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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싶다☞/♤ 도시와 산

[도시와 산] <26> 부산 황령산

by 맥가이버 Macgyver 2011. 2. 6.

 

[도시와 산] <26> 부산 황령산
거친 시집살이 눈물 훔치던 아낙네들의 ‘반보기산’

 

옛 아낙네들은 황령산에 올라와 친정 있는 쪽을 보며 그리움을 달랬지. 그래서 반보기산이라고도 불렸지.”

부산 북쪽에 금정산이 있다면 남쪽에는 황령산이 있다. 해발 427m로 그리 높지 않다.

산꾼들은 “이게 무슨 산이냐.”고 힐난하겠지만 정상에 올라 탁 트인 동해와 동서남북으로 한눈에 펼쳐지는 부산시의 전경을 보노라면 왜 사람들이 황령산에 매료되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바다가 가까워 실제로는 더 높아 보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봉수대가 설치돼 이곳이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봉화를 올려 왜적의 침략을 서울 조정에 알렸다. 빠르면 12시간가량 걸렸다고 한다.

또 시집간 아낙네들이 산에 올라와 저너머 친정집 동네를 보며 소맷귀를 적시며 그리움을 달랜 곳이기도 하다.

 

▲ 황령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부산 도심의 모습. 광안리와 광안대교가 손을 뻗으면 잡힐듯 가깝게 보인다.

▲ 부산의 남쪽을 대표하는 황령산의 정상은 도심이 한눈에 들어오고 아기자기해 등산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부산시는 정상 전망대에 안전하게 오를 수 있도록 목재 데크를 만들었다. 부산 손형준기자 boltagoo@seoul.co.kr

금정산과 함께 부산의 대표적인 명산으로 꼽히는 황령산은 도심에서 가까운 데다 빼어난 경치 때문에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도심 속의 산답게 정상까지 도로와 등산로가 잘 갖춰져 있어 365일 찾는 이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산 중턱에는 청소년야영장과 체육시설 등이 있어 시민휴식공간으로 톡톡히 한몫 하고 있다.

산 정상에서 보는, 해운대와 광안리 앞바다를 가로지르는 광안대교의 야경은 한폭의 그림처럼 길손의 가슴에 다가온다.

우리나라 야경 가운데 최고로 꼽힐 정도다.

 

●황령산의 ‘황’은 荒일까 黃일까

 

황령산은 부산 남·수영·연제·부산진구 등 4개 구에 걸쳐 있다.

동편은 남구에, 서편은 부산진구에 접하고 있으며 남구가 가장 많은 지역을 차지한다.

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설치돼 있고 북동쪽으로 황령산의 가장 큰 봉우리인 금련산과 연결돼 있다.

산의 암석은 남미대륙 안데스산맥의 화산에서 많이 발견되는 안산암으로 이뤄져 있다.

 

황령산이란 이름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황령산을 누를 ‘황(黃)’자를 써서 황령산(黃領山)으로 표기해 놓고 있다,

그러나 동래부읍지(1832년)에는 현재처럼 거칠 ‘황(荒)’으로 기록해 놨다.

황령산은 동래가 신라에 정복되기 전 동래지역에 있었던 부족국가인 거칠산국(居漆山國)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다.

거칠산국에 있는 산으로 ‘기츨뫼’라 했던 게 한자화하면서 거칠 荒, 고개 嶺의 황령산이 된 것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거칠고 보잘 것 없는 산이라는 뜻으로 ‘황강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전상호 황령산 늘샘 쉼터 회장은 “황령산 한자명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현재는 거칠 황자를 사용하고 있다.”면서 “이는 아마 거칠산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황령산의 또 다른 이름인 ‘반보기산’에는 시집간 여인네들의 슬픈 이야기가 숨어 있다.

옛날 아낙네들은 출가외인이라 시집을 가면 친정나들이가 쉽지 않았다.

당시 남구 대연동 사람들은 인근의 용호동이나 기장 사람들과 주로 혼인을 했는데, 친정에 가지 못하는 그리움을 황령산에 올라 멀리 친정 쪽을 바라보며 달랬다고 한다.

