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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궁궐·왕릉·묘ㆍ원

[20100321]양주 장흥면 석현리에 있는 권율장군묘(權慄將軍墓)를 찾아가다.

by 맥가이버 Macgyver 2010.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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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03월 21일(일)  
양주 장흥면 석현리에 있는 권율장군묘(權慄將軍墓)를 찾아가다.
 

종 목  시도기념물 
제2호 (양주시) 
명 칭 권율장군묘(權慄將軍墓)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기타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산168-1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사유
관리자(관리단체) 이윤배
상 세 문 의 경기도 양주시 문화체육담당관실 031-820-2129

 

일반설명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명장인 만취당(晩翠堂) 권율(1537∼1599) 장군의 묘소이다.

선조 15년(1582)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55세 때에는 의주목사로 부임하여 북방 여진족을 방어하였다.

임진왜란(1592∼1598) 중에는 전주에서 군사 만 여명을 지휘하여 독산성에 진을 치고 적이 서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또한 선조 26년(1593)에는 서울을 회복하고자 행주산성으로 진을 옮겨 군·관·민이 힘을 합하여 3만의 왜군을 물리쳤다.

이것이 임진왜란 3대 대첩(진주대첩, 한산도대첩, 행주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장군이 선조 32년(1599)에 62세로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그의 관직을 영의정으로 높였으며,

선조 37년(1604)에는 선무공신 1등에 영가부원군으로 모셔졌다.

 

현재 묘역에는 장군의 묘를 중심으로 좌우에 전(前)부인 창녕 조씨와 후(後)부인 죽산 박씨가 안장되어 있다.

묘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동자석 1쌍이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을 세웠다.

묘역의 입구에 있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는

기존의 신도비 비문이 마모되어 철종 12년(1861)에 장군의 후손들이 새로 세운 것이다. 

 

 

전문설명


이 곳은 충장공(忠莊公) 권율 장군의 묘소이다.

장군의 호는 만취당(晩翠堂), 본관은 안동이며 조선 중종 31년(1537) 강화군 영동에서 권철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선조 15년(1582) 과거에 급제하고 55세 때는 의주목사로 부임하여 북방 여진족을 방어하였다.

임진왜란 중에는 나라에 큰 전공을 세워 구국의 명장이 된 분이다.

특히 중요한 공적으로는 전주에서 군사 만여명을 인솔하여 수원 독산성(禿山城)에 진을 치고 적이 서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한편 서울을 회복하려고 행주산성으로 진을 옮겨 선조26년(1593) 2월 군관민이 힘을 합하여

적은 군사로써 왜적 3만의 대군을 물리치는 대첩을 올렸다.

 

행주대첩은 후퇴하던 왜적의 기세를 꺾었으며 임진 3대 대첩의 하나이다.

대첩 후 장군은 도원수(道元師)로 임명되어 전군을 징휘하였다.

장군이 선조 32년(1599)에 62세로 별세하자 나라에서는 영의정을 추증하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을 추봉하여 그의 공적을 기렸다.

고양군 행주산성에 행주대첩의 승전비가 건립되어 성역화되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명장인 권율(權慄, 1537∼1599)과 정부인 창녕 조씨, 후부인 죽산 박씨의 묘이다.

권율은 안동 권씨로 선조 15년(1582)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의주목사로 근무하던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목사에 임명되었다.

 

한양 수복을 위하여 북상하였으나 용인싸움에서 패하자 다시 광주로 되돌아가서 군사를 모아

충청도 금산 이치싸움에서 왜적을 대파시켜 전라도 지역을 지켰다.

이어 함락된 한양의 수복을 위하여 다시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산성에 진지를 구축하고 왜군의 진격을 막았다.

이후 행주산성으로 진지를 옮겨 권율이 일사분란하게 통솔하고 군사들은 사력을 다해 싸워 대승을 거둔다.

 

권율은 이 공으로 전군을 지휘하는 도원수가 되었으며, 선조 29년(1596)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선조 32년(1599) 관직을 물러나 그해 세상을 떠나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의 일반적인 묘역구조는 봉분(封墳)앞에 묘비(墓碑)·혼유석(魂遊 石)·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이 있고

상석(床石) 앞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그 양쪽으로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을 각각 1쌍씩 세웠다.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공신이나 훌륭한 학자에게 허용되었던 것으로 묘의 남쪽 가까이 세웠다.


권율의 묘역은 이러한 원칙에 비교적 충실히 하였다.

권율의 묘소에는 묘비(墓碑)·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이 각1기씩 있다.

그리고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표시인 망주석(望柱石)과 무덤을 수호하기 위해 세우는 동자석·문인석(文人石)이 각 1쌍씩 세웠다.

묘역의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기존의 신도비가 비문이닳아 없어져 철종 12(1861)에 권율의 후손들이 새로 건립한 것이다.

1971년과 1999년 정화사업으로 묘를 새롭게 단장했다.

 

- 문화재청 홈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