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유적탐방후기☞/♣ 궁궐·왕릉·묘ㆍ원

[20091111]창덕궁 탐방 後 광화문광장 거쳐 청계천 세계 燈 축제 관람 - 1

by 맥가이버 Macgyver 2009. 11. 12.

 

29336

  

 2009년 11월 11일(수)  
도심나들이-'창덕궁 탐방 後 광화문광장 거쳐 청계천 세계 燈축제'에 다녀오다.

 

 '창덕궁 탐방 後 광화문광장 거쳐 청계천 세계 燈축제 관람' 코스

종로3가역→돈화문로→돈화문→창덕궁 궁궐관람(금천교ㆍ진선문ㆍ인정문ㆍ인정전ㆍ선정전ㆍ희정당ㆍ대조전ㆍ성정각)

→후원입구→후원 관람(부용지ㆍ부용정ㆍ영화당ㆍ주합루ㆍ어수문ㆍ의두합ㆍ불로문ㆍ애련지ㆍ연경당ㆍ선향재ㆍ농수정)

→창덕궁 향나무→궐내각사→창덕궁 서문(금호문)→동궐마루안국역 4번 출입구→운현궁 앞→천도교 수운회관 앞

→'정자옆에서' 저녁식사 後→종로경찰서 앞→광화문광장→세종로 4거리→청계천을 따라 두물다리 '청혼의 벽'까지 간 후

→두물다리 '청혼의 벽'에서 다시 청계천을 거슬러 청계광장까지 와서 걷기를 마치고 광화문역과 시청역에서 해산

 맥가이버의 '창덕궁 탐방 後 광화문광장 거쳐 청계천 세계 燈 축제 관람' 이야기

 

오늘은 청계천일대(삼일교~청계광장)에서 열리는 '세계 燈 축제'의 개막식과 점등식이 오후 7시~9시에 있단다.

마침 오후걷기로 '자유로운 도보여행' 카페의 '창덕궁 탐방 後 삼청동과 광화문광장까지 걷기' 공지가 있어

'자유행(보아미님 주최)'의 '창덕궁 탐방 後 삼청동과 광화문광장까지 걷기'에 함께 하고나서,

청계천에서 열리는 '세계 燈축제'를 감상하면 좋겠기에 '자유행'의 오후 도심나들이를 일단 신청한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에서 도보 주최자 보아미님을 비롯한 '자유행'의 님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창덕궁 관람을 위해 돈화문을 통과하여 금천교를 건너고 진선문, 인정문을 거쳐 정전인 인정전과 편전인 선정전,

그리고 침전인 희정당과 대조전을 둘러보고, 동궁일원인 성정각 앞을 지나면서 창덕궁 궁궐관람을 마치고...

이어 후원나들이를 하였으나 올해의 단풍과 낙엽은 지난 해(2008.11.13)에 비해 볼품이 없어 실망스럽다.

 

창덕궁 관람을 마치고 천도교 수운회관 옆 '정자옆에서'라는 곳에서 이른 저녁식사를 하고...

이후 일정을 일부 수정하여 삼청동 탐방 대신에 '청계천 세계 燈 축제'를 구경하기로 한다.

 

광화문광장(세종대왕동상~이순신장군동상)을 거쳐 청계광장으로 갔으나

개막행사가 열리는 청계광장에서부터 燈이 걸린 삼일교까지는 통행이 제한되고...

 

해서 청계천 도로변 인도를 따라 걷다가 통제가 안되고 있는 수표교에서 청계천 산책길로 내려선 후

일단 두물다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면서 '세계 燈 축제'를 관람하기로 한다.

 

청계천 산책로를 따라 두물다리까지 가니 '청혼의 벽'이 재개장되어 있었다.

'청혼의 벽'에는 기존의 '워터스크린'과 사랑의 자물쇠존, 동판존 외에도 하트조명, 하트분수, 이벤트 자전거 등이 보인다.

 

청계천을 거슬러 올라오니 삼일교부터는 '세계 燈 축제'의 개막식을 마치고 점등 된 각가지 燈들이 청계천의 밤을 밝히고 있다.

 

청계광장에서 오늘의 걷기를 마치고 해산하여 서울광장을 둘러보고 시청역에서 전철로 귀가.

 

'모든 만남은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오늘도 길 위에서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고...

  

'창덕궁 탐방 後 광화문광장 거쳐 청계천 세계 燈축제 관람'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맥가이버가 '때론 함께, 때론 홀로' 산행이나 여행, 도보를 하면서 후기를 주로 사진으로 작성함은

인간의 기억력이 유한함을 알기에 훗날 그 당시의 풍광과 그리고 함께 했던 님들과의 추억을 되살리고자 함이고,

인간의 만남이 또한 유한함을 알기에 어떤 연유로 비록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하고자 함이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하는 무능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든다면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자 할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창덕궁 탐방 後 광화문광장 거쳐 청계천 세계 燈축제 관람' - 1부를 시작하며...

