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곳에 가고싶다☞/♤ 길 숲 섬

[길,숲,섬]자연과 역사를 함께 느낀다, 남한산성 성곽길

by 맥가이버 Macgyver 2010. 9. 14.

[길,숲,섬]자연과 역사를 함께 느낀다, 남한산성 성곽길

경향닷컴 이윤정기자 yyj@khan.co.kr

전체면적 36.4km2, 성 면적 2.3km2에 달하는 경기도 남한산성도립공원은 백제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위용과 치욕의 역사를 모두 담고 있는 난공불락 요새다.

남한산성도립공원은 경기도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다.
연간 방문객 280만명. 단위면적당 방문객으로 따지면 국내에서 최고 수준이다.
남한산성에 탐방객이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
수도권과 인접한 탓도 있지만 주차장에서 바로 시작되는 성곽길 탐방로가 걷기에 편하기도 한 터다.
남한산성 탐방로는 크게 5코스로 나뉜다. 짧게는 2.9km, 길게는 7.7km까지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은 맞춤코스다.
중간 중간 나 있는 샛길을 이용한다면 코스는 입맛대로 더 다양해진다.
거기에 성곽 탐방로 곳곳에 숨어있는 역사 이야기를 꺼내 곱씹는다면 남한산성은 한나절 나들이만으로도 여행 허기가 단숨에 해결되는 걷기코스가 된다.

남문~서문, 위용 vs. 치욕

 

17세기 말 경 제작된 남한산성 고지도.

지금의 지도와 모양이 거의 일치한다. (영남대학교박물관)


‘남한산성’을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치욕의 역사를 떠올린다.
1637년 1월 30일 조선 인조가 청 태종(太宗)의 대군에 밀려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가 결국 무릎을 꿇고 항복한 곳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김훈작가의 소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 일행이 산성에 갇혀 지낸 47일을 그려내고 있다.
소설 속 작가의 해설을 따라 남문부터 서문까지 걸어보았다.

남문은 남한산성 주차장에서 바로 이어진다.
1636년 12월 14일 새벽, 도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인조의 행렬은 이 남문을 통해 남한산성에 들어섰다.
그리고 청에 굴욕적인 항복을 할 때까지 조선의 조정은 ‘주화론’과 ‘주전론’으로 나뉘어 설전을 펼친다.
김훈 작가는, “결사 항전을 주장한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으며, 청과 화친하자는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고 정의한다.
서문까지 걷는 성곽길 중간에서 늠름하게 서 있는 ‘수어장대’를 마주치게 된다.
‘장대’는 장수가 전투를 지휘하는 곳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원래 5개의 장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수어장대만이 온전하게 남았다.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수어장대에 올라 직접 전투를 지휘하기도 했다.
남한산성의 위용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다시 서문까지 다다르는 길은 병자호란의 마지막 장을 열어버린다.
산성행 47일 만에 왕의 대열은 서문 밖을 빠져나와 지금의 송파구 장지동, 문정동, 삼전동을 지나 삼전나루터 수항단(항복을 받아들이는 제단)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게 된다.

서문~북문~동문, 난공불락의 요새를 느끼며

남한산성 북문에서 동문으로 향하는 길. 성곽을 따라 탐방객들이 발길을 옮기고 있다. (이윤정기자)

 
남한산성 치욕의 역사 때문에 비통하게만 느낄 필요는 없다.
서문을 넘어 북문을 돌아 동문까지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은 성곽 안쪽에서 걸으면 역사와 나란히 걷는 듯 하고 바깥쪽에서 걸으면 자연과 맞닿은 느낌이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 남한산성의 역사를 돌아보자.

남한산성은 삼국시대에는 백제 땅이었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주장성(晝長城)으로 일컬어졌다.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이 평안북도 의주까지 피난 가는 치욕을 당하자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을 다시 축조하기로 했다.
인조 2년(1624)년부터 인조 4년(1620)년에 걸쳐 수축된 남한산성은 둘레 6,297보, 여장 1,897개소, 옹성3개, 대문 4개, 암문 16개, 포대 125개를 갖춘 성이었다.
여기에 왕이 거처하는 행궁과 9개의 사찰이 성 안에 자리했다.

