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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경기 도보후기☞/☆ 염하강변일주

[20180121]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 - 2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8.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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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21일(일)

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를 다녀오다.
 

 


'염하강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 이야기

 

 '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 코스


강화역사관→舊강화대교 도강→포내천수문→포내배수펌프장→해병대훈련장→김포CC→고양리쉼터→원머루나루(고양포)→할머니매점

→쇄암리전망대쉼터→고란초삼거리→출렁다리→부래도쉼터→부래도(덕포나루)→손돌묘→덕포진 파수청터→덕포돈대→덕포진쉼터

→평화누리길1코스 입구→김포함상공원/대명항→호동천배수문→초지대교 도강→대선정(중식)초지진→초지항활어회마을→덕진교

→덕진진(덕진돈대→경고비→남장포대→공조루)→광성보(광성포대→용두돈대→손돌목돈대→신미순의총→쌍충비각→안해루→광성돈대)

→강기운 의교비강화전성→오두돈대→화도수문개축기사비→화도돈대→용당돈대→강화 더리미포구→강화외성→갑곶교→강화역사관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안내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 김포평화누리길 1코스염하강철책길 안내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염하(鹽河) or 염하강 鹽河江] - 강화해협 or 김포강화해협

인천광역시 강화군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의 해협(海峽)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강화도)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에 있는 남북 방향의 좁은 해협(海峽)이다.
마치 강(江)과 같다 하여 염하(鹽河)라고 부르며 강화해협 또는 김포강화해협이라고도 한다.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20km이다.
 
밀물 때의 최대 유속은 약 3.5m/sec로 물살이 거세고 수심이 얕아서 썰물 때에는 곳에 따라 바닥이 드러나기도 한다.
염하의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강물이 흘러들어 오는데,
염하 북쪽의 월곶과 남쪽 황산도 간에는 물높이(해수면 높이) 차이가 아주 커서 물살이 빨라지게 된다.
 
염하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서해를 북상해 온 세곡선(稅穀船)이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염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외세를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개항기 때에는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치른 격전지였다.
염하를 따라 군대 주둔지인 진(鎭)과 보(堡), 초소인 돈대 등 수많은 방어유적이 산재해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초지진(草芝鎭, 사적 제225호), 덕진진(德津鎭, 사적 제226호),
덕포진(德浦鎭, 사적 제292호),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227호), 갑곶돈(甲串墩 갑곶돈대, 사적 제306호) 등이 있다.
염하는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북한 신의주까지 오가던 뱃길이었는데
전쟁 후 뱃길이 봉쇄되었다가 2007년부터 민간어선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염하를 가로질러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놓여 있다.
 
[출처 : 두산백과]

 

염하강 일주! 
2010년 10월에 첫번째 '염하강 일주'를 하고,
2015년에 한 번, 그리고 2017년에 두 번 다녀왔었다.
이번이 다섯 번째인데...

2010년 1월에는 대명항에서 성동검문소로, 강화대교를 건너 초지진으로,
그리고 초지대교를 도강하여 대명항에서 여정을 마쳤고...

2015년 1월에는 대명항에서 초지대교를 건너 초지진에서 강화역사관으로,
그리고 강화대교를 도강하여 김포함상공원(대명항)에서 여정을 마쳤고...

2017년 2월엔 성동검문소에서 舊강화대교를 건너 강화역사관에서 초지진으로,
그리고 초지대교를 건너 성동검문소에서 여정을 마쳤고...
 
2017년 3월엔 성동검문소에서 대명항으로, 초지대교를 건너 강화역사관으로,
그리고 舊강화대교를 도강하여 성동검문소에서 마쳤다.
 
 
오늘은 다섯 번째 '염하강 일주(김포 염하강철책길 + 강화 호국돈대길 이어걷기)'를 위해 길을 나선다.
 
염하(鹽河) 또는 염하강(鹽河江)이란 김포시와 강화도 사이의 바다를 달리 이름이고,
'염하강 일주'란 강화초지대교와 강화대교(or 舊강화대교)를 도강하며
'강화도 해안길'과 '김포 해안길'을 따라 이어 걷는 것을 말한다.
 
오늘 걷는 '염하강(김포강화해협) 일주' 코스는
위 '염하강일주 코스도'처럼 강화역사관에서 시작하여 먼저 '舊강화대교'를 도강하며
김포 해안길을 먼저 걷고 초지대교를 도강하여 강화해안길을 따라 강화역사관으로 원점회귀 코스이다.
 
