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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과 깨달음☞/☆ 깨우치는 한마디

[정민의 世說新語] [552] 지려작해 (持蠡酌海)

by 맥가이버 Macgyver 2020. 1. 2.



지려작해 (持蠡酌海)



[정민의 世說新語] [552] 지려작해 (持蠡酌海)



새해 벽두에 고려 나옹(懶翁) 스님의
'탄세(嘆世)'시 네 수를 읽어 본다.

첫 수는 어둡다.

"세상 일 어지럽다 언제나 끝이 날꼬.
번뇌의 경계만이 배나 더 많아지네.
미혹(迷惑)의 바람 땅을 깎아 산악을 뒤흔들고,
업장(業障)의 바다 하늘 가득 물결을 일으킨다.

죽은 뒤의 망령된 인연 다시금 모여들고,
눈앞의 광경은 어둡게 사라지네.
구구하게 평생의 뜻 애를 써 보았지만,
가는 곳마다 그대로라 어찌하지 못하네

(世事紛紛何日了, 塵勞境界倍增多.
迷風刮地搖山嶽, 業海漫天起浪波.
身後妄緣重結集, 目前光景暗消磨.
區區役盡平生志, 到地依先不奈何)."

미망과 업장을 못 떨쳐 세상은 늘 어지럽고, 번뇌는 깊어만 간다.
아등바등 뭔가 이뤄보겠다고 애를 써보지만,
하던 대로 하고 가던 길로만 가려 드니 어찌해 볼 수가 없다.

둘째 수는 이렇다.

"세월은 순식간에 날아가 지나버려,
젊은 때를 흰머리와 맞바꿔 버렸구나.
황금 쌓고 죽기 기다림 얼마나 어리석나.
뼈 깎으며 삶 꾀하니 그 일이 슬프도다.
흙 퍼다가 산 쌓는 일 저만 그저 바쁘고,
표주박으로 바닷물 떠냄 그른 생각 분명하다.
고금의 하고많은 탐욕 빠진 사람들,
여기에 이르러선 한 점 앎이 없으리

(眨眼光陰飛過去, 白頭換却少年時.
積金候死愚何甚, 刻骨營生事可悲.
捧土培山徒自迫, 持蠡酌海諒非思.
古今多少貪婪客, 到此應無一點知)."

잠깐 살다 가는 인생이 황금을 쌓아두고
그것만 흐뭇해서 다가오는 죽음을 못 본다.
흙을 날라 산을 쌓겠다고 법석을 떨고,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퍼내겠다며 만용을 부렸다.
고금의 역사가 그 탐욕의 끝을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건만
그것이 잘 안 보인다.

마지막 넷째 수다.

"죽고 죽고 나고 나고 났다가 다시 죽어,
미친 미혹 한결같아 멈추지를 않누나.
낚싯줄 밑 맛난 미끼 탐할 줄만 알았지,
장대 끝에 낚싯바늘 있는 줄 어이 알리.
백년 인생 다 가도록 기량만 뽐내다가,
저세상 가고 나면 허물만 끝없으리.
업화(業火)가 꺼지잖고 타는 곳 생각하면,
특별히 근심하라 가르치지 않겠는가

(死死生生生復死, 狂迷一槪不曾休.
只知線下貪香餌, 那識竿頭有曲釣.
喪盡百年重伎倆, 搆成久遠劫愆尤.
翻思業火長燃處, 寧不敎人特地愁)."

깨닫고 나면 이미 늦다.
새해에는 조금 더 비워내고, 하나 더 내려놓고 살자.


정민 | 한양대 교수·고전문학