괴 4매를 덮어서 구축하였다.

 

수구 폭은 188cm이고, 높이는 205cm로서 산성내의 일반적인 암문의 크기보다 더 크다.

 

수구문의 바닥에 깔린 돌에는 폭 23cm 정도 간격으로 직경 9∼12cm, 길이 6∼9cm 정도의 구멍이 파여 있고, 천장석에도 직경 7cm, 깊이 9cm정도의 홈이 파여 있는데, 철심이 박혀 있는 것으로 보아 수구문을 통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쇠창살을 가로질러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외에 성내에는 축성 위치에 따라 부분적으로 우수가 모이게 되는 지점에는 별도로 작은 수구를 설치하여 성벽 안으로 물이 스며들어 성벽을 약화시키는 것을 방지하였다.

 

산성내에는 현재 성벽이 무너져서 확인이 어려운 지점을 제외하고 가시적으로 확인되는 수구는 모두 28개에 달한다.

 

일반적으로 수구는 낮은 곳으로 모여든 물을 성밖으로 배출하였기 때문에 배수구의 위치는 외면에서 볼 때 출수구의 위치가 성벽의 중간에 있는 경우도 많다.

 

남한산성의 경우도 출수구의 위치가 바닥에서 100∼150cm 지점에 위치하는 것이 가장 많으며 2m가 넘는 것도 있다.

 

▼ 남한산성 안내도

 

 

▼ 동문 옆 성벽을 헐고 도로를 내어...

 

▼ 동문

 

★ 동문(左翼門)
산성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문과 함께 가장 사용빈도가 높았던 성문 중의 하나이다.

 

이 성문은 선조 때에 이미 보수하였고 인조 2년 새로 수축된 이후, 정조 3년(1779) 성곽 보수시에 이 성문도 보수하였다. 이때 다른 문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다.

 

동문을 '좌익문' 이라 한 것은 국왕은 남면(南面)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므로 동쪽이 왼쪽이 되기 때문이다. 동문을 '좌익문' 이라 한 것은 국왕은 남면(南面)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므로 동쪽이 왼쪽이 되기 때문이다.


성문은 홍예식이며, 폭은 310cm, 높이는 400cm 이다. 홍예는 홍예기석 위에 9개의 홍예돌을 쌓아서 구축하였다. 홍예 안쪽에는 두께 12cm의 목재 판문을 달고 겉에는 가로 31cm, 세로 16cm의 철린을 붙여 보강하였다.

 

문 뒷면에는 가로 40cm, 세로22cm의 장방형 홈을 파서 장군목을 걸칠 수 있도록 하였다. 일반적으로 성문의 육축(陸築)은 크고 정교하게 가공된 무사석(武砂石)쌓기를 하는 것이 보통인데, 동문의 경우 일반 성돌에 비해 오히려 덜 가공된 약 2배 정도 크기의 성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성돌의 형태나 축성상태를 보면 개구부의 바깥쪽에서 보았을 때 홍예의 좌측 부분이 여러 번 수축되었음이 확인된다.

 

성문의 여장은 타의 구분이 없이 하나로 연결한 평여장이며 총안도 설치되지 않았다. 성문 좌측 부분은 경사가 급해 계단으로 처리된 부분의 여장은 가운데에 한 개의 총안이 있는 층단형 여장이며, 우측은 경사면을 따라 올라가는 성벽과 평행하여 옥개정상부도 사선을 이루도록 하였다.

 

문루는 단층이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지붕은 홑처마를 두른 팔작지붕 양식으로 용머리는 망와로 마감하고 문루의 천정은 연등천정을 하였다.

 

기둥 양식은 주심포 양식의 민흘림 기둥이며 그 위에 굴도리 가구(架構)를 둘렀다.

 

다른 문에 비해 동문은 가장 낮은 지대에 축조되어 있기 때문에 성문은 지면에서 높여 계단을 구축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동문은 계단을 통해 드나들기에 우마차는 통행이 불가하였다.

 

 

 

▼ 동문 옆으로 성벽을 따라 오르고...

 

 

 

 

▼ 송암정에 대한 설명글을 읽어보니...