오늘 걸은 거리는 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14km와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16km를 합하고,
두 길을 잇기 위한 초지대교와 舊강화대교의 도강거리와 
강화도쪽의 진과 돈대 등의 탐방으로 4km 정도를 더하면 34km 이상일 듯...
 

08시 18분에 강화역사관을 출발하여 '염하강(김포강화해협) 일주'를 하고,

17시 40분에 강화역사관으로 원점회귀하였다.



☞ 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누군가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다.
맥가이버는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걷는 것을 죽고사는 차원이 아닌 즐기는 차원에서 걷는다.
즉, 좋은 길을 걷다가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되고, 느끼고, 감동 받고, 깨닫는 것을 즐긴다.
 

 

 
 
'모든 만남은 걷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길을 걷다보면 새로운 풍광을 보게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맥가이버가 '때론 함께, 때론 홀로' 산행이나 여행, 도보를 하면서 후기를 주로 사진으로 작성함은
인간의 만남이 또한 유한함을 알기에 어떤 연유로 비록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하고자 함이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하는 무능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든다면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자 할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 염하강 일주(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이어걷기) - 2부를 시작하며...

 

 

손돌묘에서... 


☞ 손돌공 전설

 

서기 918년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여 제23대 고종에 이르기까지

314년간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고려는 많은 수난을 겪었다.

 

서기 1231년 몽고(원나라)가 침입하매, 고종은 화친을 내세워 일단 회군시켰으나,

그들이 계속 부당한 조공(朝貢)을 요구하므로 결사항전할 것을 결심하고

1232년 몽고의 2차 침략 때 강화도로 천도 하게 되었다.

 

고종은 조정을 이끌고 개경을 떠나, 사공 손돌의 배를 타고

예성강 벽란도를 거쳐 임진강과 한강 하류를 지나 강화도로 가고 있었다.

도중 현재의 대곶면 신안리와 강화도 광성진 사이의 해협이 협소하고 급류인 목에 닿게 되었다.

 

이곳은 앞이 막힌 듯이 보이는 지형으로 처음 가는 사람은 뱃길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지라,

천도 하는 고종도 심기가 불편한 나머지 뱃길도 없는 곳을 향하여 노를 젓는 사공 손돌을 의심하여

수차 뱃길을 바로잡도록 하명하였으나, 손돌이 아뢰기를

 "보기에는 앞이 막힌 듯 하오나 좀더 나아가면 앞이 트이오니 폐하께서는 괘념치 마옵소서"라고 아뢰었다.

 

고종은 마음이 초조하여, 손돌의 흉계로 의심하고 신하들에게 손돌을 죽이라고 명하였다.

손돌은 죽음에 직면하고도 임금의 안전 항해를 바라는 충성에서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뱃길이 트일 것을 아뢴 후 참수되고 말았다.

이후 왕의 천도 항해는 손돌의 바가지 안내대로 험한 협류를 무사히 빠져나와 목적지에 당도하였다.

 

왕은 늦게나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손돌을 후히 장사지내주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당도 세워주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 뱃길목을 지금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르며,

공(公)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 쯤이면 손돌의 원혼이 바람을 일으킨다 하였다.

이때에 거센 바람을 '손돌이바람', 이 무렵의 추위를 '손돌이추위'라 전해온다.

 

이러한 전설에 따라 매년 음력 10월 20일에 손돌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제를 지내고 있다.

아쉬운 점은 아직까지는 손돌의 실화를 입증할 어떤 문헌이나 자료 등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손돌공의 묘는 물 건너로 광성진을 보이는 덕포진 북쪽 해안 언덕 위에 있다.

공의 제사는 조선조말까지 계속되어오다가 일제 강점 후 중단되었었으나 1970년 이후 계속 지내오고 있으며,

묘는 1977년 박일양(朴一陽)씨등과 면민들이 묘비를 세우고 치산(治山)하여 크게 단장하였다.

 

자료출처 : 경기도홈페이지>경기도소개>경기문화유산>향토지적재산 中



손돌목[孫乭項]

경기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지역에 있는 목[項].


유형 : 지명
성격 : 해협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정의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지역에 있는 목[項]

 

지형상 이 지역이 바다로 돌출해 있는데

대안(對岸)의 강화도 광성보(廣城堡)가 있는 곳도 바다로 돌출해 있어 두 지역 사이가 좁은 여울의 형태를 이룬다.

따라서 밀물 때 이곳을 흐르는 해류가 급류를 이루어 배가 건너다니기 어렵다.

