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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싶다☞/♤ 도시와 산

[도시와 산] (17) 울산 무룡산

by 맥가이버 Macgyver 2010. 11. 11.
[도시와 산] (17) 울산 무룡산

울산 시내에 있는 무룡산(舞龍山)은 해발 452m로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울산의 진산(鎭山)으로 옛날부터 수호산으로 추앙받았다.

왜구로부터 울산을 지키는 천혜의 요새 역할을 했다.

동해와 연결된 정상에서의 경치는 일품이다.

정상에서 석유화학공단을 내려다보는 야경은 울산 12경에 포함될 정도로 빼어나다.

앞을 못 보는 슬픈 용과 산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든다는 등 많은 전설도 풀어낸다.

 

▲ 산악자전거 동호인들이 울산시내가 저멀리 내려다 보이는 무룡산 정상의 임도를 따라 페달을 밟고 있다. 울산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용이 승천 산에 묘를 쓰면 ‘가뭄’

 

무룡산은 앞을 보지 못하는 슬픈 용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옛날 무룡산 꼭대기 연못에는 일곱 마리의 용이 살았다.

어느 날 선녀 일곱이 내려와 용들과 어울려 논 뒤 함께 하늘로 올랐다.

그러나 용 가운데 앞을 못 보는 한 마리가 하늘로 오를 수 없어 마음씨 착한 한 선녀가 남았다.

옥황상제는 이 일로 진노했고, 선녀와 용들은 다시 무룡산 연못으로 귀양을 왔다.

 얼마 뒤 옥황상제의 노여움이 풀려 선녀와 용들은 모두 승천했다. 그 후로 무룡산에는 연못이 없어졌다.

산 정상에 묘를 쓰면 울산에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한다.

무룡산에 몰래 묘를 쓰면 자손들이 발복한다는 풍수설이 있어 종종 사람들은 암장했다.

그때마다 크게 가뭄이 들어 주민들은 암장을 찾아냈다고 한다.

울산읍지에 따르면 1924년 여름 큰 가뭄이 계속돼 농작물이 말라죽어 먹을 게 없게 되자 주민들이 무룡산에 몰래 쓴 묘를 파헤쳤다.

이 때문에 묘 주인과 주민 간에 싸움이 발생해 20여명이 경찰에게 붙잡혀 갔다.

 

무룡산은 쓰시마섬과 가까워 왜구들과 관련된 각종 얘기가 전해온다.

신라 충신 박제상(363~419년)이 418년에 눌지왕의 아우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 왜국으로 출발한 곳이 무룡산 아래 바닷가에 있는 유포(柳浦)다.

현재 북구 강동동 판지마을에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성터인 ‘유포석보’(柳浦石堡)가 있다.

유포석보는 조선 세조 5년(1459년) 축조된 이후 울산과 경주 등 10개 고을에서 징집된 300명의 장정이 3교대로 지켰다고 한다.

무룡산은 왜구들이 울산으로 숨어드는 것을 막는 천혜의 요새였다.

초창기 왜구들은 쓰시마섬을 출발, 유포에 상륙한 뒤 무룡산 고갯길을 이용해 울산에 잠입했다.

그러나 세조 이후 경상 좌병영(울산 병영)이 유포와 무룡산에 군사를 배치하면서 길이 완전히 차단됐다.

왜구들은 울산과 경북 경주의 경계지역으로 우회해야 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무룡산 고갯길은 왜구들에게 내주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통화 관문

 

무룡산 정상에 오르면 우리나라 통신발달사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통화시설이 무룡산 중계소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근대적인 국제통화방식인 지름 19m의 스캐터(전파를 바다를 향해 발사하는 방식) 통신용 안테나가 설치된 곳이다.

정부는 1968년 6월 일본 하마다(濱田)와 가장 가까운(270㎞) 무룡산에 중계소를 설치했다.

1980년 11월 한·일 간 해저케이블이 개통돼 국제통화가 이원화될 때까지 이곳은 우리나라 유일의 국제통화 관문이었다.

1991년 3월 해저 광케이블을 통한 국제통화가 일반화되면서 운영이 중단됐고, 같은 해 11월 한국통신 사적 제5호로 지정됐다. 2000년 12월 시민들에게 무료 개방됐다.

무엇보다 이 안테나는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한·일 프로레슬링 경기를 TV로 볼 수 있게 해준 시설이다.

당시 국민들은 일본에서 열린 김일 선수와 안토니오 이노키(猪木?至) 간의 프로레슬링 경기를 보면서 열광, 또 열광했다. 지금은 초고속해저 광케이블에 일자리를 뺏긴 채 세월의 뒤안길에서 자리만 지키고 있다.