 

▼ 

 

 

 

 

창덕궁 [昌德宮]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

 

사적 제122호. 1405년(태종 5)에 이궁(離宮)으로 조성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7년(선조 40)부터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10년(광해군 2)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인정전(仁政殿)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 1647년에 다시 짓기 시작했다.
그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있었으며,

특히 1833년(순조 33)의 큰 화재 때 대조전(大造殿)과 희정당(熙政堂)이 불탔으나 곧 다시 중건되었다.


1908년에 일본인들이 궁궐의 많은 부분을 변경했으며,
1917년에 큰 불이 나자 일제는 불탄 전각들을 복구한다는 명목 아래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들을 헐어내고는 이 가운데 극히 적은 재목들을 사용하여 창덕궁을 변형·복구했다.


이 궁궐은 창경궁과 이어져 있고, 뒤쪽에 후원이 조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867년에 복원되었기 때문에 광해군 때부터 300여 년 간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궁궐의 배치는 지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각들을 배치하여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 북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꺽인 곳에는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르는 금천(禁川) 위에 금천교가 놓여 있고,
이 다리를 건너면 진선문(進善門)과 그 양옆에 월랑(月廊)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이것을 모두 헐어버려 지금은 볼 수 없다.


인정문은 정전의 정문이며 그 양쪽에 있는 월랑은 'ㄷ'자형으로 인정전을 감싸고 있다.
ㄷ자형의 마당 안에는 인정문으로부터 시작된 어도(御道)가 있고,
그 북쪽 끝에 있는 중앙의 높은 월대 위에는 정전인 인정전이 자리잡고 있다.
인정전 월랑의 동북쪽에는 편전(便殿)인 선정전이 위치해 있다.
선정전의 주위에는 여러 행각이 있는데,

그 남쪽에 있던 여러 칸의 행각들은 일본인들이 모두 헐어버렸고, 뒤쪽에 있는 행각만 남아 있다.


동북쪽에는 희정당과 내전인 대조전 영역이 서남향으로 지세에 맞추어 배치되어 있다.
〈궁궐지〉에 희정당은 편전으로, 또 〈동궐도〉에는 중층 누각으로 되어 있어 현재의 모습과 다르다.


희정당으로부터 구름다리 모양의 행각이 북쪽으로 뻗어 희정당 자리보다 높게 자리잡은 대조전은
침전으로 장방형의 행각이 둘러싸고 있고, 이 뒤쪽으로는 아름다운 후정이 조성되어 있다.


대조전 영역의 동남쪽에 내의원이 있었던 자리에 지금은 낙선재(樂善齋),

승화루(承華樓), 백칸 안쪽에 이르는 행각들만 남아 있다.
창덕궁의 북쪽에 있는 넓은 터에는 금원(禁苑)이라고 부르던 후원이 있다.


현재 이 궁궐 안에는 건물 13동과 후원의 건물 28동 등 모두 41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 인정전(국보 제225호)·돈화문(敦化門:보물 제385호)·인정문(보물 제813호)·선정전(宣政殿:보물 제814호)·

희정당(보물 제815호)·대조전(보물 제816호)·선원전(璿源殿:보물 제817호) 등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다음백과사전(출처:브리태니커)에서 -

 

 

 * 동궐도

1989년 8월 1일 국보 제249호로 지정되었다. 2점 모두 견본채색(絹本彩色)이다.

16첩 병풍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가로 576㎝, 세로 273㎝이다.

각각 고려대학교박물관과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입체감이 나도록 조감도식으로 그려 자연의 구릉과 능선, 계류와 원림(苑林) ·궁담 ·전각 ·재실 ·정자 등이 생생하며,

집과 물체마다 먹으로 이름이 쓰여 있어, 역사적 자료로 가치가 높다.

《순조실록》에 의하면, 1830년(순조 30) 8월에 창경궁 환경전(歡慶殿)이 불탔다 하였는데,

이 그림에는 환경전이 그려져 있어 1830년 이전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궁궐지에는 창덕궁 후원 내의 연경당(演慶堂)이 1828년(순조 28)에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배치도에는 연경당이 없다.

궁궐지에 창덕궁 경복전(景福殿)이 1824년(순조 24)에 소실되었다고 하였는데,

이 그림에는 경복전기(景福殿基)로 불탄 자리만 그려져 있다.

따라서 동궐도는 1824년 경복전이 소실된 후부터 1828년 연경당이 건립되기 이전까지의 기간 중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궁의 옛 모습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왕궁의 건물 배치나 조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돈화문(敦化門)

창덕궁으로 들어가는 정문이다.

 

지금은 기단이 없이 평지에 바로 초석을 놓고 문을 세운 것으로 보이나, 문 밖에 도로포장 때문이 기단이 묻혀버렸다.

즉 기단과 기단으로 오르내리는 긴 계단이 땅 밑이 묻혔다.

그 상태로 근 90년 동안 있다가 1997년에 아스팔트를 걷어 내고 월대 부분을 다시 되살렸다. 하지만

그 앞의 도로까지는 깎아낼 수 없어 어색해진 모습이다.

 

돈화문은 정면 5간, 측면 2간 해서 10간짜리 건물이다.