 

손돌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있던 뱃사공의 이름에서 나왔는데 그에 관한 전설은 2개로 되어 있다.

 

고려 때 몽고의 난을 피해 급히 이곳에 도착한 왕이 바다를 건너고자 할 때 손돌이 아직 바람이 자지 않았으니 쉬었다 건너자고 하여

왕이 그를 모반자로 생각하여 처형을 하니 광풍이 불이 바다를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왕이 크게 후회하여 그가 탄 말의 목을 베어 제사를 지내고 나니 바람이 잔잔하여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전설은 왕이 탄 배가 바다를 건널 때 손돌이 배를 급류쪽으로 몰아 위험을 느낀 왕이

손돌의 행동을 의심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그가 죽기 전 자기가 죽은 뒤 바다에 바가지를 띠워

그 바가지가 가는대로 배를 몰면 안전할 것이라고하여 손돌을 죽인 뒤 그의 말대로 했더니 배가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이에 왕이 크게 뉘우쳐 손돌의 무덤을 만들고 크게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음력 10월 20일경인데,

이때는 겨울의 북서풍이 강하게 불어 겨울의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며 이 시기에 부는 바람을 손돌풍(孫乭風)이라고 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덕포진 손돌묘[德浦鎭孫乭ㅡ]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덕포진에 있는 묘이다. 


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292호
지정일 : 1981년 09월 25일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 103-1
시대 : 조선
종류/분류 : 유적지
크기 : 면적 48,794㎡

 

덕포진 북쪽 해안 언덕 위에 있다.

1970년에 덕포진 내의 현 위치에 복원하였으며 1977년에는 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단장하였다.
 
손돌은 고려시대의 뱃사공인데,
몽고가 침입하여 고려 왕이 강화도로 피난할 때 손돌의 배를 타게 되었다.
물길이 좁아 앞이 보이지 않고 세찬 물살에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왕은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손돌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손돌은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우고 그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 말한 뒤 죽음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왕은 자신이 경솔하였음을 깨닫고
후하게 장사를 치른 뒤 사당을 세워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넋을 위로하였다.
 
조선 말까지 손돌의 넋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오다가 일제강점기 동안 중단되었으며 1970년부터 다시 지냈다.
1989년부터는 김포문화원이 주관하여 손돌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에 진혼제를 지낸다. 

 

[출처 : 두산백과]



염하강일주를 할 때 염하강철책길 중 덕포진의 이 길이 가장 아름답게...


김포 덕포진[金浦 德浦鎭]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진영. 사적 제292호.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66년(현종 7) 강화에 예속된 진이었다고 하며,
1679년(숙종 5) 강화의 광성보, 덕진진, 용두돈대와 함께 축성되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격전지이다.

 

유형 : 유적
시대 : 조선
성격 : 진(鎭)
건립연도 :1679년
규모(면적) : 지정면적 4만 8794㎡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292호
문화재 지정일 :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92호. 지정면적 48,794㎡.

이곳은 돈대(墩臺)와 포대(砲臺) 및 파수청(把守廳)이 있던 곳으로,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66년(현종 7) 강화에 예속된 진이었다고 하며,

1679년(숙종 5) 강화의 광성보(廣城堡)·덕진진(德津鎭)·용두돈대(龍頭墩臺)와 함께 축성되었다.

 

돈대의 위치는 한성으로 통하는 바닷길의 전략요충지로서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함대와, 신미양요 때는 미국함대와 싸웠던 격전지이다.

또, 돈대와 포대의 중심부에는 파수청터가 있는데, 이곳은 포를 쏠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는 동시에 포병을 지휘한 장소로 생각된다.

 

1980년의 발굴조사 당시 7개의 포탄과 상평통보(常平通寶) 2개가 출토되었고, 건물터에서는 주춧돌과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는데,

건물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추정되며, 둘레에 맞담을 쌓듯이 둘러친 석벽이 있었다.

또, 돈대터에서는 1874년(고종 11)에 만들어진 포와 포탄 등이 발굴되었다.

 

이곳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화도의 광성보와 맞서 있는데, 시야가 막힌데다가 해협이 매우 좁고 물살이 빠르며 소용돌이치므로

적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고려 고종이 몽고병의 침략을 피하여 강화도로 가는 길에 배를 타고 이곳의 바닷길을 지나다가 위험을 느낀 나머지

사공이 흉계를 꾸몄다고 오해하여 그를 처형하였으나,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가자 잘못을 뉘우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부근에는 당시 사공이었던 손돌(孫乭)의 무덤이 있으며, 지금도 덕포진 앞의 좁은 바닷길을 손돌목이라 부르고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파수청터









김포 덕포진[金浦 德浦鎭]


강화의 초지진(草芝鎭) ·덕진진(德津鎭)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통하여

수도 서울로 진입하려는 외세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한 조선시대의 군영. 


