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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읍기행]서울의 집성촌을 찾아서, 구로구 수궁동

by 맥가이버 Macgyver 2010. 6. 3.

[소읍기행]서울의 집성촌을 찾아서, 구로구 수궁동

경향닷컴 이윤정기자 yyj@khan.co.kr

 

서울 구로구 수궁동은 서울의 서남단에 위치한 풍치지구다. 안동 권씨, 전의 이씨, 제주 고씨, 전주 이씨, 상주 박씨, 진주 유씨 등의 성씨가 집성촌을 이뤘던 옛모습을 떠올리며 수궁동을 찾았다.

우리네 선조가 꾸리던 마을의 옛모습은 어떠했을까. 현대화를 겪으며 개력해진 도시에서 그 흔적을 더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개발의 가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마을의 전통은 헤실바실 부서져 왔다. 하지만 옛마을의 흔적을 좇는 여정은 오래전 책갈피에 껴놓은 단풍잎을 찾아낸 듯한 기쁨을 살그머니 놓고 간다.

궁이 있던 마을, 천혜의 지형 속 집성촌

옛 지도에서 수궁동이 속해있던 수탄면(水呑面)을 보면 남(南)쪽을 제외한 마을 주변이 산으로 빙 둘러싸인 것을 알 수 있다. /부평군읍지


서울의 서남단에 위치한 수궁동은 구로구에 속해있지만 북으로는 양천구, 서쪽으로는 부천시와 맞닿아있다. 수궁동은 온수동의 ‘수’와 궁동의 ‘궁’을 합쳐 생긴 이름이다. 경인로를 타고 오류고가를 넘으면 북쪽으로는 궁동, 서쪽에서는 온수동을 만난다. 지난 가을 수궁동에 처음 들렀을 때의 느낌은 퍽 인상적이었다. 남쪽을 제외한 마을 주변은 모두 산으로 둘러싸였고 인근에 높은 건물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풍치지구로 지정돼 개발이 제한돼있고 건물을 올리더라도 7층 이상은 지을 수가 없다. 산에 에워싸여 야트막하고 소담한 마을이 들어선 모양이다. 실제 주민도 2만여명에 불과하다.

이곳에서 서울의 몇 안 남은 집성촌을 찾아 나섰다. 먼저 궁동으로 향했다. 1963년 서울로 편입되기 전까지 경기도에 속했던 궁동은 ‘궁’이라는 이름처럼 정선옹주의 궁이 자리했던 곳이다. 조선선조 임금의 7녀인 정선옹주는 안동 권가로 출가해 이곳에서 터를 잡았다. 그 뒤 안동 권씨 가문은 400여 년 넘게 마을을 지켰다. 6.25때 불타버린 정선옹주궁의 흔적은 현재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에 서 있는 궁골 표지석으로 짐작할 수 있다.



궁골표지석 옆 산자락에 정선옹주와 안동 권씨 가문의 묘역이 있다. 이곳에 서면 궁골이 얼마나 천혜의 지형에 들어섰는지 쉽게 짐작이 간다. 마치 와룡산이 날개를 뻗어 양옆으로 감싸고 따스한 몸으로 달걀을 품는 모습이다. 묘역 바로 아래 저수지는 ‘배산임수’의 조건을 완성시킨다. 옛날에는 하늘에서만 볼 수 있다 하여 ‘천옥(天屋)’이라 불린 궁동에는 와룡산 왼쪽 줄기로 안동 권씨, 오른쪽 줄기인 청룡산으로는 전의 이씨 가문이 터를 잡고 살아왔다.

옛 주막거리가 연립주택 단지로

온수골 옛길의 흔적이 온수동 기스락에 그대로 남아있다. /이윤정기자


다시 지도를 들고 마을을 걷는다. 논두렁, 밭두렁을 따라 휘뚤휘뚤 나 있던 길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다. 들판에 넓은 도로가 뚫리고 산을 관통하는 터널은 양천구와 부천시 양방향으로 마을을 이어준다. 원래 마을길은 지금은 복개되어 보이지 않는 오류천을 따라 형성돼있었다. 온수역 인근 동부제강 자리에는 예부터 중국사신과 우리나라 관리들이 제물포와 서울을 오가며 쉬어가던 ‘오류원’이 있었다. 당시의 주막거리는 이제 연립주택 단지와 온수산업단지가 됐다.

옛길의 흔적을 찾아 온수동으로 내려갔다. 온수동에서는 제주 고씨와 전주 이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현재 제주 고씨 6가구가 대를 잇고 있으며 아직 허물지 않은 고가(古家)도 몇 채 남아있다. 제주 고씨 영곡공파 17대손인 고상빈(58)씨와 함께 온수골 옛길을 걷는다. 마차가 지나던 흙길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고상빈씨는 “이 길을 마차길이라 불러요. 마차길 앞의 집은 250년 전 저희 문중이 온수골에 자리 잡으면서 지은 거죠.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아 폐가처럼 변했지만 예전에는 문중의 큰 제사를 지내던 온수골의 중심부였어요”라고 설명한다. 가옥을 빙 둘러선 가지나무와 뒷마당 자리에 남은 우물터, 서까래와 고방 등 옛 가옥의 정취는 감탄을 자아낸다.

