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읍기행]외나무다리의 사연이 얽힌 곳, 영주시 무섬마을
500년 전통을 이어 살아가는 50여 채의 기와집과 초가집.
무섬마을로 찾아갔다.
2009년 1월 시작한 '소읍기행'이 88회를 맞이했다.
매주 수요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한국의 아름다운 마을을 찾아간 것이 88주째다.
연재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을은 경북 영주시 수도리, 일명 '무섬마을'로 정했다.1666년 반남박씨(潘南朴氏) 휘 수(諱 燧)가 이곳에 들어와 터를 닦고 집을 지었다.
이 후 예안김씨(禮安金氏) 휘 대(諱 臺)가 들어오면서 두 성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 됐다.
지금도 50여 채의 전통가옥을 지키며 살아가는 마을이다.
무섬마을의 상징 외나무다리 / 이다일기자
"외부에 있던 사람이 외나무다리를 건너 들어오면 꼭 빠지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무섬마을 갈 때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외지의 때를 모두 벗어버리고 들어가야 빠지지 않는다고 했어요"
무섬마을 보존회 박종우회장(70)의 말이다.
무섬마을은 마을을 감아 도는 물길 때문에 외지와 단절됐다.
육지라고 하지만 마을 앞은 물이 흐르고 뒤로는 산이 둘러쌌다.
풍수지리상으로 배산임수의 형태다.산자락 끝에 자리했고 앞에는 물이 흐르기 때문에 논이나 밭을 만들 공간이 없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강 건너 30리까지 농사를 지으러 다녔다.
무섬마을에 드나드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외나무다리였다.
1970년대 지어진 콘크리트 다리 덕택에 외나무다리는 사라졌다가
지난 2005년 마을의 옛 모습을 복원하면서 다시 돌아왔다.
박회장은 "옛날에는 저 다리로 가마타고
시집오고 또 죽으면 상여가 저 다리로 나갔어요.이 마을 사람들에겐 사연이 많은 다리지요"라고 말했다.
외나무다리는 여름이면 사라진다.
비가 와서 물이 많아지면 다리가 쓸려 내려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치와 철거
를 반복하는 다리다. 구조도 간단하다.통나무를 절반으로 쪼개서 의자처럼 다리를 붙였다.
그리고 물에 박아 넣은 것이 외나무다리다.
여름이면 사라지는 다리라 농사일과는 호흡이 맞지 않는다.
비가 많이 오면 논, 밭을 둘러보러 강 건너로 가야하는데 다리가 없으니 난감했다.
마을 사람들은 물살이 약하면 헤엄쳐 건너가기도 했고 한국전쟁때는 군용 보트에 의존해서 강을 건너기도 했다.
글 읽고 분수 지키며 살아가는 마을
1970년대 새로운 다리가 놓이면서 외나무다리는 사라졌다. /이다일기자
무섬마을도 여느 시골 마을처럼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기 힘들다.
올해 일흔인 박회장이 마을에서 네 번째로 젊다. 그래서 마을에는 일 할 사람이 없다.
강 건너에 포도밭이나 고추밭을 소일꺼리로 하기는 하지만 크게 농사를 짓는 사람은 없다.
마을일을 공동으로 하기도 쉽지 않다. 그저 자기 집 손질이라도 잘 되면 다행이다.
하지만 방학이나 명절이 되면 얘기가 다르다.
평소 4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마을에 손자, 손녀들이 들어온다.
박회장은 "지난여름에는 한 200명쯤 되더라고요.
여기 주민들에 아들, 딸이 놀러오면서 아이들도 같이 오니 동네가 북적북적 했어요"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관광객들도 늘어났다. 주로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또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같은 전통 마을이 유명세를 타면서 무섬마을도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해마다 10월에 진행하는 '외나무다리 축제'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무섬마을에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외나무다리와 함께 보여준다.
무섬마을 사람들은 예로부터 공부를 많이 했다.
90세가 넘은 노인들 가운데에도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있다하니 학구열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주로 관직보다는 학계에 많다고 한다.
50여 채의 집이 있는 작은 마을에서 현직 대학교수가 16명이라고 한다.
