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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싶다☞/♤ 도시와 산

[도시와 산]<9> 대구 팔공산

by 맥가이버 Macgyver 2010. 9. 11.

[도시와 산]<9> 대구 팔공산

만인에 열린 소망의 언덕

남쪽으로 힘차게 내달리던 태백산맥이 낙동강과 금호강이 만나는 곳에서 우뚝 솟았다.

대구·경북의 영산(靈山) 팔공산이다.

요즘 팔공산은 사람들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주말과 공휴일이면 더 멀어진다.

하루 7만~8만명이 찾기 때문이다.

 대구시 인구가 250만명이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팔공산에서 주말과 공휴일을 보내는 셈이다.

그만큼 대구 시민에게 없어서는 안될 휴식 공간이다.

편안하게 팔공산을 찾기 위해서는 평일이 좋다.

팔공산 동화사지구에 있는 산중식당 주인 김유진(39·여)씨는 “주말과 휴일에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잡기가 힘들다.”고 귀띔했다.

▲ 불교문화의 성지인 팔공산은 대구시민의 영원한 안식처로 자리를 잡아 항상 등산객들로 북적인다. 팔공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동봉의 한 바위에서 등산객들이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다.
대구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동화사지구 상가촌 중심거리 중앙분리대의 한 바위에 새겨진 시 한 수가 험난한 팔공산 산길을 예고했다.

 ‘험준한 공산이 우뚝이 솟아서/ 동남으로 막혔으니 몇달을 가야 할꼬/ 이 많은 풍경을 다 읊을 수 없는 것은/ 초췌하게 병들어 살아가기 때문일까.’ 매월당 김시습의 ‘팔공산을 바라보며’ (望公山)라는 글이다.

 

팔공산의 이름은 신라 때 ‘공산’이었다.

원래 ‘꿩산’인 것을 한자로 표기하려다 보니 공산이 됐다고 한다.

실제로 팔공산 일대 일부 지형은 꿩을 닮았다.

동화사 너머 ‘치산리’(雉山里)가 그곳이다.

치산리에 대해 경북도교육청이 발간한 ‘경북 지명유래 총람’은 “주위 지형이 쪼그리고 앉은 꿩 모습을 해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기록했다.

‘팔공산’이란 명칭은 1530년 편찬된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와서 처음 등장한다.

 

●팔공산 정상 비로봉 곧 시민의 품에

 

팔공산은 정상인 비로봉(1192m)을 중심으로 동·서로 20㎞에 걸쳐 능선이 이어져 동봉(1155m)과 서봉(1041m)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하지만 최고봉인 비로봉은 금지된 땅이다.

1960년대 말 군사보안, 통신시설 보호 등의 이유로 철조망과 쇠말뚝에 몸을 내어준 지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 보니 동봉을 팔공산 정상으로 여기는 시민들이 많다.

팔공산 정상을 시민들에게 돌려달라는 여론이 들끓으면서 비로봉의 문이 열리게 됐다.

팔공산자연공원관리사무소 최재덕 소장은 “이르면 9월쯤 대구 방향쪽으로 쳐져 있는 철책을 걷어낼 것”이라며 “이를 위해 9000만원의 예산도 확보해 뒀다.”고 밝혔다.

아는 이들이 많지 않지만 팔공산은 ‘한국 산악운동의 메카’다.

산악인들을 대거 배출한 ‘전국 60㎞ 극복 등행대회’가 매년 열려서다.

이들은 대구·경북 산악인들이 대한산악연맹을 창립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산악운동사에 반드시 조명돼야 할 소중한 존재다.

대구시산악연맹 갈판용(64) 고문은 “1959년 팔공산에서 열린 제1회 대회가 올해로 51회를 맞는다.”며 “이 대회를 통해 전국의 내로라하는 산악인들을 무수히 배출했으니 팔공산이 우리나라 산악운동의 요람이라고 자부할만 하다.”고 말했다.

 

●팔공산은 불교문화 성지

 

팔공산은 불교문화의 성지다. 팔공산의 대표 사찰 동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9교구 본사 사찰이다.

원래 이름은 유가사였으나 중건할 당시 오동나무 꽃이 상서롭게 피어 있어서 동화사로 고쳐 부르게 됐다.

마애좌불좌상(보물 제243호)을 비롯한 7점의 보물이 있다.

부인사는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으로 알려진 초조대장경을 보관한 곳으로 유명하다.

제2석굴암은 경주 석굴암보다 250년 앞서 만들어졌다.

팔공산을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관봉석조여래좌상(보물 431호)이다. 머리에 평평한 돌 하나를 갓처럼 쓰고 있어 갓바위로 더 잘 알려진 높이 4m의 불상이다.

한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영험이 있어 입시철에는 전국에서 수많은 불교신자들이 찾는다.