온수동의 가옥은 공터에 들어선 것도 있지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에 그대로 지어진 집도 많다. 안동 권씨 16대손 권창호(60)씨는 “조선시대에는 기와집을, 일제시대에는 양철집을 짓고 살다가 18년 전에 집을 헐고 새로 지었죠. 집은 신식이 됐지만 조상이 물려준 터에 그대로 살고 있는 셈 입니다”라고 말한다. 전의 이씨 28대손 이경노(69)씨도 옛 집터에 다시 주택을 지어 살고 있다. 1360년대부터 이곳에 터를 잡은 전의 이가는 수궁동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온 가문이기도 하다.

궁골, 터골, 배밀, 삭새 등 옛 지명 따라 걷는 수궁동

마차길/ 수궁동 대부분이 연립주택단지로 변했지만 옛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이 아직 남아있다. 온수골에 자리잡은 옛길은 포장도 되지 않은 흙길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길을 '마차길'이라 불렀다. 옛날에는 마을의 큰 길이던 이 곳으로 마차가 지나다녔기 때문이다. 마차길을 사이에 두고 오래된 집(오른쪽)과 새로 지은 연립주택(뒤쪽)이 세월의 서로 다른 운명을 받아들였다. /이윤정기자


풍치지구로 묶여 개발이 제한돼있었다고는 하지만 수궁동의 옛모습을 되짚으려면 지도를 펼쳐 옛지명을 불러내야 한다. 온천이 나온다는 ‘온수골’, 온수역의 북쪽 자락 ‘터골’, 터골과 궁동을 넘는 ‘삭새’, 와룡산 원각사 인근 ‘절골’, 원각사 아래 골짜기 논 ‘배밀’, 정선옹주 궁이 있던 ‘궁골’, 안동권씨 집성촌 ‘양지말’, 전의이씨 집성촌 ‘음지말’, 오류천변 장승이 서 있던 ‘장승배기’ 등 사라져가는 옛 이름은 푸근하고 친근하다. 마을에서는 옛지명을 살려 지도를 그리고 있다. 올봄부터는 정선옹주 묘역을 중심으로 와룡산을 따라 산책로를 재정비해 공개한다.

마을 사람들은 전통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개발이 안 돼서 그나마 마을을 지켜온 것도 있지만 각 가문마다 고유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다”고 말한다. 고상빈씨는 “아직 수궁동에는 농사를 짓는 가구가 남아있어요. 토박이 주민이 많다보니 이웃의 경조사에 함께 참여하죠”라고 말한다. 전의 이씨 가문은 세종대왕이 내려준 가훈을 현재까지 이어오며 소중히 지켜가고 있다. 수궁동 주민자치위원장이기도 한 권창호씨는 표지판 하나 제대로 세워져있지 않은 정선옹주 묘역을 비롯해 마을의 구석구석을 옛 전통대로 살릴 수 있는 방안을 계획 중이다.

가는길/
서울에서 지하철 1, 7호선을 이용해 온수역에서 내리면 온수산업단지관리공단 및 온수연립주택단지가 나온다. 온수역이 위치한 곳 주변이 온수동, 동북쪽 방향에는 궁동이 자리했다. 온수동의 ‘수’와 궁동의 ‘궁’을 합쳐 ‘수궁동’이라 부른다.


정선옹주 묘역/ 풍수지리가들은 궁동을 금계가 알을 품는 듯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곳이라 말한다. 그 중심에 정선옹주와 부군 권대임, 그리고 안동 권씨 문중 묘역이 있다. 이 묘역을 중심으로 왼쪽 날개는 와룡산, 오른쪽 날개는 청룡산이 궁동을 마치 알을 품듯 감싸 안는다. 와룡산 자락 양지말에는 안동 권씨, 청룡산 자락 음지말에는 전의 이씨가 대대로 살아왔다. /이윤정기자


궁동생태공원/ 궁동저수지는 금계가 알을 품는 듯한 천혜의 지형에 배산임수의 조건까지 만족시켜준다. 예부터 이곳에 물이 고였다고 하는데 1943년 농업용수를 저수하기 위해 900여 평의 저수지를 축조했다고 전해진다.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 앞 약 2200여 평은 저수지와 어우러진 궁동생태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윤정기자


