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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남한산성

[20091004]'남한산성 도보여행'을 다녀오다 - 2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09.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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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0월 04일(일)  

'남한산성 도보여행'을 다녀오다.

 

 '남한산성 도보여행 코스 :

마천역→비호아파트→만남의장소→청운사→갈림길→돌탑→서문→수어장대→남문→산성주차장→북문→서문→마천역

  

 맥가이버의 '남한산성 도보여행' 이야기

 

추석 연휴이자 일요일인 10월 4일 오후에 남한산성으로 도보여행을 다녀왔다.

'송파올레길 밤새걷기'를 통해 알게된 도보카페 '자유로운 도보여행'과 세 번째 도보여행이다.

남한산성 개요

 

남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경기도남한산성도립공원은 동경 127도 11분, 북위 37도 28분 지점에 위치한다.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광주시는 약 80%가 산이며 나머지 20%가 평야부에 속하는 경작지이다.

높고 낮은 산이 많으며 좁고 긴 하천이 한강을 향하여 북 또는 북동쪽으로 흐른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였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왕조 시대의 경기도남한산성도립공원은

선조 임금에서 순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 그 중에서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인조 2년(1624)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1626년)에 완공한데 이어,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 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그 이후 주인을 잃은 민족의 문화유산들은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다가 하나 둘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말았다.

그렇지만 남한산성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것에서 터만 남아있거나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최근 들어 남한산성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 남한산성도립공원 홈에서 -

 

☞ '남한산성 도보여행'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 '남한산성 도보여행을 다녀오다'의 2부를 시작하며...

 

▼ 수어장대로 들어서고...

 

▼ 좌측에 있는 사당은 '청량당'

  

  

 

▼ 수어장대

 

 

 

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며, 2층 누각과 건물의 왼쪽에 2동의 사당인 청량당으로 이루어졌다. 이 건물은 선조 28년 남한산성 축성 당시 동남북의 3개 장대와 함께 만들어졌으며 유일하게 현존한다.
원래 단층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 라 부르던 것을 영조27(1751)에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이층누각으로 증축하고 안쪽에는 무망루, 바깥쪽에는 '수어장대' 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며, 서대라고도 불렀다.
수어장대의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 상층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양식의 2층 누각이다.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루를 둘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올렸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 60cm의 팔각장주초석 위에 올려져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의 이출목익공식이다. 1층의 사방 1칸은 복도로 비워두고 정면 3칸, 측면 2칸만 장마루를 깔고 사방에 높이 45cm의 난간을 둘렀다. 2층은 1층 우측 뒷켠에 있는 사다리를 통하여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방에 판문을 달았으며, 판문에는 태극무늬를 그렸다.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 수어장대 앞에서 단체사진...

 

 

 

 

 

 

 

▼ 저 바위는...

 

▼ 매바위

 

매바위 전설
 
 수어장대 앞 마당 한쪽 모퉁이에는 '매바위' 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매바위로 불리어지게 된 데에는 남한산성의 축성 책임을 맡았던 이회 장군의 억울한 죽음과 한이 깃들어 있다.
이회 장군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산성 동남쪽 지역의 공사에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하나하나 철저하게 점검을 하며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그만 정해진 날짜를 넘기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공사비용 역시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사비용이 부족하게 된 이유가 이회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에 나라에서는 이회 장군에게 그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서장대 앞뜰에서 이회 장군은 참수를 당하기 직전 하늘을 쳐다보면서
"내가 죽은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죄가 있는 것이다" 라는 말은 남겼다.
그런데 실제로 이회 장군의 목을 베자, 이회 장군의 목에서 매 한마리가 튀어나와
근처 바위에서 슬피 울다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멀리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이 그 매가 앉았던 바위를 보니 매 발톱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장군의 말대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이회 장군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라 믿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회 장군이 책임을 맡았던 지역의 성곽을 살펴보니, 아주 견고하게 쌓아져서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성곽 공사를 함에 있어서 부정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심혈을 다했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회 장군의 목에서 나왔던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고, 이 바위를 신성시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 매바위에는 실제로 매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어떤 일본인 관리가 남한산성을 둘러보다가,
바위 위의 매 발자국을 보고 참신기한 일이라 여겨서 그 매 발자국이 찍힌 부분을 도려내어 떼어 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 일본 관리가 떼어갔음을 말해주는 사각형의 자취만 남아 있다고 한다.

 

▼ 매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 '수어서대'

 

수어서대(守御西臺)

 

남동쪽 모서리에 있는 매바위에 새겨진 암각문이다.

사각형으로 제액을 파고, 그 안에 '수어서대'라고 새겨놓았다.

