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 속 그 이야기 (42)] 충북 괴산 충청도양반길
[중앙일보] 입력 2013.10.11 00:01 / 수정 2013.10.11 00:01물안개 사이로 물소리·바람소리 … 느릿느릿 걷는 풍류 1번지
1 산막이옛길 아침 풍경. 가을 바람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와 호수를 포근하게 감싼 짙은 물안개가 발길을 잡았다.
충북 괴산의 ‘산막이옛길’은 칠성면 외사리 사오랑마을에서 사은리 산막이마을까지 이어진 옛길의 흔적을 더듬어 만든 길이다. 어느새 괴산을 대표하는 명소가 됐다. 지난해에만 약 130만 명이 찾을 정도로 유명한 트레일 코스가 됐다. 괴산군의 인구가 약 3만7000명인데 괴산 인구의 30배가 넘는 사람들이 이 길을 찾아 왔다. 고추· 옥수수·배추 등을 길러 파는 조용한 시골 마을에 매주 주말이면 관광버스 수십 대가 줄을 서서 들어온다. 유서 깊은 문화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름난 꽃이나 단풍관광지도 아니다.
그저 잘 닦은 4㎞ 산책로뿐인데 입소문이 나면서 많은 방문객을 끌어모은 것이다. 2011년 11월에 개장한 산막이옛길이 큰 인기를 끌자 괴산군은 길을 더 내 ‘충청도양반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괴산군은 산막이옛길을 충청도 양반길의 1코스로 포함시켜 전체 길이 85㎞에 달하는 트레일을 조성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1, 2, 2-1, 3코스까지 모두 25㎞의 길이 완성돼 있다. week&은 1, 2 코스 14.3㎞를 걸었다. 1코스 산막이옛길이 보기에도 예쁘고 걷기에도 편한 잘 정비된 산책로라면 2코스 갈은구곡은 산으로 들어가 계곡을 따라 걷는 호젓한 길이었다.
2 산막이옛길 초입에 있는 소나무 출렁다리는 남녀노소가 다 좋아한다. 3 갈은구곡 4곡 옥류벽.
산막이옛길 정원처럼 예쁘고 걷기 편한 길
산막이옛길은 괴산 촌부들이 만든 길이다. 사오랑·외사리·학동·갈론 등 4개 마을이 함께 갈은권역비학봉영농조합법인을 설립해 농림부가 주최하는 ‘농촌마을조합개발사업’에 공모했다. 농촌마을조합개발사업은 시골에 체험·숙박시설 등을 개발하도록 지원을 해주는 것인데, 2007년에 선정돼 예산을 받아 길을 조성했다.
애초에 만든 계획서에는 산막이옛길이 없었다. 산막이마을부터 사오랑마을을 연결하는 옛길을 되살리자고 제안한 건 임각수(66) 현 괴산군수였다. 오지 산막이마을 사람들은 산에서 나물과 약초·버섯을 따다가 읍내 장에다 내다 팔아 연명했다. 그랬던 것이 1957년 괴산수력발전소가 생기면서 위기를 맞았다. 돌다리를 겨우 놓아 건너다니던 개울은 댐이 생기면서 만수면적 17.5㎢에 달하는 호수로 변했다. 마을 대부분이 수몰됐고, 천을 따라 읍내로 가는 유일한 육로가 사라져버렸다. 하는 수 없이 산허리를 둘러 가는 비탈길을 만든 것이 산막이옛길이었다.
사오랑마을에서 나고 자란 임 군수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어 길을 닦고 길 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담았다. 사연이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었다. 길에서 호랑이 발자국을 봤다느니, 울음소리를 들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토대로 근방에 있는 작은 굴에 ‘호랑이굴’이라는 팻말을 세우고 호랑이 모형을 설치했다. 산짐승이 내려와 물을 마시고 갔다는 ‘노루샘’, 여우비를 피하는 ‘여우비 바위굴’ 등 4㎞ 구간 안에 아기자기한 명소를 26곳 만들었다.
주말에는 하루에 8000명 정도가 온단다. 평일인데도 전국 각지에서 온 관광버스 열댓 대가 주차장을 가득 메웠다. 산막이옛길은 등잔봉·천장봉·삼성봉 등 높이가 500m 정도 되는 산줄기 중간에 나있었다. 뒤로는 산이 버티고 앞으로는 괴산호가 흘렀다.
길 초입에 있는 출렁다리에 올라 소나무밭 상공을 걸었다. 길이가 60m 정도 되는데, 공중에 4m 높이에 떠 있어 제법 아찔했다. 출렁거리는 반동 때문에 저절로 발걸음이 경쾌해졌다. 속세를 잊는다는 망세루(忘世樓)를 지나자 데크로드가 시작됐다. 데크로드 옆으로는 가파른 계곡이 보였다. “예전에는 한 가득 짐을 실은 지게꾼이 목숨을 내놓고 걸었어요.” 허영란(56) 해설사의 말이 실감 났다.
