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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궁궐·왕릉·묘ㆍ원

[20100321]파주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 소령원[昭寧園]을 찾아가다.

by 맥가이버 Macgyver 2010.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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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03월 21일(일)  
파주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 소령원[昭寧園]을 찾아가다.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호

경기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 조선 숙종(肅宗)의 후궁이며 영조(英祖)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묘소. 
 
숙빈최씨는 1670년(현종 11) 11월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태어나,
7세에 궁에 들어가 숙원(淑媛)·숙의(淑儀)·귀인을 거쳐 숙빈에 봉해지고, 1694년(숙종 20) 영조를 낳았다.


1718년 3월 49세로 죽어 서울 궁정동 칠궁 안에 사당을 짓고

그 묘호(廟號)를 육상(毓祥), 묘호(墓號)를 소령원이라 하여 묘비는 1744년 영조가 친히 썼다.

 

묘의 시설은 병풍석(屛風石) 없는 곡장(曲墻) 및 혼유석(魂遊石)·묘비·문인석(文人石)·석마(石馬)·석양(石羊) ·사초지(莎草地) 등이 있고,

사초지 앞에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이 있으며, 묘역 진입로에 신도비각(神都碑閣)이 있다.

 

정자각 동쪽 비의 전면에는 ‘朝鮮國和敬淑嬪昭寧園’이라는 비명이 있고,

묘소의 동쪽 비명은 ‘淑嬪海州崔氏昭寧園’으로 되어 있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에서 -

 

 

 

 

 

 

 

 

 

소령원(昭寧園) 

 

종 목  사적  제358호 
명 칭 소령원(昭寧園)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면적 312,279㎡
지정(등록)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267외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파주삼릉관리소


조선 19대 숙종(재위 1674∼1720)의 후궁이며 21대 영조(재위 1724∼1776)의 어머니인 숙빈최씨의 무덤이다.

숙빈최씨는 최효원의 딸이며 숙종 44년(1718)에 49세로 죽었다.

효심이 지극했던 영조는 최씨의 무덤 근처에다 막을 짓고 무덤을 받들었으며, 친필 비(碑)와 비각을 4곳에 세웠다.

위패는 조선시대 역대왕이나 추존된 왕의 생모인 7명의 후궁을 모신 칠궁(七宮)중 육상궁에 모셨다.

무덤 주변에는 여러 석물들이 있으며 정자각이 있다.


조선(朝鮮) 제(第)19대(代) 숙종(肅宗)의 후궁(後宮) 숙빈최씨(淑嬪崔氏)의 묘소(墓所)이다.

숙빈최씨(淑嬪崔氏)는 현종(顯宗) 11년(年)(1670) 11월 6일 최효원(崔孝元)의 여(女)로 출생,

숙종(肅宗)의 후궁(後宮)이 되어 영조(英祖)를 출산하였다.

숙종 44년(年) 3월(月) 9일(日) 49세(歲)로 별세(別世)하였으며

서울특별시 궁정동 칠궁(七宮)안 육상궁(毓祥宮)에 그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있다.

 

묘(墓)의 시설은 봉분(封墳)(병풍석무(屛風石無)) 곡장(曲墻) 혼유석(魂遊石) 묘비(墓碑) 문인석(文人石) 석마(石馬) 석양(石羊)

사초지(莎草地)가 있고 사초지 앞에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이 있으며 묘역(墓域) 진입로(進入路)에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있다.

 

기록(記錄)은 묘비(墓碑)의 전면(前面)은 비명(碑名)이 없고

후면(後面)에 「···성략···황명숭정기원후백십칠년갑자추칠월십오일근서(···省 ···皇明崇禎紀元後百十七年甲子秋七月十五日謹書)」.

「사친본수양아성고숙종대왕후궁야당성십일월초육일생우여경방사제고황명기원후무진후구십일년아주상전하즉조지사십사년무술구월일입(私親本首陽我聖考肅宗大王後宮也唐成十一月初六日生于餘慶坊私第考皇明紀元後戊辰後九十一年我主上殿下卽祚之四十四年戊戌九月日立)」이라 새겨져 있다.

또한 정자각(丁字閣) 동(東)쪽 비(碑)에는 전면(前面) 비명(碑名)이

 「조선국화경숙빈소령원(朝鮮國和敬淑嬪昭寧園)」이며 후면(後面)에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다.