장승배기/ 논두렁, 밭두렁을 따라 휘뚤휘뚤 나 있던 수궁동 길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다. 원래 마을길은 지금은 복개되어 보이지 않는 오류천을 따라 형성돼있었다. 사진 속 길은 오류천을 따라 난 마을의 주길이었다. 나무가 서 있는 곳 근처에 장승이 세워져 있어서 ‘장승배기’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이윤정기자


제주 고씨 고가(古家)/ 현재 온수동에는 제주 고씨 6가구가 대를 잇고 살고 있다. 제주 고씨 영곡공파 17대후손인 고상빈(58)씨와 함께 250년 된 고가(古家)를 찾았다. 세월의 변화에 따라 덧대고 고친 흔적이 역력하지만 기본 구조는 옛 모습 그대로다. 고상빈씨는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아 폐가처럼 변했지만 예전에는 문중의 큰 제사를 지내던 온수골의 중심부였어요”라고 설명한다. / 이윤정기자


옛집 들여다보기/ 제주 고씨 고가의 내부는 겉에서 보는 것과 달리 정교한 손길이 살아있었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반들반들 윤이 나는 마루가 집을 받치고, 분위기 있는 서까래는 지붕을 업고 있다. 방에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고가구와 살림살이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채 세월의 흐름이 잠깐 멈춰있는 모습이다. / 이윤정기자


서까래/ 250여 년 온수골을 지킨 제주 고씨 가문의 옛집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했다. 집 바깥쪽은 시멘트, 슬레이트, 유리창 등 다양한 재료가 더해졌고 내부에도 등이 달리고 전기선이 놓였다. 지붕 안쪽 서까래 사이사이는 새로운 재료로 메워져 있다. 그래도 옛집 천장이 전해주는 아늑한 분위기는 그대로다. /이윤정기자


우물 자리/ 제주 고씨 고가의 뒷마당에는 우물이 있었다. 시멘트로 막아 놓은 너른 자리가 우물이 있던 곳이다. 이 집이 온수골의 중심지였던 만큼 뒤편에 마련된 우물터에는 하루 종일 사람이 몰렸을 것이다. 집 앞으로 난 큰 길에는 마차가 다니고 우물을 중심으로 휘뚤휘뚤 옛길이 나있다. /이윤정기자


세종대왕이 하사한 가훈/ 수궁동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인 전의 이씨 27대손 이근열(73, 오른쪽)씨와 28대손 이경노(69, 왼쪽)씨가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전의 이씨는 세종대왕이 이정간 공(전의 이씨 11대손)에게 직접 하사한 어필을 가훈으로 지키고 있다. ‘충’과 ‘효’를 전하자는 가훈대로 전의 이씨는 수궁동 집성촌에서 걸출한 인물을 배출해왔다. /이윤정기자


궁골/ 정선옹주 궁이 있었던 자리에 궁골 표지석이 서 있다. 6.25때 전소된 정선옹주 궁은 현재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 입구에 있는 표지석으로 그 흔적을 짐작할 수 있다. 권창호씨는 “학교가 들어서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주민들이 밭농사를 지었는데 기와와 그릇 등 옛 물건들이 종종 나오곤 했어요”라고 설명한다.


충정공 신도비/ 안동권씨 묘역 인근에 두 개의 신도비가 서 있다. 하나는 충정공 권협의 신도비, 또 하나는 정선옹주 부군인 권대임의 신도비이다. 사진 속 비는 충정공 권협의 공을 기리는 것인데 마모가 매우 심해 글씨를 알아보기는 힘들다. /이윤정기자


궁동의 고가(古家)/ 수궁동이 풍치지구여서 개발이 제한돼있다고는 하지만 옛집이 남은 곳은 거의 없다. 오래된 집들은 대부분 헐리고 연립주택이 들어섰다. 사진 속 집은 6.25 이전에 지어진 옛집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멘트를 덧대고 지붕을 새로 얹어 겉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구조는 옛 한옥 그대로다. 마당 한가운데 화분과 옹기를 모아놓은 모습이 정겹다. 집 바깥쪽으로는 새로 지은 연립주택이 보인다. /이윤정기자


천옥(天屋)이 교통 요지로/ 궁동은 산으로 에워싸여 하늘에서만 보이는 동네라 하여 천옥(天屋)이라 불렸었다. 하지만 이제 경인로와 산을 관통하는 터널이 놓여 부천시와 서울 양천구 등 여러 방향으로 길이 이어진다. 사진은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 옥상에서 북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이윤정기자


아직 농사를 짓는 마을/ 수궁동 산 기스락에는 여전히 농사를 지으며 사는 가구가 남아있다. 수궁동은 ‘수탄면’에 속해 있었는데 마을은 ‘수룬’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마을 주민에 의하면 옛 논에 수렁이 많아 ‘수렁논’이라 부르다보니 ‘수룬’이라는 지명을 얻었다고도 하고 ‘물’이 많아 ‘수룬’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이윤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