가운데 세 간은 문짝이 달려 있고 가장자리 두 간은 벽으로 마감이 되어 있다.

문짝 셋을 자세히 보면 가운데의 문이 좌우의 문보다 약간 더 크다.

가운데 문은 왕만이 드나드는 어문이다.

우진각 형식의 지붕이 두 층으로 되어 있는데, 지붕만이 아니라 실제로 중간에 마루가 깔려 있는 2층이다.

2층 마루에는 큰 종이 달려 있어 시각을 알려주거나 비상시에 위급을 알리는 용도로 쓰였다.

 

- 한국의 궁궐 홈에서 -

 

 

 

 

잡 상

궁궐의 지붕 추녀마루 끝에 한 줄로 놓여있는 상으로, 궁 안에 잡귀나 흉액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잡상은 중국 소설 서유기의 주인공과 도교의 잡신으로 구성되는데,

대당사부, 손행자, 저팔계, 사화상, 이귀박, 이구룡, 마화상, 삼살보살, 천산갑, 나토두가 있다.

건물의 격에 따라 올려지는 잡상의 수가 다른데 3, 5, 7, 9, 11의 홀수로 올려진다.


1) 대당사부(大唐師父)

대당사부는 잡상의 첫 순위 (맨 앞자리)에 놓인다.

대당사부는 당(당)나라 때 현장(玄奬)이라는 승(僧)으로 법명이 삼장법사(三奬法師)이다.

삼장법사는 천축(天竺)으로 佛經을 구하러 가는 길에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을 데리고 간다.

천신만고 끝에 불경을 구하여 당나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엮은 소설이 서유기 (西遊記)이다.

대당사부는 실제 인물이었기 때문인지 사람의 얼굴 모습으로 삿갓을 쓰고 있는 형상이다.

창덕궁 인정문에 설치된 잡상에서 실측한 크기는 키 (높이)가 0.43미터, 어깨폭 0.27미터, 전후폭(발과 등) 0.35미터이다.

(이하 수치는 창덕궁 인정문의 잡상의 크기를 실측한 수치로 다른 건물도 이와 비슷하다.)

2) 손행자 (孫行者)

손행자는 孫悟空이라고도 한다.

돌원숭이인데 삼장법사를 따라 천축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길에 삼장법사를 호위하며 길동무가 되었다.

서유기라는 소설속의 주인공이 되는 조화(造化)의 영물이었다.

손행자는 원숭이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으며 삿갓을 쓰고 앞발을 버티고 앉아 있다.

키가 0.35미터, 어깨폭이 0.11미터, 전후폭이 0.9미터이다.

3) 저팔계

저팔계는 손오공과 갈이 삼장법사를 따라 천축에 갔던 멧돼지이다.

저(猪)는 돼지이고 팔계(八戒)는 부처님이 가장 싫어하는 여덟 가지의 음식물을 뜻하기도 한다.

얼굴의 모양은 돼지의 형상이며 삿갓은 쓰지 않았다.

키는 0.35미터, 어깨폭이 0.13미터, 전후폭이 0.23미터이다.

4) 사화상

사화상(獅畵像)은 사화상(沙畵像)이라고도 한다.

"獅"자는 사자이고 "沙"자는 서유기에서 나오는 사오정(沙悟淨)의 '沙'자로 풀이하면 사오정 역시 손오공과 같이

삼장법사를 호위했던 괴물로, 원래는 옥황상제를 모시고 궁전에서 수렴지기를 했다는 짐승이라고 한다.

얼굴 모습은 사자상을 하고 있으며 삿갓은 쓰지 않았다. 크기와 앉은 자세는 저팔계와 비슷하다.

5) 이귀박(二鬼朴)

우리나라의 용어에는 보이지 않은 단어로 불교의 용어를 빌려 풀이하면

'二鬼'는 '二求'의 다른 음(音)으로 보아,

二求는 중생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욕구인데 낙(樂)을 얻으려는 得求와 낙을 즐기려는 命求이다.

생김새는 허리의 앞과 뒤에 뿔이 난 짐승의 형상이다.

크기와 앉은 자세는 다른 잡상과 비슷하다.

6) 이구룡(二口龍)


입이 둘이어서 二ㅁ龍이라고 하며, 머리에는 두개의 귀가 나있고 입은 두 개로 보인다.

크기와 앉은 자세는 다른 잡상과 비슷하다.

7) 마화상(馬畵像)

마화상은 말(馬)의 형상을 하고 있다.

서유기에는 '필마온(弼馬溫)이라 하여 "馬"자를 쓴 것과 출세마왕(混世摩王)이라고 하여 '摩'자를 쓴 것이 있는데

지금까지 사용된 용어에는 음으로는 같으나 한자(漢字)가 다르게 馬畵 魔畵 麻畵등으로 표기 되어 있다.

크기와 앉은 자세는 다른 잡상과 비슷하다.

