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산] (10) 포천 국망봉
궁예의 恨 드리운 듯 山이 되지 못한 峰
산은 찾을 때마다 모습이 전혀 새롭다. 높고 큰 산일수록 더욱 그렇다.
경기도에서 세 번째로 높은 국망봉(國望峰·1168m)은 그런 산이다. 매번 찾아갈 때마다 모습을 달리했다.
화악산, 명지산, 광덕산, 각흘산, 명성산 등 주변 산에 올라서 봐도 산으로서의 품격이 높았다.
궁예와 관련된 역사성도 있고, 개성도 독특하다. 그런데도 국망봉은 자신을 낮추어 산이 아닌 ‘봉’이 되어서일까.
서울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도시의 산꾼들에게는 광덕고개에서 백운산~도마치봉~신로봉~국망봉~개이빨산(견치봉)~도성고개~강씨봉으로 이어지는 당일치기 종주산행 코스가 이름있다.
▲ 1100여년 전 궁예의 애잔한 전설이 내려오는 국망봉의 정상이 구름 저편에 자리잡고 있다. 푸른 카펫을 깐 것 같은 방화대가 능선을 따라 조성돼 있다. 한 폭의 산수화 같은 풍경 속에서 두 사람이 산행하고 있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천상의 화원, 영혼까지 맑게 한다
경기·강원 경계인 광덕고개(664m)에서 시작해 국망봉을 거쳐 강씨봉까지 이어지는 9시간 이상의 종주코스는 체력만 허락되면 당일치기로는 최고이다.
힘이 부치면 신로령, 국망봉, 도성고개 등 중간중간서 단축, 이동 쪽으로 하산하면 그만이다.
도성고개에서 이동 쪽 하산길 끝 부분에 낙태나 유산으로 고통받는 불자들과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사라져간 생명을 위한 참회기도 도량 구담사가 눈길을 끈다. 부근이 불당(佛堂)골로 예전에 큰 절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울창한 참나무와 물푸레나무 숲이 계속되는 해발 1000m 안팎의 능선은 환상적인 천상의 화원이다.
백운산 일원에서는 멸종위기 식물인 천연기념물 히어리가 보호되고 있다.
이후 끝없는 산상·천상 화원이 펼쳐진다.
도시에서 찾아간 산꾼들의 넋을 빼앗고, 영혼까지 맑게 한다.
긴 종주능선에서 5월 초에는 얼레지가 지천이다.
음지는 물론 방화대 여기저기 외롭게 혹은 집단으로 서식한다.
가냘프면서도 우아하다. 꽃말이 ‘질투’이듯 시샘이 날 정도로 미려하다.
홀아비꽃대는 투박하다.
각시현호색은 수줍어 보인다.
산괴불주머니, 노랑매미꽃, 애기똥풀, 각시붓꽃, 아욱제비꽃, 애기나리 등은 꽃도, 이름도 정겹다.
민드기산 정상의 할미꽃들은 처연하다.
5월 말 천상의 화원은 주인공이 바뀐다.
보름 전 소수이던 애기나리, 둥글레, 용둥글레가 거의 전 능선을 점령해 버린다.
앙증맞으면서도 순결해 보이는 은방울꽃은 잊을만하면 깊고 그윽한 향기를 뿜어낸다.
국망봉 정상 가까운 능선 고산지역서만 보이는 큰앵초 군락은 지친 발걸음에 힘을 불어넣는다.
천상의 화원은 가을까지 주인공이 쉼 없이 바뀐다.
동자꽃이 한철을 풍미하고 가을에는 천남성이 인상적이다.
구절초, 쑥부쟁이가 흐드러진다.
●1100년 전 전쟁터 지금도 상흔이…
국망봉 주변은 궁예가 고려 왕건과 패권을 다툰 치열한 전쟁터였다.
국망봉에서는 궁예가 세웠던 태봉의 도읍 철원이 보인다.
궁예는 자신에게 쓴소리를 하던 부인 강씨를 인근 강씨봉 자락에 유폐시켰다.
왕건에게 패한 뒤 강씨를 찾아나섰다가 죽었다는 소식에 이 산에 올라 철원 쪽을 바라보며 탄식해 국망봉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 말까지 망국산(望國山)으로 불리다가 봉으로 격하돼 국망봉이 됐다는 기록도 있다.
▲ 궁예가 부인을 유폐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강씨봉. |
국망봉에는 현재도 분단의 상처가 깊다.
국망봉 바로 남쪽이 38선으로 해방 이후 수년간 북한 땅이었다.
한겨울 영하 20도 이하로 내려가는 전방고지 화악산이 지척이다.
