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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숲,섬]하트의 아픔을 간직한 송림, 아산 봉곡사 소나무 숲

by 맥가이버 Macgyver 2010. 12. 25.

[길,숲,섬]하트의 아픔을 간직한 송림, 아산 봉곡사 소나무 숲

 
경향닷컴 이윤정기자 yyj@khan.co.kr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은 한반도 구석구석에 남아있다.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에 위치한 봉곡사 숲의 소나무들, 역사의 아픔을 아직도 온몸에 새기고 있다.

‘여행은 단순한 떠남이 아니다. 다른 생에서의 삶을 이생에서 한 번 살아 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여행이다.’

유성룡 여행작가의 말처럼 무엇을 즐기기 위해 여행을 계획한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관광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생에서의 삶을 살아보는 것, 그것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것일 게다.

흔히 우리는 역사의 흔적이 문화재에만 또렷이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연도 역사의 한 순간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에 위치한 봉곡사 숲은 시대의 한 지점으로 방문객을 인도한다.

역사의 아픔을 이겨낸 훈장마냥 저마다 몸에 상처를 지닌 채 봉곡사 소나무는 말없는 증인처럼 묵묵히 숲을 지키고 있다.

‘숨겨진’ 아름다운 한국을 찾아

하트 모양으로 보이지만, 일제강점기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다. (이윤정기자)

 


“제가 정말 좋은 곳 소개해드릴게요. 아, 저희가 이런 취재는 정말 잘 알고 있다니까요.

봉곡사라고 절이 있는데, 거기 숲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일제가 수탈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요...”

아산시청을 나서려는데 유선종공보담당관이 팔을 붙잡는다. 숨겨진 ‘아름다운 한국’을 소개해달란다.

하지만 이미 창밖에는 작은 눈발이 흩날리고 있다. 추위 속 ‘겨울숲’ 산행이라니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무심코 대답을 한 뒤 39번 국도를 향해 차를 몰았다.

저 멀리 고색창연한 외암민속마을이 시신경을 자극하면서 외지인을 유혹한다.

사시사철 그 자리에 있는 숲이 뭐가 다를까하는 속 좁은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 봉곡사 숲 입구에 다다랐다.

아스팔트가 깔린 널찍한 산책로를 보자 차로 오를 수 있을 것 같다는 도둑놈 심보가 스멀스멀 마음을 간질인다.

하지만 이런 고얀 마음을 가진 이가 많았는지 산책로 입구에는 ‘신선한 송림숲을 걸어 다닙시다’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고요한 숲에서의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하트 모양으로 보이시나요? 일제의 수탈현장입니다

높이 15m 가량, 평균 수령 100여년의 소나무가 길 양옆으로 멋들어지게 서 있다. (이윤정기자)


발을 내딛는 순간 걷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멋들어진 송림의 자태가 마치 패션 잡지에서 매끄러운 몸매와 독보적인 포즈로 독자를 유혹하는 모델 같다.

하지만 봉곡사 숲의 소나무는 다른 곳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밑동에 V자로 움푹 팬 자국이 나무마다 새겨져 있다.

어림잡아도 성인 머리 크기 정도는 된다.

어떤 나무는 V자가 변해 우리가 흔히 하트모양으로 부르는 ♥자로 변해있다.

자연적으로 생겼다고 하기엔 그 모양이 인위적이고 흔적 또한 깊다.

봉곡사 소나무가 세계 최고 모델이었다면 치명적인 상처다.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아산시청 산림과 이낙원계장을 찾았다.

이계장은 “아마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반에 일제가 석유 대신 쓰려고 송진을 채취했던 모양입니다.

그 숲이 봉곡사 소유라 밑동을 다 베진 못하고 나무에 생채기를 내서 송진을 받아갔던 것 같습니다”라고 설명한다.

일제는 한반도의 소나무 숲에서 마구잡이로 송진을 채취하거나 나무를 벌채해 갔다.

그래도 봉곡사 숲은 벌채의 위기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숲이 봉곡사를 감싸 안고 지켜주듯이 사찰도 숲을 지키기 위해 애썼기 때문이다.

이계장은 “봉곡사 숲은 우리나라 토종 소나무 천연림입니다.

평균 높이 15m에 수령은 아마 100여년쯤 됐을 거예요.

