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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궁궐·왕릉·묘ㆍ원

[20091111]창덕궁 탐방 後 광화문광장 거쳐 청계천 세계 燈 축제 관람 - 2

by 맥가이버 Macgyver 2009.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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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1월 11일(수)  
도심나들이-'창덕궁 탐방 後 광화문광장 거쳐 청계천 세계 燈축제'에 다녀오다.

 

 '창덕궁 탐방 後 광화문광장 거쳐 청계천 세계 燈축제 관람' 코스

종로3가역→돈화문로→돈화문→창덕궁 궁궐관람(금천교ㆍ진선문ㆍ인정문ㆍ인정전ㆍ선정전ㆍ희정당ㆍ대조전ㆍ성정각)

→후원입구→후원 관람(부용지ㆍ부용정ㆍ영화당ㆍ주합루ㆍ어수문ㆍ의두합ㆍ불로문ㆍ애련지ㆍ연경당ㆍ선향재ㆍ농수정)

→창덕궁 향나무→궐내각사→창덕궁 서문(금호문)→동궐마루안국역 4번 출입구→운현궁 앞→천도교 수운회관 앞

→'정자옆에서' 저녁식사 後→종로경찰서 앞→광화문광장→세종로 4거리→청계천을 따라 두물다리 '청혼의 벽'까지 간 후

→두물다리 '청혼의 벽'에서 다시 청계천을 거슬러 청계광장까지 와서 걷기를 마치고 광화문역과 시청역에서 해산

 맥가이버의 '창덕궁 탐방 後 광화문광장 거쳐 청계천 세계 燈 축제 관람' 이야기

 

오늘은 청계천일대(삼일교~청계광장)에서 열리는 '세계 燈 축제'의 개막식과 점등식이 오후 7시~9시에 있단다.

마침 오후걷기로 '자유로운 도보여행' 카페의 '창덕궁 탐방 後 삼청동과 광화문광장까지 걷기' 공지가 있어

'자유행(보아미님 주최)'의 '창덕궁 탐방 後 삼청동과 광화문광장까지 걷기'에 함께 하고나서,

청계천에서 열리는 '세계 燈축제'를 감상하면 좋겠기에 '자유행'의 오후 도심나들이를 일단 신청한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에서 도보 주최자 보아미님을 비롯한 '자유행'의 님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창덕궁 관람을 위해 돈화문을 통과하여 금천교를 건너고 진선문, 인정문을 거쳐 정전인 인정전과 편전인 선정전,

그리고 침전인 희정당과 대조전을 둘러보고, 동궁일원인 성정각 앞을 지나면서 창덕궁 궁궐관람을 마치고...

이어 후원나들이를 하였으나 올해의 단풍과 낙엽은 지난 해(2008.11.13)에 비해 볼품이 없어 실망스럽다.

 

창덕궁 관람을 마치고 천도교 수운회관 옆 '정자옆에서'라는 곳에서 이른 저녁식사를 하고...

이후 일정을 일부 수정하여 삼청동 탐방 대신에 '청계천 세계 燈 축제'를 구경하기로 한다.

 

광화문광장(세종대왕동상~이순신장군동상)을 거쳐 청계광장으로 갔으나

개막행사가 열리는 청계광장에서부터 燈이 걸린 삼일교까지는 통행이 제한되고...

 

해서 청계천 도로변 인도를 따라 걷다가 통제가 안되고 있는 수표교에서 청계천 산책길로 내려선 후

일단 두물다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면서 '세계 燈 축제'를 관람하기로 한다.

 

청계천 산책로를 따라 두물다리까지 가니 '청혼의 벽'이 재개장되어 있었다.

'청혼의 벽'에는 기존의 '워터스크린'과 사랑의 자물쇠존, 동판존 외에도 하트조명, 하트분수, 이벤트 자전거 등이 보인다.

 

청계천을 거슬러 올라오니 삼일교부터는 '세계 燈 축제'의 개막식을 마치고 점등 된 각가지 燈들이 청계천의 밤을 밝히고 있다.

 

청계광장에서 오늘의 걷기를 마치고 해산하여 서울광장을 둘러보고 시청역에서 전철로 귀가.

 

'모든 만남은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오늘도 길 위에서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고...

