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21일(일) 강화 석모도일주와 낙가산(보문사), 상봉산 산행을 다녀오다.
오늘은 그동안 여러 사정으로 가보지 못했던 '석모도'로의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해서 '석모도 도보일주'와 '해명산-낙가산-상봉산 연계산행'을 위한 답사를 계획하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섰다.
강화도 외포리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갈매기와 함께 석모도 석포선착장에 도착하여 시계방향으로 둘러보면서
어류정항과 민머루해수욕장을 거쳐 보문사에 들러 눈썹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상을 보고, 낙가산으로 올라서서
상봉산을 거쳐 '한가라지 고개'까지 간 후 석모도 일주도로 따라 석포선착장까지 원점회귀 후 강화도를 거쳐 귀가.
☞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 블로그의 사진으로 대신한다.
☞ 2부를 시작하며...
☞ 일주문
마을이 있는 절 입구에서 조금 올라와 있는 곳에 세워졌다.
일주문(一柱門) 아래 절 입구 주차장에는 민가와 상가들이 들어서 있는데, 여기에서 북쪽 산으로 나 있는 길이 절로 들어가는 길목이 된다.
이곳에서 위로 약 300m쯤 올라가면 절이 나온다.
무릇 어떤 절이든 이 일주문의 형태는 있기 마련인데, 보문사 일주문처럼 대개는 목조 건물 형식을 띠고 있다.
칸수는 한 칸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현판에 쓰여진 `낙가산 보문사'라는 글씨는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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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전에는 보문사에 전해내려오는 귀중한 보물인 옥등잔이 있었는데, 사미승은 옥등잔에 기름을 부으러 가는 것이다. 떨어진 옥등잔은 두조각이 나게 되고, 사미승은 혼비백산하여 법당을 빠져나와 구석에 주저앉아 훌쩍이게 된다. 무슨일인지 물어보자, 사미승은 옥등잔을 깨게 된 일을말하게 된다. 두동강난 옥등잔은 멀쩡히 불빛만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상히 여긴 노스님은 옥등잔을 자세히 살펴 보았지만, 깨진 흔적조차 없이 멀쩡하였다. 이에 노스님은 "이것은 분명 나한의 신통력 때문이로다" 하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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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한 석상과 석굴 법당
희정대사가 보문사를 창건한지 14년 만인 649년(신라 진덕왕 3)에 일어난 일이다. 보문사 산아래 지금의 매음리 동네 어부들이 배를 타고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 바다에 그물을 쳤다가 한참만에 걷어 올렸는데 그물이 몹시 무거웠다. 고기가 걸렸으면 그물이 당겨지고 움직일텐데 그물은 무거웠지만 요동이 없었다.
이상하게 고기는 한 마리도 걸려있지 않고 이상스럽게 생긴 돌덩이만 잔뜩 그물에 걸려 있었다. 어부들은 어리둥절하며 그 돌덩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기이하게도 그 돌덩이들은 마치 사람 모습과 똑같았다. 어부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이한 석상을 보고 놀랍기도 하고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그 석상들을 얼른 바다에 다시 던져 버리고 배를 저어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가서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기로 했다.
한참만에 어부들은 그물을 다시 걷어 올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까처럼 그물이 무겁기만 하고 꿈틀거림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배에 올려놓고 다시 보니 아까 멀리 떨어진 곳에 던져버린 그 석상들이 그대로 똑같이 그곳에 놓여있었다. 어부들은 매우 놀라 황급히 그물은 바다에 털어 버리고 그 날은 고기잡이를 포기한 채 서둘러 배를 저어 육지로 돌아와 버렸다.
그런데 그날 밤, 어부들은 전부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꿈을 꾸었다. 꿈의 내용은, 맑은 얼굴에 훌륭한 풍모를 한 노스님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먼 서천국(인도)으로부터 왔느니라. 나와 더불어 스물 두 성인이 돌배를 타고 이곳까지 왔는데 우리가 타고 온 돌배를 돌려보내고 물속에 있다가 그대들의 그물을 따라 올라왔더니 그대들은 두 번씩이나 우리들을 다시 물속에 넣어 버리더구나. 그대들이 알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니 그 일을 허물하지 않겠노라. 우리가 이곳 동방 세계의 서쪽 바닷가에 온 것은 이 나라에 아라한의 신통을 펴기 위한 것이며 더욱 큰 뜻은 영산회상에서 베풀어진 무진법문과 중생의 복락을 성취하는 길을 전하러 온 것이다.