대성산 등 수많은 최전방 고지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군부대나 군시설도 주변에 많다.
그래서인지 이동이나 광덕고개까지 가는 사창리행 버스에는 군인이나 면회객들이 등산객들보다 많다.
▲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생명들을 위한 참회 도량인 구담사 법당 왼쪽의 애자모 지장보살전. |
동서울터미널에서는 오전 9시까지 3편의 사창리행 버스를 이용, 이동이나 광덕고개(1시간40분 소요)에서 내려 국망봉에 오를 수 있다.
상봉터미널에서 사창리까지 운행하는 강원고속 운전기사 안복수씨는 “토요일에는 많은 등산객이 오전 8시20분 버스로 광덕고개까지 간다.”고 소개했다.
●방심하면 큰일 난다
국망봉 주능선은 부드럽지만 하산길은 거칠다.
가평 쪽으로 내려갈 수 있지만 교통여건 상 서울 등산객들은 거의 포천 이동 쪽으로 하산, 귀경한다.
이동 쪽 하산길은 국망봉 쪽에서 급경사를 통해 내려가야 한다.
봄~가을에도 여기저기 밧줄을 잡고 내려가다가 미끄러지고 추락할 수 있다.
체력이 떨어진 상태라 30분 정도는 긴장해야 한다.
동절기 국망봉은 더 거칠다. 4월 말까지는 눈길이다.
2003년 2월에는 설날을 맞아 국망봉에 올랐던 6명이 조난을 당해 그 중 4명이나 숨지는 참사가 있었다.
이후에도 실족·추락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유명한 눈길 산행지인 국망봉은 동절기엔 위험이 2배 이상 증가한다.
반드시 장비를 갖추고 일몰 전에 하산해야 한다.”고 포천소방서 장서익 구조대장은 당부한다.
하나 있는 도마치봉 아래 샘은 갈수기엔 말라 버려 식수를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백운산에서 국망봉으로 갈 때는 자칫 흥룡사 쪽으로 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삼각봉 안내판 방향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
김재완 포천시 공보팀장은 “등산 안내판과 등산로의 안전시설 입찰을 끝내고 보강하는 작업을 순차적으로 진행한다.”고 전했다.
가평군·산림청도 최근 시설보완을 했다.
국망봉 능선은 9시간 이상 걸어도 만나는 일행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한적하다.
가끔 등산객을 만나면 음식 인심이 눈물 나게 후하다.
사람이 적기 때문에 위험을 당하면 더 당황하기 쉽다.
그러나 어디서도 잘 터지는 휴대전화를 이용, 119에 구원을 요청하면 된다.
이춘규 편집국 부국장
● 힘든 산행길 보너스 푹신푹신 방화대 능선길
국망봉 남북으로는 폭 10~20m의 나무를 베어 없앤 방화대(防火帶, 혹은 방화선)가 능선을 타고 길게 이어져 있다.
북쪽에서는 도마봉에서 국망봉 지척까지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국망봉에서 10리 정도 없다가 다시 푸른 카펫 길처럼 수십리 이어진다.
방화대는 능선을 따라 설치된다.
나무들이 울창한 가운데에 설치되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길게 카펫을 깔아놓은 것처럼 아름답다.
봄~가을은 나무들이 없는 방화대에 잡초가 우거지기 때문에 푹신푹신하다.
가을에는 잡초들이 말라 불에 타기 쉬워진다.
경기도 산림환경연구소 박봉섭씨는 “매년 10월 말~11월 초 예초기 등 장비를 동원해 방화대의 잡초와 잡목들을 제거, 혹시 모를 산불에 대비한다.”고 설명했다.
눈이 왔을 때 방화대는 등산객들이 편하게 걸을 수 있는 통행로가 된다.
방화대 설치를 “탁상행정이다.”며 복원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봄철 강풍 땐 방화대가 무기력할 수도 있지만 바람이 없을 땐 산불 번짐을 차단한다.
아울러 진화인력과 장비의 투입로로 활용된다고 산림청 산불방지과 정철호 주무관이 밝혔다.
방화대는 일본 강점기인 1929년부터 전국적으로 1764㎞ 설치됐다.
흐지부지됐다가 1차 산림녹화기(1972~78년)에 685㎞가 재차 조성됐다.
가평 명지산~연인산, 석룡산, 남양주 축령산과 천마산 그리고 포천 각흘산 등에도 방화대가 있다.
미국과 일본은 최대 폭 50m의 방화대를 다수 설치, 관리 중이다.
이춘규 편집국 부국장 tae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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