 원래 수어사는 도성의 수어청에서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유사시 에는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에 와서 지휘하였다.

정조 19년(1795)부터는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였다.

 

▼ 무망루와 리승만대통령 행차 기념식수비

 

▼ 무망루

  

성안 서장대(수어장대)의 2층 문루 이름이다. 남한산성의 5개 장대중 2층 문루가 있는 장대는 서장대와 남장대로서, 서장대의 문루는 '무망루' 이고, 남장대의 문루는 '타운루' 이다.
무방루의 2층 누대는 영조 때인 1751년 유수 이기진이 지었고, 현종 때인 1836년 유수 박기수가 중수한 것이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이 삼전도에 나아가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한번 절할 때마다 이마를 세 번씩 조아려야 했던 삼배구고두의 치욕, 그리고 청나라의 심양에 끌려가 8년 동안이나 볼모로 잡혀 있다가 돌아와 북벌을 꾀하였으나 끝내 그 한을 풀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임금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영조께서 이름한 것이라고 한다. 무망루의 뜻은 '무망' 즉 '잊음이 없다', '잊을 수 없다' 는 뜻이다.

 

 

 

 

 

 

 

▼ 암문에서...

 

 

  

 

 

 

 

 

 

 

 

 

 

 

 

▼ 남문(지화문)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cm 지점에 위치한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 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至和門)으로 칭하였으며 남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 올 때에도 이 문을 통해서 들어 왔다. 성문은 홍예문과 문루로 구분된다.
홍예문은 높이 475cm, 너비 335cm, 길이 860cm로 홍예기석 위에 17개의 홍예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문의 하부 육축은 일부 성벽의 배부른 현상을 제외하고는 육축의 높이와 홍예문의 높이가 동문보다는 높게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문의 문비도 두꺼운 판재에 30cm 크기의 철린을 촘촘히 박아 댄 육중한 모습이며 상하의 지도리석으로 위아래에서 지탱하도록 되어 있는 원형 그대로이다. 문짝의 뒷면에는 빗장을 지를 수 있도록 장방형 장군목 홈이 측벽의 좌우에 각각 파여져 있다. 성문 통로의 바닥은 바깥쪽으로 경사가 심하며 통로 위의 천장은 동문의 경우와 같이 회벽이 홍예형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회벽칠로 둥글게 막아져 있다. 다른 성곽의 성문에서는 주로 판자널로 천장을 막고 별화단청을 한 천판을 형성하는 것이 통례임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문루는 1976년 화강석 장주초석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주초석을 대부분 새로 보충하여 문루를 복원하고 현판을 걸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동문에 비해 비교적 그 규모가 크고 장초석을 사용하여 기둥높이는 낮으나 건물의 전체 높이는 약간 더 높게 지어졌다. 또한 건축양식으로 비교하면 동문보다는 공포와 가구구조, 처마부분 등에서 비교적 형식을 갖추어 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기단은 양 측면에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생략되어 있다. 향후 보수시에 기단이 설치 되어야 할 것이다. 화강석 장주초석 위에 세워진 기둥은 건물규모에 비하여 비교적 굵으며 약한 민흘림이 있다. 도리는 굴도리가 사용되었으며 공포는 주두, 소로, 초익공을 갖춘 익공계 양식으로 꾸며 졌다. 고주없이 대량 위에 동자주를 세워 중도리를 받는 5량가 형식으로서 퇴량이 없이 측면쪽에만 대량 위에 충량 2본씩이 걸쳐져 외기중도리를 받는 구조이다. 건물 내부의 천장은 연목의 몸이 그대로 드러나는 연등천정이며 외기반자쪽만 판재로 막아 대었다. 문루는 팔작지붕이며 용머리는 망와로 마감하였으나 내림마루에는 망새대신 용두를 장식하였다. 누대의 천정 양식은 연등 천정 양식이다. 주춧돌은 가로 50cm, 세로 50cm, 높이 110cm의 장주 초석을 사용하였다. 남문은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다.

 

 

 

 

 

  

 

 

▼ 이곳에서 두 팀이 모였다가...  

 

 

 

 

▼ 북문이 보이네...

 

▼ 북문(전승문:戰勝門)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상사창리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안으로 운반하였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戰勝門)이라 칭하였다. '전승문' 이란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인데 현재 편액은 걸려있지 않다.
북문은 홍예식 문이며, 홍예기석 위에 10개의 홍에돌을 쌓아 구축하였다. 문의 폭은 325cm, 높이는 365cm이다. 육축은 특별히 가공하거나 큰 무사석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며 일반 성벽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성벽의 두께는 두꺼워져 약 710cm에 달한다. 홍예 안쪽에는 판문을 설치하였으며 철린을 박아 보강하였다. 여장은 총안이나 타가 없는 평여장을 설치하였고 , 문루로 오르는 계단을 별도로 설치하지도 않았다.
문루는 단층이고 규모는 정면 4칸 측면2칸이며, 지붕은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용머리는 치미를 장식하였고 내림마루에도 용두를 장식하였다. 천장양식은 연등천정이며 기둥 양식은 주심포 양식의 민흘림 기둥이다.