마을 뒤 낙가산에 가보면 우리가 오래도록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이 있으니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해 주기 바라노라. 의심하지 말라. 내일 곧 시행하도록 하라. 이 인연과 공덕으로 그대들의 후손들까지도 길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니라." 노스님은 다시 앞장서 낙가산으로 어부들을 인도하여 보문사 앞에 있는 석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노스님은 이곳에 쉬게 해달라고 다시 한 번 당부하고는 어부들이 낮에 석상을 버린 바다로 사라졌다.
어부들은 새벽녘부터 일어나 간밤의 꿈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모두가 감탄을 했다. 그들은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띄워 어제 삭상을 던져 버린 그 바다에 그물을 쳤다. 조금 후 그들이 걷어 올린 그물에는 어제의 그 석상 스물 두 체(體)가 그대로 따라 올라왔다. 어부들은 정성스럽게 석상을 모시고 뭍으로 올라와 물로 깨끗하게 씻고 꿈에 본 석굴로 석상 스물 두 위를 모셔갔다.
굴 앞에 다가가니 굴 안에서 경 읽는 소리가 나고 은은한 향 내음이 굴 밖으로 스며 나오고 있었다. 어부들은 형언할 수 없이 편안한 마음을 느끼면서 굴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굴 안은 마치 어떤 사람이 일부러 다듬은 것처럼 천연적으로 된 좌대(座臺)가 만들어 져 있었다. 어부들은 스물 두 위의 석상을 그 좌대에 차례로 올려 모셨다.
그리고 어부들은 그 석상들이 돌부처님이라고 생각했다. 돌부처님을 좌대에 모시고 나니 굴 안은 엄숙하고 신비한 영기(靈氣)가 가득 찬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일제히 돌부처님 앞에 엎드려 거듭거듭 절을 하면서 돌부처님에게 소원을 이루어 주시도록 염원했다. 어부들은 돌부처님을 모시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신심이 절로 우러나서 기쁜 마음으로 동네에 돌아와 잔치를 벌이면서 하루를 경사스럽게 보냈다.
그날 밤 꿈에 그 노스님이 다시 어부들 앞에 나타나셨다. "그대들의 수고로 장차 무수한 중생들이 복을 빌어가게 될 것이다. 그대들에게 먼저 복을 줄 것이니 받은 복을 함부로 쓰지 말며 교만하거나 자비심을 버리라. 악하고 삿된 마음을 일으키게 되면 곧 복을 걷어 들일 것이니라. 그리고 그대들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복덕을 갖춘 아들을 점지할 것이니라."
노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어부들에게 옥동자를 안겨 주고는 계속 말씀을 이었다. "사람들은 이 노승을 빈두로존자라고 부른다네. 우리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두 보살님을 함께 모시고 왔으니 나와 더불어 나머지 열여덟 분은 모두 부처님의 수제자들이라네. 존자들의 이름은 스님들에게 잘 일러놓을 것이니 소원을 빌 때에는 반드시 명호를 불러야 하느니라."
어부들뿐만 아니라 보문사의 스님들도 같은 꿈을 꾸었다. 스님들과 어부들은 전부 이 신령스러움에 감탄만 할 뿐이었다. 어부들이 바다에서 옮겨 봉안한 열여덟 분의 존자들은 모두가 아라한과를 성취한 대 아라한들로 생사에 자재하여 삼천대천세계에 현몰이 자재한 대 신통을 갖추신 성인들이시다. 굴법당 좌측에 모셔진 분은 [나반존자]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독성이시다. 나반존자는 지금 천태산에서 선정에 들어 계시는데 장차 용화세계의 대좌주로 출현하시게 된다.
얼굴이 희고 눈썹이 길고 희게 표현되는 나반존자는 차와 과일을 즐기신다. 이러한 특징으로 보아 이 나반존자가 바로 빈두로존자라고 보고 있다. 신통 자재한 아라한들의 하는 일이므로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 석굴 옆에는 신령스런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다. 그 물맛이 감미로워 불자들이 많이 마시게 되는데 아무리 많이 마셔도 탈나는 일이 없다. 그때 모셔진 스물두 분의 석상은 조금도 변함없이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마치 최근에 모신 것처럼 항상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이 느껴진다.