 

 

★ 송암정

성밖의 동문에서 성벽을 따라 동쪽으로 오르면 바위절벽과 그 사이에 말라죽은 소나무가 서 있는 곳이다.


이 곳은 산성리 산 8-1번지에 해당되며 송암정 표지석은 성 안에 , 송암정의 바위와 고사목은 성 밖에 서 있다.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가 하산하여 이 곳을 지나는데 남자 수명과 기생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때 술에 취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자 황진이는 개의치 않고 그 사내에게 심오한 불법을 설파하였다.
 
이때 그 무리 중 감명을 받은 기생 한사람이 갑자기 절벽으로 뛰어 내려 자결하였다.


이 바위에 서 있는 고사목(소나무)은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대부' 벼슬을 내렸으므로 '대부송' 이라고 부르는 그 소나무이다. 송암정은 우리말의 '솔바위 정자'라는 뜻이다.

 

▼ 대부송

 

 

 

 

 

 

▼ 장경사 일주문이 보이고...

 

▼ 장경사 일주문

 

★ 장경사

성내에 존재했던 9개의 사찰 중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현존한는 유일한 사찰이며, 남한산성 동문 안에서 동북쪽으로 약 350m거리의 해발 36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망월봉의 남사면 중턱 곡저부이 완경사면을 이용하여 비교적 넓은 대지를 구축하였다.


이 사찰은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수축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건립한 군막 사찰이다.

 

사찰내의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진남누(鎭南樓), 칠성각, 대방, 요사채 등이 있는데, 그중 대웅전이 가장 화려하게 지어진 고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은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이며, 다포양식의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측면의 칸은 정면의 칸보다 약간 좁아서 건물의 전체 평면은 장방향을 이룬다.

 

건물의 정면에는 각 칸마다 4쪽 여닫이 교자문을 달았다. 종무소는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양식에 주심포식 4가가 모기둥을 썼다.


이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는데 앞으로는 짧은 툇마루를 내었으며 2쪽 미닫이 卍자문을 달았다.

 

요사는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양식의 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산신각은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양식으로 좌우에는 밑이 둥근 바람막이를 하였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규모인데 정면 2칸에는 2쪽 여닫이 卍자문을 달았다. 현재 장경사만이 유일하게 옛 모습이 남아 있다.

 

 

 

 

 

 

▼ 장경사 풍경

 

 

 

 

 

 

 

 

 

▼ 이정목 - 현위치 장경사신지옹성

 

▼ 장경사신지옹성

 

 

★ 옹성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또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아 이중으로 쌓은 성벽을 말한다.

 

성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만 하고,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지만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옹성이라기보다는 치나 용도, 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록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지지자료에 이것들을 옹성이라고 명명하고 있음을 볼 때, 옹성의 개념은 단순히 성문을 보호하는 시설이라기보다는 체성벽의 보호를 위하여 이중으로 성벽을 구축한 시설을 의미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의 옹성은 남쪽에 3개, 동쪽과 북쪽에 각각 1개씩 설치되었다.

 

남쪽에 가장 많은 옹성이 설치된 것은 북쪽이나 동쪽, 서쪽에 비해 남쪽의 경사가 가장 완만하여 방어에 취약하여 검복리 방면에서 계곡의 완경사면을 따라 올라와 해발 537.7m인 검단산 정상을 확보하거나 계곡에서 화포를 쏠 경우 산성의 방어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옹성은 모두 능선으로 연결되어 방어에 취약한 지점에 축조되어 있다.
옹성은 치성과는 달리 모두 체성과 직접적인 연결됨이 없이 체성벽의 기저부를 옹성의 상단으로 하여 축조하였고, 암문을 통하여 연결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말단부에는 포루를 설치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이 옹성들은 연주봉 옹성을 제외하고 다른 옹성은 원성축조 시에 쌓은 것이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에 적의 화포공격에 대응할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1남옹성은 둘레가 426m이며 옹성 끝에는 7개의 포루가 설치되어 있다. 원성과 연결되는 시축지점은 약간 넓게 벌어졌다가 가운데는 잘록하고 끝부분은 다시 넓어져 뭉툭하며 옹성 중간 부분에는 장대가 구축되어 있다.
 
