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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숲,섬]전국 일일생활권 연 국가대동맥, 경부 고속도로

by 맥가이버 Macgyver 2010. 9. 4.

[길,숲,섬]전국 일일생활권 연 국가대동맥, 경부 고속도로

 

경향닷컴 이다일기자 cam@khan.co.kr

서울에서 부산을 잇는 428km의 경부고속도로. 1970년 완공, 올해로 40년을 맞았다.
불혹을 맞은 지금 한해 3억 3천만대의 자동차가 오가는 국가 대동맥이 됐다.

"길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한남대교가 놓여 있는 곳까지 어렵게 지프를 몰아갔는데, 다리가 건설되기 전이라 한강을 건너는 일조차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당시 국가기간고속도로계획조사단장을 맡았던 윤영호씨가 한국도로공사40년사에 남긴 증언이다.
박정희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고속도로건설을 발표한 1967년 4월 29일부터 경부고속도로를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당시 야당에선 세계은행(IBRD)의 조사결과처럼 강원도와 서울을 잇는 동서 간 고속도로가 더 시급하다 주장했고 박대통령측은 경부선 철로가 있는 곳에 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하며 논란이 더욱 커진 것이다.
정부는 1968년 2월 1일 논란 속 경부고속도로는 착공했다.


온 나라가 들썩인 경부고속도로 건설

1970년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를 지나는 코로나 자동차와 할아버지 (경향신문)


해방직후에 우리나라의 도로는 총 2만4,031km였다.
그나마 5,263km의 국도 가운데 포장된 도로는 746.4km에 불과했다.
일제가 수탈을 위해 만들기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 도로의 시작이었고 이어진 6.25를 거치면서 그마저도 황폐해져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당시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경부선 철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12시간이 꼬박 걸리는 거리였으니 이런 때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목표인 서울과 부산을 5시간 내로 달릴 수 있는 길을 건설하는 것은 공사의 적합성을 떠나 실로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경부고속도로는 총 429억원이 투입돼 2년 5개월 만에 완공됐다. 놀라운 속도였다.
시공에 16개 업체를 비롯해 3개 건설공병단까지 참여해 마치 군사작전처럼 진행된 사업이었고 연인원 892만8,000명과 165만대의 장비가 투입된 대형 사업이었으며 77명의 숭고한 희생자를 낳기도 한 사업이었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순전히 우리 기술로 다른 나라에서 만든 고속도로에 비하면 훨씬 싼값에 가장 빨리 완공하였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꼽힌 경부고속도로 충북 옥천 구간은 평균 1.6km마다 터널을 뚫거나 다리를 세워야하는 최대의 난공사 구간이었다.
하루 종일 수백 명이 노력을 해도 불과 30cm밖에 뚫지 못하는 공사는 작업자들이 공사를 포기하고 달아날 만큼 힘든 지역이었다.
결국 1970년 6월 27일 당재터널(지금의 옥천터널) 공사를 끝으로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됐고 올해로 40년을 맞는다.

'산업전사'의 희생과 과속공사의 경험을 남기고

완공직후 하늘에서 바라본 경부고속도로 (경향신문)


경부고속도로는 전국간이 완공된 1970년에 총 368만9천대의 차량이 이용했다.
꾸준히 늘어난 이용량은 1985년에 3천4백만대를 넘기면서 10배의 통행량이 됐고 지금은 완공 당시의 100배가 넘는 3억4천만대가 도로를 이용하고 있다.

고속도로 완공은 무수한 이야기와 사건을 남겼다.
그중에 고속도로 중앙 지점에 만들어진 두개의 비석은 당시를 되돌아보게 한다.
하행선 금강휴게소에는 고속도로 공사에 피를 흘려 목숨을 바친 77명의 '산업전사'에 대한 위령비가 놓여있다.
 
