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유적탐방후기☞/♣ 궁궐·왕릉·묘ㆍ원

[20091022]가을 나들이-'세계문화유산 종묘'와 '창경궁'에 다녀오다 - 2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09. 10. 22.

 

29308

 

 2009년 10월 22일(목)  

가을 나들이-'세계문화유산 종묘'와 '창경궁'에 다녀오다.

 

 가을나들이 - '세계문화유산 종묘'와 '창경궁' 코스 :

종로3가역→종묘공원→종묘 외대문→향대청→공민왕 신당→종묘 교육홍보관→재궁 일원→전사청 일원→종묘 정전→종묘 영녕전

→구름다리→창경궁 관천대→함인정→환경전→경춘전→통명전→풍기대→성종태실비→춘당지→팔각칠층석탑→대온실→광덕문

→홍화문→옥천교→명정문→명정전→광정문→문정문→문정전→숭문당→구름다리→종묘 정전→종묘 외삼문→종로3가역

  

 맥가이버의 '가을 나들이-'세계문화유산  종묘'와 '창경궁' 이야기

 

오늘은 가을나들이로 '세계문화유산 종묘'와 '창경궁'을 관람하고 왔다.

 

가을 나들이-'세계문화유산  종묘'와 '창경궁'에 다녀오다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 창경궁에 대하여...

 

사적 제123호. 이 궁궐에서 장조(莊祖)·정조(正祖)·순조(純祖)·헌종(憲宗) 등 여러 왕들이 태어났다.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다른 궁궐은 모두 남향하고 있으나 이 궁궐만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동향하여 있다.

 

본래 태종이 아들 세종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면서 자신이 거처할 궁궐로 지은 수강궁(壽康宮)에서 시작되었다.

그후 1484년(성종 15) 이 수강궁 자리에 새로이 별궁인 창경궁을 건립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 다시 세웠다.

 

이때 동향으로 세워졌던 명정전(明政殿)을 남향으로 고쳐야 한다는 김일손의 상소가 있었으나

도감(都監)에서는 만약 남향으로 할 경우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의 내청룡으로 이어지는 맥이

함춘원(含春苑)의 남쪽 지맥을 끊게 된다면서 그대로 둘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 많은 전각들이 1633년에 중건되었다.

1656년(효종 7)에 요화당(瑤華堂)·난향각(蘭香閣)·취요헌(翠耀軒)·계월각(桂月閣) 등

4개의 전각을 지어 효종의 네 공주들을 머물게 했다.

 

1909년에는 일제가 강제로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든 다음 일반인들에게 관람시켰으며,

1911년에는 박물관을 짓고 이름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을 낮추어 불렀다.

 

198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던 문정전(文政殿)과 월랑(月廊) 등을 복원하고 정비하면서 다시 이름을 창경궁이라고 했다.


동향한 궁궐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을 들어서면 금천(禁川)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이 개천 위에는 금천교(禁川橋)인 옥천교(玉川橋)가 있다.

옥천교를 건너면 정전의 정문인 명정문(明政門)에 이르고,

이 문을 들어서면 높은 월대(月臺) 위에 서 있는 정전인 명정전과 마주하게 된다.

 

동서로 길게 뻗은 월랑은 홍화문과 명정문의 남북 양쪽에서 뻗어나온 월랑과 합쳐져

 'ㅂ'자 모양을 이루면서 정전의 좌우 앞쪽을 둘러싸고 있다.

 

명정전의 남서쪽에는 편전인 문정전과 그 월랑이,

북서쪽에는 많은 내전과 행각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나머지 수천 간의 전각과 행각 등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이 궁궐의 전체적인 배치는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꼭 필요한 곳만을 골라 집터를 잡고 정원을 꾸민 것이 특징이다.

 

〈동궐도 東闕圖〉(국보 제249호, 고려대학교 박물관)를 통하여 1830년대의 창경궁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 창경궁 안내도 ☜

  

   

        

가을 나들이-'세계문화유산  종묘'와 '창경궁'에 다녀오다의 2부를 시작하며...