누군가는 송진 채취 흔적을 보고 훈장 같다고 하대요. 저도 일제 강점기는 겪지 못한 세대니까,

이 숲이 역사의 증인인 셈 입니다”라며 숙연해진다.

사색의 숲길 700m를 지나 호젓한 봉곡사까지.

봉곡사 봉곡사는 조용하고 때 묻지 않은 사찰이다. 조용한 경내는 엄중하다기보다는 소박한 느낌이 강하다. 초겨울 날씨에도 봉곡사 앞에는 꽃이 피어있다. 활짝 피었다가 추위에 못 이겨 갑자기 ‘얼음’ 자세를 한 것처럼 더 이상 시들지 않았다. 서울에 돌아와서 봉곡사에 전화해보니 이제 꽃은 모두 지고 말았단다. 청초한 꽃 대신 이제 무엇이 봉곡사의 운치를 더하고 있을까. (이윤정기자)


봉곡사를 찾았을 때 스님은 계시지 않았다. 대신 한 보살이 이것저것 설명해준다.

“동안거 기간이라 스님들은 다른 절에 가셨죠. 저희는 정월 보름까지 100일 기도를 올리기 위해 이곳에 왔고요”

한 낱 보살의 이름은 알아서 무엇하냐며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말을 잇는다.

“봉곡사 숲은 봄, 여름에 방문객이 많아요. 기도하러 오는 사람도 있고 그냥 산책하러 오는 사람도 있고요.

봉곡사는 조용하고 때 묻지 않아서 다들 좋아 합디다”라며 불공을 드리러 간다.

숲 입구에서부터 700m, 약 20~30분을 걸으면 봉곡사가 나타난다.

한 보살의 말처럼 봉곡사는 호젓하다 못해 고요하다.

신라 진성여왕 원년(887)에 도선국사가 지은 이 절은 고려시대 ‘석암사’로 불리다

조선 정조 때 ‘봉곡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찰은 임진왜란 때 폐허가 돼 인조 24년에 고쳐진 것이다.

오래된 역사만큼 절 안에서는 구수한 소박함이 묻어나온다.

사찰 앞으로는 하늘을 찌를 듯 전나무가 솟아 있고 뒤편으로는 대나무 숲이 푸근하게 감쌌다.

장마를 대비해 파놓은 연못에는 물이 빠지고 대신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이렇게 고즈넉한 봉곡사에서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795년 실학자들과 함께

공자를 논하고 성호 이익의 유고를 정리하는 강학회를 열었다.

또 만공(1871~1946)스님은 1895년 이곳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봉곡사 숲길을 걸으며 일제강점기 역사의 아픔을 느끼고 시대의 교훈을 배워가고 있다.

〈경향닷컴 이윤정기자 yyj@khan.co.kr〉

가는길/
온양온천역까지는 서울에서 수도권 전철이 다닌다.

KTX를 탈 경우 천안아산역에서 온양온천역까지 버스나 지하철로 환승해야 한다.

온양온천역 앞에서 봉곡사행 시내버스는 하루에 3번 다닌다.

오전 9시, 오후 12시, 오후 6시에 운행되므로 시간에 유의해야 한다.

아니면, 유구행 시내버스를 타고 큰길에서 봉곡사까지 걸어들어와야 한다.

승용차를 이용한다면 경부고속도로를 타다가 천안 IC로 나와 21번 국도를 통해 아산으로 들어온다.

다시 송악면 방면으로 39번 국도를 타면 봉곡사에 다다를 수 있다.



시대를 살아낸 훈장 봉곡사를 오르는 700여m. 양옆으로 빼곡히 들어선 500여 그루의 소나무는 하나같이 저렇게 V자 모양으로 움푹 팬 흔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석유 대신 사용하려는 목적으로 한반도의 숲에서 송진을 채취해갔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피처럼 흘린 송진의 흔적은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또렷하다. 키가 자랄 때마다 흔적이 팽창됐을 터이다. 누군가는 이 흔적을 보고 말한다. ‘훈장’같다고.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받은 훈장과도 같다고 말이다. (이윤정기자)


