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꽃 피는 수수한 숲길…홍천 내면~양양 잇는 ‘구룡령 옛길’
어쨌든 심심산골 구룡령에 옛길이 하나 있다. 국도 56호선에서 살짝 파고드는 산길인데 홍천 내면과 양양 갈천을 잇는 길이다. 여기저기 옛길 찾기 바람이 불자 이 동네 사람들도 “우리도 좋은 길 하나 있는데” 했던 것이 정부에 의해 덜컥 명승 29호(2007년)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구룡령 옛길에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되어 일대 주민들이 강제 징집되었던 애환의 역사가 서린 철광소와 케이블카가 남아 있고, 옛 길가에는 1989년 경복궁 복원 당시 사용되어 밑동만 남아 있는 소나무 거목 흔적이 남아 있는 등 조선시대와 근현대사의 역사가 함께 잔존하여 역사적 가치가 큰 소중한 명승지이다”라고 나와있다.
구룡령 옛길은 국도 56호선 구룡령 휴게소 옆이 출발점이다. 산 아래서 위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 대부분 휴게소 앞에서 내려가는 길을 택한다. 처음 1.2㎞ 정도만 오르막이고 나머지 2.6㎞는 내리막길이다. 옛길 정상에서 홍천 방면 명개리쪽과 양양 방면 갈천리쪽 두 갈래가 나뉜다. 많이 찾는 쪽은 갈천리다.
명개리는 계곡길이 길고, 최근에야 다듬어졌다. 일단 야생화가 많았다. 다른 곳에서는 졌을 법한 피나물, 광대나물, 은방울 꽃이 눈에 띄었다. 구룡령은 해발 1083m로 여름이 더디다. 산 정상은 5월말 새순이 돋기 시작했다. 구룡령 옛길은 사시사철 개방되지만 인근의 산자락은 산불방지 기간으로 묶여있다가 5월24일에야
개방됐단다. 그나저나 구룡령(九龍嶺)이란 이름은 9마리 용이 지난간 흔적이란 뜻일까.
동행했던 산림청 등산안내인 김종환씨는 고려 때 이름은 구운령(拘雲嶺)이라 했다.
갈천마을 입구에 효자가 살았는데 장가를 못갔다. 산 너머 홍천 내면에서 처녀보쌈해서 도망치다 마을 사람들에게 쫓겼다. 구름이 끼어 길을 잃었는데 개가 길을 안내해서 살아 돌아왔다. 옛날에는 여성 유괴, 납치 같은 중범죄도 미담으로 여겼다. 한데 왜 이런 심심산골 산길이 없어지지 않았을까.
“심마니들하고 약초꾼들이 아직도 많이 다녀요. 그래서 길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거죠. 불과 30년 전만해도 어머니가 아이들 아프면 애 들쳐 업고 양양읍내로 병원을 다니기도 했어요.”(김종환)
마을주민 남상수씨는 1908년 옛길이 아닌 국도 56호선이 개통됐다고 했다. 자원수탈을 위해 일본인이 뚫었단다. 구룡령 정상 바로 아래가 산적 소굴이었는데 길이 개통되고 산적들이 사라졌다. 그 전에는 명개사람, 갈천사람들이 주막에서 한 이틀씩 머물다 열댓명 이상 돼야 길을 떠났다. 그래야 산적에 맞설 수 있었으니까.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긴다. 국도가 1900년대 초에 뚫렸으면 사람들도 옛길 말고 그 길로 다녔을 텐데? 그건 아니다. 구룡령 옛길 정상에서 갈천마을까지는 2.6㎞. 국도를 타면 11㎞가 넘는다. 국토가 포장된 것은 1991년. 게다가 심마니와 약초꾼들은 지금도 이 길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구룡령길의 재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울울창창한 숲길을 걷는 재미다. 정상에서 솔숲반쟁이까지는 활엽수림이 많다. 다릅나무, 피나무 같은 활엽수들이 하늘을 덮고 있다. 솔숲반쟁이 아래로는 금강송이 아름답다. 1989년 경복궁 복원 당시 이곳에서 8그루를 베어갔다. 숲길엔 쓰러져 누운 나무들이 많았다. 지난 겨울 눈무게를 못이겨 넘어진 나무들이다. 쓰러진 나무도 요즘은 함부로 치우지 않는다. 통행에 불편이 없다면 자연스럽게 놔둔다고 한다.