  

'창덕궁 탐방 後 광화문광장 거쳐 청계천 세계 燈축제 관람'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맥가이버가 '때론 함께, 때론 홀로' 산행이나 여행, 도보를 하면서 후기를 주로 사진으로 작성함은

인간의 기억력이 유한함을 알기에 훗날 그 당시의 풍광과 그리고 함께 했던 님들과의 추억을 되살리고자 함이고,

인간의 만남이 또한 유한함을 알기에 어떤 연유로 비록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하고자 함이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하는 무능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든다면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자 할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창덕궁 탐방 後 광화문광장 거쳐 청계천 세계 燈축제 관람' - 2부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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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

 

본래 창덕궁의 후원으로 후원(後苑) 또는 왕의 동산이라는 뜻에서 금원(禁苑)이라고 불렀으며,

비원(秘苑)이라는 명칭은 일제 때 용어이다.

〈태종실록〉에 1406년(태종 6) 4월 창덕궁 동북쪽에 해온정(解溫亭)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정원은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459년(세조 5)에는 후원 좌우에 연못을 만들고, 열무정(閱武亭)을 세웠다.

1463년에는 후원을 확장하여 경계가 거의 성균관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창덕궁과 함께 후원도 불타버렸으나 광해군 때 복원되었다.

이때의 모습이 왕조실록의 주해에 기록되어 있는데 "기이한 화초와 괴석들을 늘어놓고

원유의 꽃과 돌 사이의 곳곳에 작은 정자들을 만들어 그 기교하고 사치스러움이 예전에 일찍이 없었다"라고 했다.

 

1636년(인조 14)에 지금의 소요정(逍遙亭)인 탄서정(歎逝亭), 태극정(太極亭)인 운영정(雲影亭), 청의정(淸漪亭) 등을 세웠고,

청의정 앞쪽 암반에 샘을 파고 물길을 돌려 폭포를 만들었으며 옥류천(玉流川)이라는 인조의 친필을 바위에 새겨놓았다.

 

1642년에는 취규정(聚奎亭)을, 1644년에는 뒷날 관덕정(觀德亭)인 취미정을, 1645년에는 희우정(喜雨亭)인 취향정(醉香亭)을,

1646년에는 청연각(淸讌閣)인 벽하정(碧荷亭)을, 1647년에는 취승정(聚勝亭)과 관풍정(觀豊亭)을 세웠다.

1688년(숙종 14)에는 청심정(淸心亭)과 빙옥지를, 1690년에는 술성각 옛 자리에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을 세웠다.

1704년에는 대보단을 축조했고, 1707년에는 택수재(澤水齋)를 세웠다.

1776년에는 왕실의 도서를 두는 규장각을 세웠는데 이는 주합루(宙合樓)라 부르는 중층 누각이며,

그 아래 연못 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택수재를 지금의 부용정(芙蓉亭)으로 고쳤다.

 

1828년(순조 28)에는 사대부들의 생활을 알기 위해 후원 안의 개금재 자리에 연경당(演慶堂)을 지었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는 선원전을 지었다.

 

후원은 크게 네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영역은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주합루·영화당(暎花堂)·사정기비각·서향각(書香閣)·희우정·제월광풍관(薺月光風觀) 등의 건물들이 있는 지역이다.

둘째 영역은 기오헌(寄傲軒)·기두각(奇斗閣)·애련지(愛蓮池)·애련정·연경당이 들어선 지역이다.

셋째 영역은 관람정(觀纜亭)·존덕정(尊德亭)·승재정·폄우사(砭愚榭)가 있는 지역이다.

넷째 영역은 옥류천을 중심으로 취한정(翠寒亭)·소요정·어정(御井)·청의정·태극정이 들어서 있다.

그밖에도 청심정·빙옥지·능허정(陵虛亭) 등이 곳곳에 있다.

후원의 구성은 낮은 야산과 골짜기 그리고 앞에 펼쳐진 편평한 땅 등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꼭 필요한 곳에만 인공을 가해 꾸며놓았다.

따라서 우리나라 조원(造苑)의 특징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예이다.

- 다음백과사전(브리태니커) 에서 -

 

 

 

 

 

 

 

 

 

 

 

 

 

 

 

 

 

 

 

 

 

 

 

 

부용정


부용정은 숙종 33년(1707)본래 택수재로 지은 것을 정조 16년에 고쳐 지으면서 부용정이라 부르게 된 정자이다.

정자의 남쪽은 낮은 동산인데 여기는 단이 지게 흙을 파내어 고르고 그 가장자리를 장대석으로 마무리 하였다.

그리고 단마다 꽃을 심거나 석함을 놓아 치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전통정원에서의 화계라 부르는 것이다.