8) 삼살보살(三殺菩薩)

살(殺)은 살(煞)과 같은 의미이며 삼살(三煞)이란 세살(歲煞) 겁살(劫煞) 재살(災煞)등으로

살이 끼어서 불길한 방위라는 뜻으로 쓰이는 용어이다.

보살은 불교에서 위로는 부처님을 따르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님에 버금가는 성인(聖人)이다.

이 두 가지의 뜻으로 해석하면 삼살보살이란 모든 재앙을 막아주는 잡상이라고 생각된다.

잡상에서는 대당사부와 같이 인물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두 손을 합장하고 무릎위에 팔꿈치를 받치고 허리를 꾸부려 앉은 모습이다.

크기는 다른 잡상과 비슷하다

9) 천산갑(穿山甲)

인도 중국 등지에 분포된 포유동물의 일종이다.

머리 뒤통수에 뿔이 돋혀 있고 등이 다른 잡상보다 울퉁불퉁 튀어 나왔다.

크기와 앉은 자세는 다른 잡상과 비슷하다.

10) 나토두(羅土頭)

나토두의 형상은 상와도에 그려져 있지 않다.

나토라는 짐승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나티"의 다른 표기라고 생각된다.

나티는 짐승같이 생긴 귀신으로 작은 龍의 얼굴형상 또는 검붉은 곰의 형상이라고 한다.

 

 

 

 

 부시(罦:그물 부, 罳면장 시)

궁궐 건물 위를 보면 그물 같은 것이 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부시’라고 부른다.

전통 가옥의 처마는 새들이 둥지를 틀기 좋은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새들의 분비물로 인한 건물의 부식을 막고,

새를 잡아먹기 위해 뱀이 기둥을 타고 올라와 살생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부시를 설치했다고 한다.

 

 

 

 

 

   

 

 

 

 

 

 

 

 

 

 

 

  

회화나무

 

돈화문을 들어서서 왼편으로 안내판 뒤편 일대에 꽤 나이가 들어보이는 나무들이 서너그루 서 있다.

얼핏 보면 아카시아 나무같아 보이지만, 아카시아와는 달리 가시가 없고 크기도 훨씬 더 커서

한결 기품이 있는 그 나무는 괴목, 회화나무 또는 홰나무라고 하는 나무이다.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서술한 <주례>라는 책에 의하면 회화나무는 궁궐의 바깥 문을 들어서면

바로 만나는 조정 가운데 세 그루를 심게 되어 있는데 그 아래가 곧 최고 벼슬아치인 삼공이 앉는 자리이다.

 

이런 까닭이 삼괴 그러면 삼공, 곧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뜻하게 되었고, 궁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나무로 받아들여졌다.

창덕궁에도 다른 곳에 몇 그루 더 있고, 경운궁이나 다른 궁궐에서도, 그리고 서울의 다른 곳에서도 가끔 눈에 띈다.

나무에도 뜻을 심을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다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한국의 궁궐 홈에서 -

 

 

 

 

 

창덕궁


종 목 : 사적  제122호 
명 칭 : 창덕궁(비원포함)(昌德宮(秘苑包含)) 
분 류 : 궁궐 
수량/면적 : 583,516.3㎡
지 정 일 : 1963.01.18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창덕궁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충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문화재청 홈에서 -

 

 

 

금천교(錦川橋)

 

돈화문에서 어도를 따라 가보면 서쪽으로 금호문이 있는 지점에서 동쪽으로 꺾여서 창덕궁 내부로 향하게 되어 있다.

꺾인 길 앞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개울이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그 개울을 금천이라고 하는데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하는 의미와 배산임수의 뜻을 살라기 위한 명당수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금천과 어도가 만나는 지점에는 다리가 놓였는데, 이 다리를 일반적으로 금천교라 하는데 창덕궁 금천교의 이름이 금천교이다.

금천교는 창덕궁에서, 다른 궁궐을 통틀어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건조물로써 1411년(태종11) 창덕궁을 처음 지을 당시의 것이다.

 

금천교는 돌다리 치고는 상당히 넓은 다리이다.

전체가 세 구획으로 이루어진 삼도인데 가운데의 어도가 상당히 넓고 좌우에 돌난간을 세웠는데, 난간 네 귀퉁이에 동물 석상이 있다.

다리 밑에는 홍예를 두 틀 틀었는데, 두 홍예 사이 역삼각형이 이루어진 부분에는 도깨비 얼굴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한편 금천교는 현재 진선문과 숙장문의 축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지 않다.

하지만 1820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를 통해보면 일직선상의 축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2001년 현재 금천교 발굴조사를 통해, 원래의 위치에서 일제때 현재의 위치로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길이가 12.9미터, 폭이 12.5미터 이다.