시인 조지훈의 처가도 이곳이다. 마을을 안내해 준 박종우 회장도 35년간 교직에 있었다.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
기와집과 초가집 / 무섬마을에는 50여 채의 전통가옥이 있다.낮은 담장에는 꽃과 풀이 피어나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 이다일기자
마을에는 'ㅁ'자 형태의 기와집을 포함해 50여 채의 전통가옥이 있다. 그중에 12채가 빈집이다.
집 주인은 대부분 도시에 살고 있다. 방학이나 휴가철이면 가끔 내려와 머무르는 게 전부다.
하지만 한 집도 외지인에게 팔지 않았다. 모두 박씨 아니면 김씨 가문에서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오래 동안 비어있던 집에 사람들이 들어왔다. 무섬마을이 고향인 사람들이다.
도회지에 나가 생활을 하다가 수 십 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근 안동에 가족들을 두고 홀로 들어온 노인도 있었고 서울에 아들, 딸을 두고 옛 집으로 내려온 할머니도 있었다.
400년 가까이 된 고택에 살고 있는 할머니는 "서울에서 오래 살았지만 그래도 고향이니까 내려왔지.
여기는 공기도 좋아서 아픈데도 낫는 것 같아"라고 말하며 고향에 돌아온 소감을 얘기했다.
아름다운한국 ‘소읍기행’ 연재가 88회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그동안 한국의 아담하고 아름다운 마을을 찾아 1년 8개월을 달려왔다.
척박한 땅에서 삶을 일군 사람들부터 천혜의 자연환경에 터전을 가꾼 사람들까지.
다양하고 재미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버무려져 소읍기행이라는 맛있는 식탁이 차려졌다.
소읍기행은 분명 마을이야기였다. 그러나 환경이 아닌 ‘사람’이 그 주인공이 됐다.
‘어디에서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교훈을 전해준
소읍기행의 주인공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중앙고속도로 풍기IC에서 들어가면 된다.
서울에서 대략 1시간 50분 거리다.
동서울터미널이나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영주시까지 하루 26회 버스가 운행된다.
영주역에서는 3번 버스를 타고 영주여객에서 선비촌행 버스로 갈아타면 된다.
장작/ 집집마다 장작을 쌓아 놨다. 겨울에 장작불을 때는 집이 많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아랫목이 뜨끈해서 좋다고 한다. 정작 마을에는 노인들뿐이라서 젊은 사람들이 있을 때 장작을 해 놓거나 돈을 주고 사다놔야 하는 실정이다. / 이다일기자
김위진 가옥 / 'ㅁ'자형 기와집으로 19세기 말에 건립됐다. 하지만 옛날 형식을 그대로 유지해 가치가 높다. / 이다일기자
지붕위의 박 / 맑은 하늘 아래, 초가지붕 위로 박이 열렸다. 기와 담장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정겹다. 옛날 박이 열려 큰 복을 얻었다는 흥부전의 한 대목이 생각나는 풍경이다. / 이다일기자
만죽재고택/ 무섬마을에 제일 처음 자리 잡은 고택이다. 반남 박씨 휘 수(1641~1729)가 마을 서편 강 건너 머럼에 거주하다가 현종 7년(1666년)에 이곳으로 들어와 지은 집이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며 지금도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 이다일기자
해바라기/ 제방 아래서 올려다보니 해바라기가 아래를 내려 보고 있었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이라 해를 보지 않는 것일까? 무섬마을은 1970년대 제방을 쌓았다. 제방이 없을 때에는 대청마루에 앉아서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이다일기자
해우당고택/ 선성 김씨 입향조 김대의 셋째집 손자 영각이 1856년에 건립한 주택이다. 경상북도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ㅁ'자형 가옥이며 무섬마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집이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해우당의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 이다일기자
무섬마을 전경 / 내륙 한가운데 있지만 마치 섬처럼 보인다. 무섬마을의 모습이다. 1970년대 완공된 다리가 유일한 통로다.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외나무다리에 의존해서 마을사람들이 다녔다. / 권호욱기자
외나무다리/ 마을을 오가던 외나무다리를 지난 2005년 복원했다. 여름철이면 불어난 물에 휩쓸려 내려갈까 봐 미리 철거해두던 다리다. 지금은 물이 많지 않은 계절에 관광객들을 위해 설치해두고 있다. 또 매년 10월에 외나무다리축제를 열고 있다. /정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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