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292호
지정일 : 1981년 09월 25일
시대 : 조선
종류/분류 : 군영
크기 : 지정면적 48,794㎡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 103-1 지도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92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大串面) 신안리(新雁里)에 소재하며, 지정면적은 4만 8794㎡이다.
설치된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666년(현종 7) 이미 강화에 예속된 진이었다.

1679년(숙종 5) 강화의 광성(廣城) ·덕진(德津) ·용두(龍頭)의 여러 돈대(墩臺)와 함께 이곳에도 돈대가 축성되었으며,

1866년(고종 3) 9월 병인양요(丙寅洋擾) 때는 프랑스 함대와,

1871년 4월 신미양요(辛未洋擾) 때는 미국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1980년 포대 ·돈대 및 파수청(把守廳) 터의 발굴조사에서 1874년에 만든 포와 포탄,

조선시대의 화폐인 상평통보 및 주춧돌과 화덕 등이 출토되었다.

파수청은 유구(遺構)로 보아 포대와 돈대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포를 쏘는 불씨를 보관하던 장소인 동시에 포병을 지휘하던 장대(將臺)로 추정된다.


[출처 : 두산백과]














덕포진 쉼터
































김포함상공원


▼ 지난 2010년 11월 14일에 '염하강 도보일주'를 하면서 잠시 들린 '김포함상공원' 안으로 들어가 보니... 

 

 

 

 



대명항 주차장을 지나다가...



호동천배수문을 지나...


대명항 버스종점





강화초지대교를 건너며...


강화초지대교[江華草芝大橋]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草芝里)와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藥岩里)를 잇는 아치형 4차선 다리로,

길이 1.2㎞, 폭 17.6m의 4차선 교량인데,

1999년 6월부터 인천광역시가 공사를 맡아 2002년 8월 28일 개통하였다. 


인천 강화군 길상면과 경기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를 잇는 교량.


국가 : 한국
구분 : 다리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과 경기 김포시대곶면 약암리 사이
건립기간 : 2002년 08월 28일
건립자 : 인천광역시
설계자/건축가 : 시공 한솔건설(주), 감리 동일기술공사(주)
건축양식 : 교각 우물통공법
규모 : 길이 1.2㎞, 폭 17.6m(4차선)

 

1995년 10월부터 민자유치사업으로 추진되다가,

1999년 6월부터 인천광역시가 공사를 맡아 2002년 8월 28일 개통하였다.
시공은 한솔디앤씨(주)이, 감리는 동일기술공사(주)가 맡았고, 총 590억 원의 사업비가 들었다.
길이 1.2㎞, 폭 17.6m의 4차선 교량으로, 하루에 3만 5000대의 교통량을 처리할 수 있다.

 

교각(橋脚:기둥)은 12개이며, 아치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각 건설공법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고 물살이 빨라

이를 견뎌 낼 수 있도록 거대한 우물통공법을 적용하였다.
즉 강재로 제작한 우물통을 해상 크레인을 이용해 바다에 집어넣고,

콘크리트를 타설한 뒤 그 내부를 굴착해 바다 밑 암석에 2m 정도까지 심는 공법을 채택하였는데,

교각 지름은 16m, 높이는 30m, 무게는 5,000~6,000톤이다.
그 밖에 자전거 전용도로와 인도도 함께 건설되었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경기도 부천시·김포시 등

수도권 서부지역 주민들이 기존의 강화대교를 이용하는 것보다

차로 30여 분 빨리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고,

강화도에서 인천까지는 출퇴근이 가능한 1시간대로 교통이 편리해졌다.


이 다리를 건너 우회전해 해안도로를 따라 5분 정도 가면

흥선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가 있는 덕진진(德津鎭)이 있고,

그 주위로 마리산 국민관광지, 화도면 철새도래지 등 관광명소가 많다.

 

[출처 : 두산백과]












대선정에서 점심식사를...








초지대교













초지진


강화 초지진[江華 草芝鎭]
인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초지리에 해안선을 지키기 위하여 설치한 진. 


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225호
지정일 : 1971년 12월 28일
시대 : 조선(효종7)
종류/분류 : 진(鎭)
크기 : 면적 4,233㎡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 

 

1971년에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4,233m2이다.