근래 사람들이 돌의 석질을 조사해보니 석상의 돌은 화강암같이 보이지만 우리나라 화강암이 아니라 인도에서 산출되는 돌임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 보문사 석실(나한전)
석실 안에 봉안된 23불의 나한상은 눈썹바위의 마애관음보살좌상과 더불어 보문사의 대표적 성보문화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문사가 관음신앙의 성지인 동시에 나한신앙의 대표적 도량이 된 것은 바로 이 석실에 있는 나한상 때문으로 보아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 석실 및 안에 봉안된 나한상이 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높다. 또한 이 석실은 우리나라에 흔치않은 석굴사원이기도 하다. 석굴사원의 예는 경주 석굴암, 경북 군위의 삼존석굴, 강원도 속초의 개조암(開祖庵) 등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몇 되지 않는 귀중한 예이다.
이 석실의 역사는 곧 보문사 창건 역사와 거의 일치한다. 전설에 따르면 창건 후 14년 뒤인 649년 신라 선덕왕 때 어부들이 고기잡이 나가다 그물에 걸려 올려진 석불상들을 이곳 동굴에 안치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곧 이때부터 석실이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뒤의 역사는 알 수 없고, 조선 시대 후기에 들어서인 1812년(순조 12)에 한차례. 그리고 1867년(고종 4)에 다시 경산(京山)화상이 석굴을 보수했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1958년 춘성(春城)선사가 석굴 내부를 좀 더 확장하며 개수하였다. 최근에는 1980년 정수(靜守)스님이 내부를 다시 확장하는 한편 지금의 불단(佛壇) 뒤와 옆에 있는 석탱화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다음으로 석실의 구조를 보면, 내부는 천연 동굴을 확장하여 만들었고 입구에 무지개 모양을 한 3개의 아치형 홍예문(虹?門)을 달았다. 석굴 안은 면적이 30평으로 꽤 널찍한 편이다. 늘 이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의 기도음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 석실 나한상
석실을 들어서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전부 22불의 성상(聖像)을 모셔 놓은 불단이다. 석실이니만큼 다른 불전과는 달리 불단 및 닷집이 전부 돌로 커다랗게 만들어진 것이 특이하다. 연꽃이 조각된 불단 위에 닷집이 달린 전각 형태의 불전(佛殿)이 있고, 그 안에 아래 위 두 줄에 걸쳐 감실(龕室)이 마련되었으며 여기에 22불의 석상이 봉안되었다.
석상의 22불의 석상(石像)은 아마도 전설에 전하듯, 어부들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 봉안한 석상 그대로인 것으로 보인다. 이 22나한상의 명호에 대해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좌우의 미륵보살·제화갈라보살 및 빈두로아존자·가락가빌차존자·바리도 아존자·노빈타존자·낙구라존자·발타라존자·가릿가존자·빌사라불타라존자·주단반탁기존자·라후라존자·나가세라존자·인계라존자·빌라바사존자·아시다존자·수단반탁가존자·정우존자·빈두루존자 등 18분의 나한들이라고 한다. 석상의 크기는 전부 30cm 안팎이다.
불단 뒤에는 1982년의 불단 조성을 기념한 <보문사석굴법당연기문(普門寺石窟法堂緣起文)>과 <법화경약모게(法華經略摹揭)>가 새겨져 있다. 연기문은 기현(奇玄)스님의 글이고, 게는 법화경의 내용을 베낀 것으로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의 글씨다.
한편 근래 이 석상들의 재질(材質)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강암이 아닌 인도에서 나오는 석재임이 확인되었다고도 한다.
불단 좌우로는 인등(引燈)이 있고, 불단 왼쪽 벽에는 석조 신중탱이 걸려 있다. 이 석조 신중탱과 불단 뒷벽에 커다랗게 조각된 탱화는 1980년 조성된 것이다
☞ 깨어진 옥등
보문사에는 고려왕실에서 왕후가 헌정한 옥등이 있었다. 이 옥등은 그 이후로 석굴법당의 인등용(引燈用)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
옛날 언제인가의 일이다. 석굴법당을 청소하던 어린 사미스님이 어느 날 이 옥등을 깨끗이 닦다가 실수로 그만 굴법당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래서 옥등은 마치 칼로 자른 것처럼 용케도 두 조각으로 잘라져 버렸는데 기름이 흘러 내려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옥등은 절에서 귀히 여기는 것이었으므로, 사미스님은 자신의 잘못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고도 남았다. 어린 사미승은 울면서 주지스님에게로 뛰어가 옥등을 깬 일을 보고했다.