▼ 

 

 

 

 

   

 

 

 

 

 

 

 

 

관천대

이 관천대는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하여 천문을 관측하던 곳으로,

관천대 - ≪서운관지(書雲觀志)≫에 보면 숙종 14년(1688)에 조성된 것이다.

계동 현대건설 본부 건물 앞뜰에 남아 있는 15세기 초의 관천대와 함께 조선시대의 천문대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높이는 2.2미터, 넓이는 2.4*2.3미터이며, 주위에는 돌난간을 돌렸다.

대의 중앙에는 높이 99센티미터의 관측기를 설치하는 작은 대가 있고,

그 위에 넓이 73.4*52.6센티미터, 두께 24.5센티미터의 또하나의 판석이 있다.

여기에 남북방향으로 관측기를 고정했던 5개의 구멍이 파여 있다.

 

 

 

 

 

  

 

 

 

 

  

함인정

이곳에는 원래 성종 15년에 지은 인양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인조 11년(1633)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이건하여 함인정이라 한 것이다.

이곳은 특히 영조가 문무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짰고, 주칸에는 화반 두 개씩을 놓았다.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내진주(內陳柱)로 구획된 마루는 한 단 높게 처리하여

그 위로는 우물천정을 하고 사방둘레의 툇간(退間)에는 연등천정을 하였다.

 

 

 

 

 

경춘전

이 전각은 창경궁의 내전으로 성종 14년에 건립되었다.

그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에 재건하였으나,

순조 30년에 불탄 것을 그 34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이 경춘전은 정조와 헌종이 탄생한 곳이며,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정면 7칸, 전후툇간을 포함해서 측면 4칸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네모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고, 기둥사이에는 두세 개씩의 화반을 놓았다.

네면에는 모두 세살문을 달았고 그 위에 교살창을 하였다.

좌우엔 온돌방과 중앙3칸은 마루를 깔았고 천정은 우물천정으로  하였다.

 

 

 

환경전

이 건물은 성종 1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에 중건하였다.

그 후 순조 30년(1830)의 큰 불로 소실되었던 것을 그 34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곳은 창경궁의 한 내전으로 왕이 늘 거처하던 곳이며,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했고,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가 승하했을 때는 빈궁(殯宮)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고 기둥사이에는 두세 개씩의 화반을 놓았다.

건물의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로 변형되었다. 외진평주(外陳平柱)와 내진고주(內陣高柱)를 배열하여

퇴량을 걸고 . 대들보(大樑)은 내진고주 사이에 걸었다.

  

 

  

 

 

 

통명전

통명전은 창경궁의 연조 공간으로 명정전 서북쪽에 있으며,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침전의 중심 건물이다.

창경궁 창건 때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이 되고, 다시 이괄의 난과 정조 때 화재를 입었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년에 중건된 것이다.

남향한 전면에는 월대를 두고 양모서리에는 청동제 드므를 놓고 그 북쪽에 외벌대 기단 한 단을 두어 건물을 세웠다. 
 
정면은 7칸이고 측면이 4칸인 이익공계(二翼工系) 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였다.

지붕 위에는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고, 전후퇴칸을 두었다.

북서쪽 일부의 방을 제외하고는 건물 내부 바닥에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정면으로 보아 양측에 2칸씩 방을 꾸몄음이, 1984년의 발굴조사에서 연도지(煙道址)가 노출됨으로써 확인되었다.

 

 

 양화당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한 일이 있으며,

고종 15년(1878) 철종비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세벌대의 장대석 기단 위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초익공계 포작(包作)을 짰다.

기둥사이에는 화반(花盤)없이 굴도리 밑에 장여를 받고 있는 소로만을 끼워 간결한 장식을 하였다. 
 
건물의 내부에는 좌우엔 온돌방과 중앙3칸은 마루를 깔았고, 전면 중앙의 2칸에만 툇마루를 창 없이 개방하였다.