 

- 한국의 궁궐 홈에서 -

 

 

 

  

 

 

 

진선문(進善門)

 

건립연대는 정확치 않으나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종 9년(1409)년에 처음 진선문과 관련된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창덕궁이 창건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908년 탁지부 건축사무소에 의해 시행되었던 인정전 개수공사 때 헐렸던 것을

1996년 복원을 착수, 1999년 완공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진선문에는 태종대와 영조대에 북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들이 와서 치면

왕이 직접 해결해준다는 신문고혹은 등문고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진선문은 남북축의 돈화문이나 인정문과는 달리  동서축으로 세워져 있어,

돈화문으로 들어와 북측으로 진행하다 동측으로 꺽어서

금천교와 진선문을 지나게 되며 다시 북측으로 꺽어서 인정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외행각의 동측 진선문에 대응하는 위치에는 숙장문이 세워져 있어 진선문과 함께 동서축을 이루고 있다.

진선문 북측 행각끝에는 동으로 정청(政廳)을 연결시키고 남측 행각끝에서는 동으로 내병조가 연결된다.

한편 진선문 현판 글씨는 1999년 복원 당시 서예가 정도준씨가 썼다.

 

- 한국의 궁궐 홈에서 -

 

 

 

 

 

 

인정문(仁政門)

 

태종 5년에 인정전과 같이 창건되고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중수하였고,

영조 20년(1744)에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3월에 재건된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 21년에 건립한 것으로 보고있으나 지금의 모습은

1912년경에 인정전의 행각을 전시장으로 만들면서 전시장 출입문의 기능으로 바꾸기 위해 벽체와 바닥의 구성이 변형된 것이다.

 

또 인정문 좌우로 접속되는 월랑도 <조선고적도보>의 사진과 '동궐도형'에서 인정문의 가로 방향 중심축에 맞춰 연결되어 있으나

현재는 인정문의 내측 칸에 맞게 회랑이 연결되어 있다.

 

인정문의 월랑과 연결되는 인정전의 동행각, 서행각도 원래는 2칸 폭의 복랑인 것을 전시장으로 만들면서 3칸 폭으로 변형되었고

인정전 좌우로 연결된 회랑도 없던 것을 추가한 것이여서 전반적으로 횔아 일곽이 변형된 현재의 모습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 구조의 겹처마 팔작 지붕이고 지붕 양식은 돈화문과 같으나 잡상의 수가 돈화문보다 적다.

정전의 대문으로는 조선시대의 궁궐이 모두 인정문과 같은 팔작 지붕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인정문의 편액(가로 200cm, 세로 80cm)은 검정 바탕에 흰 글씨로 양가하였고 선조 때의 명필인 북악 이해룡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 한국의 궁궐 홈에서 -

 

 

 

 

인정전(仁政殿)


창덕궁의 정전으로 태종 때 처음으로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광해군 원년(1609)부터 다시 짓기 시작하여 다음해 중건되었다.

인종반정때에도 화재를 면하였으나 순조 33년(1833)에 불타 순조 34년에 또다시 지었다.

창덕궁의 가장 중심건물로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20간 바탕에 팔작지붕이 두 층으로 되어 건물의 높이도 상당하다.

기둥과 지붕을 잇는 형식은 지붕을 들어올리며 크게 만드는 다포식에 단청을 화려하게 칠했다.

 

건물의 겉보기는 2층으로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한층으로 되어 있어 넓고도 높은 공간을 만들었다.

바닥은 원래 전을 깔이 마감한 전바닥이었으나 순종황제 때 서양식건축의 실내양식으로 장식되었다.

평면의 중안 어간의 뒤쪽으로 어좌가 마련되었고 일월오악병풍이 둘러 처져 있다.

천장은 우물 천장으로 특히 중앙에 보개천장을 만들고 봉황새 한 쌍을 그려 위엄을 더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용마루 양 끝에 취두를 놓고,

합각마루와 추녀마루 끝에는 용두를 얹고 추녀마루 위에는 잡상을 놓아 장식하였다.

특히 현재의 용마루에는 인정문에서처럼 5개의 이화문장의 장식을 두었는데, 이것은 일제시대때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인정전 월대 앞 중앙에 자리잡은 어도의 동쪽과 서쪽에 정 1품으로부터 시작되는 18품계석이 늘어서 있고

마당에는 박석들을 깔이 마무리하였다.

인정전의 동북쪽에 편전인 선정전이 자리잡고, 이 전각의 주위로는 행각들이 둘러싸고 있다.

 

- 한국의 궁궐 홈에서 -

 

 

 

 

박석

 

조정은 법전에 들어서면 보이는 조회를 하는 넓은 뜰을 의미한다.

조정에는 화강암으로 된 큰 돌들이 깔려 있는데, 이렇게 얇고 넓적한 돌을 박석이라고 부른다.

 

박석은 크기가 일정치 않으며 표면도 울퉁불퉁하다.

궁궐에 이런 돌을 깔았던 첫 번째 이유는 왕이 행사에 참가시 건물안에서 밝은 뜰 위에 서있는 신하들을 보게 되는데,

땅에 반듯한 돌들이 깔려 있으면 눈이 부시므로 난반사를 일으켜 빛이 분산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당시의 관원들은 가죽신을 신었는데, 돼지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미끄러운 바닥에서는 그런 가죽신이 미끄러지기 마련이니, 5센티미터 정도 되는 얇은 박석을 울퉁불퉁하게 처리하여

임금님 앞에서 행여나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정(朝廷)에 있는 박석은 약간 바깥 쪽을 향해 경사가 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비가 올 경우 박석 옆으로 물이 빠지게 되어 배수시설을 따로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차일고리

 

각 궁궐의 중심이 되는 근정전, 인정전, 명전전 등 법전의 기둥과 조정의 박석에는 둥근 쇠고리가 있다.