 

묘소(墓所)의 동(東)쪽 비명(碑名)은 「숙빈해주최씨소령묘(淑嬪海州崔氏昭寧墓)」이며

후면(後面)의 비문(碑文)은 「? ? (파손) 기원후백십칠년 ? (파손) 지행순덕영호의열주상전하즉조이십년갑자팔월이십팔일입우내표용내오향표석입어묘전묘향신도비어외백호지향을향지석일본안어유석하일본안어삼계하현록대부서평군요봉경서(? ? (破損) 紀元後百十七年 ? (파손) 至行純德英護毅烈主上殿下卽祚二十年甲子八月二十八日立于內表龍內午向表石立於墓前卯向神道碑於外白虎之向乙向誌石一本安於遊石下一本安於三階下顯祿大夫西平君橈奉敬書)」라고 새겨져 있다.

 

- 문화재청 홈에서 -

 

 

 

 

 

 

 

 

 

 

소령원(昭寧園)에 얽힌 이야기

 


경기 파주시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에 위치하고 있는 소령원은 조선 숙종(肅宗)의 후궁이며

영조 (英祖)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묘소로 사적 제35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원’은 세자와 후궁의 무덤을,

‘묘’는 대군과 공주, 옹주, 후궁, 귀인의 무덤을 봉할 때 쓰는 명칭입니다.
숙빈 최씨는 일개 무수리에서 후궁자리에까지 올라 영조를 낳지만 영조가 즉위하기 5년 전 별세하여

왕실의 법도에 따라 왕비의 무덤인 ‘능’에 모셔지지 못하고 ‘묘’ 에 모셔지게 됩니다.

영조는 즉위 후 숙빈 최씨의 미천한 출신배경을 콤플렉스로 여겨 ‘소령묘’를 왕비릉으로 격상시키고자 애를 쓰지만

조정 신료의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영조29년에 숙빈 최씨의 묘소는 ‘소령원’으로 봉해지게 되었죠.
 
그래서 숙빈 최씨의 묘에는 비석이 세 개가 있습니다.

숙종 44년(1718년) 후궁 숙빈 최씨가 사망 시 ‘有明朝鮮國後宮淑//嬪首陽崔氏之墓’ 라고

두 줄 세로로 써서 세운 비석은 영조가 즉위하지 못했을 당시에 세워진 것입니다.


영조가 왕위에 있으면서 친필의 비석 두개를 세우는데 정자각 우측 위쪽에 각각 비각 속에 들어 있습니다.

왕이 되자마자 세운 것에는 ‘淑嬪海州崔氏昭寧墓’라 쓰여 있는데요. 영조는 어머니인 숙빈 최씨가 왕비가 아니라서

종묘 신위에 올라가지 못하자 즉위하던 해인 1725년 생모를 기리기 위해 궁정동에 사당을 만들어 숙빈묘(廟)라 하게 됩니다.

 

1744년 이를 육상묘(毓祥廟)로 개칭한 후, 육상궁으로 승격시키면서 소령묘(墓)도 소령원(園)으로 승격됩니다.

이 육상궁에 1908년 7월 23일 왕과 추존왕의 생모 5명의 신위들을 모아 봉안하면서 육궁이 됐으나

1929년 영친왕의 어머니인 순빈 엄씨의 신위를 봉안해 현재 칠궁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영조가 왕이 되고 29년이 지난 1753년에 비석을 하나 만들어

“朝鮮國和敬淑嬪昭寧園”와 같은 내용이 적힌 또 다른 비각을 세웁니다.
영조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곳에서 시묘막을 짓고 3년 상을 치릅니다.

하지만 영조가 실제 시묘살이를 한 날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 사람을 시켜 대신 하도록 했을 터이죠.

시묘막은 99칸짜리 집으로 되어 있었는데, 6.25 전란으로 다 타버리고

현재는 깨어진 기왓장과 함께 주춧돌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다음은 영조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효심이 묻어나는 소령원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영조는 어려서부터 무예와 산타기를 좋아하여 틈만 나면 사냥을 하고 이산 저산을 두루 다녔습니다.

풍수지리에도 밝아 산세를 살피면서 다니던 중 지금의 광탄면 용미리 산을 지나가다 초라한 장례로써

산소자리를 파는 것을 발견하여 올라가보니 험준한 망지에다 자리를 잡아 수인이 역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딱한지라 상주에게 사연을 물은 즉 원채 가난한 집에 태어나 좋은 자리에 산소를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자리를 봐준 사람은 누구냐고 물은 즉 아래 산기슭에 사는 선비가 묘소를 정하여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 상주를 위해서 영조는 양주목사에게 쌀 1가마니와 돈 100냥을 보내라는 편지를 써 보내니 양주목사가 이를 보고

즉시 포졸을 시켜 돈을 보내어 이 뒤편에 묘소를 다시 잡아주고 장사를 잘 치르게 하였습니다.

장사를 치른 후 영조가 산을 내려와 선비를 찾아가서 왜 이런 나쁜 곳에 산소자리를 잡아 주었냐고 묻자

이 선비는 쌀 1가마니와 돈 100냥이 생길 자리인데 왜 그러냐고 말합니다.