화계는 글자 뜻 그대로 꽃을 심어 만든 계단을 말하는데 궁궐뿐만 아니라

사대부 집이나 정자, 누대 등이 서 있는 주변에 구릉이 있는 곳이면 화계를 꾸민다.

 

우리나라는 전국토 2/3가 산지이기 때문에 곳곳에 산과 구릉이 많아서

이런 화계를 (부용정에 새겨진 물고기)두는 것이 일반적인 정원의 모습이다. 

그리고 화계는 특히 뒤뜰 뒷동산을 중심으로 두기 때문에 예부터 뒷동산을 잘 가꾸어 왔고

이를  가꾸는 사람을 "동산바치"라 불렀다.

동산바치는 오늘날의 정원사이다.


부용정 화계위에는 석함이 있고 석함에는 괴석이 담겨져 있는데 일종의 정원을 꾸미는 석물이다.

괴이하게 생긴 그러나 운치 있는 괴석을 담아 두는 석물이라 하여 석함이라 부르며

때로 괴석을 받쳐주는 대라는 뜻으로 괴석대라고도 한다.

석함은 일반적으로 정방형이나 장방형이지만 때로 육각형, 팔각형이기도 하다.

그 높이도 다양하여 바닥에 닿는 낮은 것에서부터 높은 대를 세우고 그 위에 다시 괴석을 담은 석함을 올려놓기도 한다.

 

또 부용정 기둥에는 기둥마다 주련들이 걸려 있는데,

여기에는 한시들이 초서체로 새겨져 있어 이들 시구를 감상하노라면 저절로 시흥에 젖고,

더더욱 부용정의 공간정서에 몰입하게 된다.


시는 다음과 같다

 

천 떨기 고운 자태 아름다운 놀 흐르고

십리에 퍼진 맑은 향기 사향을 터트린 듯

낭원의 신선들 푸른 일산 펼친 듯

대라천 일천 부처 향성에 싸여 있듯.

붉은색 푸른색 어리 비쳐 맑은 물에 드리웠고

꽃도 잎도 향기로워 발속에 스며드네

활짝 핀 꽃봉오리 삼천궁녀 취한 볼이요

연잎의 빗방울은 오백 나한 염주알이라.

거북이 놀고 고기 헤엄치는 맑디 맑은 가을 물속이요

이슬 짙고 바람 좋은 서늘한 초가을일레.

-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홍순민 지음>에서 -

 

 

 

 

부용지

부용정 북쪽으로는 넓다란 장방형 연못이 있다.


이 방지의 크기는 세로 34,5m 가로 29.4m나 되는데 가장자리는 장대석들을 바른층 쌓기로 하여 마감하였다.

또 못 가운데에는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한 둥근 섬이 하나 있다.

연못이 네모나고 섬이 둥근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고 하는 천원지방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연못은 대개 네모나고 또 가운데에는 둥근 섬이 하나씩 있다.

이런 모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이루어져 왔다.


[삼국사기]의 백제 무왕때 기록을 보면 "궁궐남쪽에 못을 파고,20여리 밖으로부터 물을 끌어드리고

네 가장 자리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 방장 선산을 모방하여 섬을 만들었다"고 쓰여져 있다.

여기서 네 가장자리라는 것을 바로 못이 네모난 방지임을 말해 주고

방장 선산은 도가에서 말하는 신선들이 산다는 방장, 봉래, 영주의 세 선산 가운데 하나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

도교사상이 일찍부터 정원 조영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게 해준다.


곧 부용지의 조영에는 음양론, 도가사상 등이 크게 작용하였으며 이러한 오래된 조형 원리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부용지의 물은 지하에서 솟아오르고 또 서쪽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은 연못 서쪽에 있는 용머리의 석루조로 들어오는데

1800년대에 그린 "동궐도"에는 석루조가 없고 가운데의 섬도 지금보다 훨씬 작으며 배가 2척 떠 있다.

연못의 가득찬 물은 동쪽 연못 가장자리에 뚫어 놓은 수구로 간다.

그리고 부용정 쪽은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하였는데 한 돌에 물고기 한 마리가 새겨져 있다.


-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홍순민 지음>에서 -

 

 

 

 사정기 비각


부용정 큰 못 서쪽물가에 서 있는 이 비각은 숙종 때 세운 것이다.

본래 세종 6년 영순군과 조산군으로 하여금 지금의 주합루 근처에서 우물을 찾도록 하였는데

마침 두짝 씩 찾아내어 이것들을 마니, 파려, 유리(琉璃), 옥정이라 이름을 지었다.