주지스님도 크게 놀랐다.
"저런! 그 옥등은 사중의 보물이야. 이 일을 어쩐담! 깨져버린 건 할 수 없지만 ....."사미스님을 앞세우고 주지스님이 황급히 석굴법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석굴 안이 훤했다. 옥등이 깨어졌으니 굴 안이 어두워야 했건만 불이 켜져 있는 것이었다. 그때 주지스님의 머리에 언뜻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급히 달려가 불 켜진 등을 만져봤더니 바로 옥등이었다.
주지스님은 사미스님을 돌아보고, 사미스님은 주지스님을 쳐다봤다. 주지스님의 입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아, 나한성중!"
주지스님은 옥등을 만지고 또 만져보며 깨어졌다고 생각하니 깨어진 것처럼 옥등에 금이나 보였다. 그러나 그 옥등은 깨어진 것이 아니었고 기름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완전히 두 조각으로 깨어져 버린 옥등이 이렇게 완전히 다시 붙여지다니!
굴 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고, 불단에 모셔진 나한상들도 움직인 흔적이 없었다.
주지스님은 석불 바닥에 흘려있을 기름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사미스님이 가리킨 곳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그리고 보니 옥돌잔의 불은 전보다 더 밝고 기름도 하나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주지스님과 사미스님은 나한님 앞에 정례(頂禮)를 올리고 `제대아라한무량자비성중(諸大阿羅漢無量慈悲聖衆)'을 되뇌었다.
이 옥등은 10여 년 전까지 보문사의 보물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10·27법난을 겪은 동안에 어디론지 행방을 감추어 버려 환란한 틈에 분실된 것으로 보여 진다. 그때 같이 보관되어 있었던 작은 또 하나의 옥등은 그 이후 최근까지도 사중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현재는 역시 남아 있지 않다.
☞ 향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석실과 범종각 사이에 있는 큰 바위틈에 인천광역시 지방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된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수령(樹齡)이 약 600년이나 된 노목(老木)으로 크기는 높이 32m, 땅 위 1.2m 부위의 둘레가 2.8m이다. 1.7m 높이에서 원줄기가 동서로 갈라져 둘레가 동쪽 것은 1.3m, 서쪽 것은 1.5m나 된다. 이 향나무는 6·25 당시 죽은 것 같이 보였다가 3년 뒤 다시 소생하였다고 한다.
느티나무는 향나무 옆 천인대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두 그루가 나란히 자라고 있다. 둘 다 수령은 약 290년이고 크기도 비슷해서 높이 16m, 둘레 4.8m 정도이다 현재 군(郡)지정 보호수로 관리되고 있다.
또 절 경내 아래 주차장에도 수령 약 600년 된 노목 한 그루가 있어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수종은 은행나무인데 높이 31m, 둘레 4.8m 나 된다. 역시 군 지정 보호수로 관리되고 있다.
이 밖에도 경내에는 적송과 참나무, 그 외 여러 잡목들이 우거져 있다.
☞ 보문사 맷돌과 절구
맷돌은 옛날 절의 스님들이 취사용으로 사용하던 것으로 석실 입구 오른쪽 삼성각 올라가는 계단 옆 화단에 있다.
석재는 화강암인데, 전체적으로 돌 다듬은 솜씨가 부드럽고 또한 조각도 정밀한 편이다.
둥근 모양을 한 밑부분의 주연(周緣)에는 흠이 널찍하게 파여져 있고, 맷돌질로 잘게 으스러진 음식물이 밑에 받치는 그릇에 흘러 잘 담아지도록 홈통도 적당한 너비로 파여 있다.
윗돌은 얇게 조성되었으며 역시 주연에 굵직한 테를 양각하고 그 양쪽을 파 놓아 그곳에 자루를 끼워 맷돌을 돌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맷돌은 웃돌, 곧 상대석만 남아 있는데 이 보문사 맷돌은 웃돌 뿐만 아니라 아랫돌, 곧 하대석까지 완전하여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크기도 지름 69cm, 두께 20cm나 되어 보통의 것보다 두 배 가량 된다.
이 맷돌이 이용되던 시절 보문사가 얼마나 많은 스님과 신도들로 성황을 이루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전체의 양식으로 보아 조선 시대 후기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인천광역시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맷돌 좌우에 크기가 비슷한 돌절구가 하나씩 있는데 이 역시 맷돌과 마찬가지로 취사용으로 쓰인 듯하다.