봄, 여름에 방문객이 많아요 봉곡사 숲길을 찾았던 때는 찬바람이 옷 속까지 파고드는 초겨울이었다. 그래서 숲길을 걷는 동안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봉곡사에 물어보니 봄, 여름에는 방문객이 줄을 잇는단다. 느긋하게 걸을 수 있는 700m의 산책로는 호젓하게 소나무 숲길을 걷는 이부터 봉곡사에 불공을 드리러 오는 사람까지 모두가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아산시청 제공)


고요한 사찰의 속내 소나무 숲 입구에서 30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자 고요한 느낌의 봉곡사가 눈에 들어온다. 한참동안 사진을 찍고 있어도 오가는 이 하나 없다. 요리조리 눈치를 살피며 사찰 건물의 뒤편으로 발을 옮겼다. 승려의 생활공간인 요사인 듯 보이는데 너무 조용하다. 나중에 알아봤더니 동안거(음력 10월 보름부터 정월 보름까지 승려들이 바깥출입을 삼가고 수행에 힘쓰는 일) 기간이라 대부분의 스님들이 출타 중이었다고 한다. 사찰이 더욱 고요했던 이유다. (이윤정기자)


엽서 사진 속 나무는 전나무란다. 이렇게 산을 자주 다니는데도 나무 이름을 구별하려면 세심한 관찰력이 필요하다. 멋들어지게 몸을 구부리며 늠름한 기상을 자랑하는 소나무와 달리 전나무는 하늘 높이 곧게 뻗어나가며 가지와 잎으로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어낸다. 하늘 높이 솟은 전나무를 사진에 담았다. 마치 엽서 속 한 장면처럼 멋진 문양이 찍힌다. 연말이 되면 사진에 정성스런 글을 담아 지인에게 건네고 싶다. (이윤정기자)


울창한 천연림 봉곡사 숲은 우리나라 토종 소나무 천연림이다. 아산시청 산림과 이낙원계장은 “봉곡사 소나무는 평균 높이 15m에 수령이 100여년쯤 됐다”며 “500여 그루의 토종 소나무를 지키기 위해 시에서도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숲의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됐다. 전체 숲의 80%가량이 60년대 ‘산림녹화’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됐다. 한국토종 소나무 숲이 남아있다는 것은 귀한 보물을 간직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산시청 제공)


숲의 주인 도시민은 일 년에 몇 번이나 숲을 찾을까. 연례행사쯤으로 숲을 찾는 사람과는 달리 숲이 삶의 터전이자 보금자리인 생물도 많을 것이다. 온갖 풀과 나무가 그럴 것이고, 사람이 만들어준 집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이름 모를 새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숲을 찾을 때는 손님의 예의를 갖추게 된다. (이윤정기자)


구절초 꽃의 겨울 봉곡사 입구에 하얀 구절초 꽃이 처연하게 피어 있다. 원래 9~11월 사이에 핀다고는 하나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굳건히 서있기엔 아무래도 너무 춥다. 다른 꽃은 모두 잎을 축 늘어뜨리고 추위에 항복했는데 유독 한 송이만 고개를 들고 해맑게 웃는다. 이제 곧 눈이 내리고 봉곡사에 긴 겨울이 찾아오면 해맑게 웃던 구절초 꽃은 내년 9월을 기약하며 조용히 작별의 시간을 맞을 것이다. (이윤정기자)


반지의 제왕 나무 소나무 숲에 속을 훤히 드러낸 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서 있다. 지난 세월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한 명은 족히 들어갈 만한 큰 구멍을 내보인 나무는 분명 징~한 사연을 품고 있을 것이다. 가지를 이리저리로 뽑아 올린 모습하며 마치 앞으로 걸어 나갈 듯한 기둥의 풍채는 흡사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윤정기자)


태풍이 지나간 자리 봉곡사 숲의 아름드리나무가 작년 여름 태풍에 두 동강이 났다. 이미 나무는 병이 들어있었는지 속까지 훤히 비워둔 채였다. 사람이 억지로 나무를 두 동강내려면 어마어마한 힘이 들 터인데, 자연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쉽게 꺾이지 않는 가지도 밤새 내린 함박눈이 쌓이면 힘없이 꺾이고야 만다더니 끊임없는 태풍의 공세에 큰 나무의 위용이 꺾이고야 말았다. (이윤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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