 2남옹성은 둘레가 318m이며 옹성 끝에 87개의 여장이 있었다. 이 옹성은 다른 옹성과는 달리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 끝에는 포루가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홍예문이 있다.


포루는 동서남 3방향으로 3개씩 9개가 설치되어 있다.
3남옹성은 시축 부분에서 축조가 끝나는 부분의 양쪽 벽이 거의 평행이다. 둘레는 125m이고, 31개의 여담이 있었다. 끝부분엔 5개의 포루가 남쪽에 3개 동쪽과 서쪽에 각각 1개씩 설치되어 있다. 이 옹성의 포혈은 방형이 아니라, 凸자 모양으로 구축된 것이 특이하다. 
 
장경사 신지옹성은 둘레가 159m이며 여장이 40개였다. 옹성 끝에는 2개소의 포루가 구축되었다. 포루 좌측 벽에는 '이방' 이라 불리는 무기나 화약을 저장하는 시설이 있었다.


연주봉 옹성은 둘레가 315m에 73개의 여담이 있었다. 이 옹성에도 포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확인되지는 않는다. 암문을 통하여 성내로 출입할 수 있었으며, 옹성의 끝부분에는 원형의 석축구조물이 있다.
 

 

 

 

 

 

 

▼ 남한산성 군포지

 

 

 

 

▼ 여장

 

성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을 말한다. 이 여장은 다른 용어로 여담, 여첩, 치첩, 타, 여원 이라고도 하고 고어로는 성각휘, 성가퀴, 살받이터 등으로 불려졌다. 또한 설치하는 목적에 따라 치폐, 첩담, 비예, 희장 이라고도 하였다.

여장의 종류에는 평여장과, 凸형여장, 반원형여장 등으로 구분된다.평여장은 타와 타 사이에 타구를 설치하고 크기가 일정한 장방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남한산성의 여장은 1940타 이며 모두 평여장이다.
1타의 길이는 남한산성의 경우 위치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1타의 길이는 대략 3 ∼ 4.5m 정도이며 여장의 높이는 낮은 곳은 70cm, 높은 곳은 135cm 정도이다.
 
타와 타 사이의 타구의 폭은 30cm이고 타구의 높이는 56cm로 대략 여장높이의 1/2정도이다. 여장의 폭은 76cm이고, 타와 타 사이의 간격은 15cm 정도이나 중앙부를 형태로 뾰족하게 처리하여 좁지만 상대적으로 넓은 면적의 조망이 가능하도록 하여 방어의 효율성을 높였다.
 
▼ 동장대지

 

★ 동장대 

동장대는 동쪽 내성의 가장 높은 곳, 즉 한봉외성으로 나가는 암문의 우측 언덕에 있는 건물 터로 해발 501m 지점에 위치한다.


동장대는 인조 2년(1624) 산성수축시 동장대가 설치되고 누각이 함께 건축되었다. 이곳에는 동서 21m, 남북 17m 정도 규모의 평탄지가 있으며 중앙에는 4개의 초석이 남아 있다.


장대의 외곽에는 높이 350cm 정도의 석축이 쌓여 있다. 수어청의 5영 중 전영장과 좌영장이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 장졸을 지휘하던 곳이다.


건물 지에는 와편과 잡석이 흩어져 있으며 주변에 비교적 높이 쌓은 석축이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곳은 숙종 때 외성이 확장되면서 외도장대와 함께 성곽의 동쪽에서 가장 높아 성곽 북쪽과 동쪽을 한눈에 감지 할 수 있는 곳이다.

 

▼ 동장대지에서...

 

 

▼ 암문 -벌봉이나 한봉을 갈 때 이곳을 지나야 한다.

 

 

 

 

 

 

▼ 내려다 보는 저곳은...

 

▼ 수구 - 성안에 고인 물을 성밖으로 내보내는...

 

▼ 암문에서...

 

▼ 암문 밖을 내다보니...

 

▼ 다시 성벽을 따라...

 

 

▼ 돌탑

 

 

▼ 구비구비 이어진 성벽

 

 

 

 

 

 

 

 

 

 

 

 

 

 

▼ 북문이 보이고...

 

★ 북문(戰勝門)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상사창리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안으로 운반하였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戰勝門)이라 칭하였다. '전승문' 이란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인데 현재 편액은 걸려있지 않다. 