등산객 김용수(53)씨는 “무룡산 중계소가 없었으면 아마 우리는 김일 선수와 이노키 선수의 한·일 프로레슬링 경기를 볼 수 없었을지 모른다.”면서 “스캐터 통신은 당시 프로레슬링의 인기만큼이나 한·일 전파교류에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무룡산은 지역 주민들의 삶이 진하게 묻어 있다.

가난했던 옛날 인근 주민들은 무룡산에서 나물과 약초를 캐고, 땔감을 구했다.

칡이며, 각종 나무열매며, 가재와 물고기가 풍부해 주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다.

집에서 기르던 가축들은 무룡산에서 풀을 뜯으며 농사일을 할 힘을 길렀다.

쉼터 역할을 하는 약수터도 있다.

 

무룡산의 산행길은 십수 군데가 있지만 컴퓨터과학고(구 화봉공고) 뒤편 화동저수지로 올라가는 코스가 완만하면서도 정겹다.

정상은 언제 와도 시원하다. 푸른 동해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아득한 수평선 너머에서 달려온 바람이 휭휭 얼굴을 스쳐 달음질해간다.

정상에서 북쪽 능선을 바라보며 하산길을 택하면 쉽게 내려올 수 있다.

울산을 대표하는 노래인 ‘울산아리랑’에서도 무룡산의 기품이 잘 드러나 있다.

‘운무를 품에 안고 사랑 찾는 무룡산아….’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울산지역 노래방의 단골 레퍼토리가 될 정도로 시민의 가슴 속에 각인돼 있다.

 ‘울산아리랑’의 2절 중간쯤에 나오는 정자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울산의 동쪽에 있는 무룡산은 도심의 산답게 거미줄처럼 등산로가 뚫려 있어 울산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많은 산꾼들도 즐겨 찾는다.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무룡산에서 본 야경, 마치 보석 뿌려놓은 듯… 울산 12경중 으뜸

 

“무룡산에서 관망하는 울산공단 야경은 마치 보석을 뿌려 놓은 것과 같이 아름다우며, 울산이 한국의 산업수도로서 긍지를 느낄 수 있는 역동성과 상징성이 있다.”

 

클릭하시면 원본 보기가 가능합니다.

▲ 무룡산 정상에서 바라본 석유화학공단의 야경. 마치 보석을 뿌려놓은 듯 아름답다.

 

울산시가 무룡산 정상에서 바라본 석유화학공단의 아름다운 야경을 설명한 글이다.

무룡산은 울산 12경 중의 하나로 선정되면서 울산산업의 이미지와 연계돼 있다.

울산의 진산(鎭山)이 도시의 발전을 가져온 산업화와 연계돼 새로운 의미를 만들고 있다.

최근 방학을 맞은 딸과 아내를 데리고 산행에 나섰다.

밤에 오른 무룡산은 하늘과 땅이 바뀌어 있었다.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웅장한 ‘불의 나라’는 별들로 이뤄진 우주. 땅에서 쏘아 올린 불빛에 가려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에는 둥근 달이 망망대해로 흘러간다.

시간의 물줄기를 따라 둥근 달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흘러가지만 거대한 밤의 왕국은 불빛이 꺼질 줄 모른다.

여름밤. 야간산행은 이렇듯 한낮의 불볕더위에 지친 도시민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과 사방에서 심포니를 이루는 풀벌레 소리, 그리고 시골마을 유년의 기억이 가물가물한 한여름 밤의 수많은 별. ‘아빠, 너무 예뻐요!’라고 연신 외치는 딸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흩어진다. “그래 예쁘다.”라는 아내의 목소리가 맞장구를 친다.

 

무룡산 주변에는 수년 전의 산불로 나무가 없다.

민둥의 등산로는 공단의 불빛을 그대로 받아 대낮처럼 환하다.

찌르라기들의 합창과 등 뒤로 불어오는 솔바람을 친구삼아 공단 야경을 내려다보노라면 세상 어디에도 이런 ‘카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에는 둥근 달을 띄워놓은 망망대해를, 땅에는 불야성의 별천지를 갖춘 이런 카페가 또 어디에 있을까.

하물며 풀벌레들이 들려주는 생음악에, 적당하게 식은 산들바람은 어느 누가 만들 수 있을까.

정자 해변에서 떠오른 달은 여천공단 중천을 한참이나 노닐다가 마침내 시청 뒤 남산 너머로 사그라져 간다.

무룡산의 야간 산행은 어느 곳에서도 즐길 수 없는 여름밤의 추억을 만들어 준다.

석유화학공단의 웅장한 불길은 시민들에게 오늘의 삶이자 내일의 미래를 밝혀주고 있다.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서울신문 2009-07-27  2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