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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남한산성

[20081102]남한산성 성곽따라 일주하며 단풍유람 산행을 다녀오다 - 5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08.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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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02일 일요일
'남한산성 성곽따라 일주하며 단풍유람 산행을 다녀오다'
 
마천역-마천로-사자아파트-비호아파트-비호부대-청운사-남한산성 서문-시계방향으로 일주 시작
-서문(우익문)-매탄지-암문-북장대지-북문(전승문)-암문-동장대 암문-동장대지-장경사신지옹성
-장경사-송암정-동문(좌익문)-수문-시구문-제3옹성/암문-제2옹성/암문-남장대지-제1옹성/암문
-남문(지화문)-영춘정-수어장대-매바위-청량당-병암-서문(우익문)-이제는 서문 밖으로 나가서
-전망터-연주봉옹성 입구-연주봉 옹성 망루-산불감시탑-성불사 능선으로 하산하여-마천역
 
오늘은 단풍유람산행으로 좋을 듯한 남한산성으로 가을산행을 나선다.
마천역에서 남한산성 서문으로 올라 시계방향으로 성곽을 따라 산성일주를 하고,
서문으로 원점회귀한 후 서문 밖으로 나가 연주봉옹성을 둘러보고
성불사 능선을 타고 하산하여 마천역에서 일정을 마쳤다.
 
☞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으로 대신한다.
     
 
'남한산성 성곽따라 일주하며 단풍유람 산행을 다녀오다 - 5부'를 시작하며...
  

 

 

★ 수어장대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며,

2층 누각과 건물의 왼쪽에 2동의 사당인 청량당으로 이루어졌다.

이 건물은 선조 28년 남한산성 축성 당시 동남북의 3개 장대와 함께 만들어졌으며 유일하게 현존한다.


원래 단층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 라 부르던 것을

영조27(1751)에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이층누각으로 증축하고

안쪽에는 무망루, 바깥쪽에는 '수어장대' 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며, 서대라고도 불렀다.

 

수어장대의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 상층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양식의 2층 누각이다.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루를 둘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올렸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 60cm의 팔각장주초석 위에 올려져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의 이출목익공식이다.

1층의 사방 1칸은 복도로 비워두고 정면 3칸, 측면 2칸만 장마루를 깔고 사방에 높이 45cm의 난간을 둘렀다.

 2층은 1층 우측 뒷켠에 있는 사다리를 통하여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방에 판문을 달았으며, 판문에는 태극무늬를 그렸다.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 매바위

 

수어장대 앞 마당 한쪽 모퉁이에는 '매바위' 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매바위로 불리어지게 된 데에는 남한산성의 축성 책임을 맡았던 이회 장군의 억울한 죽음과 한이 깃들어 있다.

 

이회 장군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산성 동남쪽 지역의 공사에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하나하나 철저하게 점검을 하며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그만 정해진 날짜를 넘기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공사비용 역시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사비용이 부족하게 된 이유가 이회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에 나라에서는 이회 장군에게 그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서장대 앞뜰에서 이회 장군은 참수를 당하기 직전 하늘을 쳐다보면서

"내가 죽은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죄가 있는 것이다" 라는 말은 남겼다.


그런데 실제로 이회 장군의 목을 베자,

이회 장군의 목에서 매 한마리가 튀어나와 근처 바위에서 슬피 울다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멀리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이 그 매가 앉았던 바위를 보니 매 발톱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장군의 말대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이회 장군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라 믿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회 장군이 책임을 맡았던 지역의 성곽을 살펴보니,

아주 견고하게 쌓아져서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성곽 공사를 함에 있어서 부정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심혈을 다했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회 장군의 목에서 나왔던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고,

이 바위를 신성시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 매바위에는 실제로 매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어떤 일본인 관리가 남한산성을 둘러보다가,

바위 위의 매 발자국을 보고 참신기한 일이라 여겨서 그 매 발자국이 찍힌 부분을 도려내어 떼어 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 일본 관리가 떼어갔음을 말해주는 사각형의 자취만 남아 있다고 한다.

 

 

 

▼ 수어서대(守御西臺)

 

남동쪽 모서리에 있는 매바위에 새겨진 암각문이다.


사각형으로 제액을 파고, 그 안에 '수어서대'라고 새겨놓았다.

 

원래 수어사는 도성의 수어청에서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유사시 에는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에 와서 지휘하였다.

정조 19년(1795)부터는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였다.

  

 

 

 

▼ 무망루(無忘樓)

 

성안 서장대(수어장대)의 2층 문루 이름이다.

남한산성의 5개 장대중 2층 문루가 있는 장대는 서장대와 남장대로서,

서장대의 문루는 '무망루' 이고, 남장대의 문루는 '타운루' 이다.


무망루의 2층 누대는 영조 때인 1751년 유수 이기진이 지었고,

현종 때인 1836년 유수 박기수가 중수한 것이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이 삼전도에 나아가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한번 절할 때마다 이마를 세 번씩 조아려야 했던 삼배구고두의 치욕,

그리고 청나라의 심양에 끌려가 8년 동안이나 볼모로 잡혀 있다가 돌아와 북벌을 꾀하였으나

끝내 그 한을 풀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임금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영조께서 이름한 것이라고 한다.


무망루의 뜻은 '無忘' 즉 '잊음이 없다', '잊을 수 없다' 는 뜻이다.

 

 

  

 

 

 

 

 

 

 

 

 

 

 

 

 

 

 

 

▼ 병암(屛岩)

 

병암은 수어장대에서 서문방향으로 약200m 길 우측에 두 개의 돌로 되어 있다.
이 비문에는 정조3년(1779) '남성신수기비문'이 새겨져 있어 유명하다.
이 바위 우측에 '병암이민하10세기미서'라는 글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병암'의 글씨는 이민하가 10세 때에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이것으로 '남한산성 성곽따라 일주하며 단풍유람 산행을 다녀오다'를 마친다.

 

 

2008년 11월 02일 일요일
[남한산성 성곽따라 일주하며 단풍유람 산행을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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