병자호란은 남한산성 축조 10년 만에 일어났다.
그러나 아무리 사료를 뒤져도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인조는 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무릎 꿇었다. 청은 항복문서에 ‘청나라 군대가 물러가고 난 후 어떠한 경우라도 산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아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넣었다.
청나라 군대는 분명 남한산성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느꼈다.
실제로 호란이 끝난 뒤 청나라는 해마다 사절을 보내 남한산성을 수축 또는 보수한 흔적이 있으면 문제 삼았다고 한다.

남한산성 로터리=산간도시의 종로거리

남한산성 성곽을 빙 둘러 다시 로터리로 들어섰다.
허기진 탐방객의 마음을 꿰뚫기라도 하듯 로터리 구석구석 음식점이 성행한다.
하지만 이 로터리는 조선시대에도 사방의 길이 교차하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에는 로터리에 설치된 종각에서 종을 울려 시각을 알렸다.
남한산성은 군사요새일 뿐 아니라 산속에 건설된 계획도시였다.
‘종로’는 서울에만 있는 지명이 아니라 각 도시 중심가의 공통된 이름이다.
남한산성 로터리는 산간도시의 종로거리였다.

로터리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남한산성 탐방의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왕이 임시로 머물던 행궁은 불에 타 없어져 지난 2003년 왕의 침소였던 상궐이 복원됐다.
업무를 보던 하궐도 올해 가을 복원이 완료돼 일반에 개방된다.
행궁 터를 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AD 2∼3세기 경의 백제토기편들이 다량으로 출토됐다.
백제시대부터 남한산성터가 군사적 요지임을 입증하는 자료들이다.
일제강점기에는 1907년 일본군이 산성내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사찰들을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난공불락 요새의 위용과 치욕은 끊임없이 반복되며 성곽 길 안에 포개져 있는 셈이다.

가는길
남한산성은 서울 송파에서 진입하는 길과 중부고속도로 경안IC나 상일동IC에서 진입하는 방법이 있다.
송파의 경우 잠실에서 복정사거리~약진로를 통해 남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광지원을 거쳐 동문을 통해 들어간다.
지하철은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로 나와 9번 버스를 타고 들어간다.
9번 버스는 성남 야탑역에서 출발, 산성로터리까지 들어온다.
남한산성 입장료는 없다. 주차장 요금은 승용차가 1000원이다.

기타내용
산성 홈페이지(www.namhansansung.or.kr)에 교통편과 역사, 지도가 나와 있다.
남한산성 관리사무소(031-743-6610)에 들르면 산성 지도를 얻을 수 있다.
남한산성 내 유적지 중 꼭 들러봐야 할 곳은 행궁, 수어장대 등이다.
행궁은 임금이 묵었던 별궁이고, 수어장대는 장수가 휘하장병을 지휘하던 곳이다.
산성 내 절터를 둘러보는 것도 옛 역사의 한 장면으로 인도한다.
일제강점기 의병의 집결지였던 산성 내 사찰들이 하루아침에 재로 변한 현장이다.
로터리 인근에도 둘러볼 곳이 많다. 남한산성 역사관은 산성의 옛이야기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해놓았다.
또 천주교 순교성지, 만해기념관 등이 로터리 인근에 위치해 둘러보면 좋다.