1656년(효종 7) 강화유수(江華留守) 홍중보(洪重普)가 처음 설치하였다.

 

66년(현종 7) 병마만호(兵馬萬戶)를 두었다가 1763년(영조 39)에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는데

이 때의 병력은 병마첨절별사(兵馬僉節別使) 1명,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墩軍) 18명, 목자(牧子) 210명, 진선(鎭船) 3척과 무기 다수가 있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이 곳에서 프랑스 함대의 로즈 소장과 싸웠으며,

1871년(고종 8)에는 미국 아시아함대의 로저스 중장이 이 곳에 침입하였을 때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하다 함락된 바 있었고,

1875년(고종 12)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와도 이 곳에서 교전하였다.

 

이 초지진은 모두 허물어져 돈(墩)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73년 초지돈만 복원하였다.

돈에는 3곳의 포좌(砲座)가 있고 총좌(銃座)가 100여 곳 있다.

성은 높이 4m 정도에 장축이 100m쯤 되는 타원형의 돈이다.

돈 안에는 조선 말의 대포 1문이 포각 속에 전시되어 있는데,

포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 홍살로 되어 있으며, 대포의 길이는 2.32m, 입지름 40cm이다.

 

[출처 : 두산백과]
















애초엔 이곳에서 좌회전을 했었는데 이제는 직진이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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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돈대



덕진돈대[德津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 53돈대의 하나.

손돌목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소속한 2개 돈대 중 하나로서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 중간에 있어 강화수로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 역할을 한다.
 
1679년(숙종 5)에 축조하였으며 덕진진 안에 있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을 때 남장포대,

덕포포대와 함께 미국의 아시아 함대와 이틀에 걸친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신미양요 때 크게 파괴되었으나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 당시 새롭게 복원하였다.

돈대의 남쪽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가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당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짐작하게 하는 '강화 덕성리의 경고비'가 세워져 있다.

 

[출처 : 두산백과]




경고비



덕진진 경고비[德津鎭警告碑]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덕진진에 있는 비석. 

 

강화해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요새 덕진진(德津鎭, 사적 제226호) 앞 바닷가에 있는 경고비이다.

강화군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바다의 척화비’라고도 불린다.

1876년,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세웠으며 높이는 147cm, 폭은 54.5cm, 두께는 28cm이다.

비석 정면에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는 문장이 음각되어 있는데,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므로, 외국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는 뜻으로 결연한 쇄국의지를 담고 있다.

경고비 우측 상·하단부에는 탄흔이 남아 있다.

 

[출처 : 두산백과]







남장포대




남장포대[南障砲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 8포대의 하나.
덕진진에 소속된 포대로 건립 당시에는 약 15문의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시되었다.


1679년(숙종 5)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바다)에서 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자연적인 지형을 고려한 반달 모양의 요새로 축조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군사들이

이 곳을 통하여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1871년(고종 8)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을 때는

덕포포대와 함께 미국의 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신미양요 이후 성곽과 포대가 크게 파괴되었으나,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 당시 새롭게 복원하였다.

덕진진 안에 있으며 포대 오른쪽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덕진돈대가 있다.


[출처 : 두산백과]





덕진진 공조루


강화 덕진진[江華 德津鎭]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덕진진은 조선시대 때 덕포진과 더불어 강화도해협의 관문을 지키던 강화도 제1포대였다.


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226호
지정일 : 1971년 12월 28일
시대 : 조선
종류/분류 : 요새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며,

덕진진은 덕포진과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의 포대였다.
덕진진은 본디 수영(水營)에 속하여 첨사(僉使)를 두고 있었는데,
1666년(현종 7년)에 강화유수 서필원(徐必遠)이 임금에게 청하여

첨사를 경기 김포시 덕포로 옮기고 이곳에 별장을 두었다.

1677(숙종 3년)에는 유수 허질(許秩)이 임금에게 청하여 만호(萬戶)로 승격시켰다.
1874년(고종 11년)에 축조한 남장 포대는 15문의 포대가 남아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梁憲洙)의 부대가 밤의 어둠을 타서 이 진을 거쳐

삼랑성(三郞城:일명 정족산성, 鼎足山城)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파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J.로저스 중장이 이끄는 미국 극동함대와 이곳에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성첩(城堞)과 문루(門樓)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터만 남게 되었다.
1976년에 문루를 다시 세우고 돈대(墩臺)를 보수하였으며 남장 포대도 개축하였다.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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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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