대구 얼찾기 모임 이정웅(64) 회장은 “팔공산은 조계종의 발상지이고 곳곳에서 불교의 발자취를 만날 수 있다.

또 동화사는 신라 불교 공인 이전에 창건됐다.

이로 미뤄 팔공산 일대에 얼마나 불교문화가 성행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수태골코스가 가장 인기있는 등산로

 

등산로는 동화사 코스, 갓바위 코스 등 수없이 많다.

정상까지 거리는 3~9㎞, 소요시간은 2~6시간에 이를 정도로 다양하다.

이 가운데 가장 인기있는 코스는 경사가 완만하고 등산로가 잘 정비된 수태골 코스다.

수태골~암벽바위~국도림폭포~동봉(3.5㎞)까지 약 2시간 소요된다.

김현주(46·여·대구시 달서구 상인동)씨는 “수태골의 맑은 계곡물과 새소리, 바람소리가 어우러져 올 때마다 설레게 한다.”고 말했다.

동화지구~동화사~염불암~동봉에 이르는 3.4㎞ 2시간 코스는 불교문화 탐방코스로 인기다.

동화사에서 염불암까지 확 트인 길은 등산객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뿐만 아니라 계곡의 수려함이 팔공산의 산세와 더불어 일품을 이룬다.

동화사 집단시설지구에서 해발 820m까지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다.

시간이 부족한 이들에게 효과적인 수단이다.

약 1.2㎞ 구간을 왕복 운행하며 정상에는 음식과 음료를 판매하는 휴게소도 마련돼 있다.

팔공산은 여름이면 더욱 바빠진다.

아예 팔공산으로 집을 옮기는 사람들 때문이다.

동화지구와 파계지구, 가산산성 등 3곳의 야영장에는 대구의 지독한 더위를 피해온 행렬로 장사진을 이룬다.

이곳에는 500여동의 텐트촌이 형성돼 발 디딜 틈이 없다.

이래저래 팔공산은 대구시민들을 오랜 세월 보듬어 왔고 시민들은 그 품에 기대어 살아간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고려 개국 공신들 피의 함성 들리는 듯

 

팔공산은 고려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노산 이은상 선생은 ‘팔공산’이라는 시에서 ‘눈 속에 오동꽃이 피었더라기/ 팔공산 동화사에 오르는 길에/ 고려의 두 장군이 피를 흘린 곳/ 주춤서 슬픈단가 외어보았소.’라고 했다.

 

▲ 만지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동화사 봉서루 앞 바위에 있는 3개의 봉황알.
대구 정연호기자

팔공산 일대는 통일 신라 말 왕건의 고려군과 견훤의 후백제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927년 후백제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은 이곳에서 후백제군과 격전을 치른다.

후삼국 통일전쟁의 3대 전투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공산전투’ 혹은 ‘동수대전’이다.

 

왕건은 이 전투에서 자신만 겨우 목숨을 부지해 도망쳤고 1만명에 이르는 고려군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왕건이 살 수 있었던 것도 고려 개국 공신 신숭겸의 목숨을 빌려서였다.

신숭겸은 팔공산에서 포위당해 위기를 맞았을 때 자신이 왕인 양 꾸며 행동함으로써 변장한 왕건에게 탈출할 시간을 벌어준 후 전사했다.

 

왕건은 신숭겸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전사한 자리인 팔공산 지묘동 일대에 지묘사, 미리사 등의 사찰을 세워 명복을 빌게 했다.

이들 사찰은 고려 멸망 뒤 폐사됐다가 1606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유영순이 지묘사 자리에 표충사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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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표충사 앞쪽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왕건의 군대가 크게 패한 고개라 해 ‘파군재’라 부른다.

 

파군재 남쪽 산기슭의 봉무정 앞의 큰 바위는 왕건이 탈출해 잠시 앉았다고 해 ‘독좌암’, 표충사 뒷산은 왕건을 살렸다는 뜻에서 ‘왕산’이라고 한다.

팔공산 입구인 불로(不老)동은 왕건이 도망쳐 이곳에 이르자 어른들은 피란가고 아이들만 남아 있어 붙여졌다.

위험을 피해 한숨을 돌리고 찌푸린 얼굴을 활짝 편 곳은 해안동이다.

 

왕건이 도주하던 중 나무꾼을 만나 주먹밥을 얻어먹었다가 나중에 나무꾼이 다시 그 자리에 내려와 보니 왕건이 온데간데 없어졌다고 해서 ‘왕을 잃은 곳’이란 뜻의 ‘실왕리’(시랑리)로 불린다.

 

한밤중에 달이 중천에 떠 탈출로를 비췄다고 해서 반야월(半夜月)이고 이곳에 도착해서야 왕건이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고 해서 ‘안심’이다.

대구시는 최근 이 길을 복원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대구 한찬규기자

서울신문 2009-06-01  2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