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 속 그 이야기 (41)] 전남 나주 풍류락도 영산가람길
[중앙일보] 입력 2013.09.13 00:30 / 수정 2013.09.13 09:09천 년 역사의 향기 따라, 톡 쏘는 홍어 냄새 따라 …
1 나주의 핏줄 영산강을 걸었다.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외딴 동섬으로 가는 목교에서 본 영산강의 풍경.
전남 나주는 ‘나주 배’의 고장으로만 각인되기엔 억울한 곳이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남도의 행정·경제·문화의 중심지로 군림하면서 쌓인 사연이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나주읍성부터 시작해 금성산, 나주영상테마파크, 고대 마한의 유적인 반남고분군 등을 잇는 ‘풍류락도 영산가람길’은 서 말 구슬을 잘 꿰어 만든 보배다. 7개 구간 63㎞에 이르는 이 길을 문화체육관광부가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했다. week&이 그중에서 제1길(6.5㎞)과 제3길(9.3㎞)을 골라 걸었다. 구간은 나눠져 있지만 길은 이어져 있다. 나주읍성을 중심으로 조성한 제1길을 걸을 때는 고도(古都) 나주의 위상을 느낄 수 있었고 제3길에서는 영산강을 터전으로 삼은 민초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2 나주 읍성 안에 있는 금성관. 사신이나 중앙관리의 숙소로 사용됐었다. 3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등록된 남파고택.
천 년 전 풍경을 걷다
금성산 끝자락에 조성한 인공저수지 한수제에서 제1길이 시작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읍성 서문 바로 밖에 있는 나주향교에 도착했다.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 마당에는 이성계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가 버티고 있었다. 학생들이 교실로 사용한 명륜당 뒤로는 금성산 자락의 낮은 봉우리가 나주향교를 보듬고 있는데, 이름하여 ‘장원봉(壯元峰)’이다.
향교를 둘러보고는 서성문을 지나 읍성에 진입했다. 나주읍성의 첫인상은 허름했다. 길은 좁고 3층 넘는 건물이 거의 없었다. 읍성을 지금 그대로 보존하려는 나주시의 정책 때문이었다. 길 해설을 맡은 윤지향(43) 학예연구사는 “나주읍성은 다른 읍성과 달리 박제화되지 않았다. 읍성 안에서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어 살아 있는 문화재다”고 힘줘 말했다.
성의 안과 밖을 구분해 주는 성벽은 없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오밀조밀한 민가 사이로 자동차 두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길이 이어졌는데, 평범해 보이는 이 길이 천 년도 넘은 길이란다. “옛길에 아스팔트만 깔고 차가 지날 수 있도록 살짝 넓히기만 했다”는 윤지향 학예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나주 목사내아에 도달했다. ‘목(牧)’은 지금의 ‘도(道)’ 개념으로 보면 된다. 고려는 전국을 12목으로 나눠 관리(목사)를 파견했다. 그러니까 지금 나주는 인구 8만여 명에 불과한 지방의 중소도시에 불과하지만 천 년 전에는 전국 12개 도시 중 하나였다는 뜻이다. 나주목사의 살림집이었던 목사내아는 현재 숙박시설로 쓰인다. 여기에 묵으면 시험·관운이 따른다고 소문이 나서 나주에 들르는 정치인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이 묵어간다고 한다.
풍수로 말하면 노령산맥에서 내려온 용이 영산강 물을 먹으려고 강 쪽으로 머리를 댔을 때 정수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목사내아라고 한다. 나주목사는 정3품, 지금으로 치면 차관급인데 그가 묵었던 집은 의외로 소박했다. 묵직한 대문을 열자 정면으로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ㄷ’자 한옥이 보였다. CD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가야금 소리가 운치를 더했다.
나주관아 정문이었던 정수루를 통과해 금성관으로 향했다. 금성관은 사신이나 중앙관리가 나주를 방문했을 때 숙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문을 통과해 정면으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정청(政廳)인데, 여기서 매월 1, 15일과 왕의 생일 때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인 ‘망궐례(望闕禮)’가 열렸다.
금성관에는 다른 객사(客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구조가 있다. 정청 앞에 단을 높여 만든 ‘월대’와 평평한 돌을 박아 만든 바닥이다. 궁궐에만 쓰인 건축기법인데, 궁궐이 아닌 건축물 중 유일하게 금성관에만 있다고 한다. 과거 나주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다.