뒷날 숙종 16년(1690)에 이를 기념하여 옛 술정각 자리에다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사정기 비각이다.

 

-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홍순민 지음>에서 -

 

 

 

 

 

 

 

주합루/어수문


주합루는 부용정 북쪽 맞은편 부용정 연목의 북쪽 놓은 언덕 위에 이층 다락집으로 우뚝 서 있다.

이 주합루를 처음 세운 것은 정조 원년인 1777년으로 아래층에는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정각이 있고

그 위층은 열람실로서 사방의 빼어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누대가 있다.

 

정문인 어수문을 들어서서 여러 단의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노라면 먼저 주합루 팔작 지붕이

그리고 다음으로는 누의 공포 창방 기둥들이 눈앞에 다가 오다가 1층 규장각 제일 중앙 어간을 마주하게 된다.

누의 건축은 장대석 바른층 쌓기를 한 높은 기단위에 다듬은 돌초석을 놓고 밖으로는 방주를 세우고 안쪽으로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윗몸에 익공 2개를 놓아 이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부연을 둔 겹처마로 팔작 기와지붕을 덮었는데, 용마루는 양쪽에 회를 발라 양성을 하였고

용마루 끝에는 취두를 얹고 추녀마루에 잡상들을 얹어 한껏 치장을 하였다.


어수문 낮은 터부터 주합루가 자리잡은 위 터까지는 중앙에 놓은 돌계단 좌우로

장대석 바른층 쌓기 한 석단들을 여러 층 놓아 마무리 하였다.

이 석단에는 꽃도 심고 나무도 심었고 "동궐도"에서 살펴보면 어수문 좌우의 작은 협문으로 넝쿨을 말아 올리는 시설을 하여

여기에 푸른 식물들이 뒤덮여 있어 마치 푸른 병풍을 둘러놓은 듯하다.

이런 시설물 곧 취병은 "동궐도"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대부분 이곳 어수문 양쪽에서와는 달리 그 길이가 짧고 전각의 안뜰에 설치되었다.

 

어수문 양쪽으로 둘러친 긴취병은 어수문 위쪽 주합루의 공간과

부용정 부용지의 아래 공간을 커다란 2개의 공간으로 갈라놓는 역할을 한다.

주합루 앞쪽 동쪽석단 위에는 운두가 놓은 장방형 기단석을 놓고

이 위에 상중하 세 부분으로 나눈 한 덩어리의 커다란 직육면체의 돌을 얹어 놓았다.

아래위는 중앙부보다 돌출되고 사면에 아름다운 꽃무늬를 새기고

중앙에 들어<구름모양의 계단: 구름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체이며 왕과 백성을 연결하는 의미를 나타낸다.>간 부분은

안상을 새겨 치장하였다.

 

석물은 한떄 이런 석물 자체만으로서 정원의 한 장식품이 되는 수석으로 알려졌으나

과학사 분야의 연구로 낮과 밤의 시간을 알게 해주는 시계를 얹어 두던 하나의 받침돌 곧 대석임이 밝혀 졌다.

이것의 올바른 이름은 "일성정시의대"이다.

 

동궐도에는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후원 곳곳에 해시계가 그려져 있는데

그만큼 당시에 궐 밖의 종루와 자격루에만 의존하지 않고 생활하는 가까이에서 시각을 알게 하였던 것을 말해준다.


-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홍순민 지음>에서 -

 

 

 

 

 영화당 


부용지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단층집으로 정면 5간 측면 3간 되는 장방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이 정자 모양의 영화당은 숙종 18년(1682)에 다시 지은 것인데 궁궐지에는 "영화당 15간이고 남쪽에 남행각 7간이 있었고

여기에 의춘문이 있었으며 또 담장에 영화문 그리고 22간의 곳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설명과 일치하게 " 동궐도"에도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또 정조 때부터 이곳 영화당 동쪽 넓은 마당에 과거장을 마련하고

영화당에 임금이 친히 참석하여 전시를 보여 인재를 뽑았다고 한다.

 

-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홍순민 지음>에서 -

 

 

 

  

 

 

 

 

 

의두각 


기오헌 처럼 민도리집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백골집으로 정면 2간 측면1간의 극히 작은 평면을 이루고 있다.

이곳 또한 익종이 왕세자일때 다시 짓고 즐겨 시간을 보내던 곳이다.

 

-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홍순민 지음>에서 -

 

 

 

 

 

 

 

 

불로문과 애련정


금마문 옆 담장 중간에는 담장을 끊어 2개의 다듬은 돌 초석을 놓고 이 위에  모양으로 한 장의 통 돌을 깍아 세운 불로문이 있다.