 

 

 

▼ 북문을 밖에서 보니 편액에 '全勝門'이라고...북문을 복원하면서 생각없이 戰을 全으로 바꿔 썼네...

 

▼ 성곽은 아직도 복원 중...

  

 

 

 

▼ 여장

 

성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을 말한다. 이 여장은 다른 용어로 여담, 여첩, 치첩, 타, 여원 이라고도 하고 고어로는 성각휘, 성가퀴, 살받이터 등으로 불려졌다. 또한 설치하는 목적에 따라 치폐, 첩담, 비예, 희장 이라고도 하였다.
여장의 종류에는 평여장과, 凸형여장, 반원형여장 등으로 구분된다.평여장은 타와 타 사이에 타구를 설치하고 크기가 일정한 장방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남한산성의 여장은 1940타 이며 모두 평여장이다.
1타의 길이는 남한산성의 경우 위치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1타의 길이는 대략 3 ∼ 4.5m 정도이며 여장의 높이는 낮은 곳은 70cm, 높은 곳은 135cm 정도이다. 타와 타 사이의 타구의 폭은 30cm이고 타구의 높이는 56cm로 대략 여장높이의 1/2정도이다. 여장의 폭은 76cm이고, 타와 타 사이의 간격은 15cm 정도이나 중앙부를 형태로 뾰족하게 처리하여 좁지만 상대적으로 넓은 면적의 조망이 가능하도록 하여 방어의 효율성을 높였다.
남한산성 여장의 경우 급경사지역의 일부지역에서는 경사면의 중간에 단을 두어 계단과 같이 축조하였으나, 대부분의 경우 단을 두지 않고 바닥의 경사면과 평행하게 여장을 설치하였다. 이 경우 여장의 높이가 전체적으로 일정하게 되어 방어의 효율성은 있지만, 여장을 쌓을 때 양력이 아래로 쏠리게 되어 여장 축성시 어려움이 있고, 안정성에도 문제가 있다.
일반적인 여장의 경우 체성벽의 상단에 미석을 설치하고 여장을 쌓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석은 체성벽에서 3치 정도 밖으로 돌출하도록 하였는데, 체성벽 맨 윗단의 높이를 일정하게 맞추는 역할과 의장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남한산성의 경우 이러한 미석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축성시 미석을 설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 여장의 경우 당초 벽돌로 축조하였으나 영조 20년(1744)에 벽돌을 제거하고 기와로 덮었으며, 정조 3년에는 다시 원성을 수축하면서 기와로 덮었던 것을 치우고 전돌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여장은 대부분 전돌로 쌓은 것이며, 부분적으로 타와 타 사이의 타구에는 수키와를 한 장씩 횡방향으로 올려 놓았다.
현존하는 여장을 보면 성벽의 정상부에 지대석을 놓고 그위에 20-30cm 정도의 활석으로 약 30cm 정도 허튼층 막쌓기로 쌓고 그 윗부분에는 방전을 사용하여 쌓고, 내부에는 생석회 잡석다짐을 하였으며 정상부에는 옥개전을 덮었다. 여장의 1타에는 3개의 총안이 설치되었다. 세 총안의 가운데에는 근총안을 설치하고, 양쪽에는 원총안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총안의 간격은 대략 96cm 정도이며, 총안의 크기는 폭22cm, 높이 24cm이다. 성벽외곽의 경사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근총안은 경사도가 38도, 원총안은 22도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형적으로 외곽의 경사도가 높은 능선지점에는 여장의 총안외에도 체성벽의 상단부에 별도의 총안을 설치하기도 하여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 개망초

 

개망초꽃 / 안도현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 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꽃을 개망초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때

눈물 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것 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들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꽃이라 부르겠는가

 

 

 

 

 

 

▼ 서문이 보이네...

 

 

▼ 서문을 나서...

 

 

▼ 왔던 길로 다시 내려서고...

 

 

 

 

 

 

 

▼ '만남의 장소'까지 내려와서...

 

▼ 이곳에서 뒤풀이를 하고...

 

▼ 마천역으로 돌아와서...

 

☞ 여기서 '남한산성 도보여행을 다녀오다'를 마친다.

 

 

 

2009년 10월 04일(일)

'남한산성 도보여행'을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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