4 완사천에는 왕건과 그의 둘째 부인 장화왕후 오씨가 처음 만난 장면을 재현한 조각상이 있다. 5 홍어로 이름난 영산포에는 홍어 전문집 수십 개가 모여 홍어의 거리를 형성했다.
호남의 핏줄 영산강을 따라서
금성관을 등지고 나주천을 건너 밀양 박(朴)씨 나주 종가인 남파고택(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53호)을 지났다. 읍성 동문인 동점문 부근에 있는 남산시민공원을 통과하자 읍성 밖으로 길이 이어졌고, 옛 나주역사에서 자전거도로를 따라 3㎞ 정도 걸어 1구간의 종착점인 완사천에 도착했다.
제3길은 제1길 종점 완사천에서 바로 시작됐다. 완사천은 왕건과 그의 둘째 부인 장화왕후 오씨 부인이 처음 만난 곳이다. 원래는 개천이었는데 도시가 개발되면서 물길이 사라졌고 대신 그 자리에 샘을 만들었다.
나주역을 지나고 드디어 영산강을 마주했다. 강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섬 하나가 떠 있었다. 동섬이다. 동섬으로 가는 다리에 서서 강을 바라봤다. 전날 내린 비 때문에 물은 다리 밑까지 차 올랐고, 물기를 머금은 강변의 풀에는 생기가 돌았다. 엄지 손톱만 한 청개구리가 벗어놓은 배낭으로 튀어 올라 앉았다. 청개구리를 배낭에 모시고 쉬엄쉬엄 20분을 걷자 영산포로 가는 영산교가 나타났다.
영산포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나주를 호남 지역 수탈의 근거지로 삼기 위해 만든 내륙 항구다. 조선시대까지 주로 사용했던 포구는 지금의 나주역 부근이었다. 남도 전역에서 거둬들인 물자가 영산포로 흘러와 한양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지금, 포구는 흔적도 없다. 나주역을 만들기 위해 옛 포구 자리를 간척했기 때문이다.
6 영산포등대.
영산교를 건너자마자 홍어 식당이 줄이어 있는 ‘홍어의 거리’가 시작됐다. 강력한 홍어 냄새가 사방에서 풍겨왔다. 영산포 홍어의 유래는 이렇다. 고려 말 흑산도·영산도 등지에 살던 섬사람들이 왜구의 습격을 피해 나주로 도망했다. 한 달 이상 배를 타고 오면서 홍어가 자연스레 삭았다. 버리기 아까워 한 점 먹었는데, 탈도 없고 맛이 별나서 그때부터 홍어를 삭혀 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삼합이 생겨난 이유는 더 재밌다. “전라도에서는 잔칫집에 가면 꼭 홍어를 내요. 홍어가 귀하니까 주인이 볼 때는 싼 돼지고기랑 김치를 집어먹다가 안 볼 때 홍어를 몰래 먹어서 결국엔 이 세 가지가 한꺼번에 입에 들어갔는데, 그 맛이 좋아 삼합이 생겼대요.” 어릴 때 어른들에게 들었다며 윤지향 학예연구사가 말했다.
홍어의 거리 근처에는 일본인 대지주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가 살던 집과 동양척식회사 문서고가 있었다. 두 곳 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최근 보수를 마친 구로즈미 이타로 가옥은 올 연말부터 숙박시설로 쓰일 예정이다.
영산포를 빠져나온 길은 한갓진 시골마을을 통과했다. 나주 나(羅)씨 집성촌인 택촌과 제창마을이 차례로 보였다. 제창마을 건너편에는 앙암이라는 웅장한 절벽이 있는데, 이 앞을 흐르는 강물이 소용돌이가 심해 침몰 사고가 많았다. 쌀·포목·특산품 등을 실은 배가 한양으로 떠날 때면 나주목사가 직접 제창마을로 와서 용왕제를 지냈다. 마을에는 아직까지 용왕제를 지낸 용진당이 남아 있다고 한다. 도로 확장공사 때문에 한창 어수선한 구진포 ‘장어의 거리’에서 여정을 마무리했다. 3구간 종점인 천연염색문화관을 2㎞쯤 남겨둔 지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