이 쇠고리는 중요 행사나 의례가 있어 관료들이 장시간 모여있을 때에 햇살이나 비를 가려줄 차일(천막)을 쳤는데,

이 고리가 바로 그런 차일을 치는 줄을 매던 고리이다.

 

 

  

 

 

드므

 

법전이 위치하고 있는 월대 위에 각 모서리에는 쇠솥처럼 생긴 것이 있다.

이것은 드므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궁궐의 건물들은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화재 발생시 주로 대화재가 일어나므로 불을 끌수 있는 소방수를 갖다 놓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정도 물을 갖고는 화재를 진압 할 수 없다. 이것은 일종의 의식용이다.

 

불귀신은 자기 얼굴이 얼마나 흉측하고 무서운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

래서 불귀신이 불장난을 치기 위해 법전으로 달려 오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게 되는데,

평소에 자기 얼굴을 모르고 있던 불귀신이 자기 얼굴에 놀라 도망간다고 한다.

 

 

  

 

 

 

일월오악도(일월오봉병)

 

법전 안을 들여다 보면 임금님의 용상 뒤에 큰 그림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일월오악도, 일월오봉도, 일월오봉병(병풍)이라 부르는 것으로 왕권을 상징한다.

그림의 양쪽에 해와 달이 있고, 다섯 봉우리가 있으며, 소나무와 폭포, 그리고 푸른 물결이 그림을 구성하고 있다.

이 그림은 임금을 향한 백성들의 칭송과 나라 융성의 염원, 그리고 우주 질서에 대한 외경심이 나타나 있다.

 

 

 

 

 

 

어차고(御車庫)

 

인정문에서 내의원 쪽으로 올라가는 도중 올라가는 도중 오른쪽에는

고종과 순종이 사용하던 어연과 주정소(국왕의 능향 등 행차 때에 잠시 쉬기 위한 용도의 구조물),

외바퀴의 초헌, 마차와 승용차들이 전시된 건물이 있어 승용차의 변화 과정을 실감할 수 있어 흥미롭다.

 

여기는 본래 내전으로 들어가는 대문이었던 숙장문의 안쪽이며 동시에 편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곳으로

'동궐도'에서는 빈청이라 하였고 <궁궐지>에서는 비궁당이라 하였다.

대신과 비변사(국방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당상관이 국왕을 만나기 위해 모이는 장소이며

때로는 외국의 사신이 임금을 졉견하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곳이라고 한다.

 

정면 5칸에 측면 3칸의 초익공 양식의 건물로서 현재는 내부의 벽체를 철거하여 진열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동궐도형'에서는 좌우쪽의 칸이 온돌방으로 되어 이 부분의 지붕이 맞배 지붕으로 대청부의 지붕에 직각으로 구성됨으로써

팔작 지붕과 맞배 지붕이 결합된 일종의 공자 형태의 톡특하 지붕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의 실권이 일본에 넘어가면서 1910년부터는 이곳을 궁내의 차고 사용하였다고 한다.

 

- 한국의 궁궐 홈에서 -

 

 

 

희정당(熙政堂)

 

<궁궐지>에는 편전으로 왕이 업무를 보는 장소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연산군 2년(1496)년에 "숭문당을 고처 희정당으로 명하라."는 연산군의 명으로 이때부터 기록에 희정당의 이름이 나타나지만,

당시 숭문당이 어느 건물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희정당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때 재건된 것으로 인조반정 때에다시 화재를 입고 1647년에 대조전과 함께 복원되었다.

그후 1917년 대화재 이후 경복궁의 강녕전을 이전하여 1920년 12월에 재건된다.

따라서 현재의 희정당 모습은 원래의 희정당과는 다른 모습으로 되어 있다.

 

희정당은 왕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가, 순조대에 이르러서는 편전으로 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순조 30년 5월에는 효명세자(후에 익종으로 추존)가 이곳에서 승하했으며, 고종이 경복궁 완공 전까지 머물던 곳이다.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 속에 그려진 희정당의 옛 모습은 1920년 재건되면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뀐다.

외관의 남행각에 현관을 만들고, 내부에 카펫과 서양식 가구가 놓이는 등 서양식으로 변형되었다.

정면 11간에 측면 5간의 55간 건물이다. 현재 보물 815호로 지정되어 있다.

 

- 한국의 궁궐 홈에서 -

 

 

 

 

 

선정전(宣政殿)


인정전에서 동쪽으로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이 바로 선성전이다.

선정전은 왕의 공식집무실인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대개의 궁궐 전각들이 그러하듯이 딱히 공식 집무실의 용도로만 국한되어 쓰인 것은 아닌 듯 하다.