본래에는 문짝을 달았었는지 돌쩌귀 구멍 자리가 남아 있는데 이 문을 드나들면 늙지 않기를 기원했던 모양이다.

"궁궐지"에도 불로문 앞에 연못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볼때  이"궁궐지"의 기록이나

"동궐도"의 내용이 서로 같으며 또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한 동궐도"에는 순조 27년(1827)에 지은 기오헌과 의두각이 없고

대신 양안제와 거림운이라 쓴 2채의 집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동궐도"가 필자가 밝혔던 순조 24년(1824)에서 28년(1828) 사이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던 것을 

1년 앞당겨 1827년 이전에 그려진 것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불로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넓은 네모난 연못이 있고 이 북쪽 연못가에 애련정이 자리 잡고 있다.

애련정은 숙종 19년 (1692)에 지은 것이다.

부연을 둔 겹처마로 사모지붕 중앙에는 절병통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기둥과 창방 아래에 낙양판을 붙여 정자 안에서 밖으로 내다보는 경관이나 정자를 바라볼 때 한층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


기둥에는 주련 들이 걸려 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비 맞은 연잎 위에 진주알 흩어지고

활짝 핀 연꽃은 단장한 고운 볼일레

정자는 여래 자리에 가깝고

못은 태을주를 띄웠네

꽃이 사랑스러워 군자라 일컫고

거북이 나이를 성상께 바치네

푸른 연대로 어주를 드리고

찬란한 놀 천화의 향기 흩도다


-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홍순민 지음>에서 -

 

 

 

 

 

 

 

 

 

 

연경당 


애련지를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작은 연목이 나오고 이 서북쪽 터에 연경당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의 연경당은 순조28년(1828)에 당시 왕세자였던 익종의 청으로 대사대부집을 모방하여 궁궐 안에 지은 이른 바 99간 집이다.

순조의 왕세자인 익종은 순조 9년에 태어나 순조 27년 왕명으로 대리 청정을 하다가 순조 30년(1830)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아들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왕으로 추존되어 익종으로 종묘에 봉향 되었는데 연경당은 바로 익종의 대리 청정 때 지은 것이다.


"동궐도"를 보면 애련지와 연경당 앞쪽의 작은 연못사이에 "어수당"이라 편액을 건 기와집이 한 채 있었고

또 연경당 자리에는 지금의 연경당과는 다른 "ㄷ" 자 평면의 연경당과 개금재 그리고 행랑에 우뚝 선 장락문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동궐도"와 기록을 살펴 볼 때 지금의 연경당을 본래의 연경당과 개금재 자리에 지으면서

당호와 문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먼저 살펴본 의두각, 기오헌 등이 모두 익종의 왕세자 시절에 지은 것으로

이곳 금마문과 불로문 안쪽 넓은 영역은 주로 익종이 왕세자 시절 즐겨 생활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홍순민 지음>에서 -

 

 

 

 

 

 

 

 

 

 

 

 

 

 

 

 

 

 

 

 

 

 

 

 

 

 

 

 

 

 

 

 

 

 

 

 

 

 

 

 

 

 

 

 

 

 

 

 

 

 

 

 

 

 

 

 

 

 

 

 

 

 

 

 

☞ 여기서 '창덕궁 탐방 後 광화문광장 거쳐 청계천 세계 燈축제 관람' - 2부를 마치고...

 

 

 

2009년 11월 11일(수)

'창덕궁 탐방 後 광화문광장 거쳐 청계천 세계 燈축제'에 다녀오다.

   

-▥☞ 1부[종로3가역→돈화문로→창덕궁(돈화문→금천교→인정전→희정당→대조전→성정각)]는 여기를 클릭.☜▥-

 

-▥☞ 2부[성정각→후원(부용지→주합루→영화당→불로문→연경당)→향나무→금호문→동궐마루]는 여기를 클릭.☜▥-

  

-▥☞ 3부[동궐마루→운현궁 앞→천도교 수운회관 앞→광화문광장→청계광장→수표교→오간대수교]는 여기를 클릭.☜▥-

 

-▥☞ 4부[오간대수교→존치교각→두물다리 청혼의벽→존치교각→빨래터→오간대수교→나래교→삼일교]는 여기를 클릭.☜▥-

 

-▥☞ 5부[삼일교→장통교→광교→광통교→모전교→청계천 시점폭포→청계광장→서울광장→시청역]는 여기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