두번째는 이야기가 많다. 옛길 정상은 산신당이 있던 자리. 조선시대에는 과거를 보러 이 길을 드나들었던 사람들 중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가면 낙방한다는 얘기가 내려온다. 숲 중간에 숯가마터와 대장간도 있었다. 숲 속에 숯을 만들기 위해 불을 피웠다는 것은 지금이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참나무숯을 만들던 가마자리가 있다고 한다. 횟돌반쟁이라는 곳은 횟돌을 캐던 곳. 횟돌은 요즘으로 치면 시멘트다. 횟돌을 갈아 무덤 아래 위에 뿌려놓으면 나무뿌리가 관을 뚫지 못한다고 한다. 묘반쟁이에는 홍천수령과 양양수령이 내기를 했던 이야기가 내려온다. 두사람이 군의 경계를 나눌 때 서로 만나는 지점을 경계로 삼기로 했다. 양양수령을 모신 노비가 수령을 업고 열심히 뛴 덕분에 홍천군과 양양군의 경계는 홍천군쪽으로 쑥 들어간 명개 삼거리가 됐다. 하지만 이 노비는 힘을 너무 쓴 탓에 돌아오는 길에 ‘과로사’해서 수령이 제법 큼지막한 묘를 써줬고, 심마니들이 오가면서 풀도 베줬단다. 숲길 인근에 철광을 캐던 흔적도 있다. 철이 좋아서 일본인들이 양양과 삼척을 잇는 철도를 놓을까 생각했다.
70년대까지 철을 캤다. 철광석을 실어날랐던 삭도(케이블카)도 흔적이 남아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대관령 옛길처럼 움푹 파인 구간. 흔히 통행량이 많아서 그럴 거라 믿지만 비바람에 의한 침식작용 때문이다.
갈천마을 입구에는 물 좋은 계곡이 나타난다. 발 담그고 가기 딱 좋은 계곡이다. 구룡령 옛길은 초등학교 5~6학년이면 갈 수 있다. 대관령 옛길과도 다르고, 문경새재길 하고도 다르다. 행세 못했던 평범한 산마을 사람들이 다녔던 수수한 길이다. 해서 더 정겹다.
▲여행길잡이
*서울~춘천고속도로를 타고 마지막 톨게이트인 동홍천IC까지 간다. 설악산 방면 44번 국도를 타고 가다 인제 상남쪽으로 이어지는 446번 지방도를 탄다. 지방도를 따라 계속 달리면 홍천군 내면이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해서 삼봉휴양림 방향으로 올라간다. 삼봉휴양림 앞을 지나 고갯길로 계속 달리면 구룡령 정상이 나온다.
*영동고속도로를 탈 경우 속사IC에서 빠진다. 운두령방면으로 달리다 운두령을 넘어 만나는 창촌삼거리에서 홍천 내면방면으로 우회전한다. 여기서 계속 달리면 왼쪽에 삼봉휴양림이 나타나고 휴양림 앞을 지나 더 달리면 구룡령이다.
*구룡령 정상에서 차를 세워두고 길 건너 왼쪽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구룡령 옛길이다. 구룡령 옛길을 따라 양양군 서면 갈천마을까지 내려오는데는 2시간30분 정도 잡으면 된다.
*구룡령 못미처 홍천 내면 오대산 내고향(033-435-7787)이 산채와 두부전문점이다. 요즘 산채가 제철. 산채비빔밥이 좋다. 두부도 직접 만든다. 두부전골이 별미다. 민박도 하는데 황토방은 주말 5만원. 성수기에는 값이 더 오른다. 구룡령 넘어 갈천리의 경우 성수기에만 문을 여는 식당이 많다.
구름도 쉬어가는 구룡령, 노새는 쉬이 넘네
구룡령 옛길은 백두대간에서도 가장 산림이 울창한 지역인 설악산과 오대산의 허리에 위치한 대표적인 옛길이다.
홍천군 내면 명개리와 양양군 서면 갈천리를 연결하는 구룡령은 영동과 영서 사람들이 설악산·점봉산·오대산 등 백두대간 장벽으로 나뉘어 산지와 해안 지역을 오가는 것이 힘들었던 시절 두 지역을 연결해주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 구룡령 옛길은 비탈을 따라 힘겹게 올라가는 길이 아니다. 대신 비탈에 수없이 굽이를 줘 발품을 팔아도 힘겨움이 덜하도록 최대한 배려한 흔적이 많다. |
영동 북부 양양·속초 등지에 살았던 이들은 한계령·미시령·진부령보다는 주로 구룡령을 통해 홍천이나 평창으로 다녔다. 고속도로를 내면서 옛길을 곳곳에서 토막내는 바람에 원형이 많이 사라진 한계령·미시령·대관령 등에 비해 구룡령 옛길은 백두대간의 영서와 영동을 연결하는 옛길 가운데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전돼 있는 길로 꼽힌다.