 

세조 7년(1461년)에 조계청이었던 것을 선정전이라 하였고,

후에 임진왜란, 인조반정 등으로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다가 인조 25년(1647년)에 인경궁의 재목을 이용하여 다시 완공한다.

 

현존하는 선정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기와집으로 서울에 남아있는 궁궐 건물 중 유일하게 청기와 지붕으로 되어있다.

선정전의 내부에는 보개천장을 꾸미고, 간이한 어좌를 만들고 일월오악병풍을 쳤다.

선정전 앞에는 월대를 두었고, 월대 모서리에는 드므를 설치했다.

순조 이후에는 희정당이 편전의 역할로 주로 쓰였던 것 같다.

현재 보물 814호로 지정되어 있다.

 

- 한국의 궁궐 홈에서 -

 

 

 

 

 

 

 

 

 

 

대조전(大造殿)

 

창덕궁의 왕비 정침(왕비가 기거하면서 공식적은 활동을 하는 공간)으로 태종 5년(1405)에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광해군 때 다시 지었고, 인조반정(1623)때 또 다시 불타 인조 25년(1647)에 다시 지었다.

 

현재의 대조전은 순조 때 불타 복원한 것이 1917년 다시 불타게 되자,

일제가 복구한다는 명분으로 이미 헐어낸 경복궁의 부재의 일부만으로 재건한 것으로 옛<동궐도>의 모습과는 다른점이 많다.

 

현재는 중앙에 돌계단을 둔 높은 기단 위에 솟을대문을 두고 그 좌우로 행각을 둘러 대조전 몸체를 ㅁ 자로 감싸고 있다.

대문과 마주하는 높은 월대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월대와 대문 사이에는 어도가 있고 월대 네 귀에는 드므가 있다.

 

대조전은 정면 9간 측면 4간으로 중앙 3간이 대청이고 좌우로 온돌방들이 있다.

현재 대청은 쪽마루로 되어 있으나 이는 인정전에서와 같이 일제가 고친 것이다.

또 창호 위의 커튼박스도 그때 시설한 것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나 용마루가 없는 내전의 특색을 갖추고 있다.

대조전 뒤쪽으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행각을 두어 경훈각과 연결하였으며,

또 장대석 바른층쌓기한 석단들을 두고 그 위쪽으로 담장을 쌓아 아름다운 후정을 조성하였다.

 

- 한국의 궁궐 홈에서 -

 

 

 

 

 

 

 

경훈각(景薰閣)

 

대조전 서북쪽에 위치한 경훈각은 현재는 단층 건물이지만 원래는 2층 건물이었으며

위층을 징광루라고 하고 아래층을 경훈각이라 하였다.

그 뒤로 인조 반정 때에 소실되고 인조 25년에 중건되었다가 순조 33년에 소실되고 또 다시 이듬해에 중건된다.

순조 때 화재가 발생하기 전인 1826년에서 1830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동궐도'에서는

경훈각이 2층에 청색 기와로 그려져 있으므로 인조 연간의 중건 때에 청기와로 지붕을 이은 것으로 추측된다.

 

1917년에 창덕궁의 화재로 불타 버린 경훈각도 대조전과 함께 1920년에 중건된다.

현재의 경훈각은 바로 이 때에 경복궁의 자경전 북쪽에 있던 만경전을 철거하여 단층으로 건립된 것이다.

 

본래 경훈각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정면 9칸, 측면 4칸의 단층 건물이며

초익공계의 물익공 양식으로 겹처마 팔작 지붕이다.

건물의 정면 동쪽에서 두 번째 칸에서 복도각 4칸으로 대조전 서쪽 뒷면과 연결되어 있다.

 

건물의 앞뒷면 툇간은 복도와 부속실로 이용되고 정면 9칸에 측면 2칸을 동서로 3칸씩 나누어 가운데 칸이 대청으로 되었다.

나머지는 동 온돌방과 서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대청의 동쪽 벽에는 '조일선관도'가 서쪽 벽에는 '삼선관파도'가 그러져 있는데

대조전과 희정당이 그림과 같이 1920년에 제작된 것이다.

 

- 한국의 궁궐 홈에서 -

 

 

 

 

굴뚝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에는 그 규모나 격식에 걸맞는 굴뚝을 만든다.

특히 경복궁의 후원 아미산의 굴뚝은 정말 아름답다.

그리고 굴뚝이 있는 것은 온돌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굴뚝위에는 작은집 연가가 있는데 이 연가는 연기속의 재를 걸러주는 기능을 한다고 한다. 

 

 

 

  

 

 

 

 

 

 

 

 

 

  

내의원(內醫院) 과 성정각(誠正閣)

 

희정당 동남쪽에 남향으로 자리하여 문간채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현재 내의원으로 소개되고 있는 건물은 성정각은 원래 동궁이 학문을 배우던 곳이다.

올바른 것을 공경한다는 뜻의 건물 이름에서도 그 용도를 짐작할 수 있다.

 

내의원은 왕실의 의약을 담당하던 곳으로 인정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동궐도'에서는 "약방"으로 기록하고 있고 또 "내국"이라고도 하였다.