북문은 홍예식 문이며, 홍예기석 위에 10개의 홍에돌을 쌓아 구축하였다. 문의 폭은 325cm, 높이는 365cm이다.

 

육축은 특별히 가공하거나 큰 무사석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며 일반 성벽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성벽의 두께는 두꺼워져 약 710cm에 달한다.

 

홍예 안쪽에는 판문을 설치하였으며 철린을 박아 보강하였다. 여장은 총안이나 타가 없는 평여장을 설치하였고 , 문루로 오르는 계단을 별도로 설치하지도 않았다.

 

문루는 단층이고 규모는 정면 4칸 측면2칸이며, 지붕은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용머리는 치미를 장식하였고 내림마루에도 용두를 장식하였다.

 

천장양식은 연등천정이며 기둥 양식은 주심포 양식의 민흘림 기둥이다.

 

▼ 북문은 아직도 보수 中?

 

▼ 간식시간

 

 

▼ 계단길

 

 

▼ 맥가이버

 

 

 

 

▼ 멀리 연주봉옹성이 보이고...

 

☆ 옹성

옹성이나 외성과 구별하기 위하여 인조대에 축성된 성벽의 범위를 일반적으로 원성이라고 한다.


수어사 이서는 원성을 축성함에 있어 동남성의 축조는 이회에게 맡기고, 서북성은 벽암대사를 도총섭으로 임명하고 8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진행하였다.

 

인조 2년 7월에 시작된 원성 수축공사는 인조 4년(1626) 11월에 완공되었다. 당시 수축된 원성에 대하여 장유의 남한산성기에는 '여장 1,700첩, 대문 4개, 암문 8개, 사찰 7개와 관청창고 등을 갖추었다.

 

성벽의 동쪽에는 수문을 만들고 서북방의 연주봉에는 대를 세우고 용도를 쌓아 붙였다'고 하였다.


남한산성은 인조대에서 정조 3년(1779)에 이르기까지 근 150여 년간 10여 차례의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처음 수축된 산성은 활과 검을 주무기로 하는 전근대적인 전쟁개념을 바탕에 두고 축성된 것이었다.

 

화포를 쏠 수 있는 포루는 연기와 불꽃이 일어난다는 이유로 아예 처음부터 설치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선은 화포라는 새로운 공성무기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청군은 원성 밖의 봉암과 한봉, 검단산 등을 장악하고, 성내를 들여다보면서 홍이포 등으로 화포공격을 하였다. 포탄은 6km 정도를 날아가 행궁 기둥을 맞추고 성내의 건물들을 무너뜨렸다.


이에 따라 이후의 축성방법은 적의 화포공격에 대응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성벽의 요해처에 옹성을 구축하고, 곳곳에 포혈을 설치하였으며, 성돌도 크고 다양한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아마도 인조 16년(1638) 무너진 성벽의 보수 및 원성에 대한 증개축과 함께 아마도 남옹성 3개가 신축되었으며, 연주봉옹성을 포함한 4개의 옹성에 포루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연주봉 옹성을 당겨보니..

 

 

 

 

 

 

 

▼ 성벽 위에서 바라본 연주봉 옹성

 

 

▼ 매탄저

 

▼ 서문이 보이고...

 

▼ 남한산성 일주를 하고...

 

▼ 서문에 도착하는 님들...

 

▼ 서문

 

▼ 서문을 나와서 연주봉옹성으로...

 

 

 

▼ 연주봉옹성

 

 

 

▼ 연주봉옹성에서 단체사진

 

 

▼ 연주봉옹성을 돌아서 성불사쪽으로 하산을 시작하며...

 

▼ 일몰시각을 30여분 앞두고 짙은 구름속으로 사라지는 낙조를 붙들어서...

 

 

 

 

 

▼ 냉커피를 나눠 마시며...

 

 

▼ 드디어 성불사의 모습이 보이고...

 

▼ 남한산 성불사 - 성(穴+惺)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니 크게 깨달을(大悟) '성'이란다.

 

▼ 상가지역에 당도하니 비가 '후두둑'하고 뿌리다가 잠시 후 그친다.

 

▼ 뒤풀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