위령비에는 '세상에 금옥보다 더 고귀한 것은 인간이 가진 피와 땀이다. ~중략~ 그들은 실로 조국 근대화를 향한 민족 행진의 산업전사요, 자손만대 복지사회 건설을 위한 거룩한 초석이 된 것이니 우리 어찌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은혜와 공을 잊을 것이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당시 우리나라의 여러 상황을 종합했을 때 16년 걸린다는 공사를 2년 5개월 만에 끝냈으니 경부고속도로는 이후로 부실과 보강의 문제에 시달렸다.
당초 계획한 24m의 노폭을 22.4m로 줄였다.
비용과 기간을 줄이기 위해 중앙분리대를 비롯한 안전시설을 갖추지 못해 차후 대형사고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개통 1년만에는 전 노선에 대한 덧씌우기 공사가 착수됐다.
야당의 한 국회의원은 "경부고속도로가 누워 있으니 망정이지 서 있었다면 벌써 와우아파트처럼 무너졌을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개통 후 10년간의 유지보수비용은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을 넘는 수준이었으니 초고속 건설의 후유증은 실로 만만치 않았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의 효과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꼬박 10년이 지난 1980년 7월 7일 언론들은 이른바 '10년의 경제효과'를 분석해냈다.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효용성에 대한 회의와 막대한 재정부담으로 해서 건설초기 상당한 비판도 없지 않았던 이 고속도로가 10년이 지난 오늘 명실상부한 국가산업과 국민생활의 대동맥으로 그 중요성이 인식되게 되었음은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고 동아일보는 '산업 대동맥 10년'이란 기사에서 '건설초기 그 타당성 여부를 두고 국내는 물론 외국기술진들마저 회의를 보여 상당한 논란을 벌였으나 10년이 지난 지금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 조차 어색할 지경이다'라고 말했다.

초기 10년간 경부고속도로는 26.9%의 여객수송 증가를 이뤘고 수송인 거리에서는 35.2%의 증가를 가져왔다.
화물 수송은 16배가 증가했다. 개통당시 50%가 넘었던 승용차의 비율이 10년이 지난 시점에선 화물차 위주로 확대됐다. 또한 서울 인근 지역의 발전과 함께 유통조직의 변화를 가져왔다.
40년 전 경부고속도로를 시작으로 우리나라엔 총 25개 노선, 2천922km의 고속도로가 건설됐다.(2005.12.31기준)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도로는 국가 대동맥으로써 역할을 다하고 있고 이제는 북한을 넘어 중국,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는 아시안 하이웨이를 바라보고 있다.

관련정보
서울특별시 서초구의 한남대교 남단에서 부산광역시 금정구까지 이어지는 총연장 428km의 도로다.
1970년 7월 7일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는 서울과 부산의 중간지점이자 가장 높은 지역인 추풍령에 기념비를 세웠다.
충북 옥천에서 이어지는 금강 주변 구간은 경부고속도로 건설당시 최대의 난공사 지역으로 타 지역의 최대 1.8배에 가까운 인력과 비용이 들어간 지역이기도 하다.
상행선 추풍령 휴게소로 진입하면 기념비를 볼 수 있다.
또한 하행선 금강휴게소에는 고속도로 건설에 생명을 바친 77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위령비를 세웠다.


경부고속도로 전구간 개통 기념식 1970년 7월 7일 진행된 경부고속도로 전구간 개통 기념식에서 박정희대통령과 주요인사가 테이프 커팅식을 진행하고 있다. 2년 5개월만에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는 서울 서초구와 부산 금정구를 잇는 428km의 도로다. (경향신문)


고속도로건설당시모습 경부고속도로 건설당시 수원공구 및 언양공구 현장에 시험감독요원을 참여했던 故 전몽각씨의 기록사진이다. 전씨는 공사에 참여하면서 직접 찍어 보관하던 사진을 한국도로공사40년사 발간에 기증했다. (한국도로공사)



경부고속도로준공식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은 전국에서 진행됐다. 서울에서 시작된 카퍼레이드는 수원, 안성, 천안, 청주를 지나며 각 지방마다 행사를 했다. 오전 9시30분에는 대전에서 고속도로 개통 테이프 커팅식을 했고 9시 55분에는 금강 인근의 위령탑의 제막식을 가졌다. 12시에는 대구공설운동장에서 준공식을 마쳤다. (한국도로공사)



군대까지 동원된 대규모 공사 경부고속도로는 마치 군사작전처럼 진행됐다. 실제로 고속도로의 기획부터 공사까지 육군 공병단이 참여했는데 사진은 부산~대구간 고속도로 기공식에 참여한 군 장비의 모습이다. (한국도로공사)



양재동 톨게이트 서울에서 고속도로로 들어가는 관문인 양재동 톨게이트의 옛 모습이다. 불과 7개의 요금소가 있고 지금은 사진 속 에서만 볼 수 있는 차들이 길을 달린다. (한국도로공사)



당재터널 공사 경부고속도로 최대의 난공사 구간으로 꼽힌 당재터널의 모습이다. 지금은 옥천터널로 이름이 바뀌었다. 충북 옥천 인근의 공사 현장으로 당시 기술로는 500m가 자연 환풍을 하면서 건설할 수 있는 터널의 최대 길이었고 공사기간 단축을 위해 코스변경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당재터널을 뚫어야만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는 상황이었다. 현대건설이 맡은 이 구간은 결국 적자를 감수하며 사업이 진행됐다. (한국도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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