가끔 친정식구들과 중간지점인 황령산에서 만나 반나절 정도 정을 나누다가 아쉬움을 안고 헤어졌는데 그런 연유로 반보기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일제 강점기 때에 이곳에는 탄광이 여럿 있었던 것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수영구 광안4동 옛 공무원교육원 자리에 있던 광산이 규모가 가장 컸는데 구리와 금을 캤다.

 

●사통팔달 등산로

 

황령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다. 그야말로 사통팔달이다. 남구 쪽에서는 대연동 경성대를 들머리로 해서 오르는 임도 코스가 있다. 비교적 코스가 단조롭지만 안전한 데다 길이 넓고 부드러워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다.

 

산행시간은 2시간30분쯤 걸린다. 경성대 인문관에 닿기 전 언덕길 왼쪽 산자락으로 따라 난 길을 타고 쭉 올라가면 된다. 황령산 정상으로 오르는 넓고 편한 길은 몇 개가 더 있다. 문현동 현대2차아파트를 들머리로 오르는 임도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산길은 남구와 부산진구를 가르는 구 경계선인 돌산고개에서 남구방향으로 20m쯤 내려오면 왼쪽으로 만난다. 현수막을 게시할 수 있는 지정광고대 옆(산쪽) 시멘트 길이 초입이다. 산행 초입에서 바람재까지 넉넉잡아 20분이면 충분하다.

 

부산시는 지난해 10월 ‘황령산 봉수대 전망시설 및 주변정비사업’을 벌여 산 정상에 6604㎡ 규모의 공원을 꾸며 누구나 황령산 정상에 올라 편안하고 안전하게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부산서 가장 오래된 봉수대

정상 안 가보면 정말 후회합니데이!

 

부산 황령산 봉수대는 임진왜란 때 불을 피워 전쟁을 알린 중요한 사적지로 해운대의 간비오산 봉수대와 함께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봉수대 중 하나이다.

경상도 지리지에 따르면 조선시대인 1425년(세종 7년)에 황령산 정상에 봉수대가 설치됐다.

조선시대 동래부에서 관리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황령산 봉수대에서 봉수가 올라 북으로 이어졌다.

 

황령산 봉수대에서 내려다보면 부산의 앞바다가 확 트여 보이고 내륙지역을 바라보는 시계도 넓어 적의 침입을 쉽게 확인하기에 가장 알맞은 곳이었다.

이 봉수대는 동쪽으로 해운대의 간비오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구봉 봉수대와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범어사·계명산 봉수대 등과 연결돼 있다.

부산지역 봉수망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봉수대에는 5개의 봉화구가 있으며 1898년에 기능을 상실했다가 1976년 복원됐다.

이후 1992년과 1995년, 1996년 등 세 차례에 걸쳐 보수 작업이 이뤄졌다.

 

봉수대는 고려시대부터 사용한 통신시설로 약 30리마다 산꼭대기에 봉화대를 두고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불을 올렸다.

평시에는 한 번, 적이 나타나면 두 번, 적이 접근하면 세 번, 적과 싸우면 네 번을 올리는 등의 방식으로 서울 목멱산(현재 남산)의 경(京)봉수대까지 연결됐다고 한다.

해마다 산신제와 함께 봉화 재현 행사가 열린다.

각 봉수대에는 도별장 1명을 두고 이 밑으로 별장 10명, 감고(監考) 1명, 봉군(烽軍) 100명씩 배치했다.

 

김무조 부산시문화재위원은 “봉수대는 조선시대 군사적 목적의 중요한 통신 수단이었으며 황령산 봉수대는 부산에서는 가장 오래된 봉수대에 속한다.”라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부산의 남쪽을 대표하는 황령산의 정상은 도심이 한눈에 들어오고 아기자기해 등산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부산시는 정상 전망대에 안전하게 오를 수 있도록 목재 데크를 만들었다.

 

부산 손형준기자 boltagoo@seoul.co.kr

울신문 2009-09-28  2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