산막이옛길의 중간 지점인 호수전망대에 섰다. 왼편 저 멀리로는 괴산수력발전소가 보였고 정면에는 한반도 지형이 눈에 들어왔다. 잔잔한 물결은 불룩 튀어나온 한반도 지형을 휘감고 나갔다. 한반도 지형 뒤에 있는 군자산의 부드러운 산세가 고스란히 수면에 비쳤다. 발아래 쪽빛 물속부터 먼발치의 산 능선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기면서 온전하게 호수 풍광에 젖어들었다. 허영란 해설사는 “댐이 생기기 전 냇가 주변으로 고운 모래밭이 넓게 있었다”며 “그래서 이 주변 마을 이름에 모래 사(沙)자가 많이 들어가 있다. 사은리·외사리처럼. 지금은 전부 물에 잠겼다”고 설명했다. 허 해설사의 말에 수몰된 마을에 대한 아쉬움이 가득 묻어났다. 데크로드가 끝나자 흙길을 걸어 드디어 산막이마을에 도달했다. “댐이 생기자 세 집만 남아 버티던 마을에 산막이옛길이 개통하면서 부흥기가 찾아왔어요. 그러고 보면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딱이에요.” 허영란 해설사가 개울물에 손수건을 헹구며 말했다. 지금 산막이마을에는 모두 7가구가 모여 펜션과 식당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4 길 중간에 있는 앉은뱅이 약수로 목을 축였다. 5 산막이마을 선착장을 지나 코스모스 꽃길이 이어졌다.
갈은구곡 투박해도 자연스러워 좋은 길
산막이마을 선착장부터 2코스가 이어졌다. 여기서 배를 타고 갈론나루터에 가거나 2.7㎞를 더 걸어 굴바위농원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갈론나루터에 내려도 된다. 길가에 예쁘게 핀 코스모스에 맘을 뺏겨 2.7㎞를 더 걸어간 다음 굴바위농원에서 배를 타기로 했다.
2코스 갈은구곡(葛隱九曲)은 투박하지만 자연스러운 맛이 있었다. 산막이마을 선착장에서부터 굴바위농원 선착장까지는 호수변을 끼고 걷는 길이다. 어느 구간은 쪼그려 앉아 손을 뻗으면 물을 만질 수 있을 정도로 호수와 가까웠다. 40분쯤 걷자 굴바위농원 선착장에 도착했다. 산막이마을 선착장 매표소에서 받은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10분쯤 기다리자 갈론나루터로 가는 철선이 도착했다.
갈은구곡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유학자 주자가 조성한 ‘무이구곡(武夷九曲)’을 흉내 내 만든 것이다. 주자는 중국 무이산에 있는 경치 좋은 9개 계곡에서 공부를 하고 시를 지어 바위에 새겼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이를 계승해 전국에 구곡문화를 심었다. 괴산에는 모두 7개의 구곡이 있는데, 이 중 유명한 것이 송시열(1607~1689)이 지은 화양구곡과 이황(1501~1570)이 지은 선유구곡이다. 갈은구곡은 누가 지은 것인지 모른다.
갈은구곡의 시작을 알리는 갈은동문(葛隱洞門)이 적힌 바위는 아파트 3층 높이만 한 커다란 바위에 턱 하니 얹어져 있었다. 마치 범고래처럼 생긴 바위 군데군데에는 소나무와 잡초, 야생화가 자라나 신기한 모습이었다. 전날 내린 빗물이 시커먼 바위 표면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갈은구곡을 설명하는 팻말이 없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웠다. 마치 보물을 찾듯 계곡 주변에 널려 있는 바위를 유심히 살피면서 걸었다. 3곡 강선대(降僊臺)가 나왔다. 허영란 해설사가 바위에 새겨진 글자를 가리키며 “보통 신선 선(仙)자를 쓰는데, 여기는 춤출 선(僊)을 썼어요. 신선이 얼마나 좋았으면 춤을 다 췄겠습니까”고 말했다. 등산로에서 약간 비껴 있어서 그런지 고요했다. 큼직한 바위에 부닥쳐 흐르는 물소리가 둔탁하면서도 깊었다. 물속에는 송사리 떼가 어지럽게 헤엄치고 있었다. 평상처럼 널따란 바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흐르는 물소리·바람소리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으니 그 옛날 여기서 풍류를 즐겼을 팔자 좋은 양반네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선대부터는 계곡과 살짝 멀어져 10분 정도 흙길을 걸었다. 간간이 자라난 억새가 팔을 쓸어줬다. 다시 물소리가 들려왔다. 길은 계곡 건너로 이어졌다. 4곡 옥류벽(玉溜壁)부터는 분위기가 달랐다. 상류다 보니 물줄기가 작아지고 대신 바위가 많았다. 네모반듯한 바위가 축대처럼 계곡 양옆에 늘어서 있었다. 갈은구곡을 통과하자 옥녀봉으로 가는 등산로에 접어들었다. 앞서 계곡을 따라 걷는 것과는 달리 울창한 숲길이었다. 1㎞ 정도 산을 오르자 옥녀봉 가는 삼거리가 나왔고 여기서 1㎞ 내리막을 걷자 사기막리 마을에 도착했다.
글=홍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