이에 영조는 깜짝 놀라며 자기가 한 일이 꼭 맞아 감탄하며 치하하고 돌아가면서 명지사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얼마 후 사친인 숙빈 최씨가 서거하자 각지에서 명지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였으나 영조는 이들을 전부 물리치고

아무개에 사는 이 선비를 데리고 오라고 하여 묘지를 잡은 곳이 바로 광탄면 영장리 산1번지 소령원인 것입니다.

소령원은 중국의 풍수지리지에 수록될 정도로 길지라고 합니다.

영조는 소령원 자리를 잡아준 명지사 이 선비를 후사하기 위하여 궁궐로 초대하여

극진히 대접을 한 후 얼마만큼 맞추나 시험하기로 합니다.
 

영조는 경기도 일대에 명당자리가 몇 군데 있느냐고 물으니

어디는 정승 날 자리, 어디는 판서 날 자리 등등 수 십군데를 마구 지껄이고 있어 역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명지사임이 틀림없고 학문에도 뛰어나 유능한 인재임을 알게 되죠.

 

이에 한번만 더 시험하리라 생각하고 별궁을 시켜 쥐 한 마리를 잡아오라 하여 용상 및에 감추고

"이번 질문을 맞추면 큰 벼슬도 주고 후사할 것이나 만약 맞추지 못하면 죽일 것이다."하며 하문하기를

"짐의 용상 및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하자 이 선비는 한탐 생각한 뒤에

"쥐가 들어있는 것으로 믿습니다."하니 아연실색한 영조는 "그럼 몇 마리가 들어 있느냐?"고 하자

"3마리가 들어 있습니다."하니 "이 놈 짐을 속이는구나!"하고 선비를 참하라 명하였다.

 

얼마 있다가 별궁이 달려와서 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 두 마리가 들어있다고 하자 영조는 이런 인재를 등용하여

정사를 맡기리라 생각하고 즉시 이 선비를 죽이라고 명한 것을 취하면서 별궁을 시켜 죽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별궁이 가보니 애석하게도 이미 죽은 후라 할 수 없이 돌아와서 그 사연을 고하니 영조는 깜짝 놀라며

짐의 잠깐 실수로 나라의 아까운 인재를 잃었노라며 애석해 하였다는 설화도 전해집니다.


영조는 사친의 묘가 능(陵)으로 모시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승격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조정 중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가장 반대가 심한 중신 박사정(朴師正)을 소령원 제사 지낼 적에 보내 봉노를 시켜 숯불이 이글대는 향로를 맨손으로 들게 하니

열손가락 사이로 기름이 흘러 내리는 찰나 영조가 이래도 능으로 책봉하지 않겠느냐고 하문하니

“소신은 죽사와도 능지하원지상(陵之下園之上)입니다.”라고해서 능으로 격상하는 것을 단념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나무꾼이 도성에 들어와 모화관 부근에서 나무를 팔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영조가 이 나무꾼을 보고 어디서 해온 나무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평시에 말하던 대로 자랑스럽게 양주(당시에는 양주군에 속했음) 소령릉이 있는 마을에서 해왔다고 대답하자

영조는 이 나무꾼을 궁궐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대신들 앞에서 다시 물으니 역시 같은 대답이었죠.

이때 영조는 대신들에게 백성들은 소령릉이라고 하는데 조정 대신들은 왜 소령원이라 부르냐고 호통을 친 일도 있습니다.

후에는 대신들이 능으로의 승격을 주장했다지만 영조는 궁중의 법도에 맞춰 그대로 원으로 했다고 전합니다.
 
이후 영조는 나무꾼에게 통훈대부에 작위를 내리고 대대로 능세원(능에서 나무를 간수하는 직책)을 지내게 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영장리에 김해 김씨가 몇 집 살고 있는데 김호길(金好吉)의 8대손 이라고 하며

당시 능참봉(陵參奉) 능순원(陵巡員) 능수복(陵守僕)이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영조의 모친에 대한 애틋한 효심이 이런 이야기를 낳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은 상주하는 관리인이 없는 왕릉도 있는데, 소령원은 원(園)인데도 유일하게 참봉이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소령원에서 앞을 보면 안산인 고령산이 눈에 들어오고, 고령산 아래 있는 보광사는

영조가 숙빈 최씨의 제사를 봉향하는 원찰로 지정하고 어필을 내린 사찰입니다.

보광사와 소령원 곳곳에 남아 있는 영조의 흔적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모곡입니다.

궁녀의 세숫물을 떠다 바치는 하녀에서 왕의 어머니가 된 여인의 숨어 있는 눈물을 아들이 알고 헤아리지 않았을까요?


글쓴이 : 세종대왕유적관리소 행정주사보 정종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