내의원은 고종 32년(1895)에 폐지되고 전의사로 개칭되었으므로 그 뒤에 성정각을 내의원 용도로 사용한 것 같다.

 

1917년의 화재로 임시 침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므로 1920년대의 중건 때에 내의원으로 바뀐 것 같다.

마당에는 약재를 다루던 돌절구가 남아 있다.

 

'동궐도'와 '동궐도형'에 그려진 성정각의 그림과 현존하는 건물과는 모습이 부합된다.

그런데 정조 이후의 중수 기록이 없으며, 성정각 현판이 정조 어필 이라는 기록과

성정각 동쪽의 중희당을 정조 6년에 세우는 등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 건물은 정조 연간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건물은 정면 6칸에 측면 2칸이며 동쪽 칸에는 반 칸이 돌출되어

뒤의 2칸과 같이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고 누마루 아랫부분은 개방되어 있다.

누마루 서쪽에 반 칸의 마루방이 있고 그 옆 2칸이 방, 다음이 대청,

다음 앞뒤로 방 2칸이 있고 누마루로 오르는 계단은 반 칸 마루방 앞퇴에 설치되어 있다.

 

'동궐도'에서는 성정각 앞으로 널찍한 월대가 있고 누마루 밑에도 벽과 창문이 설치되고

누마루 남쪽 끝에서 동쪽으로 담장이 세워지고 이 담장 중앙부에 일각 대문인 보춘문이 있다.

북쪽으로는 누마루의 한 칸 옆에서 북쪽으로 판장이 설치되는 등 마당이 세분되는 상태로 보아

이 건물에 출입하는 사람의 신분과 직책에 따라 통로를 구분하여 동궁이 한적하게 면학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의 판장들은 필요에 따라 이동시킬 수 있는 조립식 판장으로 그려진 특색이 있다.

성정각의 문간채는 5칸이 남아 있으며 서에서 두 번째 칸이 영현문이며

문간채 동쪽에 담장과 연결되어 있는 행각은 '동궐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 한국의 궁궐 홈에서 -

 

 

 

  

 

낙선재(樂善齋)

 

낙선재는 현존하는 살림집 가운데 최고를 자랑하고 있다.

배치 및 공간구성, 입면, 조경, 담장 어느 것 하나 허투로 다룬 것이 없어 보면 볼수록 그 조화가 놀랍다.

낙선재는 헌종 때 새로 맞이한 후궁 경빈 김씨의 처소로 석복헌을, 왕 자신의 연침(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전각)으로 낙선재를,

수렴청정을 마친 순원왕후의 처소로 쓰기 위해 기존에 있던 수강재를 중수함으로써 완성되었다.

 

낙성재의 구성은 간단하다.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나열하듯 배치하고 그뒤 구릉에 각각의 독립된 후원을 두었다.

다만 석복헌이나 수강재에 비해 낙선재는 담장이 있고, 영역이 더 세분화 되어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낙선재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볼 수 있는 사대부의 살림집보다 크기가 크고, 격이 높을며 정교하다.

그러나 낙선재에서 중요한 것은 집 자체보다 본채 뒤에 있는 야트막한 구릉을 이용한

후원의 조성 방법, 건축과 한몸이 된 조경에 있다.

위에서 아래로 조망할 수 있도록 후원의 언덕 위에는 정자를 겸함 집을 짓고,

그곳까지 갈 수 있는 길 양 옆으로 화강석 계단을 만들과 화계를 꾸몄다.

그 계단식 정원에는 전돌로 쌓은 아름다운 굴뚝과 꽃, 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각각 후원의 경계를 이루는 꽃담을 구릉의 경사를 이용해 변화감 있게 쌓았다.

낙선재는 집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건축적 요소들이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소우주를 만들고 있다.

 

- 한국의 궁궐 홈에서 -

 

 

☞ 여기서 '창덕궁 탐방 後 광화문광장 거쳐 청계천 세계 燈축제 관람' - 1부를 마치고...

 

 

 

2009년 11월 11일(수)

'창덕궁 탐방 後 광화문광장 거쳐 청계천 세계 燈축제'에 다녀오다.

   

-▥☞ 1부[종로3가역→돈화문로→창덕궁(돈화문→금천교→인정전→희정당→대조전→성정각)]는 여기를 클릭.☜▥-

 

-▥☞ 2부[성정각→후원(부용지→주합루→영화당→불로문→연경당)→향나무→금호문→동궐마루]는 여기를 클릭.☜▥-

  

-▥☞ 3부[동궐마루→운현궁 앞→천도교 수운회관 앞→광화문광장→청계광장→수표교→오간대수교]는 여기를 클릭.☜▥-

 

-▥☞ 4부[오간대수교→존치교각→두물다리 청혼의벽→존치교각→빨래터→오간대수교→나래교→삼일교]는 여기를 클릭.☜▥-

 

-▥☞ 5부[삼일교→장통교→광교→광통교→모전교→청계천 시점폭포→청계광장→서울광장→시청역]는 여기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