외진평주와 내진고주 사이에는 툇보〔退梁〕를 걸었고, 그 위로는 연등천장을 하고, 안쪽으로는 우물천정을 하였다.

대들보는 내진고주 사이에 걸었다.

 

 

 

 

 

 

 

 

 

 

 

 

 

 

 

 

 

 

 

 

 

 

 

 

풍기대

이 풍기대는 영조 8년(1732)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풍기대 위의 구멍에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재던 것으로, 방향은 24방향으로 측정하였다.

전체 높이는 228.1센티미터인데, 하부대석 높이는 92.4센티미터, 상부 팔각주의 높이는 135.7센티미터이다.  

 

 

 

성종태실비

양화당의 동북쪽 구릉지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태실은 4각형의 지대석 위에 석종형(石鍾形)의 몸체를 놓고 8각형의 지붕돌을 얹었으며 상륜부(相輪部)는 보주로 장식하였다.

태실비는 태실 동쪽에 있는데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를 갖추고 있고 비신 앞면에는 "성종대왕 태실"이라 새겨져 있다.

 

이들은 원래 조선 제9대 성종의 태를 묻은 곳인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에 있었던 것인데

1928년 전국에 있는 조선 역대 임금의 태실을 대부분 서삼릉으로 이봉하면서

원래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태전리에 있던 성종태실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성종은 세조 3년(1457) 덕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예종의 뒤를 이어 1469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 뒤 25년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성종태실의《경국대전(經國大典)》 의 반포 등

조선의 문물 제도를 완비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특히 창경궁을 창건한 임금이기도 하다.

 

 

 

 

 

 

춘당지

춘당지는 1909년에 조성된 원지(苑池)이다.

두 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의 것이 1,107평방미터, 아래 것이 6,483평방미터이다.

연못 속의 섬(366평방미터)과 1986년에 조성한 것이다.

춘당지는 현재 큰 연못과 작은 연못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아래쪽의 큰 연못은 원래 내농포(內農圃)라고 부르던, 왕이 직접농사를 지으며 농정을 살피던 논이었다.

1909년 일본인들이 이곳을 파서 연못을 만들었고 이후 1986년에 한국식 연못으로 재조성한 것이다.

춘당지 북쪽에 인접한 작은 연못이 조선시대 춘당지라 부르던 원래의 연못이다.

 

 

 

 

 

 

 

 

 

 

 

 

 

 

 

 

 

 

 

 

  

 

 

 

 

 

 

 

 

 

 

 

팔각칠층석탑 - 보물1119호
춘당지 옆에 세운 탑이다.

일제 강점기 이왕가박물관을 만들 때 만주(滿洲)에서 가지고 온 상인으로부터 매입하여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몸돌에 “遼陽重/ 開山都/ 綱挺玉/ 巖壽塔”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大明成化六年庚寅歲秋七月上澣吉日造”라고 기록되어 있어 1470년(성종원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8각의 평면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으로 전체 모습은 라마탑의 형태와 비슷하다.  
 

 

 

 

 

 

 

 

 
대온실(식물원)
1909년에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식물원이다.

건축 당시 한국 최대의 목조구조 식물원이었으며,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

1986년 창경궁 복원공사를 계기로 자생목본류를 중심으로 야생화와 함께 전시하고 있다.

현재 대온실은 2004년 2월 6일에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 여기서 가을 나들이-'세계문화유산  종묘'와 '창경궁'에 다녀오다  - 2부를 마치고...

 

 

 

2009년 10월 22일(목)

가을 나들이-'세계문화유산  종묘'와 '창경궁'에 다녀오다.

   

-▥☞ 1부[종로3가역→종묘 외대문→향대청→전사청→종묘 정전→종묘 영녕전→구름다리]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

 

-▥☞ 2부[구름다리→창경궁 관천대→함인정→통명전→풍기대→성종태실비→춘당지→대온실]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

 

-▥☞ 3부[대온실→광덕문→옥천교→명정전→문정전→숭문당→구름다리→종묘 외대문→종로3가역]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