남한산성도립공원 http://www.namhansansung.or.kr/


남문(지화문) 남한산성 탐방로는 크게 5코스로 나뉜다. 짧게는 2.9km, 길게는 7.7km까지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은 맞춤코스다. 필자는 제일 긴 코스인 5코스를 선택했다. 남문에서 시작해 수어장대를 지나 서문~북장대터~북문~동장대터~동문에 이르는 길이다. 첫 시작점 남문을 카메라에 담았다. 다시 산성로터리로 돌아오기까지 4시간 정도 소요됐다. 5코스를 걸을 경우 보통 3시간 20분 정도 소요된다. (이윤정기자)



가파른 탐방로 남한산성 탐방로는 산행 치고는 평이하다고 하지만 성곽을 따라 오르막 내리막이 연달아 나오는 구간도 있다. 사실 남문에서 점점 멀어지자 가파른 오르막길에 숨고르기를 여러 번 했다. 물론 이건 필자의 저질(?) 체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윤정기자)



새순 주봉인 청량산(해발 482.6m)에 올라 성곽 밖을 내려다보았다. 남한산성을 찾은 날은 겨울인데도 봄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나무도 눈치를 챘는지 새순의 고운 살을 내보였다. 새순 너머로 서울시 송파구의 모습이 담겼다. (이윤정기자)



암문 성곽 중간중간에 사람 한두 명이 드나들 만한 암문이 있다. 암문(暗門)은 대문을 달지 않고 정찰병들을 내보냈던 작은 문이다. 옛날엔 돌로 막아뒀다고 한다. 암문을 통해 바깥길과 안길을 들락거릴 수 있다. (이윤정기자)



성곽 안길 vs. 바깥길 성곽을 따라 길을 걷다가 성곽 바깥쪽에서 걷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어떻게 나갔나 싶었더니 암문을 통해 나가서 바깥길로 걸은 것이다. 성곽 안쪽에서 걸으면 역사와 맞닿은 느낌이고, 바깥길로 걸으면 자연을 좀더 가까이 느끼는 기분이 든다. (이윤정기자)



수어장대 남문에서 걷기를 시작해서인지 수어장대에 30여 분만에 도착했다. ‘장대’는 장수가 전투를 지휘하는 곳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원래 5개의 장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수어장대만이 온전하게 남았다.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수어장대에 올라 직접 전투를 지휘하기도 했다. 남한산성의 위용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윤정기자)



북문으로 향하는 길 북문으로 향하는 길이다. 길 경사는 제법 잠잠해졌지만 이번에는 바람과 응달이 문제다. 봄바람이 불던 남쪽과 달리 북문에 다다를수록 바람이 거세진다. 그늘진 곳도 많아 얼음길이 이어지기도 한다. 5코스 완주를 하려면 등산복을 챙겨 입는 것이 좋다. (이윤정기자)



번째 이미지 태그

굽이치는 성곽 북문을 지나 동문으로 가는 길목 장경사신지옹성을 앞에 두고 사진을 찍었다. 굽이치는 성곽이 자연과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선사한다. 마치 성곽 자체가 산허리를 치고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듯 그렇게 매끄럽게 연결된다. (이윤정기자)



옥정사지 옥정사가 있던 곳으로 남한산성 수축 전부터 있던 사찰이다. 절 뒤에 큰 우물이 있었는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옥 같은 샘이 나온다하여 ‘옥정사’라 했다. 옥정사는 산성 수축 때부터 군막사찰의 역할을 하였지만 일제가 조선인의 무기 및 화약 수거를 하면서 폭파하였다. 터만 남은 곳에 나무들이 쓰러지듯 누워있다. (이윤정기자)



장경사 동문에서 약 900m 동북쪽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세웠으나 지금 건물은 대부분 근래에 건축한 것이다. 절로 들어서는 계단에 포대화상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이윤정기자)


동문 성곽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동문까지 다다랐다. 걷고 느끼고 둘러보는 사이 어느덧 탐방을 시작한지 3시간이 넘게 흘렀다. 사실 여느 산행이라면 길게 느껴졌을 시간이 성곽을 따라가며 차분하게 걷다보니 저절로 빠르게 지나간 듯하다. 동문을 지나면 로터리로 향하는 자동차도로를 만나게 된다. (이윤정기자)


로터리로 향하는 도로 동문에서 바로 도로가 이어진다. 성곽이 나가고 들어오는 길에 또 도로가 이어진다. 지금의 산성로터리는 조선시대에도 사방의 길이 교차하던 중심지였다. (이윤정기자)

 
ⓒ 경향신문 & 경향닷컴에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