산지와 해안을 잇던 거의 유일한 통로
구룡령 옛길은 우리 사회가 옛길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구룡령의 지명과 위치가 현재 잘못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지리에 밝고 산을 잘 안다는 사람들조차 구룡령의 옛길은 모른다. 대부분이 구룡령 하면 지금 차가 다니는 56번 국도가 넘나드는 고개를 원래의 구룡령길이라 생각한다. 이 도로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자원 수탈 목적으로 구룡령 고개에서 1km가량 떨어진 곳에 개설한 비포장도로가 지난 1994년 포장된 것이다. 일제 당시 일본인들이 지도에 원래의 구룡령의 위치가 아닌, 차가 다니는 비포장도로를 구룡령으로 표기하면서 사람들은 구룡령의 위치를 잘못 알기 시작했다. 더욱이 94년 이후에는 모든 지도와 행정 표기에서 구룡령의 위치가 현재 차가 다니는 지점으로 정리됐다. 백두대간을 연구하고 관리하는 정부나 민간단체, 학자들조차 구룡령길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구룡령 옛길에는 조상들이 어떻게 길을 다녔는지를 보여주는 원형이 남아 있다. 요즈음 사람들은 영서와 영동을 차로 넘으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백두대간의 험한 지형을 실감한다. 그래서 이런 급경사의 산지에서 말이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길을 걸어보면 구룡령 옛길에서 노새와 조랑말 등이 큰 등짐을 지고 다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된다. 그만큼 옛길은 힘겨운 고개를 가장 힘이 덜 드는 형태로 만들어놓았다. 비탈길이어도 최대한 경사를 누인 길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은 누군지도 모를 옛사람들의 지혜가 세월과 함께 쌓인 덕분이다. 어떤 빼어난 등산로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자연 속에 파고드는 절묘한 흐름이 길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숲과의 조화가 자연스럽고 깊다는 점은 걸어보면 단박에 느껴진다. 똑같은 고도의 등산로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여유가 길에 묻어 있다.
△ 구룡령 옛길에는 농기구를 만들기 위해 철을 캐던 전통 광산의 흔적이 동굴 형태로 남아 있다(위). 구룡령 옛길의 양양 쪽 들머리인 갈천분교(아래). |
지리산이나 설악산 등 큰 산의 등산로를 오르다 보면 주변의 숲을 감상하기 어려운 비탈과 고빗길이 수없이 펼쳐진다. 그래서 산쟁이들 가운데서도 발품이 노련하고 옹골진 이가 아니면 대부분 숲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하고 정상으로 오르기에 바쁘다. 하지만 구룡령 옛길은 숲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 옛사람들은 요즘 일부 등산꾼들처럼 싸우는 듯이 산길을 걷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갈 길이니 최대한 여유 있고 천천히 걸음이 이어지도록 길을 냈던 셈이다. 그러다 보니 숲의 원형이 훼손되지 않으면서도 다니기에 편안한 길이 되었다. 선조의 경험과학이 녹록지 않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솔반쟁이, 묘반쟁이, 횟돌반쟁이…
구룡령 옛길에는 굽이굽이 민중들의 꿈과 희망, 아픔과 좌절도 녹아 있다. 특히 일제시대 때 숯을 구웠던 재탄장과 함께 철광의 흔적이 남아 있다. 농경사회의 시작과 함께 철기문화가 열리면서 양양 일원으로 공급한 철로 만들어진 농기구의 원재료를 구룡령의 옛길 한쪽에서 생산해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철을 캐던 동굴이 그대로 남아 있다. 광산이 일제 강제수탈의 현장이었던 점도 흔적을 통해 확인된다.
숲으로 펼쳐진 구룡령 옛길의 또 다른 상징은 금강소나무다. 1980년대 말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 많은 금강소나무가 베어진 뒤 국내에는 금강소나무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드물다. 무리를 이룬 200~300년 된 금강소나무들의 붉은 기운이 하늘로 뻗어 있다. 굵은 금강소나무의 표본인 곳이라 해 ‘솔반쟁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젊은 청년 죽은 터는 ‘묘반쟁이’, 장례식의 하관 때 회다짐을 하기 위해 쓰던 횟가루를 생산한 곳이라는 뜻의 ‘횟돌반쟁이’ 등의 지명도 남아 있다.