왼쪽 것은 높이 58cm, 입지름66cm, 깊이 30cm이고 오른쪽 것은 높이 53cm, 입지름 71cm, 깊이 30cm이다.
☞ 윤장대
책장의 일종으로 불교에서는 경전을 넣은 책장을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윤장 또는 전륜장(轉輪藏)·전륜경장(轉輪經藏)이라고도 한다.
중심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 의지하여 원형 또는 다각형의 나무장을 올린 뒤 여기에 경전을 넣고 손잡이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든다.
경전은 경장뿐 아니라 율(律)과 논(論), 여러 고승들의 장소(章疏)도 함께 넣어 둔다.
☞ 극락보전
현재 정면 5칸 측면 3칸의 커다란 규모로 보문사를 찾는 사람을 반기고 있다.
극락보전의 내부 넓이는 약 60평이며, 이곳에 관음보살상을 포함해 3,000불이 모셔져있다.
극락보전 바로 아래에는 요사채가 있다.
그래서 경내에서 이곳을 바라볼 때는 지상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계단 아래 주차장 쪽에서 보면 2층 요사 건물 위 3층 되는 곳에 올려진 것으로 보인다.
곧 2층 요사 옥상 위에 세워진 셈이다.
☞ 마애관음좌상
보문사가 관음 도량의 성지임을 가장 잘 상징하는 성보문화재로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리고 이곳에서는 멀리 서해바다가 한 눈에 조망되는 등 경치가 장관이다. 특히 낙조(落照) 경관은 아주 일품이어서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붉은 해와 노을을 쳐다보노라면 종종 그야말로 무아지경 불심(佛心)의 경지에 들곤 한다.
이 관음좌상은 대웅전과 관음전 사이에 있는 계단을 따라 한 10분가량 올라가면 나오는 낙가산 중턱의 눈썹바위 아래에 새겨져 있다. 절에서부터의 거리는 약 1km가량 된다.
오르는 길이 제법 가파르기 때문에 계단은 지그재그 식으로 놓았다.
이 불사를 기념하는 `관음성전계단불사공덕비'가 중간에 놓여 있다.
계단이 놓여졌다고는 하나 눈썹바위로 올라가는 길 자체가 워낙 급한 까닭에 한달음에 올라갈 거리는 못된다.
가다 보면 제법 다리에 힘도 들고 허리가 뻣뻣해지기도 한다.
이럴 때 `관세음보살'을 마음속으로, 혹은 나지막이 외우며 올라가노라면 문득 어느새 관음보살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마애관음좌상은 1928년 배선주 주지스님이 보문사가 관음 성지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이화응(李華應)스님과 더불어 이곳에 새긴 것으로, 크기는 높이 920cm, 너비 330cm에 달하는 거상(巨像)이다.
크기를 척수로 환산하면 높이 32척에 너비가 11척이 되는데, 이것은 곧 관음보살의 32응신(應身)과 11면(面)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관음 좌상 약간 비스듬히 나 있는 바위면에 새겨졌는데, 위의 바위가 마치 지붕처럼 돌출되어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관음부처님을 가려 주고 있다.
관음 좌상의 양식을 보면,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보관을 쓰고 두 손을 모아 정성스레 정병(淨甁)을 받쳐 든 채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얼굴에 비해 다소 크게 느껴지는 코 입 귀는 투박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서민적이라 보는 사람의 마음도 푸근해지며 정감이 간다.
또 부처님 얼굴에 빠짐없이 있기 마련인 백호(白毫)도 이마 사이에 솟아 있다.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다.
불의(佛衣)는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도록 입는 통견(通肩)을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연화대좌 왼편, 그러니까 관음을 바라보아 오른쪽에는 `조불화응선사(造佛華應禪師)'가 그리고 그 반대편 위패 모양으로 새긴 구획 안에도 `화엄회상필부사왕중(華嚴會上八部四王衆)·나무화엄회상욕색제천중(南無華嚴會上欲色諸天衆)·화엄회상호법선신중(華嚴會上護法善神衆)' 등의 글씨가 세 줄로 새겨져 있다.
이 관음상은 비록 작품이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이곳이 관음 도량의 성지인 동시에 기도(祈禱) 성지임을 나타내는 상징성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이곳에서 정성으로 기도 드리면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이 없다 하여 지금도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 여기서 2부를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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