구룡령의 영동 쪽 방향 하늘 아래 첫 마을인 양양군 서면 갈천리에 사는 엄익환(70)씨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구룡령 옛길을 살리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갈천리는 백두대간에서도 대표적인 첩첩산중으로 골이 깊고 숲이 울창한 곳으로 ‘갈천약수’로 더 알려져 있다. 오대산을 중심으로 설악산 일대까지 50년 가까이 산삼을 캐러 다녀 백두대간 심마니로 잔뼈가 굵은 엄씨가 구룡령의 옛길을 되살리려 하는 것은 산림이 곧 생활 터전이었던 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오대산·설악산 지역의 내력과 문화, 역사를 줄줄 꿰고 있는 그의 삶과 구체적으로 닿아 있다. 그는 들머리와 날머리 등을 비롯해 구룡령 구석구석 옛길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곳마다 담겨진 사연을 기록하고 정리하고 있다. 심마니로서 구룡령 일대의 백두대간을 어릴 때부터 수없이 다녔던 기억을 되살려 옛 지명과 유래를 밝혀주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엄씨는 “내가 이 길의 내력과 이야기를 후대에 전해주지 않으면 영동 북부와 영서 내륙이 만나고 빚어낸 사연은 그냥 사라질 것이 아닌가”라며 “그것이 내 남은 생의 꿈이자 보람”이라고 말했다. 엄씨는 군대를 제대한 뒤 본격적인 심마니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수십 년 발품으로 산을 다니며 받은 산삼으로 4남매 자식들을 길러내고 분가시킨 뒤 지금은 아내와 함께 크게 넉넉하지 않아도 곤궁하지는 않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엄씨를 비롯한 갈천리 주민 모두는 구룡령 옛길을 지켜온 산증인들이다. 엄씨와 마을 주민들의 옛길 복원 노력은 결실을 맺고 있다. 지난 10월12일 구룡령 정상에서는 ‘구룡령 옛길 걷기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양양군청과 강원도청, 동부지방산림청 관계자들과 등반객 등 300여 명은 이날 양양과 홍천을 넘나드는 옛길을 따라 5km 정도를 걸었다. 특히 구룡령 옛길의 들머리가 시작되는 곳으로 삼기 적절한 56번 국도가의 갈천분교는 그 소담한 풍경이 대한민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여서 참석자들이 눈길을 떼지 못했다. 이곳은 몇 해 전에 폐교가 되어 지금은 수련원으로 쓰이고 있다.
10월에는 ‘옛길 걷기대회’ 열려
구룡령 옛길은 엄씨가 떠나고 갈천리 주민들의 기억이 사라지면 영원히 역사에 묻힐 가능성이 큰 길이다. 백두대간의 문화적 원형과 생태적 유산이 녹아 있는 이 옛길이 주민들의 뜻처럼 제대로 관리되고 이용된다면 우리 사회는 그 어떤 포장도로보다 의미 있고 풍부한 길을 하나 더 가지는 셈이 된다.
고개 넘던 사연은 가물가물
우리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옛길은 영남대로와 호남대로 등이다. 이 길들은 삼국시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 땅의 주요 축선이었다. 영남대로는 서울 남대문을 나서면서 시작돼 문경새재를 넘어 부산 동래까지 이어지는 길로 조선시대의 관리, 장사꾼 등 한양으로 올라가는 이들에게 필수적인 도보 교통로였다. 이런 옛길 가운데서도 가장 이질적인 문화가 교류했던 곳이 바로 태백산에서 금강산 너머 원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고갯길이었다.
이 길을 통해 영동 지역의 소금과 미역 등 해산물과 영서 지역의 곡식, 임산물 등의 교류가 이뤄졌다. 일제 강점기까지 생활의 많은 부분을 자연산물에 의지하던 시절 바닷가의 산물이 주를 이루던 영동과 산림의 산물이 주를 이루던 영서가 오갔던 이동통로가 바로 백두대간의 고개였다. 특히 이 고개는 영동 사람들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로였다.
이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길이 대관령 옛길이다. 대관령 옛길은 고속도로가 뚫렸지만 그래도 옛길의 역사가 일부 남아 있는 편이다. 하지만 백두대간의 나머지 주요 옛길은 포장도로와 함께 그 문화와 역사도 거의 다 사라졌다. 삼척의 댓재, 백봉령, 삽당령, 닭목재, 진고개, 한계령, 미시령, 진부령 등 대부분의 고갯길은 옛길의 흔적이 바랜 지 오래다. 이제는 사연과 이야기마저 가물가물하다.
지리산에서 비무장지대 삼재령까지 약 700km에 달하는 백두대간 가운데 옛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차를 타고 넘을 수 있는 백두대간 고갯길만 헤아려도 70여 곳이다. 최근에는 속리산 자락의 밤재와 점봉산의 조침령에 포장도로가 개설됐다. 이화령에는 4차선 국도가 있는데도 그 옆에 다시 고속도로가 뚫렸다.
|
||||
구룡령=글·사진 서재철 녹색연합 국장
한겨레21 / 2006년11월10일 제634호
'▣산행·도보여행정보☞ > ♡ 산행·여행 지도 &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원도 정선 소금강 (0) | 2010.07.06 |
---|---|
한계령 보석 같은 길 '남설악 흘림골' (0) | 2010.07.06 |
강원도 화천 파로호 100리 산소길로 떠나요 (0) | 2010.07.01 |
흙길, 숲길, 강변길 이어지는 ‘화천 100리 산소길’ (0) | 2010.07.01 |
관악산 계곡+폭포 등산지도 (0) | 2010.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